
제일 재밌을 것 같고 신나는 일을 말하라고 한다면, 체육대회라고 다들 말할 만큼 모두가 기대하는 날이 다가오고 있었어. 지민이는 벌써부터 체육대회 축구 주전은 자신이하고 싶다면서, 실장인 남준이에게 ‘형님은 온리 축구, 축구다. 축구에 뼈를 묻을 테니, 그렇게 알 거라.’하며 은근한 압박을 줘. 말이 은근이지 사실을 대놓고 압박을 주는 거였어.남준이의 얼굴 볼 때마다, 마주 칠 때마다, 심지어 화장실에 갈 때에도 '나는 축구를 할 꺼야'라고 온 몸 어필을 한 터라, 남준이는 체육대회 날 종목을 정할 때 기록담당인 부실장 석진이에게 ‘우선 박지민은 축구 넣고 정하자’라고 진저리를 치면서 이야기 했어.
2)
시간이 널널하다 못해 넘쳐나던 중학교 때였다면 아무 때나 연습해도 상관 없겠지만, 시험을 앞둔 상태인 고등학생들은 연습 시간이 부족해 체육 시간을 빌려야 했어. 그동안은 깐깐하기 짝이 없는 담당 과목 선생님 때문에 수업시간 끄트머리를 이용해야 했는데, 체육 대회를 이주 정도 앞두고 선생님이 출장을 간 터라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러. 그리곤 각자의 종목 연습을 하자는 남준이의 말대로 자기 종목을 연습하기 위해 흩어져. '체육대회를 쓸어버리자!'라는 의기투합은 덤이었어. 공부할 땐 다 죽어가도 축구할 때면 메시, 호날두 저리가라 할 정도로 활발해지는 지민이는 당연히 신나서 방방 뜨고 있었어.
“축구하는 애들 빨리 모여, 축구 하자!”볼이 밀려올라갈 만큼 환하게 웃으며 사람을 모으는 지민이. 발목을 풀거나 다리 스트레칭을 하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아. 저 모습들을 보니 벌써부터 들뜨는 것 같았거든. 고개를 돌려 한 명 한 명 보고 있었는데, 제일 마지막에 정국이가 시선에 걸려. 까만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니 저절로 어깨가 들썩거려. 눈이 마주칠 줄은 몰랐거든. 짝사랑 하는 사람을 몰래 훔쳐보다 걸린 아이처럼 재빨리 시선을 돌리자, 정국이가 바람 빼듯이 피식 웃어. 작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를 눈만 굴려 본 지민이는 민망한 지 헛기침을 해.
그렇게 흩어져있던 축구하는 인원들이 전부 모이자, 자기들끼리 편을 나누기 시작해. 짝수 제일 앞 번호인 경호와 홀수 제일 앞 번호인 동우가 팀의 주장이 되었어. 지민이는 경호의 팀에, 정국이는 동우의 팀에 들어가 둘은 갈라졌어. 반대편 팀에서 몸을 풀고 있는 정국이를 보면서 지민이는 내심 잘 됐다고 생각해. 같은 편이었으면 팀워크를 발휘해서 같이 해야 하는 데, 아직까지는 정국이랑 그럴 자신이 없었거든. 편을 나누고 얼마있지 않아 작은 경기가 시작 돼. 한참 공을 뺏고 뺏기며 집중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여자아이 목소리가 들려.
“정국아, 화이팅!” 익숙한 목소리에 공을 가진 형진이를 따라가던 지민이의 발걸음이 멈춰. 창문에 작게 보이는 연주의 모습. 검은 생머리를 가진 여자아이를 눈에 담는 지민이의 표정은 미묘하게 변해 가. 그 얼굴은 여름날 소나기처럼 사라진 첫사랑에 대한 아쉬움이자, 냉랭한 제 사람에게도 계속해서 마음을 주는 연주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어. 연주가 누구보다도 다정하고, 자신에게도 잘 대해주던 사람이었으니까. 정국이 이름을 부르곤 수줍어 하는 게 조금 가슴 아프기도 했어.그렇게 지민이가 연주를 바라보며 서 있을 때, 누군가가 '박지, 조심해!'라고 크게 소리쳐. 그 말에 지민이가 무슨 소리인지 몰라 고개를 돌리니, 축구공이 아주 가까이 옆을 스치고 가. 조금만 몸을 더 틀었어도 맞았을 것 같이 아주 가까이 지나갔었어. 운동 신경이 뛰어난 사람이, 일부러 맞추려고 한 것 처럼.
“야, 정국 지민이 맞을 뻔 했잖아” “미안, 실수.” 떨어진 공을 바라보다가, '정국'이라는 이름에 지민이가 고개를 돌려 정국이를 봐. 다시금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어. 지민이와 눈이 마주치자 담담한 목소리로 '실수'라고 이야기 하는데,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어. 저렇게나 평온한 얼굴을 하고 실수라고 사과하다니. 미안, 이라고 짧게 말한 뒤 다시 공을 따라가는 모습에 어이가 없어서 숨통이 막히는 기분이었어. 축구를 좋아해 하나만 잘 하는 자기랑 다르게, 운동이라면 뭐든 잘하는 편이라 수행평가 점수를 거의 쓸어가다시피 하는 정국이가 잘못 찼을 리가 없으니까. 의도가 다분한 미필적 고의가 분명할 것이었어. 지민이에게 공을 잘못 찼다고 이야기 해놓고는, 다른 친구에게서 공을 간단하게 빼앗아 골대 가까이 모습에 이가 저절로 바득 갈려. 밉고, 싫고, 짜증나는 놈. 지민이에게 정국이는 그런 사람이 되어가는 것 같았어.3)
연습이라는 이름을 빙자한 축구를 몇 판 하다보니 어느 새 체육대회가 바로 앞으로 다가왔어. 국가대표는 아닐지라도, 반을 대표해서 나가는 것이라 괜시리 떨려오기도 했어. 각 종목 마다 상품이 걸려있었는데, 축구 종목 상품이 남자 종목 중에서 제일 인기가 많았거든. 여러가지 수입 과자와 국산 과자가 섞여 있는 박스가 하나가 아니라, 무려 네 개였으니까. 한창 자라나는 시기인 남자아이들의 눈동자는 먹을 것을 향한 결의로 빛나고 있었어. 남준이는 축구 종목을 나가는 아이들에게 '무조건 일등 해야 돼! 아니면 너희는 반을 옮겨라!'라고 압박 아닌 압박을 주었어.
그렇게 시간은 빠르게, 또 야속하게 흘러 체육대회 하루 전의 점심시간이 되었어. 마지막으로 주어진 연습 시간이고, 다른 반과 경기를 하며 그 반의 실력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라 다른 때보다 더 긴장이 되었어. 상대팀은 호석이가 있는 이과 8반이야. 다른 계열, 다른 반과 한다는 사실에, 또 '이과 화이팅!' '문과의 힘을 보여줘!'하는 응원들이 부담스러워 지민이는 평소답지 않게 호석이 친구가 건 태클에 걸려 넘어지고 말아.
“아, 씨발. 존나 아파”쓸려서 살갗이 벗겨진 무릎은 둘째 치고 발목이 살짝 접질렸는지 시큰거리며 아파왔어. 발목부터 올라오는 고통에 자신도 모르게 욕부터 나가. 크게 넘어진 터라 축구하던 아이들도 다 몰려오기 시작해. 걱정스러운 말들이 머리 위로 쏟아지지만 고통에 그런 것을 들어줄 겨를은 없었어. 그렇게 정신 없는 와중에, 지민이는 자신을 향해 뻗은 하얗고 큰 손을 잡고 일어나. 손의 주인은 지민이가 일어나 절뚝거리며 벤치로 가는 모습 마저도 계속해서 지켜보고 있었어. 자기에게 따라붙는 검은 눈동자의 존재를 모르는 지민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나가. 위태롭게 걸어가는 지민이가 걱정이 되었는 지, 관람석에 있던 호석이가 뛰어와 지민이를 부축해.
“발목 부은 것 봐. 형님이 반에 가서 영재자식 족 쳐 줄게”
호석이는 계속해서 걱정스럽단 듯이 말을 했지만, 지민이는 벤치에 앉아서 호석이를 향해 손을 내저어. '나 괜찮으니까 걱정 마. 조금 쉬었다가 보건실 갈 거야.'라는 말을 할 때에서야, 호석이는 자기 자리로 돌아갈 수 있었어. 호석이가 돌아가고 난 뒤, 지민이는 자기 발목을 매만져. 내일 축구를 제대로 하지 못 할까 걱정이 되어서야. 지금까지 연습하고 노력한 것들이 한 순간에 없어질까봐.
계속해서 자기 발목을 주무르며 한숨을 쉬는 지민이 곁에 누가 앉아. 고개를 살짝 돌려 보니 옆의 주인공은 연주였어. 운동장에서 넘어지는 것을 보고 걱정되어서 왔다는 말. 연주답게 친절하고 다정하다고 생각하면서 지민이가 웃으며 고개를 저어. 괜찮다는 의미를 보여주기 위해서였어. 연주의 걱정은 딱 봐도 친구의 선 안에 있는 걱정이기에 착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대화를 하기 시작해. 친구 사이에 걸맞게 시덥지 않은 말들이 오고 가는 와중에도 연주의 시선은 한 군데였어. 딱 봐도 부어오른 발목. 안쓰러운 마음이 들고 얼마나 부어올랐나 싶어 연주가 손을 가져다 대. 하얀 손이 지민이의 발목에 닿으려는 순간, 누군가가 이야기해.
“박지민, 너 보건실 가.”
“뭐?”
“보건 선생님 2시에 출장 가신다고 했으니까 가라고, 지금.”
지민이에게 보건실을 가라고 이야기한 것은 정국이었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미간은 찌푸려진 채였어. 그 얼굴에 자신이 너무 연주와 붙어있었나 싶어 민망해져와. 의도하진 않았지만 불륜 현장을 들킨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어. 그 때문에 지민이는 고개를 끄덕거리곤 자리에서 일어나. 보건실로 향하기 위해서였어. 그런데 그 순간, 연주가 약한 힘으로 지민이의 옷자락을 잡아와. 그러더니 언제부터 들고 있었는 지 모를 인형을 지민이 손에 쥐어줬어. 직접 만든 것 같은 모양의 작은 인형. 그걸 지민이에게 주면서 연주는, “.....지민아, 이거 정국이한테 전해주라. 걔 주려고 만든 건데, 오늘만 세 번째 거절 당했어. 내가 줘서 그런가.”
이렇게 이야기하면서 쓰게 웃어. 그 말에 지민이는 발바닥이 흰 색인 검은색 곰인형을 봐. 딱 봐도 오랜 시간 동안 정성껏 만든 것이 보여. 세 번이나 거절 당했다는 말에 지민이의 얼굴은 조금 굳어. 사람 진심을 가볍게 무시하는 정국이가 오만하고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어. 꼭 주고 싶었던 것인지 전해달라고 간절히 말하는 탓에, 거절할 수도 없던 지민이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아.
4)
연주의 곰인형을 손에 쥔 지민이는 약간 불편한 걸음으로 보건실로 가기 시작했어. 그 사이에 축구는 끝이 난 것인지, 축구 주전들 중 몇몇은 지민이를 붙잡고 발목의 상태를 물어보기도 했어. 아프면 뿌리치고 갈 만도 한데, 지민이는 그 아이들의 말에 일일이 대답해줘. 물론 괜찮다는 말만 계속해서 반복 할 뿐이었지만. 아이들에 둘러싸인 지민이는 자신을 지나쳐 올라가는 정국이를 봐. 조금 급해보이는 발걸음이기도 해보였어. 어딜 저렇게 바쁘게 가나, 싶었는데 곧 그 생각을 지워. 친하지도 않은 놈 신경 써봤자 떨어지는 이득이 없다고 생각해서야.
아이들을 모두 보내고 난 뒤, 힘겹게 보건실로 갈 수 있었어. 아픈 발목을 참고 도착한 보건실이었지만, 출장 준비를 하던 보건선생님은 뿌리는 파스를 찾는 지민이에게 안타깝다는 듯이 이야기해.
“아까 어떤 남자애가 빌려갔는데,” 그 말에 아주 무거운 물건으로 머리를 맞는 기분이 들었어. 허탕쳤다는 생각에 한숨이 저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 보건선생님이 숨을 크게 내쉬는 지민이가 불쌍했는지, '그 애 한테 찾아 올래?' 하고 명단을 뒤적거리기 시작해. 하지만 지민이는 어차피 오늘은 재수 없는 날이라고 판단해서, 이름도 듣지도 않고 괜찮다고 웃고는 보건실을 나서. “되는 일이 없다, 정말” 주머니 속에 곰인형의 거칠거칠한 표면을 만지면서 푸념하며 걸어 가. 가뜩이나 발목이 아파 죽겠는데, 첩첩산중으로 쌓인 계단을 보니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자신에게도 느껴졌어. 에라, 모르겠다ㅡ 하는 심보로 발걸음을 떼는 데, 그 순간 우연처럼 한 손에 뿌리는 파스를 든 정국이가 계단에서 내려오고 있었어. 보건실에서 빌려갔다던 아이가 전정국이구나, 라고 아무 생각 없이 눈만 깜빡이며 정국이를 보다가, 문득 오늘 운동장에서 축구를 한 사람들 중 자신을 제외하곤 다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아.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지민이는 멍하게 정국이를 보고만 있어. 자신을 멍하게 보는 지민이의 얼굴을 똑같이 빤히 보던 정국이는, 지민이에게 파스를 던져줘. 주춤거리면서도 파스를 받은 지민이는 정국이를 힐끔 보다가 이야기 해.“나 이거 찾고 있었는데,”
“......”
“고마워, 전정국.”
싫어하는 건 싫어하는 거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솔직하게 고맙다고 이야기해. 나름 진심을 담아 한 감사의 인사였어.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입장인 정국이는 냉랭하기 그지 없었어. 날씨로 치면 눈보라, 동화 속 인물에 빗대자면 백설공주를 보는 새어머니의 얼굴. 다정스런 말을 듣자고 한 말은 아니었으나, 생각 이상으로 차가운 반응에 귀에 열이 몰리는 것 같기도 했어. 너무 나갔나, 친한 척으로 받아드렸을려나ㅡ 하는 생각에 괜히 민망해져 지민이는 뒷목을 매만져. 그 일련의 행동에도 검은 눈동자는 따라붙고 있었어. 한참을 마주보며 서 있던 둘. 지민이가 어색함과 민망함에 계속해서 만져대던 뒷목에서 손을 떼고 걸음을 옮기려는 듯한 자세를 취할 때에서야, 정국이는 입을 열어. 낮은 목소리가 둘 사이 공백을 메우기 시작했어. “너 말이야” “.....” “김연주랑 붙어있지마.” 드라마로 치면 눈 깜빡 할 만큼 짧은 대사인데, 그 대사가 왠지 지민이의 행동을 멈추게 만들었어. 하지만 그에 반해 정국인 제 할 말, 제 할 일을 마쳤는 지 천천히 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해. 하얀 얼굴이 자기 시야에서 정사라지려고 할 때, 지민이는 제 발목이 아픈 것도 잊은 사람처럼 빠르게 계단을 오르기 시작해. 아픈 신음이 새어나오기 시작했지만, 계속해서 걸어나갔어. 할 말이 있었거든, 박지민이 갖지 못한 걸 너무 쉽게 갖고, 너무 쉽게 다루는 전정국에게. “야, 전정국.” 발목이 시큰시큰 아파와 얼마 못가 멈추고 말았어. 발목이 아려오고, 다리가 아파 거친 숨을 몰아 쉬면서 그 자리에 주저 앉아. 그와 동시에 정국이가 걸어 올라가는 소리가 멈췄어. 다시금 찾아온 정적에 지민이가 고개를 들자, 계속 그 자리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는 정국이가 눈에 들어왔어. “할 말 있냐.” “너 나랑 연주랑 있는 거 싫지?” “좋으면 같이 있지 말라고 왜 얘기 하겠냐.” “.....그러면 너 연주한테 잘 해줘.” “.....” “너도 잘 알 잖아. 연주, 착한 애야.” 차마 얼굴보고는 이야기하지 못해서 '전정국'이라는 세 글자가 박혀있는 명찰만 보고 이야기했어. 정국이 눈을 보고 이야기하기엔, 제 진심이 너무 무거웠거든. 토해내는 것처럼 말을 쏟아낸 지민이는 주머니에서 곰인형을 꺼내 정국이에게 던져줘. 얄량한 질투심 때문인지, 전정국이 얄미워서인지 지민이는 그것이 연주가 준 것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아. 그냥 ‘파스 고맙다고. 너 가져.’라는 말을 툭 뱉고는 먼저 올라갈 뿐이야. 지민이가 정국이를 지나쳐 올라갈 동안, 정국이는 그 자리에 서서 지민이가 준 곰인형을 바라보고 있었어. 그 뒷모습을 슬쩍 본 지민이는 자기 머리카락을 헤집고.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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