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정의
(부제: 남자사람친구와 남자친구의 경계, 그리고 소꿉친구)
"....진짜, 내가 과 모임을 또 가면 사람이 아니다."
아으으, 속이야.... 더부룩한 속을 부여잡고 투덜대며 겨우 발을 내딛었다. 옆에서 비웃는 소리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진다.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속이 쓰린 게, 오늘 하루는 고생길이 펼쳐질 게 훤하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그러게 컨디션 안 좋을 땐 막 들이 붓는 거 아니라니까. 취해서인지 한껏 느려진 내 속도에 맞춰 걸으며 내게 잔소리를 늘어 놓는 녀석 역시 정상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술기운이 올라 발갛게 달아오른 귀, 약간 상기된 뺨에 조금 풀린 눈까지. 여러 모로 정상이 아니었다, 우리 둘은.
"야."
"왜."
"너는 어떻게 생각하냐."
"뭘?"
"아까 선배들이 한참 떠들어대던 거."
"한두 개냐, 그게."
"그래도 하나쯤은 귀에 들어오는 게 있었을 거 아냐."
"없는데?"
"....아오, 진짜 이걸."
제 영혼 없는 대답들에 투덜대며 이마에 딱밤을 놓는 시늉을 하는 녀석의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니, 답답해하던 전원우도 별 수 없다는 듯 웃으며 넘겨버린다.
견디다 못해 직접 설명한다는 듯 궁시렁거리던 녀석은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하도 뜸을 들이기에 무슨 거창한 이야기인가, 했더니.
"....그, 왜. 남사친 여사친 이야기 하던 거 있잖아."
"....난 또 뭐라고. 그게 왜? "
"그냥, 네 생각은 어떠냐고."
그 주제만 나왔다 하면 소환되니까, 너랑 내가.
다소 어정쩡하게 덧붙여진 뒷말에 괜히 뒷머리를 매만지는 네 모습에서 어색함을 느껴 네게로 두었던 시선을 앞으로 돌려버렸다. 뭘 저렇게 머쓱해 해? 자기가 질문해놓고.
괜히 머리를 정리하는 네 모습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다 앞서 걸었다. 야, 같이 가! 성큼 성큼 걸어 따라오는 너는 단 몇 걸음만에 나를 따라잡을 만큼, 훌쩍 커 있었다.
새삼 시간이 이렇게나 지났구나, 를 실감하며 멍하니 바라보다 녀석이 발을 재게 놀려 내게 따라붙을 때까지 선배들과 술자리에서 했던 대화들을 떠올렸다.
전원우가 말하는 선배들의 토론이란 그랬다.
남자와 여자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 로 시작되어 결국 투닥대는 말싸움으로 끝나버리는... 뭐, 그런 주제.
"글쎄..."
"야, 사람이 말을 하면 생각하는 시늉이라도 좀 해라."
대답하기 애매해 말을 얼버무리자 녀석이 괜히 인상을 쓰며 투덜댔다. 어떻게 그렇게 영혼 없이 대답하는 것도 한결 같냐. 그것도 능력이지, 능력.
아, 좀 조용히 해 봐. 생각하잖아. 괜히 틱틱대며 대꾸하니, 입술을 쭉 내밀고서도 대답을 기다리는 모양인지 조용히 저를 쳐다보고만 있는 모양새가 퍽 귀여워 피식 웃었다.
왜 웃어, 기분 나쁘게. 제 웃음에 괜히 시비를 걸듯 붙어 서서 장난을 걸어오는 녀석의 뺨을 쭉 밀어내며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남자와 여자, 남사친과 여사친.
사실 저에게는 별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고 생각했다. 성별이라는 게 사람 사이의 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정도의 요소는 아니라고 생각해왔으니까.
그래서 입학 후에도 늘 붙어다니던 저와 녀석에게 쏟아지는 별 이상한 소문들도, 선배나 동기들의 놀림도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일축할 수 있었다. 물론 저번 학기까지는.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남자 사람 친구들과 동성 친구인 마냥 잘 지내왔던 저라도 전원우는 좀 이상하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였는지 제 옆에서 떨어지지 않던 녀석이 지겹기보다는 당연하게 느껴졌고, 안 보이면 괜히 찾게 됐다. 물론 그건 나만이 아니었다.
그게 이상한 게 아니라 기분 좋은 일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여자라고는 관심도 없는 놈이 내 일이라면 그렇게 쩔쩔매는 모습이 좋았으니까.
서로 둘도 없는 친구니까, 익숙한 일이니까. 그렇게 기저에서 부정해온 감정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고개를 치켜들기 시작한 것은, 오로지 나만이 알아야 할 일이었다.
그래서 더 주저하고 있는 걸까. 애초에 더 생각할 것도 없었던 대답을 괜히 조금이라도 더 미뤄 보려 제게 던져진 질문을 뒤늦게 되받아쳤다.
"너는 그 질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데?"
"나?"
술만 마시면 속을 진정시켜야 하는 나를 위해 편의점을 찾으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네가 다른 짓을 하다 들킨 아이처럼 어깨를 흠칫 떨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바라보는 눈에 당황스러움이 묻어났다. 마치 이 질문을 내게 받을 줄은 몰랐다는 듯,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괜히 시선이 돌아갔다. 어쩐지 녀석을 평소처럼 바라볼 수가 없다.
그래, 너. 대답 안 해 줘? 떠보듯 던진 질문에 너는 의외로 잠시 머뭇거리며 혀로 입술을 축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나는,
"....사람마다 다를 것 같기는 한데,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디 있겠냐. 언제든 바뀔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그래?"
"어. ....야, 이거 분명히 내가 먼저 물어 봤잖아. 근데 왜 대답도 내가 하냐. 그래서 넌 어떤데."
"나는..."
"너는?"
"....아, 몰라."
"아, 왜 몰라. 생각해본다며?"
느릿하게 말을 이어가던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다음 말을 기다리며 맞장구 쳐주는 말들은 꽤나 다정했다. 제게 대답을 들어내기 위해 내는 목소리였겠지만, 이런 식의 대화도 내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더 말할 수 없을 것 같아 그냥 모른 척 얼버무렸다. 제 대답에 잔뜩 기대하던 얼굴이 어두워진다.
늘 사람 이렇게 간 보기만 하고. 이러기 있냐, 너? 김 샜다는 듯 입술을 다시금 쭉 내밀고 궁시렁대는 모습에 웃음기를 숨기지 못한 채 겨우내 눌러 참으며 얄밉게 한 마디 던졌다.
"생각은 했지. 근데 대답이 의무는 아니잖아? 그러니까 말 안 할 거야."
"아오, 진짜 이걸 때릴 수도 없고."
"때리게? 왜, 한 번 때려 보지?"
"뭘 때려. 됐고, 사람 궁금하게 해 놓고 대답 진짜 안 할 거냐? 어?"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는 내 옆에 붙어 걸으며 대답을 재촉하는 모습이 꼭 아이 같아 다시금 터지려는 웃음을 괜히 꾹 참으며 네게 혀를 내밀어보이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얄미워 죽겠네. 천천히 걸어, 다쳐. 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린 네가 다시 내게 다가온다. 아, 솔직히 아까 내 태도는 내가 봐도 얄미웠다. 그래도 어떡해,
내가 지금 솔직하게 대답해버리면, 이렇게 웃는 네 표정이 어떻게 변할 지 짐작도 안 되는데.
나도 그렇다고, 나한테 너는 단순한 남사친이 아니라고.
그렇게 말하면, 그 때도 그렇게 웃어 줄 거야?
안녕하세요, 결국 글잡으로 온 정석입니다...!
필명을 연애의 정석으로 하고 싶었지만, 불가능한 결과로... ㅎ 어떤 의미의 정석일 지는 원우 글이 끝나고 풀어가는 글에서도 보실 수 있지 않을까요? (쓸 데 없는 의미부여)
선보인 글과 크게 달라진 점은 없지만 일단 저질러 보려고 왔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응원해주셔서 너무나 감사한 부분...!
보잘것 없는 글이지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더 노력해서 좋은 글로 찾아뵐 수 있도록 할게요! 포인트가 너무 높다 싶으시면 말씀해주셔도 괜찮습니다'ㅅ'
다음 글도 얼른 써서 올릴게요! 댓글 달고 포인트 받아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