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정의
(부제: 지각변동, 위기의 시작)
내일이 없는 것처럼 달리던 과 행사도, 그렇게나 나를 괴롭히던 숙취도 흐르는 시간을 막을 수 없듯, 다시금 해가 하이얀 얼굴을 내밀었다.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지나는 동안 달라진 것은 없었고, 여전히 우리는 서로의 곁을 지키며 미묘하게 이어진 끝을 붙든 채였다.
오전 내내 이어지는 지루한 강의를 꾸역꾸역 견뎌낸 뒤 얻은 쉬는 시간, 밤새워 해야 했던 과제 덕에 피곤함을 이기지 못한 내가 책상 위로 엎어지자마자 네가 제 머리며 등을 쓰다듬는다. 저를 가볍게 도닥이는 손과 등에 걸쳐진 네 겉옷은 마치 지금의 우리 같았다. 함께라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으, 죽을 것 같아...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대는 내 모습을 보던 녀석이 혀를 찼다.
"그러게 미리 미리 좀 해 놓지, 멍청아."
"시끄러워. 나한테 수업이 이것만 있는 줄 아나."
교수님들은 내가 본인 수업만 듣는다고 생각하시나봐. 책상 위로 웅얼웅얼 흩어지는 내 말을 용케 알아들은 전원우가 고개를 갸웃대며 의아함을 가득 담은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다른 과목도 과제 있었던가? 당분간 과제 없는 걸로 아는데."
"나 지난 번에 못 들어서 이번에 혼자 듣는 교양 하나 있잖아. 그거야."
"아. 그래, 너 그건 왜 안 들었냐? 그냥 같이 듣고 말지."
"수강신청 광탈이라고 내가 몇 번을 얘기했는데, 또 물어봐?"
"...그랬나."
"내가 그 때 얼마나 찡찡댔는데. 이제 기억도 못 하고, 어? 관심 없다 이거지?"
"뭐래.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그런 사소한 것까지 기억하냐. 좀 까먹을 수도 있고, 그런 거지."
제 말에 괜히 투덜거리며 머리를 매만지는 손에서 머쓱함이 묻어난다. 눈도 못 마주치는 걸 보면 다 안다고 생각했던 게 틀려서 당황했을 것이 틀림 없다. 하여간 전원우. 여느 때처럼 피식 웃어 넘기려다, 이제 이런 사소한 습관과 눈빛만 보고도 어떤 상태인지 알게 되었다는 게 새삼 묘한 기분이 들어 가만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왜, 뭐. 제 시선을 느꼈는지 어색하게 되묻는 말에 고개를 저으며 다시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너무 피곤해서인지 수다스러워진 강의실의 분위기에 뒤척일 여력도 없었다. 오롯이 저만을 향하는 네 시선을 마주할 정신도 없어 그저 멀거니 시선을 다른 곳에 박아둔 채 무거워진 눈꺼풀을 느릿하게 움직여 눈을 깜빡이다 눈을 감고 까무룩 잠에 들려던 찰나, 시끄러웠던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아, 수업 다시 시작하는구나. 누운 채 팔을 겨우 들어 눈을 비비고 비척비척 일어나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네 손이 어깨를 짓누른다.
"...뭐 해?"
떨떠름하게 되묻는 제 말에도 대답 않고 어깨를 눌러 다시 나를 눕히던 녀석은 내가 힘에 못 이겨 다시 엎드리자 손으로 눈을 가려 주었다.
얘 왜 이래. 티 내지는 않았지만 좀 당황스러워 눈을 깜빡이자 간지러워, 하고 낮게 중얼거린다. 시야가 차단된 틈으로 파고드는 낮은 목소리에 움찔, 몸을 떨었다.
"좀 자. 중요한 부분 나오면 깨워 줄 테니까."
"...이 교수님 수업 스타일 알잖아. 뼈빠지게 필기해도 못 알아들어서 안 돼."
"나중에 내 거 보면 되잖아. 억지로 버티다 못 일어나지 말고 자라. 눈 빨갛다."
나직하게 제 귓가에 내려앉은 목소리가 자꾸 맴돌아서, 잠이 확 깨는 기분이었다. 분명 제 손을 가리고 있으면 필기를 하지 못할 너인데도 제가 눈을 감을 때까지 손을 떼지 않을 것 같아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 교수님 수업할 때 판서 장난 없으신데. 이미 꽤 놓쳤을 텐데. 제가 눈을 깜빡이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한참을 손으로 시야를 가려주던 녀석 덕에 다시금 찾아온 졸음을 반가이 맞을 수 있었다.
네 손이 떨어짐과 동시에 밝아진 시야를 제 등에 덮인 네 겉옷의 모자로 다시 차단해 주는 네 모습을 졸음이 어린 눈으로 올려다보자, 저를 챙기는 데에 열중하던 네가 저와 눈을 마주하고는 피식 웃으며 속삭였다. 잘 자.
***
요 며칠, 전원우가 보이지 않는다. 여느 때와 다름 없이 익숙하게 밖에서 저를 기다리는 녀석에게 다가가 팔을 툭 치며 밥 먹으러 가자고 했을 때의 어딘가 난감해하던 얼굴, 내가 기억하는 전원우의 얼굴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야, 나 당분간 좀 바빠져서 너랑 점심 못 먹을 지도 모르겠는데.'
'어? ...왜?'
'아, 조별 과제 때문에. 친구랑 같이 하거든. 너도 알지? 그 때 밥 같이 먹었잖아.'
'아... 너 때문에 불편해 죽는 줄 알았던 그?'
'이게 또 내 탓이지. 어, 그 때 걔.'
'둘이서 해?'
'아니, 다른 애들도 같이. 근데 생각보다 주제 스케일이 커서 자료 조사하는데 드는 시간만 장난 아니게 들 것 같다. 기다리지 말고 다른 애들이랑 다니라고.'
'계속 바쁠 건가 보네. 도와 줘?'
'뭘 도와줘. 그 시간에 다른 과제나 신경 쓰세요, 너는.'
먼저 간다. 익숙하게 제 머리에 손을 얹어 두어 번 도닥인 녀석이 점심 굶지 말고, 하는 당부와 함께 사라졌을 때. 그 때까지만 해도 그러려니 했었다. 근데 이렇게까지 못 볼 줄은 몰랐지.
같이 듣는 수업 시간에도 웬 남자 한 명, 여자 한 명과 같이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수업을 듣기만 해서 말을 붙이기가 쉽지 않았고, 수업이 끝나면 간단히 인사를 건넨 후 사라지는 탓에 이렇다 할 말은 커녕 얼굴도 제대로 보기 힘들었다. 밤마다 잠이 안 온다고 제게 전화를 걸어오는 전원우 때문에 하루가 멀다 하고 울리던 휴대폰 역시 잠잠해졌다.
끈덕지게 붙어 있던 전원우의 부재에 의아함을 가진 것은 친구들과 선배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 원우는? 여기저기서 던져오는 질문에 대답할 때마다 녀석의 빈자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시간표가 다른 탓인지 제가 찾아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모습에 우리가 평소에 얼마나 붙어 있었는지를 느끼고 나니 괜히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에는 징그럽게도 붙어있더니, 어떻게 연락 한 번이 없냐. 인사 정도는 하고 다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왠지 모르게 우울했던 일주일이 지나고 다시금 학교로 발을 딛었을 때, 과에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
"ㅇㅇ야, 원우 여자친구 생겼다는 거 들었어? 그거 진짜야?"
어깨에 잘게 내려앉은 빗방울을 털어내며 과방으로 들어서는 내게 다소 호들갑스럽게 제게 물어오는 친구 영희의 입에서는, 나도 듣지 못했던 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전원우가, 뭐?
"몰랐어? 전원우 요즘 웬 여자애랑 다니잖아."
"...그래?"
"응! 그냥 여사친은 아닌 것 같은 게, 눈에서 꿀이 떨어진다던데. 그래서 소개 받은 거 아닐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지. 원우가 너한테는 말 해 줬을 것 같아서."
여자에 관심도 없는 전원우에게 여자친구라니. 정말 이상한 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답이 없었다.
소문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 녀석의 무심한 성격 상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 저와 엮일 때면 늘 서로를 보고 강하게 부정했던 모습과는 다르게 지금 퍼지고 있는 소문은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해졌다.
아니, 여자친구 생기면 좋지. 더럽게 재미 없는 전원우 개그 받아주지 않아도 되고, 잔소리 안 들어도 되고. 괜히 꿍얼대며 캐비닛에서 책을 꺼내는 손을 빨리 하다가도 지금 하는 생각이 합리화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스치자, 거칠게 집어든 책을 힘 없이 내려놓았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우울한 기분이 나를 덮친다. 지금의 내 모습을 조금만 더 지켜보면 누구든 그 이유를 금방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아서, 더 우울해졌다.
캐비닛을 닫던 손을 멈추고 멍하니 있자, 영희가 제 팔을 툭 치며 물어왔다. 야, 진짜 몰랐어?
"...어? 아, 응. 나도 요즘 걔 못 본 지 꽤 돼서."
"대박. 전원우가 너 끔찍이 챙기잖아. 근데 너한테도 말 안 했을 줄이야. 그럼 그 소문 진짠지 아닌지는 모르는 거지?"
"응."
"와, 진짜면 전원우 진짜 의외다. 철벽남인 줄만 알았는데."
그러게. 뒤이어 제게 이것저것 물어오는 영희에게 어색하게 웃으며 나도 잘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걔 요즘 과제 때문에 바쁘잖아. 연락 잘 안 돼.
제 말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던 영희가 고개를 끄덕이다, 이내 웃으며 제 팔에 팔짱을 꼈다. 걔는 걔고 우리는 우리니까, 얼른 수업이나 들으러 가자.
영희의 팔에 이끌려 과방을 나서면서도, 굳게 닫힌 네 캐비닛을 한 번 쳐다보았다.
전원우, ㅇㅇㅇ. 그리고 그 사이에 놓인 수 많은 캐비닛. 그 숫자만큼 우리의 거리가 멀어지고 있는 것 같아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부터는 전원우를 마주하는 것에 크게 미련을 두지 않았다. 아니, 미련을 두지 않으려고 했다.
달갑지 않은 소문이 진실이 되었을 때의 그 느낌을 굳이 알고 싶지 않아서. 전원우에게 진짜 여자친구가 생겼을까봐, 그리고 그걸 소문으로 듣고서야 녀석에게 전해들을까봐, 나는 조금 두려워졌다.
여전히 휘몰아치는 과제에 속으로 교수들을 씹으며 강의실을 나와 자판기 앞에 섰을 즈음, 강의실을 뚫고 나오는 쉬는 시간의 시끄러운 대화소리들 사이로 발걸음 소리가 울렸다. 누가 지나가는 거겠거니, 하고 자판기 앞에 멀거니 서서 뭘 먹을까 고민하다 막 손을 뻗었을 때,
"....어, ㅇㅇㅇ!"
가까이 들리는 네 목소리에, 놀라 굳어버렸다.
철컹, 하며 음료수가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을 차린 내가 음료수를 내려다보았다. ...커피네. 제대로 보지도 않고 누른 탓에 제가 잘 마시지 못하는 커피가 나온 게 보이자 한숨을 쉬며 허리를 숙였으나, 저보다 먼저 다가온 큰 손이 커피를 가져가며 제 이마를 톡 쳤다. 그제야 올려다본 네 얼굴은, 장난기를 가득 담은 채였다.
"먹지도 않는 걸 왜 뽑았어. 이제 음료수 고를 정신도 없냐?"
"뭐래. 갑자기 이름 불려서 놀라서 그런 거거든? 너는 왜 이제..."
전처럼 웃으며 마주하는 얼굴에 웃으며 장난스레 맞받아치다, 별 생각 없이 시선을 돌려 바라본 녀석의 옆에 누군가 서 있는 것을 보고 멍하니 시선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옆자리를 꿰차고 서서 웃는 낯으로 너와 녀석을 번갈아 바라보는 여자는 꽤 예뻤다. ...소문의 주인공인가.
예쁘장한 얼굴에 하얀 얼굴, 그리고 하얀 미소까지. 짧게 훑어 본 것만으로도 앞의 여자가 여러 모로 너와 꽤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야, 왜 말을 하다 말아. 갑자기 말이 끊긴 내가 이상했는지 제 팔을 툭 치며 말을 걸던 너는, 대답 없는 내게서 시선을 떼고 다시 자판기 앞으로 시선을 돌리며 커피를 옆의 여자에게 건넸다.
"이건 네가 먹어라. ㅇㅇㅇ, 넌 뭐 먹고 싶은데."
"......"
익숙한 일인듯 커피를 받아드는 여자가 다시 녀석에게 캔을 내밀자 말 없이 캔을 따 주는 모습이 퍽 자연스러워서, 다시금 할 말을 잃었다. 멍하니 둘을 바라보는 사이 너는 지갑을 꺼내며 내게 물었고, 그렇게 저를 바라보는 눈과 마주했을 때. 이상하게도 입을 열 수 없었다.
한참의 침묵 속에 저를 바라보는 네 눈에 의아함이 담겼을 즈음, 고개를 저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아, 나 그냥 안 먹을래. 화장실 다녀와서 수업이나 들어야지."
"왜, 목 말라서 나온 거 아니야?"
"맞는데, 이따 영희가 핫초코 쏘기로 한 거 까먹고 있었어. 너도 얼른 수업 들어가라. 그, 옆에 분도 안녕히 가세요."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죄다 무시한 채 급하게 말을 마무리짓고 돌아섰다. ㅇㅇㅇ, 야! 급하게 발을 놀리는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과방에서 보았던 캐비닛이 지워지지 않고 잔상처럼 제 눈앞에 자꾸 나타난다. 그게 점점 멀어지는 너와의 거리를 상기시켜주는 것 같아서, 입술을 꾹 물었다.
소문은 사실이 되었고, 너를 향한 내 마음 또한 사실이 되었다. 그것을 인정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린 것 같아서, 눈물이 났다.
안녕하세요, 정석입니다! |
끊는 솜씨도 엉망이고, 브금도 엉망인 글이지만 기가 빨려서 그냥 일단 올려 놓는 걸로... 평소 주인공에게 다정한 츤데레인 원우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는데 잘 보여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감정선도... ㅎ 글을 쓸 때마다 부족함을 느끼네요. 슬프다... 8ㅅ8 원우와 저 미모의 여성분은 무슨 관계일까요! 요 정도만 해 놓고 저는 다음 글 천천히 쓰면서 과제나 하러 가야겠어요. ㅋㅋㅋㅋㅋㅋㅋ 별 거 아닌 글 읽어주셔서 너무나 감사하구요, 포인트가 너무 높다 싶으시면 꼭 말씀해주세욥! 댓글 달고 포인트 받아가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