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봐야 된다고. 이 수업 빠지면 안 돼.”
거짓말, 이라 대꾸하며 내게 제 휴대폰을 들이미는 녀석의 표정과 목소리에는 가시가 박혀 있었고, 그것은 아프게도 나를 찔러 왔다. 간만에 마주하는 너인데, 이렇게 보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 못해서 더 아픈 걸까.
하여간 필요할 때마다 도움이 안 돼요, 도움이. 괜히 작게 투덜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말 없이 나를 바라보는 녀석은, 여전히 무섭게 얼굴을 굳힌 채였다. 내가 무슨 거짓말을 해도 빠져나갈 구멍은 없겠구나.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왜 불렀는데.
“왜 피하냐고. 하루도, 이틀도 아니고 몇 주 씩이나.”
“연락 오는 거 귀찮아서 폰 잘 안 보고 지냈어. 영희는 시간표가 같으니까 매일 할 수밖에 없었던 거고.”
“...화난 게 있으면 말로 해. 얼굴 보고. 사람 불편하게 하는 게 취미냐?”
소리를 지르는 녀석 덕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한 번씩 고개를 돌려 우리를 쳐다보았다. 네 말에, 사람들의 시선에 내가 움츠러들자 녀석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한숨을 쉬었다.
무엇 때문에 화가 났는지는 짐작이 갔지만, 녀석의 이런 모습은 생각지도 못 했다. 연락을 씹었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화를 낼 줄은.
잔뜩 굳은 표정으로 삐딱하게 나를 내려다보던 녀석은 아, 하며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진짜 어이가 없네. 빈정거리며 다시금 나와 눈을 마주하는 전원우는, 상처 받은 눈을 하고 있었다.
전혀 웃지 않는 눈으로 웃으며 나를 바라보던 녀석이 이내 입을 떼었다.
“그런 적 없다, 아니다, 왜 이러냐, 이런 거 말고 다른 말은 못 하냐고. 나한테 할 말 없어?”
“당분간 바쁠 테니까 연락 씹어도 화내지 마. 너만 씹는 거 아니니까.”
도대체 무엇을 기대한 걸까, 나는.
전원우와 내가 한참 냉전 상태라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하나같이 내뱉었던 소리는 하나였다. 사랑 싸움이냐? 사각 관계?
이 과정에서 내가 들어먹는 욕도 꽤 상당했다. 철벽이 오지긴 해도 반반한 낯의 전원우를 속으로 조금 앓던 아이들에게 녀석과 오랜 친구 관계라는 핑계로 늘 붙어 다니는 나는 눈엣가시였고, 전원우에게서 떨어지자마자 함께한 존재가 무시 못 할 비주얼의 최승철이었기 때문에.
영희가 전원우 연락만 씹는 이유가 뭐냐고 끈덕지게 물어온 탓에 내가 전원우를 좋아하는 것을 알게 된 친구들은 전원우가 어장을 칠 줄은 몰랐다며 투덜댔다. 물론 그건 친구들만 해당되는 이야기였다.
어느 새 나는 과에서 얌전한 여우가 되어 있었고, 여자아이들의 따가운 시선을 무마시켜 주는 것은 친구들과 최승철 뿐이었다. 불편한 나날들이 지속되는 동안, 전원우는 연락이 없었다.
그리고, 결국 일이 터졌다. 전원우가 없는 동안에.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구들과 밥을 먹으며 수다를 떨다 잠깐 화장실로 들어섰을 때였다.
손에 흘린 음료수가 끈적거려 얼른 씻기 위해 팔을 걷으며 먼저 화장실로 들어서는데, 화장대 앞에서 화장을 고치는 아이들이 보였다.
둘 다 그냥 인사만 하고 다니는 정도였기 때문에 그러러니 하며 반대편 세면대로 걸음을 옮기려다, 잠깐 멈춰 섰다. 내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전원우와, 나의 이야기가.
“전원우랑 ㅇㅇㅇ, 진짜 소꿉친구 맞을까?”
“맞든 아니든 우리랑 무슨 상관이라고. 근데 존나 친해 보이기는 해. 전원우가 걔한테 껌뻑 죽잖아. 그거 믿고 ㅇㅇㅇ가 나대는 것도 있고.”
“ㅇㅇㅇ 걔, 별로 예쁜 얼굴은 아니지 않아?”
“안 예뻐, 안 예뻐. 걔보다 걔랑 같이 다니는 민아가 훨씬 예쁘지.”
“근데 어떻게 친해진 거지? 전원우 철벽 오지잖아.”
“누가 알아, 한 번 대 줬을지. 남자들은 다 똑같으니까.”
야아, 너무 멀리 갔잖아! 뭐 어때, 우리끼리만 하는 얘긴데. 저들끼리 깔깔대며 웃는 소리에도 아까처럼 그러려니 하며 발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예쁘지 않다는 말이야 틀린 소리가 아니었으니 상관없었지만, 뒤이어 이어지는 말들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뭘 대 줘? 내가 뭘 했는데? 내가 도대체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해? 어느 새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거칠게 닦아내며 가서 잔뜩 따지려다, 또 한 번 멈춰 섰다. 근데 요즘 전원우랑 둘이 사이 안 좋잖아.
“아, 그랬지? 그럴 줄 알았어. 딱 봐도 전원우가 여자친구 생기니까 버린 거더만.”
“전원우가 아니라고 하긴 했던 것 같은데...”
“아니긴, 그 여자애 일주일은 넘게 붙어 다녔잖아. 그 뒤로는 못 보긴 했어도. 그러고 보니 전원우 철벽남이 아니라 나쁜 놈이었네.
“하긴, 걔도 일주일용이었을지 어떻게 알아? ㅇㅇㅇ는 뭐, 오래 공 들인 애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걔가 무슨 전원우랑...”
“와, 재밌다. 소설 쓰나 봐? 결말은 어떻게 돼?”
저들끼리 하는 이야기에 심취했던 모양인지, 거울로도 쉽게 볼 수 있는 위치에 있던 내가 바로 뒤까지 다가가 말을 걸고서야 화들짝 놀라며 나를 돌아보았다. 급하게 말을 돌리는 그 아이들에게서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어이가 없어서, 진짜. 어디 더 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여 보이자, 잔뜩 당황하던 모습은 어디로 갔냐는 듯 머리카락을 만지작대며 태연히 말을 여는 모습에 기가 차 피식 웃었다.
“....너네 존나 친한 거, 아무리 봐도 그냥 친구는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맞아. 전원우가 널 좋아하거나, 네가 전원우를 좋아하거나. 둘 중 하나지. 그게 아니고서야 그렇게 끈질기게 붙어 다닐 수가 있나? 둘 다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못 해? 너네는 그게 안 되나 봐?”
“안 될 거야 없는데, 너네처럼 수준 차이가 심하진 않지.”
“수준 차이? 왜, 나 같은 애는 전원우랑은 친구도 하면 안 돼?”
“당연한 거 아냐? 솔직히 좀 아니잖아. 운동이며 얼굴이며 성적까지 완벽한 전원우 수준이야 다들 알 거고, 너는? 넌 뭔데? 네가 뭐라도 된다고 생각해?”
“그럼 넌 얼마나 수준 높은 년인데?”
갑작스레 나타난 영희가 쏘아붙이자, 이건 뭐야 하며 쳐다보던 얼굴이 뒤이어 들어서며 싸늘하게 쳐다보는 민아와 지연이의 모습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뭐 이렇게 떼거지로 모였어?”
“말은 바로 하자. 우리 그냥 화장실 온 거였거든?”
“....야, 됐어. 볼 일만 보고 나가. 이거 내 일이니까.”
“야, ㅇㅇㅇ!”
“너네한테 괜히 폐 끼치기 싫어서 그래. 나가 있어.”
착한 척 오지구요. 빈정거리는 말에 입술을 꾹 물었다.
그래, 착하지? 난 너네처럼 뒷말은 안 하거든. 똑같이 이죽거리는 말에 어이없다는 듯 나를 노려보는 아이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덤벼들기라도 할 듯 씩씩대는 영희를 토닥이며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안 되겠다 싶으면 소리 지를게. 그 때 들어 와. 알았지?
제 말에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영희가 아이들을 한 번 더 째려보고 나갔고, 뒤이어 따라 나가려던 민아가 내 주머니에 무언가를 밀어넣었다.
이게 뭐냐는 듯 바라보자 작게 녹음, 이라 속삭이고는 나가버린다. 그 와중에도 냉정히 판단한 민아가 대단해 피식 웃자, 비웃듯 뱉어지는 말이 다시금 나를 찔렀다.
“잘난 친구들도 가셨으니까, 솔직히 말해 봐. 누가 더 좋았어?”
“...무슨,”
“전원우랑 최승철 중에, 누가 더 좋았냐고. 자 봤을 거 아냐?"
“...하.”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수치스러웠다. 친구랍시고 같이 다니는 게 이렇게 욕먹을 일이었나 싶어서. 시야가 흐릿해졌지만, 이런 애들 앞에서 흘리는 눈물이 아까워 주먹을 꽉 쥐고 참았다.
어떤 말을 들어도 크게 타격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나를 향해 다가오는 뾰족한 말들은 생각보다 더 아팠다. 눈물이 날 만큼.
울지 않으려 깨문 입 안의 살이 터지기라도 한 건지 피 맛이 감돌았다.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이 아이들이 하는 말도, 입 안에서 퍼지는 피 맛도.
토기를 참으려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내가 인정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는지, 재미있다는 듯 웃던 아이들의 입은 여전히 나를 때렸다.
“왜, 둘 다 좋아서 데리고 다니는 거야? 능력도 좋지. 어떻게 꼬셨는데?”
“....와, 너네 진짜.... 더럽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살지?”
“...뭐?”
“더럽다고. 너네 다른 남자애들이랑 이야기 할 때마다 이런 생각 해? 누가 더 잘 하겠다, 누가 더 좋겠다, 하는 거.”
“하, 이게....”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내뱉던 아이가 진짜 더러운 게 누군데, 하며 손을 올렸을 때, 갑작스레 나타난 손이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미친. 여기 여자 화장실이거든?”
“넌 그게 중요하냐?”
가볍게 핀잔을 주며 제 품으로 밀어 넣는 손의 주인은, 최승철이었다.
....아, 최승철이구나. 내심 전원우이기를 기대했는지, 맥이 풀리는 스스로를 책망했다. 진짜 못됐다, ㅇㅇㅇ. 최승철이 여기까지 와 줬는데, 이렇게 도와주러 온 애를 앞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까지도 전원우 생각을 하는 나를 꾸짖듯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떨쳐낸 뒤 다시 마주한 아이들의 표정은, 경악 그 자체였다. 그와 동시에, 두려움이 보이기도 했다. 최승철의 표정이 장난이 아니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무섭게 굳은 표정으로 그들을 내려다보던 최승철이 낮게 내뱉었다. 꼭 뭣도 아닌 것들이 입만 살았던데, 딱 그 모양이네.
“내가 여자는 안 건드리는데, 너네는 진짜 누구한테 한 대 맞아도 정신 못 차릴 것 같다.”
“...뭐, 뭐?”
“너네 나한테 말이나 붙일 수 있냐? 이런 일 아니었으면, 내 얼굴 똑바로 보는 일이 있기나 했을 것 같아?”
“......”
“말 가려서 해라. 내가 쫓아다닌 거고, 너네처럼 내 눈에 한 번이라도 들어 보려고 애쓰는 애들이랑은 다르게 나 안 좋아하는데 괜히 고백해서 어색해하는 애 붙들고 억지로 데리고 다니는 거야, ㅇㅇ가. 알아들어?”
“......”
“너네가 그렇게 함부로 입에 올려도 되는 애 아니라고.”
“...하, 야. 최승철....!”
“왜, 좆같아?”
“......”
“너네가 한 말은 이것보다 더 심했는데, 그대로 돌려받고 싶은가보지?”
꺼지라는 말도 이렇게 직구로 해 줘야 할 줄은 몰랐다. 안 꺼져? 위협하듯 뱉는 최승철의 낮은 목소리에 헛웃음만 내뱉던 아이들은 할 말이 없었는지 그대로 짜증난다는 듯 투덜거리며 나가 버렸고, 상황이 종료되자 힘이 빠져버린 내가 주저앉으려 하니 놀란 듯 어깨를 붙들어오는 최승철의 품에 그대로 얼굴을 묻었다.
폭풍 같던 상황이 지나가고 나니 눈물이 났다. 우는 모습 찌질해서 안 보여주려고 했는데, 이게 무슨 망신이야. 짜증스레 중얼거리면서도 자꾸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어 울어버리자, 안절부절 못 하던 최승철이 머리와 등에 손을 얹어 가볍게 도닥였다. 괜찮아, 나 여기 있어. 가까운 거리 탓인지 잘게 떨리는 게 여실히 느껴지는 손과는 다르게 다정스레 내려앉는 목소리에 울음을 가득 머금고 웅얼거렸다. 고마워.
피식 웃는 소리에 괜히 부끄러워져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그럴수록 나를 꽉 안아주는 최승철의 품은, 녀석을 닮아 따뜻했다.
“...야, 근데 너 어떻게 알고 왔어? 영희가 불렀어?”
“오늘 과제하기로 한 거 까먹었지, 너. 강의실 앞에서 보기로 했는데, 네가 안 오잖아. 늦은 적 없던 애가 늦으니까 무슨 일 있나 싶어서 찾아보려고 나섰는데, 바로 앞 화장실에 네 친구들이 모여 있길래.”
아, 그랬구나. 눈물을 마저 닦아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나타나준 게 단순히 타이밍이 대단한 건지, 최승철이 대단한 건지는 모르겠으나 덕분에 내가 정리할 새도 없이 최승철이 정리해 주었으니, 나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슬슬 눈물을 그치고서야 여자 화장실에서 20분이 넘도록 나를 안고 있던 최승철이 생각나 피식 웃으며 녀석의 팔을 잡아끌었다. 야, 여기 여자 화장실이야. 너 들어온 지 20분은 넘은 것 같거든?
내 말에 그제야 여자 화장실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자각한 녀석이 허둥대며 화장실을 나갔다. 발개진 귀가 귀여웠다.
웃음을 참지 못하고 크게 웃으며 따라나서자 밖에서 기다리던 최승철이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한다.
“야, 그래도.... 고마워. 네 덕에 더 험한 소리는 안 들었던 것 같은데.”
“너 이런 소리 매일 듣고 다니는 건 아니지? 그런 거면 진짜 혼난다. 왜 말 안 했어.”
“나도 오늘 처음 듣는 소리거든? 그러니까 울었지. 자주 들었으면 벌써 자료 모아서 경찰서 갔어.”
어느 새 심각한 얼굴로 물어오는 녀석에게 장난스레 받아치는 모습을 보고서야 최승철이 풀어진 표정으로 살짝 웃었다. 아, 그러고 보니 녹음 했었는데. 민아가 밀어 넣었던 것을 꺼내니 아니나 다를까 한참 녹음되고 있는 중이었다.
얜 폰 없이 불편해서 어쩌려고 나한테 이런 걸 줬대. 웅얼거리며 주변을 둘러 봐도 아이들은 없었다. 먼저 갔나?
“다들 수업 있다고 해서. 내가 들어가 본다고 하니까 잘 달래 주라고 부탁하고 급하게 가던데.”
“...아, 그러고 보니 다들 수업 있었구나. 나야 이제 끝났는데... 이거 어떻게 전해 주지?”
“과제 하면서 기다렸다가 같이 전해주러 갈까?”
“그러면 나야 좋고. 너 시간 돼?”
“너랑 있는 건데 안 될 리가 없잖아.”
하여간 능청은. 발갛게 부었을 게 분명한 제 눈을 꾹꾹 눌러 주면서도 능청스럽게 대답하는 녀석의 팔을 툭 치며 걸음을 옮기려는데, 멀리서 누군가 급하게 뛰어오는 게 보였다.
늦었나보네, 수업 시작했을 텐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눈물 때문에 부어서 뜨끈해진 눈을 비비려 손을 올리자마자 팔목을 잡아채였다.
놀란 눈으로 올려다보았을 땐, 숨도 고르지 못하고 제 앞에 선 나를 내려다보는 전원우가 있었다. 며칠 만에 보는 녀석은, 생각보다 더 야위어 있었다.
“....눈이 왜 이래. 울었어?”
“....바빠도 밥은 먹고 다녀라, 좀. 어째 더 말랐어.”
“울었냐고.”
“나 과제 하러 가야 하니까, 나중에 연락 하자.”
“야.”
네 말에 대충 어물대며 지나치려던 내 노력은 거칠게 팔을 잡아채는 녀석에 의해 물거품이 되었다. 다시금 세게 붙들린 손목이 아렸다. 그냥은 못 넘어가겠구나.
한 발짝 뒤에 서 있던 최승철이 작게 한숨을 쉬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민아의 휴대폰을 가져갔다. 내가 잘 전해 줄게. 이야기 끝나면 전화 하고.
늘 빚지는 기분이 들어 미안하다고 속삭이자 씩 웃으며 다음에 밥 사, 하던 최승철이 버릇처럼 휴대폰을 고쳐 들었다. 아, 그거 민아 핸드폰인데. 아직 액정 켜져 있어서 잘못 만지면...!
-근데 어떻게 친해진 거지? 전원우 철벽 오지잖아.
-누가 알아, 한 번 대 줬을지. 남자들은 다 똑같으니까.
아, 미친... 이걸 다시 듣게 되다니. 그것도 전원우 앞에서.
급작스레 터져나온 녹음본 속 이야기에 아차 하는 표정의 최승철에게서 급하게 시선을 돌려 전원우를 바라보자, 아니나 다를까 잔뜩 굳어진 녀석의 표정이 보였다. 더 꽉 죄여오는 손목에 작게 신음했다. 힘이 실린 손이 아프게 다가온다.
얼른 가, 얼른. 이따 전화할게. 작게 속삭이는 내 말에 최승철은 미안하다는 듯 나를 보았고, 괜찮다는 듯 웃는 모습을 보고서야 미적미적 걸음을 뗐다. 화를 눌러 참는 듯 한숨을 내쉬던 전원우는 최승철이 꽤 멀리 가고 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저거. 화를 참느라 낮아진 녀석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여전히 낯설었다, 전원우가 화를 내는 모습은.
“저거, 무슨 말이야.”
“....아, 최승철 진짜.... 신경 쓰지 마. 별 거 아냐.”
"안 들려?"
"...별 거 아니라고. 신경 꺼, 그냥."
“헛소리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
“묻잖아, 저게 무슨 소리냐고!”
“저게 어떤 말이든 네가 무슨 상관인데!”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고, 이 일로 너와 더 엮이는 것도 원치 않았다. 네 얼굴을 다시 마주하면 그 말들이 떠올랐고, 잘못도 없는 네게 괜히 화를 낼까 고개를 숙였었는데, 그랬는데. 전원우는 그런 나를 봐주지 않았다.
결국 녀석은 크게 화를 냈고, 지지 않고 악에 받쳐 소리 지르는 말에 입을 다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싸늘한 전원우와는 다르게 따뜻했던 최승철의 품이 떠올라서,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래, 나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너한테 한 번은 대 줬을 거다, 너랑 최승철 중에 누가 더 좋았냐, 이런 말을 친하지도 않은 여자애들한테 10분은 넘게 듣고 있었고, 그게 수치스럽고 서러워서 좀 울었어. 그게 왜?”
“그걸 왜 이제...!”
“그걸 너한테 말 했으면! 그랬으면, 뭐가 달라지는데?“
“......”
“너 그 때 내 옆에 있었어? 나 힘들 때마다 옆에 있었어, 네가?”
“......”
“아니잖아, 너 그런 적 없잖아. 내가 힘들어할 동안 내 옆에 있어준 사람은 늘 네가 아니라 최승철이었잖아.”
화를 내듯 다그치는 전원우의 태도 때문에 결국 눈물이 터졌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런 소리까지 듣고 다니는데.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했는데.
눈물 젖은 눈으로 노려보며 씹어뱉듯 쏟아내는 내 말에 녀석은 답이 없었다. 그게 더 비참한 건 모르고.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했다. 넌 나한테 화 낼 자격 없는데 왜 화를 내. 나한테 이렇게 화내고 짜증내야 하는 사람 너 아니고 최승철이야, 알아? 잡혀 있던 팔을 거칠게 빼내어 눈물을 닦으며 말하자 어쩔 줄을 모르고 그저 짜증스레 머리를 쓸어 넘기기만 하던 녀석이 입을 열었다.
“야, 나는 네가 걱정돼서...”
“걱정? 보자마자 소리 지르는 게 걱정이야? 그리고, 네가 뭔데 날 걱정해?”
“....너 나한테 걱정할 시간은 줬냐? 안부 물을 시간은 줬어? 그렇게 피해 다니더니, 이제 걱정하지도 말라고? 친군데 이 정도는 할 수 있는 거 아니냐?”
“아, 몇 주간 너 피해 다닌 거? 그거 내가 너 피한 거지. 맞아. 나 마음 복잡해서 힘들 때 여자친구랑 있는 너 보는 거 불편해서, 좀 피했어. 너랑 다녀서 욕먹는 거나, 최승철이랑 다녀서 욕먹는 거나 다를 거 없었으니까.”
“...여자친구 아니라고 했잖아. 카톡 안 봤지, 너.”
“그래? 여자친구가 아닌데 늘 같이 다니고, 챙겨주고 한 건 뭔데?”
“그게 왜 궁금한데.”
“그럼 넌 최승철이랑 나랑 다니는 걸 왜 그렇게 신경 쓰는데?”
“......”
상처 받은 눈으로 내게 말하던 전원우는 이내 또 말문이 막힌 모양인지 입을 다물었다. ...친구잖아. 한참 뒤에 한숨같이 뱉어지는 말은 모순적이기 그지없었다. 친군데 왜 신경을 써? 날이 선 내 말에 시선을 피하는 녀석에게, 결국 내가 먼저 말을 뱉어냈다.
“말 잘 했네, 너. 이 참에 할 말 하고 그냥 끝을 보자. 네 옆에 있던 그 여자. 여자친구든 아니든 네가 왜 그렇게 챙겨? 걔가 뭔데?”
“뭐? 야.”
“네가 뭔데 캔 따 주고, 수업 같이 듣고, 붙어다니면서 밥도 사 줘? 그리고 그걸 왜 내가 듣게 만드는데?”
“...ㅇㅇㅇ. 너 좀 이상하다?”
“이상한 거 나도 아니까 끝까지 들어. 이런 걸 왜 궁금해 하냐고 물었지. 똑같이 물어보는 너한테 친군데 이게 왜 궁금하냐고 내가 그랬지.”
“......”
“나는 나 말고 다른 여자를 네가 신경 쓰는 게 싫고, 나처럼 그렇게 대해주는 거 못 보겠어. 여자친구 생기는 것도 웃으면서 축하해줄 수가 없을 것 같고, 그러기 싫어. 생각만 해도 싫어.”
“...야.”
“그래, 알아. 우리 친구잖아, 분명히 친구였고, 앞으로도 친구여야 하잖아. 그러니까 이런 말도 하면 안 되는 거잖아. 근데, 근데! 나는 그게 안 돼. 너는 친구가 남자 만나는 것까지 신경 쓰는 게 가능할지 몰라도 나는 아냐. 나 너 좋아해.”
“......”
“....그러니까, 나 너랑 친구하는 거, 더는 못 해. 이제 안 해.”
알아들었으면, 더 건드리지 마. 나한테서 신경 꺼, 제발.
점점 북받쳐 오르는 감정 탓에 울음이 잔뜩 섞여 이어지지도 않는 말을 겨우 끝마치고서야 돌아설 수 있었다. 후련했다.
...사실은 더 무거워졌을 지도 모른다. 조금씩 쌓여 왔던 상처에 묻혀버려서, 아직은 느끼지 못하는 것일 지도.
자꾸 흐르는 눈물이 시야를 방해하는 것에 불편함을 느끼며 소매로 벅벅 닦아냈다. 곧 헐 것 같은 눈가가 쓰리다. 다시금 깨문 입 안쪽 여린 살이 다시 터졌는지 피 맛이 났다.
너무 울어서인지 눈도 쓰렸고, 속도 쓰렸다. 비릿한 피맛이 입 안에서 나는 건지, 상처로 잔뜩 뭉개지고 찢어진 마음에서 나는 건지 모를 정도로.
전원우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고부터 지금까지 쭉 있었던 불편한 날들 중에는, 오늘이 단연 최고였다. 과제 때문에라도 최승철을 만나야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 문자 한 통을 남기고 그냥 집으로 와 뻗어버렸다.
그치지 않고 흐르는 눈물 탓에 결국 헐어버린 눈가를 문지르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자고 일어나면, 모든 일이 없었던 일이 되어 있길 바라면서.
**
시끄럽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잠에서 깨었을 때는, 이미 어둠이 세상을 덮은 뒤였다. 나 도대체 몇 시간이나 잔거야? 식겁하며 휴대폰을 들여다보았다가 다른 의미로 굳어버렸다.
부재중 전화 89통. 전화가 이렇게 쌓였으니, 문자나 카톡 상황은 어떨지 대충 짐작이 갔다. 발신인은 모두 전원우였다.
통화 목록을 가득 채운 녀석의 이름을 보며 다시금 울컥 올라오려는 눈물을 삼켰다. ...역시, 꿈으로 치부할 수가 없는 일이구나.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는데, 또 한 번 전화가 걸려 왔다.
발신자 전원우. 받을까 말까 한참을 고민하는 중에도 녀석의 전화는 끊이질 않았다. 이대로 두면 진짜 받을 때까지 할 것 같아, 숨을 길게 내뱉어 심호흡을 하곤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집이냐.
“......”
-나와. 할 말 있으니까.
“난 없어. 가라.”
-넌 없어도 나는 있어. 피하기만 하지 말고 좀 들어, 제발.
길게 뱉는 한숨 소리에 수화기 너머로도 녀석이 얼마나 피곤해하고 있는지가 전해졌다. 얼마나 복잡해했을 지도.
그래서 더더욱 나가기가 싫었다. 어떤 말을 듣게 될지 뻔히 보여서. 한참의 침묵 끝에 무어라 말하려던 네 말을 끊고 대답했다. ...알았어, 나갈게.
급히 준비하기 위해 벌떡 일어나며 휴대폰을 침대 위로 대충 던져놓으려던 순간, 상단바 위로 카톡 알림이 떴다. 최승철이었다.
분명 문자 한 통을 끝으로 연락이 되지 않는 나를 걱정하는 말이었겠지만, 지금의 나는 그 카톡을 붙들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집 앞이라고 하는 걸 보니 꾸미기는 그른 것 같고... 어차피 이제 와서 꾸미는 게 더 이상하지만. 그렇게 중얼대면서도 조금이라도 더 깔끔한 옷을 찾으려 옷장을 뒤지는 내 모습이 너무나 이상해 허탈한 웃음을 뱉어냈다. 그냥 대충 나가자. 고개를 저으며 가디건 하나를 꺼내 입은 뒤 신발장 앞에 서서 거울을 보았다.
발갛게 붓고 충혈되어 버린 퀭한 눈, 스트레스 때문에 야윈 몸. 누가 봐도 실연당했어요, 라고 써 붙이고 있는 것 같아서 괜히 기분이 묘해졌다. 정말 별로다, 나.
“...이제야 제대로 얼굴 보여 주네.”
“...할 말만 얼른 하고 가라. 상대해 줄 기분 아니... 너 술 마셨어?”
“어, 조금.”
제 물음에 덤덤히 대답하는 네게서는 술 냄새가 났다. 숨 하나하나에 배어나오는 냄새가 꽤 짙어 인상을 썼다. 조금이 아닌데? 내 말에 그저 웃기만 하는 너는 말이 없었고, 어색함이 불편해진 내가 급히 말을 꺼내는 것으로 대화를 다시 이어갔다.
“...할 말이 뭔데.”
“...네가 말했던 걔, 여자친구 아니야."
“......”
“그 때 같이 밥 먹었던 애 기억 나냐. 걔 여동생이야. 그 자식이 아프다고 한 주 내내 쉬어버려서, 대신 전달해주러 온 것 뿐이야. 이미 남자친구도 있고. 친구 동생인데, 안 챙겨 줄 수는 없잖아.”
“근데.”
“그냥, 그렇다고. 꾸준히 아니라고 해명하고 다녔는데, 네가 안 믿으니까 아무도 안 믿어주잖아.”
“......”
“...사실 너만 믿어 주면 다른 놈들이 믿든 말든 상관없긴 했지만.”
“...그게 다야?”
"...아니."
뭐가 이렇게 바빠. 아직 시작도 안 했거든요. 여유롭게 내질러지는 말과는 다르게 억지로 웃고 있는 너는 꼭, 울 것만 같은 얼굴을 했다.
능청스럽게 이어지는 네 말에 피식 웃었어야 할 나였지만, 어쩐지 웃음이 나질 않아 여전히 표정을 굳히고 서서 녀석의 얼굴을 마주했다.
왠지 모르게 기분이 상했다. 끝까지 말을 돌리는 전원우의 모습이, 지금 상황을 얼버무리려고 하는 것 같아서. 그냥 시간만 끌고 있는 것 같아서.
나보다 더 할 말 많은 표정으로, 울 것처럼 웃는 낯으로 서 있는 주제에 정작 중요한 말은 꽁꽁 숨기는 네 태도가 싫었다.
“할 말 없어 보이는데, 그냥 들어가도 되지?”
“야,”
“피곤해서 일찍 자야 할 것 같아. 가는 거 못 봐줄 것 같네. 술도 마셨는데, 조심히 가.”
그래서 그냥 돌아섰다. 더 볼 용기도, 네 앞에 오래 버티고 서 있을 여력도 없었기 때문에. 스트레스 때문인지 자꾸 저를 괴롭히는 두통에 인상을 쓰며 현관문을 잡자마자 온종일 많이도 잡혔던 팔목이 다시 한 번 잡아채였고, 녀석의 힘에 의해 돌아섰을 때 눈앞에 보인 것은 전원우의 마른 가슴팍이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황당한 상황에 멍하니 있기도 잠시, 무슨 일인지 생각하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입술이 맞물렸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아 하얗게 변해버린 머릿속은 녀석의 축축한 혀가 입 안을 가르고 들어오고서야 다시 색을 입었다.
원래 전원우는 내가 우울해할 때나 스트레스를 잔뜩 받았을 때, 머리를 쓰다듬거나 안아주면서 달래주곤 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입술을 맞댄다던가 하는 접촉은 없었다. 네 혀가 헤집고 지나간 자리가 데인 것처럼 뜨거웠다.
갑작스런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고 벗어나기 위해 버둥대며 몸을 뒤로 빼는 나를 한가득 끌어안아 놓아주지 않는 녀석의 손은 어느 새 귓가에 내려앉는 목소리만큼이나 떨리고 있었다.
“...너는 늘 뭐가 그렇게 급해서 혼자 단정 짓고, 사람 피하는 건데. 간 보고 애태우는 게 취미야?”
"....야, 잠깐,"
“천천히 조금씩 다가가려고 했는데, 왜 자꾸 숨어. 왜 자꾸 도망가."
“......”
"나 온종일 피하는 것도, 웬 남자랑 다니는 것도 이해 못 하겠고. 그거 보면서 혹시라도 내가 설 자리가 없어질까 봐, 친구로라도 옆에 남지 못할까봐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너는 모르지.”
“...전원우.”
“남자친구가 싫으면 그냥 친구라도 하게 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네 얼굴 조금이라도 더 보려고, 조금이라도 더 오래 함께하려고 그렇게, 그렇게 애를 써도 너는...”
“......”
“늘 울고 싶었던 게 누군데, 너는 왜 그렇게...”
왜 그렇게 아프게 울어. 보는 사람 억장 무너지게.
어느새 축축해진 녀석의 목소리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건 내가 할 소리잖아. 정작 울고 싶은 건 난데, 네가 왜 울어.
한 자락이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필사적으로 나를 끌어안은 녀석의 품이 아팠다. 억지로 눌러놓았던 것들을 토해내듯 내뱉어지는 말들도, 불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손도. 지금의 전원우를 감싼 모든 것이 다 아프게 다가와서, 눈물이 났다.
아, 진짜 전원우, 너는....
“너무 늦었지. 미안해. 늦게 찾아온 것도, 내가 느려서 너 이렇게 아프게 한 것도, 다.”
“......”
“그렇게 겁내다가 결국 네 말 듣고서야 겨우 말 꺼내는 멍청한 내가 너무 병신 같다. 많이 아팠지. 많이 속상했지. 미안해, 미안해.”
“...쓸 데 없는 소리 하지 마, 바보야.”
내가 사라져버리기라도 할까 옷자락을 꾹 쥔 채 푹 젖은 목소리로 제게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하는 녀석이 꼭 아이 같아서, 가만히 머리와 등을 느리게 도닥여 주었다.
제 손길에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너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내며 다시금 속삭였다. 좋아해.
젖어 들어가는 어깨만큼, 마음도 젖어들었다. 그리고 인정했다. 나는 너를 이길 수 없음을.
결국 내 마음을 전부 틀어쥔 것은 녀석이었기에, 나는 전원우를 이길 수 없었다. 네게 받은 상처도 결국 너에 대한 동정으로 끝이 나는 것을 새삼 느끼며 녀석을 조금 더 끌어안았다. 그리고 속삭였다. 괜찮아. 나 여기 있잖아.
얼굴 보고 싶어. 작게 중얼거리는 내 말에 녀석은 얼른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 푸스스 웃자, 눈물을 매단 채 저도 슬쩍 웃는다. 그 모습이 못 견디게 해사해서, 울음을 삼켰다.
좋아해. 울음 속에서 되풀이되던 말이 제법 뚜렷하게 내게 닿아 온다. 눈을 마주한 채 젖은 네 눈가를 손으로 훑어 주며 웃는 낯으로 대꾸했다. 나도.
이제 숨지 마. 나 못 견뎌. 제법 아이 같은 투정과는 달리 다시금 진득히 다가오는 입술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친구에서 연인으로. 불완전한 관계의 끝은, 새로이 정의됨으로서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