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 네 생일이잖아.'
'…….'
'태형이 보는 거 알면서도 그런 거야?'
'…….'
'답지 않네.'
마지막 말만 뱉어놓고 집에 들어간 지민의 목소리가 귓가를 괴롭혔다. 심장의 고동이 발 끝에서 웅웅 울리는 것 같았다. 억지로 끌어올린 입가가 따가웠다. 정국은 손을 들어 따가운 입가를 매만졌다. 손에 옅게 피가 묻어져나왔다. 심장이 꽉 막힌 기분이 드는 게 우습다. 너무 우스워서 눈물까지 다 나올 거 같다.
네 생각으로 하루를 보내기는 죽기보다 싫었는데, 이제는 네 말까지 하나하나 곱씹는 나를 어쩔 방법이 없다.
정국은 침대에 누워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치워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책상 위에 덩그러니 올려져있는 달력으로 시선을 돌렸다. 크게 동그라미 쳐있는 날에 유독 눈길이 꽂혔다. 지민의 말대로 정국의 생일이었다. 정국과 지민과 그리고 태형이 처음 만난 날부터 이어져 오는 것이 있다. 서로의 생일엔, 서로의 선물을 챙겨주며, 함께 밥을 먹고, 부모님과 하하호호 웃는 것. 생일을 최악의 날로 만드는 것에는 제약이었다. 아마 부모님은 새까맣게 모를 것이다. 생일을 맞은 자신의 아들과, 아들의 제일 친한 친구 둘과 최고의 생일을 보내게 해줬다는 생각만을 가지고 있을 뿐. 속이 매스꺼웠다.
내일이 오지 않길 바라는 안일한 생각 같은 건 추호도 없었다. 피할 수 없으면 맞설 생각이다. 불 같은 태형에게는 언제나 준비가 되어있었다. 처음부터 감정을 소비하면 지치는 건 내가 아니라 태형일 것이니 태형이 지쳐가는 과정을 난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오만과 편견
김태형 X 박지민 X 전정국
토요일 밤 7시. 사람이 제일 많을 때인 이 시간, 고급 레스토랑엔 지민과 정국과 태형만이 자리했다. 물론 그들의 옆엔 부모님도 함께 했다. 철저히 계산 된 화목한 분위기가 그들의 사이를 유유히 흘러갔다. 태형의 웃는 얼굴이 정국을 향해 있었다. 목을 죄여오는 넥타이를 조금 잡아끄니 숨길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맞은편에 앉아있는 태형과 지민에게 시선을 한 번 던졌다. 나란히 붙어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보니 손에 힘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정국아 생일 축하한다. 앞으로도 태형이 좀 잘 부탁해. 지민이 너도."
"에이 엄마 무슨 잘 부탁 한다는 말을 하고 그래요."
엄마의 말에 반박하며 대답하는 태형의 목소리가 들리고 당연하죠 이모. 하고 웃으며 대답하는 지민의 목소리도 들렸다. 웃는 낯짝을 까보이면 무슨 표정이 드러날까 내심 궁금해진 정국도 표정을 숨기고 밝은 목소리로 얘기했다.
"걱정 마요 이모. 내가 태형이 챙기는 거 하루 이틀인가?"
"야 전정국이. 내가 니 아들이냐 임마?"
"친구 뒷바라지 하는 것보다 아들이 낫네. 너 아들 해라 그냥."
"이 자식이."
너네 또 싸우냐? 진짜 아빠랑 아들 같아.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지민의 말에 부모님들이 웃었다. 연기는 성공적이었다. 적대심이 가득 드러나는 표정이 아닌 정말 친한 친구를 바라보는듯한 표정을 가진 태형은 꽤 낯설었다. "정국아 많이 먹어." 네모난 입을 벌리며 히히 웃는 태형의 입가가 호선을 띄었다. "응. 너도 많이 먹어. 지민이 너도." 정국 역시 태형의 대답에 응했다. 보이지 않는 기싸움이 팽팽했다. 태형의 가라앉은 눈동자가 정국을 보았다. 시선이 정국과 태형의 사이에서 깊게 얽혔다.
"그나저나 태형이도 얼굴 꼴이 말이 아니네. 어제 정국이도 여기저기 다쳐서 왔거든."
언제 그랬냐는듯 태형은 다시 활짝 웃으며 정국의 엄마에게 시선을 돌렸다. "어 그러고보니 그렇네. 둘이 싸운 거 아냐?" 태형의 엄마까지 거들자 태형은 자신의 앞에 있는 정국을 슬끗 보며 대답했다.
"에이 싸우긴요."
"그럼 왜 그렇게 다쳤어? 너도 정국이처럼 어디서 된통 굴렀니?"
"아니요 그냥."
태형은 여전히 정국만을 바라 본 채 입을 천천히 열었다. "미친 개한테 물렸어요."
"어머, 요즘에도 그런 개가 다 돌아다녀?"
"그러게요. 돌아다니긴 하더라고요."
그런 개들은 빨리 사라져야 할 텐데 말이에요. 태형은 마지막 말까지 끝마치고 정국을 보며 씨익 웃었다. 뻔히 제 얘기를 하고 있음을 암에도 불구하고 정국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아니, 오히려 말을 뱉는 태형의 눈동자를 보며 더 환하게 웃었다. 명백한 도발이었다. 태형은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는 걸 느꼈다. 죄없는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학교 앞 백구한테 물렸나봐."
"백구?"
"응. 하교하다가 물린 거면 뻔하지."
"그 개새끼한테 이름도 있냐?"
"백구한테 개새끼라고 부르지 마. 착한 개야. 사람은 한 번도 문 적 없는데 널 문 거 보니까…"
"……."
"너도 자기 과라고 생각 했나보지. 미친 개."
정적이 흘렀다.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단도직입적으로 자신을 건드릴지 몰랐던 태형은 꽤나 당황한 눈빛이었다. "야 다시 말해봐." 유유히 흘러가던 드라마가 중단 됐다. 이유는 남자 주인공의 대사 실수. 드라마 촬영 현장은 손 쓸 틈도 없이 얼어붙어 갔다.
"화 내지 마 태형아. 정국이가 장난으로 한 말이잖아."
우리의 관계를 부추기는 것 역시 지민인데, 이 관계를 말리는 것 역시 지민이다. 이 드라마의 시나리오 작가는 애초에 지민이었다. 이 상황도 네 머리속에는 이미 예견 된 장면이었을까. 내심 궁금해졌다. 네 시나리오 끝에는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일까. 나일까, 태형일까.
"미안 태형아. 장난 친 건데 많이 화 났어?"
"……."
"왜 그렇게 화를 내. 사실이 아니라면 그렇게 화 낼 이유도 없을 텐데."
"뭐?"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여서 그런가."
태형의 숨이 성을 내었다. 정국의 시선이 부들부들 떨리는 태형의 손으로 가 닿았다. 정국의 눈빛을 보고 지민 역시 태형의 손을 바라보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이 애처로웠다. 지민은 그 조그만 손으로 태형의 손을 감싸쥐었다. 주먹 펴 태형아. 조곤조곤 내뱉은 지민의 말을 들은 건 태형과 정국 단 둘 뿐이었다. 지민의 말에 태형은 손에 잔뜩 주었던 힘을 풀었다. 튀어나오는 웃음을 애써 참지 않았다. 너나 나나 별로 다를 건 없어 태형아. 박지민 말 한 마디면 아무것도 못 하잖아. 병신같이. "오늘 정국이랑 태형이 둘 다 기분이 안 좋나봐요. 얘네들은 평소에 싸우지도 않으면서 오늘따라 왜 그런담." 헤헤 웃는 지민의 눈꼬리를 보자 부모님은 마음이 놓인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원래 사내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잖아요. 지민의 엄마와 정국의 아빠의 말에 탁 막혀있던 분위기가 다시 넘실넘실 흘러갔다.
"생일 축하해 정국아."
지민은 서둘러 발치에 있던 쇼핑백을 정국에게 주었다. 분위기를 풀어보겠다는 의도가 다분했다. "코트야. 입으면 잘 어울릴 거 같아서." 무릎 밑까지 오는 회색 코트였다. "내가 직접 골랐어. 네 얼굴 생각하면서 매치도 시켜보고." 보상을 받는 기분이었다. 난 어제 네 생각으로 하루를 보냈는데, 너 역시도 목적은 다르지만 내 생각을 했다는 것이.
"여기."
지민이 건네준 회색 코트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니 배알이 꼬였나보다. 제 앞으로 태형의 선물이 툭 던져졌다. "그거 뿌리고 가면 여자들이 많이 좋아한대." 검은색 상자로 포장되어 있는 선물을 들춰보니 향수가 들어있었다. 정국은 눈을 돌려 태형과 마주했다.
"이상하게 정국이 넌 여자를 많이 안 만나는 거 같아서."
"……."
"그거 뿌리고 여자도 많이 만나봐."
정국은 느낄 수 있었다. 태형의 말에 가시가 돋아났다. 여자를 만나. 넘보지 마. 네가 낄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
태형은 꼭 애원을 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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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감사합니다. 제가 암호닉을 신청해주신 독자분들께 뭐라도 해드리고 싶어요.. 예를 들어.. 제가 쓰는 모든 글은 텍본으로 만들 생각이 전혀 없는데 암호닉 분들을 위해서 텍본을 만들고 메일링을 한다던지.. (기약 없는 말을 뱉는다)
암호닉이 없어도 읽어주시고 댓글 달아주시고 신알신 눌러주신 독자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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