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공간의 약혼자
“응, 엄마.”
먼지가 이는 창고 안으로 들어서자 엄마가 전화를 받았다. 집안용 슬리퍼를 신었는데도 바닥에서 흐르는 냉기에 발끝이 시리다. 엄마는 자꾸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혜주의 안부를 묻는다.
“몇 번을 말 해. 나도 혜주가 어딨는지 모른다니까?”
“언니가 되어 가지고 동생 하나 챙길 줄을 몰라?”
“이런 말 할 거면 끊어. 엄마 나 이삿짐 싸는 거 도와 주려고 전화한 거 아니었어?”
“여주야.”
“어차피 나중에 알아서 걔도 잘 찾아 온다니까.”
“...... .”
화가 나고 불만이 있으면 사람을 앞에 두고 대꾸도 안 한다는 점에서 엄마와 혜주는 너무 닮았다. 나랑은 소름끼치게 다를 정도로. 나는 저절로 나오는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애써 억눌렀다. 창고에 빼곡하게 꽂힌 책들은 어렸을 때 혜주와 내가 읽었던 책들이다. 전래 동화, 창작 동화 할 것 없이 다양하다.
“그래. 창고 옷장 문 열면 아마 안에 있을 거야.”
“옷장이 어디 있어?”
“거기 안 보이니? 아. 맞아. 책장에 가려져 있을 걸. 창고가 워낙 좁아서...”
한숨을 후욱, 내쉬었다. 이사를 가려고 짐을 챙기다 생각이 났다. 오래 전 기억도 안 나는 시절의 앨범이. 한꺼번에 트럭으로 모셔지는 게 싫어 직접 찾기로 했더니 이렇게 고난이 잇따른다. 내겐 이 책장이 만리장성 같다.
“일단 끊어. 이거 다 들어내게.”
“진짜 그렇게 해야겠어? 그냥 나중에 기사님들 오면 알아서 운반 해 주시겠지. 그리고 여주야, 혜주가 엄마 전화를 안 받네... 네가 바로,”
“혜주 얘기 할 거면 끊을게.”
무참히 끊어진 통화는 3분의 짧은 통화 기록을 깜빡이며 보여줬지만 3분 사이에 기가 어마어마하게 빨린 것 같다. 책장 가득 쌓인 책을 한 줄 한 줄씩 빼내기 시작했다.
창고 안에 너저분하게 책이 쌓였다. 그제서야 모습을 보인 텅 빈 책장은 비었음에도 뭐가 그렇게 무거운지, 잔뜩 힘을 들어야 삐걱, 한 걸음을 뗀다.
“이걸 눕힐까.”
어차피 버리면 되니까. 그 생각이 들어 있는 힘껏 옷장으로부터 그 책장을 밀었다. 요란하게 소란이 일며 먼지가 공중으로 떠오른다. 마침내 옷장이 모습을 보였다. 그런데, 이 옷장...
“김혜주 옷장인데.”
내 방에 있던 게 아니라, 김혜주 방에 있던 거.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엄마가 다른 곳에 챙겨 놓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옷장을 열어 젖혔다.
시공간의 약혼자
가끔 어린 시절엔 이런 상상을 하곤 한다. 옷장 문을 열면 보이는 새로운 세계를. 숨바꼭질을 하려 옷장 속에 숨었는데 그 어둠 속에서 잠이 들었다 일어나니 눈 앞엔 새로운 꽃동산과 왕자님이 있었다는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는 상상 같은 거.
왕자님은 없었는데 새로운 세계 같다. 지금......
“씨발 너 누구야.”
“예...?”
멱살을 잡고 흔드는 남자와 어둠으로 물들어 빛 한 조각 보이지 않는 하늘 같은 건 상상하지 않았지만, 지금 내가 꿈을 꾸는 건 아닌 것 같다.
“왜 네가 나타나. 왜!”
“무슨......”
“김혜주 어디 있어?”
낯선 곳에서 들리는 낯익은 이름이 너무나 불쾌해서 나는 그 남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꿈인 건지, 꿈이 아닌 현실인건지... 아니면 현실과는 다른 세계인 건지. 그렇다면 내가 왜 거기서도 혜주의 이름을 들어야 하는지.
“찬열아. 그 손 놓지.”
“네가 뭔데 놓으라 마라...!”
살기를 드러내며 으르렁거리던 남자는 내 뒤에서 들리는 또다른 인기척에 고개를 들다 곧 순종한다. 잡힌 멱살 탓에 목 주위로 둥그렇게 아프다. 따끔 따끔.
“나한테 명령 같은 거 하지 마. 씨발.”
“내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이 몇이나 되는데. 이 능력이 어째서 그런 ‘거’야?”
“후계자 주제에.”
짓씹으며 힘겹게 뱉은 나를 공격했던 남자의 말에 내 뒤에서 목소리만 들리던 남자는 한참을 침묵했다. “꺼져.” 그 남자가 한참을 침묵하다 뱉은 말이었다. 그 말에 나를 공격했던 남자는 뒤를 돌아 사라졌다.
“드디어 여주가 왔네.”
“...... .”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
“...... .”
“사진보다 더, 더 예뻐졌어. 내 공주님.”
남자가 나를 뒤에서 끌어 안으며 귀에다 속삭였다. 소름 끼치는 기분에 몸을 부르르 털자 낮게 웃었다. 웃으며 하는 말이 더 가관이었다. “귀여워라. 떨려?” 떨리는 게 아니라, 질겁 하는 거다. 나는 고개를 극성스럽게 저었다.
“그럼 안 떨려? 내가 안는데?”
“저는 그 쪽이 누군지도 모르는데요......”
“나는 백현인데.”
“아니 백현이가 누군지 모르는데...”
“나는, 여주 약혼자야.”
백현인지 뭔지 하는 남자는 뚫린 입으로 아무 말이나 하는 게 아무래도 주특기인 것 같다. “뭐라시는 거예요!” 내가 소리치자 또 귀에다 대고 낮게 웃는다. 얼굴을 보고 싶은데 보여 주질 않으니. 남자가 뒤에서 손만 뻗어 내게 사진을 보여준다.
어린 얼굴을 한 나와 한 남자 아이가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이다. 내 머리 위에는 왕관 모양 머리띠가 씌여 있고, 남자 아이는 나보다 한 뼘 정도 키가 작다. “이거 우린데.” 웃기게도 나는 사진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다.
왜 내가 나타났느냐는 뭐고. 이 사진은 또 언제 찍힌 건지. 모르는 것 투성이인 내가 지금 멀쩡할 리가 없다. 분명 꿈을 꾸고 있는 것일 테다. 꿈을 꾸고 있다면... 정말 꿈이라면,
“나 너무 힘들어......”
꿈에서조차 김혜주를 생각해야 한다는 게 너무 싫다. 며칠 밤을 새워 놀러 다니는 그 애를 대신해서 그 애의 짐을 싸고, 엄마의 폭탄 같은 연락을 받으며 혼자 두 명분의 이사를 준비해야 하는 게 너무 싫다.
“왜 울어? 사진이 기억에 안 나?”
“진짜 죽고 싶어......”
“몇 년 만의 재회에서 이게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일까.”
남자는 당황하지도 않고 안은 그 자세에서 나를 지탱한다. 이미 나는 온 몸에 힘이 다 풀려 있다.
“우리 여주가 왜 이렇게 힘들어 하는지 백현이는 정말 모르겠네.”
“...... .”
“어릴 땐 그렇게 잘만 웃더니.”
“...... .”
내가 흐느끼자 나를 달래려는 건지 남자는 다정한 목소리로 대꾸해준다. 아무래도 내 뒤의 남자는 사람을 잘못 본 것 같다. 생각해보니 사진 속 나도 좀 이상하다. 내가 맞나? 나는 한 번도
누군가의 앞에서 어렸을 때 웃은 적이 없다.
놓았던 정신을 부여잡고 일어나자 달큰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깥에선 두런두런 이야기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이 곳이 어딘지 몰랐지만 방 안에는 단 한 칸의 창문도 없었다. “깼나 보다!” “깼나 봐!”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귀를 강타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건 앳된 남자 아이 둘이었다.
“안녕하세요.”
“...... .”
“나는 기억력이 좋아요.”
대답하지 않았는데 한 명은 조잘조잘 말을 이어 나갔다. 남은 한 명은 작은 쟁반 위에 무언가를 담은 그릇을 들고 얌전히 서 있었다.
“나는 열 세 살이나 되었지만 0살일 적의 내 모습 역시 기억한답니다.”
“...... .”
“나처럼 인이도 그래요.”
얌전히 서 있던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내 볼에 입맞춘 순간을 나는 기억해요.”
이게 무슨 소리람. 마치 사랑 고백 같은 말에 황당스러운 표정을 짓자 말을 하던 아이는 긴장을 했는지 입술을 다시고 어... 어... 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아. 그러니까, 당신에게 내가 이제 사랑을 줄게요.”
어린 고백이었다. 그런 둘의 뒤에서 나타난 한 남자가 아이 한 명이 들고 있던 작은 쟁반을 뺏어 높이 들었다. 나랑 눈이 마주쳤다. 깊고 검은 눈.
“안녕. 내 약혼자.”
“...... .”
어렴풋한 기억조차 나지 않아서 더 원망스러웠다. 남자가 너무 근사했기 때문이었다. 첫 눈에 반한다면 이런 기분일지도 모른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