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ICO-오만과 편견
백현맘 씀
“김여주.”
그리고 변백현에게 손을 잡혀 나오자마자 머리를 누가 망치로 세게 두들기는 것 같았다. 자동문 옆 벽에 기대어 아직 불 붙이지 않은 담배를 손 끝으로 꾹꾹 누르고 있는 이는 오세훈이였기 때문이었다.
선배는 오세훈을 보고 고개를 까딱거렸다. 으으음, 나는 오세훈의 얼굴을 쳐다볼 수 없었다. 오세훈이 작게 조소했다. 그리고 성큼성큼 다가와서 내 손목을 잡은 선배의 손을 떼어냈다.
“이번이 두 번째야.”
“...... .”
“내 앞에서 손목 잡힌 채로 있는 거.”
오세훈이 선배를 보는 눈빛은 적개심으로 그득했다. 친했던 과거가 생각나지 않을만큼, 명백한 분노의 표식이었다. 곧 멱살이라도 잡을 것처럼 그르렁대는 그를 앞에 두고 선배는 마냥 태연했다. “너 존나 웃기네.”
“뭐가요.”
“이제 네 여친 챙기겠다 이거야?”
“이제가 아니라 원래부터ㅡ”
“그런데 이미 내가 침 발랐어.”
저 멀리서 우루루 몰려 있는 남자 무리들이 오세훈의 이름을 불렀다. 아마 그의 동기들인 것 같았다. 오세훈은 눈을 꽉 감았다 떴다. 짝다리를 짚고 선 그가 형형하게 선배를 쳐다봤다. 선배는 왼쪽으로 기울였던 고개를 똑바로 하고 다시 내 손목을, 아니 손을 잡아 왔다.
“가자.”
오세훈 이 새끼야! 안 오냐? 빨리 와! 우리 자리 옮겨! 멀리서 고래고래 악쓰듯 오세훈의 무리가 소리쳤다. 바보 같이 서 있는 오세훈을 뒤로 하고 선배는 내 손목을 잡고선 걸어 갔다. 내가 용기 내어 뒤를 돌아 보았을 때 오세훈은 무리를 향해 뒤돌아 가고 있었다. 어쩐지 허탈했다.
“어딜 봐.”
“아... 그냥요.”
잡힌 손은 굳게 닫혀 풀릴 조그마한 틈도 내어 주질 않았다. 내가 자꾸 그 잡힌 손을 쥐었다 폈다 하자 선배는 더 꽈악 손을 쥐어 왔다. 내가 고개를 들어 선배를 바라보자 그는 나를 보지도 않고 답했다. “왜.”
“이거......”
“그냥 가.”
선배는 집 앞에 도착해서야 내 손을 놓아줬다. 그리고 내 머리를 다감하게 쓰다듬었다. 이유 없이 부끄러워지는 기분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자 직접 무릎까지 굽혀 나랑 눈을 마주치려 들었다.
“잘 자.”
“네에......”
무시할 수 없을 정도의 호감 표시였다. 내가 종종걸음 쳐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까지, 선배는 다 보고 있었다. 내가 집 안에 들어가서 베란다로 밖의 동태를 살필 때 그가 앞동 비밀번호를 입력하는 뒷모습을 볼 수 있었기에 그런 줄 알았다.
어쩐지 평화롭다 혼자 생각했던 세계에 균열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뜨거운 물에 몸을 씻으며 그런 생각을 했다. 잠이 오지 않는 것 같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감싸고 디비디를 재생시켰다.
“能给他的回忆,我能给他的记忆,就只有那么多了。”
여자는 담담하게 대사를 읊었고, 자막으로는 그녀의 대사 번역을 읽었다. ‘나는 그에게 추억을 줄 수 있고, 나는 그에게 기억을 줄 수 있어. 단지 그것 뿐이야.’ 나는 소파에 무릎을 세워 앉았다. 젖은 수건이 물을 잔뜩 머금은 채 툭 떨어졌다. 축축한 머리가 목에 닿였다.
‘돌아와도 어쩌겠어. 변할 건 다 변했는데.’
‘내가 그녀를 필요로 할 때, 그녀가 가장 필요했을 때에 그녀는 어디 있었지?’
연기하는 극중 배우의 대사 하나하나를 짚어 읽어가며 영화를 보고 있었을 때였다. 초인종이 요란하게 울렸다. 인터폰으로 비치는 얼굴은 저녁에 만났던 오세훈이었다. 없는 척 가만히 있자 문을 쿵쿵쿵 두드렸다.
“안에 있는 거 다 알아.”
그 말에 불쾌한 기색을 보이며 문을 열었다. 얼굴만 보일 정도로 문을 열고 그를 마주하자 오세훈은 내게 무언가를 말하려 입술을 달싹거렸다.
“바쁜 몸이,”
먼저 입을 떼는 건 나다. 미운 말이 먼저 나간다. 요새 저 애와 나 사이 감정은 엉망진창이다. 사귀었던 긴 시간, 그리고 친구였던 그 두 배의 시간과는 비교도 안될 감정의 파국에 치달아서.
“여기까지 언제 또 행차하셨대.”
“변백현 형이랑 연애라도 하게?”
명백한 비꼼조의 질문 같은 비수와 이유를 도통 모르는 불안한 물음이 마주한다. 뒤를 돌아 본 오세훈의 얼굴은 놀랍도록 창백하다. 그가 피곤하다는 뜻이다.
“피곤해 보이는데 그냥 너네 집 가서 쉬어.”
“변백현 형이랑 뭐 하는 짓이냐고 물었잖아.”
“그냥 친한 선후배 사이에 그러는 것도 안돼? 너 이렇게 우리 집 오는 거 나 당황스러워.”
최근 오세훈에게 가장 길게 말했다. 오세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김여주. 내가 다 설명할게.” 뭘 설명하는데? 애가 타는 듯 그의 손이 주먹 쥐었다 펴진다. 나랑 비슷하다. 오랜 시간을 함께 했으니 당연할 수도 있는 거지만.
오세훈이 이렇게 나오니 더욱 화가 난다.
“그 날, 캠퍼스 벤치에서 우리는ㅡ”
“그게 어떻게 된 거나면ㅡ”
의미 없는 말로 서로의 대화를 끊어 가며.
“끝 난 거야.”
“그저 선후배 사이에 밥 한 번 먹은 것 뿐이야.”
기분이 더욱 나쁜 것은, 오세훈이 내 말을 들으려는 시도조차 안 한다는 것이다. “어쩌라고.” 그래서 더욱 빈정댔다. 그는 인내를 하려는 것인지 깊은 한숨을 내뱉으며 내게 말했다.
“일단 들어가서 얘기해.”
“네 집이야? 난 싫어.”
“김여주.”
이판사판이라는 생각이 일었다. 변백현과 함께 오세훈을 마주할 때보다 더욱 전투력이 상승하는 기분이었다. 내가 매섭게 몰아치자 오세훈은 이제 나를 구슬리는 쪽으로 태세를 바꾸는 것 같았다.
“여기서 고성방가 하긴 싫잖아. 너 언성도 높아지고.”
“...... .”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었다. 나는 알면서도 오세훈에게 ‘구슬림’ 당했다. 오세훈을 안으로 들이자 그는 실없는 소리를 나불거렸다. “이거 봤어? 내가 디비디 사서 너한테 선물한 거잖아.” 빛 아래에서 그를 보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오세훈은 지금 취한 상태다. 골 울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취해서 우리 집에 온 거다.
“들어가서 얘기하자며. 들어왔으니까 얘기 해.”
“아아, 그거.”
“...... .”
아무 말 않고 있자 오세훈은 입술을 꾹 말아 입꼬리를 아래로 주욱 내린다. 그가 속상할 때 주로 하는 표현이다.
“...진심으로 사과하는 사람에게 너무한 말 같지 않아?”
“뭐가 진심이야?”
“네게 신경 써주지 못했던 일들에 대한 사과를 내가 하려고 하잖아. 연락이 안됐던 건ㅡ”
화가 났다. 괘씸한 새끼. 오세훈에게 남아 있던 일말의 정은, 오늘 다 버리는 걸로 하자.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서.
“진심으로 사과한다고? 뭐가 진심인데? 네가 나를 홀로 두고 고립되게 했던 수많은 밤에 대해 사과를 할 거니? 아니면 이제 한 달을 넘겨버린 마지막 데이트에 대해 사과를 할 거야? 나를 두고 ‘그냥 친구’ 라고 했던 말을?! 도대체 뭘?”
한 번 뚫어진 입은 막힐 생각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되게 만들어 준 오세훈에게 감개무량할 정도로 나는 울며 악을 질렀다.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은 아니었는데, 아까 전만 해도 잡혀 있다고 생각했던 이성이 툭 끊기는 것만 같았다.
“세훈아. 나는 정말 화가 나. 너는 왜 이제 와서, 나를, 이럴 거면 좀 잘 하지 그랬어. 내가 너를 앞에 두고 오해를 하며 백현 선배의 손에 끌려 가는 것부터 좀 막지 그랬어!!!”
종국에 나는 에너지가 방전되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사랑하는 행위를 지속하게 만들었어야지.”
오세훈이 인기가 있고, 대학교에서 유명인으로 소문이 나 있고, 그가 바쁘다는 사실은 나와 그의 애정 전선에 애초부터 문제가 될 일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의 안일한 태도였다.
불타게 사랑할 때는 몰랐었고, 사랑하지 않았을 때는 나와 사랑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짚고 넘어가지 못한 그의 담 없는 태도. 자신의 바운더리를 사수하려는 의지가 없는 멍청한 늑대와 같은.
영화 속에서 이별하는 연인과 우리가 다를 바 없었다. 다만, 우리가 조금 더 현실적인 면에서 리얼했을 뿐이지. 오세훈은 얼빠진 표정으로 내 이름을 가만 불렀다.
“......여주야.”
“...... .”
“그래도 헤어지는 건 안돼.”
그의 반응이 생각보다 너무나도 강단 있는 고집이여서 되려 당황한 것은 나였다.
“나는 너를 사랑해. 김여주.”
“나는 이제 아니야.”
“우리는 안 헤어졌어, 아직.”
“아니. 우리는 이미 헤어졌어.”
“아니야.”
“이별은 쌍방 합의 하에 하는 게 아냐. 오세훈.”
감정의 싹도 감자의 싹처럼 싹둑 파내어 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벌벌 떨리는 발에 힘을 주고 나는 그에게 다가가 그를 밀었다. 현관으로, 점점 현관으로. 그는 밀려 나면서도 부정했다. 내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오세훈은 내 얼굴에 묻은 물기들을 손으로 서투르게 닦았다. 나는 얼굴을 대차게 흔들었다.
“만지지 마.”
“...... .”
오세훈은 순순히 조던을 신었다. 취해서 그가 그랬던 건지, 그의 몸을 미는 내 손에는 힘이 없었으나 그는 고분하게 밀려났다. 나는 머리를 통하지 않고 나오는 말을 그대로 뱉어냈다.
“앞으로 너랑 이런 관계로 얽힐 일이 없길 바래.”
“...... .”
“어렸을 때부터 친했다는 관계가 이렇게 발목 잡을 줄은 몰랐는데, 넌 정말 끔찍해.”
저항하는 내 손길에 반항 않는 오세훈의 모습도 어쩜 성격을 닮았다. 나는 깊은 수렁에 빠져야만 했다. 오세훈을 완전히 잊을 것인가, 라는 절벽을 앞에 두고 번지 점프를 하는 사람이 된 것처럼.
“여주야. 네가 잘 모르는 걸 수도 있어.”
“...... .”
“변명 같은 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
“...... .”
“그래도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변하지 않아.”
오세훈이 현관을 나서기 전 했던 말을 수백 번 되새기며.
두남자
화창한 주말이었다. 밤과 새벽 사이에 큰 싸움을 한 나를 부정이라도 하는 듯 하늘은 맑았다. 눈 밑이 검었다. 나에게는 고질병이 있다. 머릿속이 복잡하면 잠을 회피한다. 토요일 낮 열두 시가 넘어서야 나는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혹시라도 미연의 사고를 대비해 자기 전 무음 모드를 해제해 놓은 휴대전화가 벨소리를 내며 울렸다. “여보세요... 네. 은수 언니.”
은수 언니의 목소리가 절절했다. 지금 나름 멀리 부산까지 여행을 나왔는데, 꼭 학교에 가서 알아볼 자료가 있다며 내게 부탁했다. 딱히 어려운 일도 아니라 쉽게 수긍하자 언니는 감격에 차 내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평소 입던 옷은 주말이라고 다 세탁기에 넣어버린 탓에 평소 부담스러워 잘 입지 않는 옷밖에 남지 않았다. 매일 묶던 머리는 감은 머리카락이 다 마르지 않아 묶을 수 없었다.
그래서, 의도치 않게 꾸민 꼴이 되어 버렸다.
선배에게 문자를 보낼까 했으나 되려 동행하자는 제안이 돌아올까봐 참았다. 나야 좋은데, 선배가 귀찮을까봐. 선배는 딱히 많이 내게 연락을 취하진 않았지만 걱정 되는 맘을 양껏 담은 문자 두 통을 보내 왔다. -자냐?- -토요일이라고 잠에 미쳤구나. 일어나서 연락해.-
그렇게 간 오세훈에게선 연락 한 통 없었다.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내가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라고 믿었다. 문을 열고 집을 나섰다. 쨍한 햇빛이 기분 나쁘지 않게 내리쬐었다.
학교에 도착하자 언니가 부탁한 일은 쉽게 할 수 있었다. 도서관은 주말에도 개방 되어 있어 이왕 온 거 도서관에서 책이랑 디비디를 빌려 가자고 생각하고 걸음을 옮겼다. “김여주.” 뒤에서 오세훈이 나를 불렀다.
오세훈의 뒷모습을 보고 도서관으로 도망친 것이 아니라, 그저 책을 빌리러 가기 위함이었을 뿐이다. 이도 저도 아닌 사이였을 적보다 훨씬 더 잦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 같다. 하필이면, 하필이면 이 때에.
“학교 왜 왔어.”
“...... .”
“말도 안 할거야?”
다정스레 물어오는 목소리가 익숙했다. 오세훈은 인상이 굉장히 험하게 생긴 것에 반해 말하는 투는 조곤조곤했다. 언제 여기까지 온 건지 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는데 뚜벅 뚜벅 걸어 와 내 어깨를 잡아 돌렸다.
“영화 보러 가자.”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제안은 터무니가 없어도 정말 없었다. “내가 왜?” 정말로 황당해서 묻자 오세훈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가정과 결혼.”
“...... .”
“생각해보니 우리 ‘예비 부부’더라고.”
고약한 강의. 나는 그 강의에서 최하점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세훈은 말할 틈도 없이 내 핸드폰을 요구했다. “네 핸드폰 좀 빌려 줘.”
“왜?”
“왜라는 말밖에 할 줄 몰라? 나 핸드폰 작살 났어. 수리 맡겼는데.”
어쩐지 멍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럼 여태껏 연락이 없었던 게... 그렇다고 흔들리지는 않았다. 정말, 정말이다.
“나는 가정과 결혼 강의 무조건 A+ 받을 거야.”
“...... .”
“그러니까 우린 비즈니스적으로 만나는 거라고.”
“...... .”
“그치만 우린 ‘예비 부부’고.”
나는 아직 널 많이 좋아해. 그가 뻔뻔하게 물 흐르듯 말하는 걸 듣고만 있자니 골치가 아팠다. 아무래도 나는 웃는 얼굴에 정말로 침을 못 뱉는 사람인 것 같다. 몇 년간을 만나온 오세훈이지만 일방적(나) 통보로 헤어진 연인의 관계로 대면하는 건 또 한 번도 없었던 일이라 그의 모습이 상당히 이질적이었다.
“...너랑 이런 식으로 만나기 싫다고 했잖아.”
“......어. 이건 그냥 과제야.”
“...... .”
“내가 어떤 감정으로 너를 대하는 것과는 별개로 너는 과제를 한다고 생각해도 돼.”
“...... .”
“어차피, 이도 저도 아니고 마음 움직이는 건 내 몫이니까. 오늘 예쁘다.”
“웃기지 마. 난 그럴 마음ㅡ”
“네가 알 때까지 계속 말 할 거야. 나는 널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 없었어.”
세훈이 사진 두 장 넣기 성공!
오늘 1일 2글이네여. 오늘 00시 5분에 하나 업데이트 했으니까...!
(뿌듯) 이유는 제가 방학을 했쥼니다.
읽어주시는... 열 분을 웃도는 분들 모두 쟈랑함미다.
두 남자는 말 그대로 두 남자에 관한 이야김니다. 지독한 클리셰와 갈등과 러부라인만 있을 예정이죠.
회를 거듭할수록 사족이 길어지는 것 같네욤.
감쟈함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