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 아침이 좀 조용하게 지나간다 했더니, 그게 폭풍 전야 였다는 것을 깨달은 건 불행히도 한참 뒤였다. 아침을 맛있게 먹고, 평화롭게 귤 하나를 까들고 방으로 사라지려는 나를 붙잡은 건 화장실에서 들려온 박찬열의 외마디 비명소리였다. 오랜만에 듣는 박찬열의 하이톤에 집안 모든 이의 귀가 쫑긋 섰다.
"아!!!!! 누가 면도기 썼어!!!"
오 싸우겠다!!! 신난다!!!!!!! 좋은 구경을 놓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나는 이미 바글대고 있는 화장실 문에 내 얼굴을 떡하니 들이밀었다.
"왜 왜 뭔데"
"몰라 박찬열 저거 화장실 들어가더니 갑자기 저 지랄"
옆에서 도경수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와 얘는 아침부터 이렇게 시크하고 난리임... 형제들이 궁금해하며 묻는 말에도 박찬열은 그저 얼 빠진 사람처럼 넋을 놓고 자신의 면도기를 애잔하게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셜록 홈즈 코스프레를 하며 화장실 안으로 잠입한 김종대가 박찬열의 손에서 면도기를 빼앗아 들고 한참 관찰을 하는 듯 하더니... 이내, 면도기를 화장실 바닥에 철푸덕 떨어트린다. 고이 접어 나빌레라. 그리고 이어지는 허탈한 목소리.
"...누가 이걸로 다리털 밀었냐."
음..? 이어지는 김종대의 말에 나는 화장실 안으로 비집고 들어가던 것을 순간적으로 멈춰야 했다. 잠깐 기억을 되돌려 보자면...
어제 저녁. 형제들은 약속이니, 일이니, 과제니 각자의 핑계들을 대며 집을 빠져 나갔고, 집에는 나와 레이 오빠만이 남아 있었다.
"우와. 오빠 집 진짜 조용하다. 그치?"
"그러게. 이게 얼마만의 평양이야~"
...응? 평양? Pyeong Yang? 3.8 선 넘고 비무장지대 건너 있는 그 평양?
"평안?"
"아니~ 평양! 평! 냥!"
그래 뭐. 오빠 인생은 오빠가 살아가는 거니까 알아서 하겠지.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는 레이 오빠에게 애써 미소를 지어주고는 거실 쇼파에 쭈욱 드리 누웠다. 레이 오빠는 오랜 만의 '평양' 속에서 피아노 연습을 해야겠다며 피아노가 있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거실에 홀로 남은 나는 결국 잉여의 상징인 '발가락으로 TV 켜기' 스킬을 시전했다.
3년 전 쯤 했을 법한 무한도전 재방송을 보면서 낄낄대던 도중, 내 눈에 들어온 것은 나의 고운 살결 위로 뽀송 뽀송...은 아니고 징그럽게 돋아난 새싹들. 그러고 보니 제모 안 한지 꽤 됐구나. 집이 조용할 때 집중해서 제모나 해야 겠다 싶어서 서랍 속에 쳐박아 둔 면도기를 뒤지기 시작했다. 그런데...없다? 원체 복잡한 방에서 결국 면도기를 찾는 데에 실패한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화장실로 나왔다. 그 때 구원처럼 눈 앞에 짠 하고 파란 면도기 하나가 나타난 것이었다.
"오빠들 껀가..? 에라. 알게 뭐람."
그리고 신나게 새싹들을 밀어 제꼈지, 아마...?
거기까지 떠올린 나는 머리 속으로 도주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아놔. 그게 내 털인지 알 수 있을리가 없어. DNA 검사를 해볼 수도 없고. 근데 애초에 다리털은 어떻게 감정한거지? 분명히 깨끗하게 탈탈 털었는데... 일단 이 집을 떠야겠다. 지금 박찬열의 눈빛은 정말 살인을 저질러도 아무 이상할 것 없을 만큼 살벌했으니까...
"지금 이 시간부터 아무도 밖에 못 나가."
"다들 거실으로 집합."
s..ssibal. 단호박을 껍질째 섭취한 듯 단호한 박찬열의 말에 결국 주말 아침, 형제들이 옹기종기 거실에 모였다. 똥 마려운 개 마냥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나를 보더니 옆에 앉아 있던 루한 오빠가 내 어깨를 잡았다.
"ㅇㅇ. 어디 아파? 왜 이렇게 가만히 못 있어?"
"어? 아, 아니. 오빠. 나 다리에 쥐나서."
근데 그게 그렇게 잘못한 건가? 같은 털이고, 같은 면도긴데. 좀 쓸 수도 있지. 나 참.
"오..오빠. 근데, 오빠 면도기로 누가 다리털 밀면 어떨 거 같애?"
"음.."
잠시 생각하는 듯 하던 오빠가 해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사람 털 다 밀어버릴거야. 눈썹까지."
...아. 그렇구나. jot 됐네? 아니야. 침착해. 침착하자 김징어. 저 멍청이들이 알아낼 수 있을리가 없어. 분명 지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다가...
"야. 이거 아무래도 여자 같은데?"
"어 맞아. 이게 뭔가...두께도 좀 다르고 느낌도 좀 다르고."
"아 ssibal."
머리를 맞대고 이러느니 저러느니 한 편의 탐정 수사극을 펼치고 있는 김종대와 변백현의 옆에서 찰진 욕설을 내뱉는 나머지 형제들이었다. 그러니까... 나 지금 대역죄인 된 거 맞져? 걸리면 jot 되는 거 맞져...?
"아.. 하..하. 야 그런 게 어딨냐. 어? 사람마다 다 그..느낌이야 다를 수 있는거지!"
"그런가?"
"그렇긴 하네."
오. 의외로 쉽게...
"아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여자야."
"범인은 여자다."
"우리 집안에 여자는..."
"여자가 없는데?"
"ssibsae"
아나. 그럴 리가 없잖아. 그 순간 ,어떻게든 빠져 나가기 위해 머리를 굴리는 나에게 직격탄을 날리는 레이 오빠였다.
"어. 징어. 어제 저녁에 면도기 쓰지 아났어~?"
Ah...오빠. 그렇게 천사같이 웃는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말라그여...그렇게 내 영혼은 8:45 헤븐.
"아..아나. 김징어..디질래?"
"나 쟤 다리털 민 걸로 면도 할 뻔 했자나 sibal"
죄..죄송.. 죄가 있으니 맞받아치지도 못하고 그저 고개만 푹 떨구고 있는 내게 박찬열과 변백현이 쏘아붙였다. 띱때들ㅠㅠ.. 지들은 뭐 얼마나 깨끗하다고!! 뭐라고 한 마디도 할라치면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는 두 마리 비글과, 그 옆에서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비글 대장. 그리고 나를 구해주고자 하는 의향이 전.혀. 없어 보이는 나머지 형제들. 결국 나는 내 손으로 그 면도기를 쓰레기통으로 버리고 씩씩대며 방에 들어와버렸다.
"아나..다 똑같은 털 아님? 존나 과민반응이야ㅠㅠㅠㅠㅠㅠㅠ"
똑. 똑.
한참을 그렇게 침대에 엎어져 데굴거리고 있는데 노크소리가 들리더니 박찬열이 문을 빼꼼 열고 들어왔다. 확 짜증이 나버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얼굴도 쳐다보지 않고 있자 박찬열이 가만히 옆으로 오더니 내 어깨를 툭툭 건들인다.
"아나. 미안하다고 했잖아!!! 뭘 더 바래!!"
잔뜩 날이 선 말투로 내뱉자 헛기침을 큼큼 하더니...
"아니. 김징어. 야. 내가 심했다. 미안."
...응? 웟 더? 박찬열은 그 말을 하자마자 시뻘개진 얼굴로 방을 후닥닥 나가버렸고, 나는 책상 위에 놓인 무언가를 발견했다. 응? 예전에는 이런 거 없었는데... 뭐지?
면도기(feat.제모크림).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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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잔 뭔가 단어하나에 너무 집착하는경향 있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