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아빠 20 (完)
(부제; 완전한 행복은)
계절이, 네 번 흘렀다. 평생 오지 않을 것 같던 스무 살을 어느새 앞두고 있었다. 수능은, 그럭저럭 친 것 같았다. 사실 수시에 올인하기로 하기는 했는데,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입시는 정말 모르는 것이니까. 아빠와 지민 삼촌은 수능을 망쳐도 자기들이 데려갈테니 걱정말라며 속 편한 소리만 해대었다. 뭐, 사실 아빠한테 그럭저럭 친 것 같다고 했는데 가채점을 해보니 성적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건 언니만 아는 비밀이었다. 아, 아빠와 만나는 꽃집 여자는 어느새 꽃집 언니라는 호칭으로 불리고 있었다. 아빠랑 무려 다섯 살 차이. 사실 처음에 나이를 들었을 때는 아빠가 도둑놈이라며 아빠를 밉지 않게 노려봤는데, 만나다 보면 아빠가 왜 언니랑 연애를 시작했는지 알 것 같다.
하여튼 수능도 끝나고, 알바나 구해볼까, 하고 슬슬 고민을 하는데 아빠는 대뜸 아빠네 회사에서 인턴도 아닌, 무슨 잡일 같은 걸 하라는 거다. 아빠 방에 책상을 놓아줄테니까 거기서 하라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건 아니다 싶어서 나랑 남준이 삼촌이랑 극구 반대를 하고 말리자 아빠는 입술을 내밀곤 툴툴거리면서도 금세 수긍하더라. 나는 그래도 나름 카페나, 뭐... 그런 곳에서 첫 알바를 하고 싶다는 로망 아닌 로망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빠는 알바는 무슨 알바냐며 극구 반대를 했지만 결국 내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사실 알바를 하게 된 곳이 꽃집 언니의 꽃집이었기 때문에. 간만에 집에 놀러 온 언니랑 여자끼리 놀러갈 계획을 세우고 있다 언니는 대뜸 자기네 꽃집에서 알바할 생각은 없냐고 넌지시 물어왔다. 꽃집이요? 내 물음에 언니는 고개를 끄덕이곤 혼자 있으니까 너무 심심하다며 말동무도 하고, 자기 일도 도와달라며, 보수는 넉넉하게 주겠다고 말했다. 아빠는 그 정도면 괜찮을 것 같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나도 딱히 나쁜 조건은 아닌 것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하여 학교에서 오전 수업이 끝나면 곧바로 언니네 꽃집으로 향해 옷을 갈아입고는 일을 하게 되었다. 언니가 귀여운 노란색 앞치마도 사주고, 친절히 일도 가르쳐주는데 사실 말이 알바지 거의 시간 떼우기에 가깝다. 거의 언니가 일을 하니까 나는 옆에서 청소와 같은 자지구레한 것들을 하고, 아니면 뭐 정리나 손님 맞이 같은 것? 그래도 며칠 일하다보니 나름 꽃 이름 몇 개 정도는 외워서 추천해줄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언니와 코코아 한 잔씩 들고 수다나 떠나 했는데, 연말이라고 사람이 도통 줄어들지를 않는다. 언니는 꽃다발을 만드느라 바쁘고, 나는 꽃을 소개하고 가져다주느라 바쁘고. 겨우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이 오자 언니는 대뜸 가게 문을 CLOSE로 만들고는 블라인드 비스무리한 것까지 전부 내리고는 다시 돌아온다. 바빠죽겠어. 투덜거리는 언니는 몸이 뻐근한지 기지개를 켜고는 자리에 앉는다. 문 안 열 걸. 후회된다. 언니의 말에 작게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오늘 처음으로 알바하는 기분이었어요. 내 말에 언니는 뭐? 하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게 얼마나 꿀알반데... 변명하듯 웅얼거리는 언니의 말을 뒤로 하고는 코코아를 한 입 마셨다. 달다.
언니는 그냥 둘이서 빈둥거리다 집에 가자며 아예 앞치마까지 집어던진다. 내가 대답을 망설이니 시급에서 안 깐다며 달큰한 유혹을 해온다. 음, 괜찮겠지? 잠시 고민하다 나도 앞치마를 벗어던졌다. 가만히 의자에 늘어져 가게를 둘러보는데 아무리 봐도 내 취향이다. 잔뜩 널린 꽃들만 아니라면 그냥 집이나 아기자기한 카페라고 해도 믿을 정도. 밝은 노란색과 흰색으로 잔뜩 채워져있는 벽들 앞에 아기자기한 소품들이 놓여있고, 꽃들을 담은 통 마저도 하얗고 노랗다. 딱 언니 취향에 맞게 꾸며진 가게는 내 취향이기도 하다. 꿀알바긴 하지. 잠시 생각하다 연락 하나 없는 휴대폰을 힐끔 보고는 다시 언니와 의미없는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아, 오늘은 그냥 퇴근하자. 얼추 다섯시가 다 되어가자 언니는 대뜸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과 가방을 챙기기 시작한다. 이런 날에는 여기 있을 게 아니야. 그냥 집이나 가 있자. 귤이라도 까먹어야겠어. 패기 넘치는 언니의 말에 덩달아 일어나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잠시 겉옷을 입고 잠시 고민하다 언니를 부르니 언니는 응? 하고 답한다. 언니, 미안한데 꽃다발 하나만 만들어주면 안 돼요? 내 부탁에 잠시 망설이던 언니는 뭐,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인다.
언니가 금세 만들어낸 파란 안개꽃다발을 가지고 가게 밖으로 나오는데 저 멀리 누군가 서성이는 게 보인다. 아빠...?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언니는 나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젓는다. 오늘 일찍 마친다는 말 없었지? 언니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자 나한테도 그랬는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냥 서있는 건가? 별 생각 없이 언니의 팔짱을 끼고는 오늘 아빠한테 뭐 사달라고 할까요, 와 같은 쓸 데 없는 얘기를 하며 지나치려는데 갑자기 언니는 어, 하고는 나와의 팔짱을 풀어버린다. 멀뚱히 언니를 보자 언니는 어색하게 웃고는 나 먼저 갈게, 하며 내 등을 떠민다. 서성이는 인영 쪽으로. 어, 언니. 당황한 내가 손을 버둥거리자 언니는 잔뜩 웃음기 서린 목소리로 이따 봐, 집은 먼저 가 있을게. 하며 저 멀리로 사라진다.
"야."
"...네? 어?"
"실망이다."
멀어지는 언니만 멍하게 보는데 대뜸 귓가에 야, 하는 낮은 목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뒤로 돌자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삐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정국이가 보인다. 어?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자 정국이는 잔뜩 골난 목소리로 실망이라며, 어떻게 남자친구도 못 알아보냐며 툴툴거리기 시작한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내 물음에 정국이는 어이없다는 듯 웃고는 할 말이 그것 밖에 없냐며 어이없다는 듯 말을 한다.
아니, 그게, 너무 반가워서 그러지. 대뜸 정국이를 끌어안자 정국이는 내 등을 천천히 토닥이며 말은 잘 한다고 투덜거린다. 솔직히, 아니, 잘난 남자친구 얼굴 보기가 좀 힘들어? 내 말에 정국이는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며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온다. 나도 보고 싶었어. 다른 말을 하는 정국이 팔을 아프지 않게 툭, 치자 정국이는 네 마음 다 알아, 하며 능글맞게 말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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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는 열 아홉이 되던 겨울, 태릉선수촌으로 들어갔다. 국대로 선발되어서 올림픽을 준비하기 위해. 처음에는 정국이가 아마 우리 연락도 자주 못 할 거고, 얼굴도 못 볼 거고... 휴가도, 외출도 언제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며 헤어지자는 말을 돌려서 말했는데 그걸 싫다고 울고 불고 매달려 겨우 안 헤어졌다. 생각해보면 날 그렇게 오래 짝사랑했다는 애가 얼굴 좀 못 보는 것 가지고 헤어지자는 게 좀 이상하기는 했지만... 하여튼 정국이가 선수촌에 들어가던 날 나도 울었고, 아빠도 울었고, 정국이도 울었다.
그렇게 홀연히 선수촌으로 들어간 정국이가 했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정말 연락 한 번 받을 수가 없었다. 정말로 그냥 뚝, 끊긴 연락에 내가 정국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낸 것은 아닌지까지 진지하게 고민할 정도였으니까, 뭐 말 다했다. 하여튼 몇 달이 지나서야 온 연락은, 내가 아닌 정국이 부모님을 통해서였다. 본인들도 얼마 하지 못했다며, 아주 보고 싶어하더라며,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내게 정국이 소식을 전해주시던 정국이 어머니와의 통화가 끝나고, 나는 정말 창피하게도 울었다. 수능특강에 빼곡하게 적힌 수학 공식들 위로 툭, 툭 떨어지는 눈물은 흐리게 공식들을 지워냈다. 한 두방울씩 떨어지던 눈물은 볼을 타고 흘러 줄기를 만들어냈고, 어느새 입에서는 끙끙 앓는 듯, 그런 신기한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가만히 거실에서 언니와 통화를 하고 있던 아빠는 내 목소리를 들었는지 급하게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언니에게 이따 전화할게요, 하고는 곧바로 통화를 끊었다.
우리 딸, 왜 그래. 아빠의 다정한 물음에 창피한 줄도 모르고 아빠의 허리를 끌어안고는 엉엉 울었다. 정국이가, 정국이, 보고 싶어서, 어떡해요. 웅얼웅얼 내뱉는 내 말에 아빠는 가만히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셨다. 정국이도 많이 보고 싶을 거야. 우리 딸 뚝 하고. 한참을 아빠 품에 안겨있다 겨우 빠져나와 붉어진 얼굴로 연신 눈물을 닦아냈다. 아빠는 작게 한숨을 쉬더니 너무 힘들면 말하라며, 머리를 쓰다듬고는 곧 방에서 나갔다. 다시 겨우 마음을 잡고 샤프를 잡아 공부를 하려해도 흐릿해진 공식은 도무지 떠오르지가 않았다. 결국, 정국이 핑계로 공부를 던져두고는 바람이나 쐬러 갔다 오겠다며 후드 집업을 들었다. 아빠는 잔뜩 걱정어린 표정을 지었지만 애써 괜찮다며 아빠에게 작게 웃어보였다. 아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동네 구석구석을 돌며 정국이와 함께 갔던 곳들을 되짚었다.
그리고 정확하게 일주일 뒤, 정국이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빠는 이른 아침에 데이트하러 나가고, 모처럼 집에는 혼자니 독서실은 무슨, 그냥 집에서 여유롭게 공부나 하자는 생각에 늦은 점심을 챙겨먹고는 침대에 드러누워 있었다. 고3이 이렇게 힘든 거구나. 하는 것도 없으면서 괜히 지치는 기분에 가만히 천장이나 올려다보는 참이었다. 느닷없이 울리는 휴대폰의 진동소리에 깜짝 놀라 확인하니 낯선 번호들이 찍혀있는 게 아니겠는가. 잠시 보이스 피싱을 고민하다 조심히 전화를 받으니 여보세요, 하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전정국?'
'잘 지냈어?'
분명 정국이 목소리를 들으면 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신기하게도 눈물이 나지 않았다. 음... 응. 잠시 뜸을 들이다 작게 답을 하자 정국이가 작게 웃는 목소리가 들렸다. 잠시 멍하게 있다 시간이 없다는 정국이의 말에 정신없이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텃세는 없냐고, 훈련은 안 힘드냐고, 밥은 잘 챙겨먹고 있냐고, 힘들지는 않냐고, 다친 곳은 없냐고.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내 물음에도 정국이는 응, 없어, 안 힘들어, 먹고 있어, 안 힘들어, 없어, 하며 차분하게 답을 했다. 한참 내 말을 듣던 정국이는 곧 아, 하고 작은 목소리를 내더니 진짜 가야겠다, 하며 퍽 아쉬운 소리를 내었다. 아, 응... 괜히 서글퍼져 작게 답하자 정국이는 잠시 답이 없다 딱 한마디를 내뱉었다. 내게 전화를 걸어 내 물음에 답하지 않고, 자신이 낸 딱 한 마디. 많이 보고 싶어. 다정한 목소리를 낸 정국이는 다음을 기약하며 전화를 끊었다.
정국이가 다시 전화를 한 것은 아마도, 춘추복에서 하복으로 넘어가는 시점이었나. 아무래도 점점 더 아이들이 예민해질 시기였다. 그냥 그저 그런 날, 독서실을 갔다가 얼른 집에 오라는 아빠의 성화에 혼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아, 정국이가 날 데리러 오던 시절도 있었지. 혼자 생각하며 괜히 흐뭇해하던 차에 갑자기 휴대폰 벨소리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화했는데... 아빠인가? 의아하게 휴대폰을 들여다보자 아니나 다를까 낯선 번호. 홀린 듯 전화를 받자 익숙한 정국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뭐해. 정국이의 물음에 집 가는 중, 하고 답하니 정국이는 씁, 하는 소리를 내고는 괜히 웃음을 터뜨린다.
나, 국대 선발 됐어. 들뜬 듯 작은 목소리로 내게 소식을 전하는 정국이의 목소리가 간질간질해서, 나는 자꾸만 웃음이 삐져나올 것 같았다. 잘 됐다. 내 말에 정국이는 한참 답이 없다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했다. 내가 올림픽 금메달 꼭 네 목에 걸어준다고 했던 거 기억나지, 그거 조만간이야. 정국이는 괜히 쑥쓰러운 듯 작게 웃고는 아직 부모님한테도 말 안 한 거라며 내게 조심히 말을 해왔다. 제 부모님이 알면 서운해 하실 거라고. 그런 정국이에게 알겠다고, 아무쪼록 몸 관리 잘하라고, 보고 싶다고 말하고는 통화를 끊었다.
그리고 무더운 여름 보충 기간, 정국이의 생애 첫 올림픽이 시작되었고 우리 반, 아니 우리 학교의 모든 관심은 정국이에게로 향했다. 아이들은 나 몰래 정국이가 금메달을 딸지 말지 내기를 걸곤 했다. 가끔 수영이가 그런 짓 하지 말라며 타박을 하곤 했지만 글쎄,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것 아닌가. 사실 나는 정국이가 이긴다에 내기를 건 적도 있었다. 하여튼 무난하게 결승에 오른 정국이는 꽤 치열한 접전 끝에 마침내 금메달을 따내었다. 학교에서 허락을 받고 우리 반은 특별히 경기를 시청 중이었는데, 이상하게도 정국이가 금메달이 확실시 되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내 짝지이기도 한 정국이가 없는 학교는 너무나도 공허해서였을까. 내 옆자리의 주인이 호구를 벗고 머리를 탈탈 터는 것을 보면서도 전혀 현실성이 없었다. 아, 저 아이의 꿈이 드디어 이루어지는구나, 하는 쓸 데 없는 생각만 머릿속에 쌓였다.
눈물이 그렁그렁해 정국이를 바라보는 것은 금방 끝났다. 카메라를 발견한 정국이가 자기야, 하고 입모양을 만들더니 곧바로 손뽀뽀를 날렸기 때문에. 동시에 아이들의 시선은 모두 나로 향했고, 나는 붉어진 얼굴을 식히려 손부채질을 하기에 급급했다. 진짜 미친놈. 좀 달달해질만 하면 산통을 깨는 정국이에 헛웃음을 짓다 결국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리고 말았다.
곧바로 정국이의 메달 수여식이 이뤄졌다. 누구보다 단상의 높은 곳에 선 정국이는 한참 동안 금메달을 만지작거렸다. 괜히 입에 깨물어보기도 하고, 제 볼에 대어보기도 하면서. 그리고 애국가가 흘러나왔을 때, 정국이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무도 몰랐겠지만 나는 알았다. 정국이는 눈물이 날 것 같으면 한 쪽 눈을 찡긋거렸으니까. 반 아이들도 한참 떠들다 애국가가 나오는 순간에는 짠 것처럼 조용히 앉아있었다.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정국이가, 자랑스러웠을까.
정국이의 메달 수여식이 끝나자마자 정국이 인터뷰 영상이 나오기 시작했다. 티비를 끄려는 선생님을 간신히 아이들이 설득하고는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활짝 웃고 있는 여자 아나운서 하나와 금메달을 목에 걸고는 생글거리는 정국이. 와, 쟤는 새삼 잘 생겼다. 아이들이 수군덕거리는 소리를 뒤로 하고 정국이에 집중했다. 금메달 딴 소감이 어떻냐, 와 같은 틀에 박힌 질문을 하던 리포터는 갑작스레 그럼 전정국 선수, 이상형은 어떻게 되나요? 하고 묻는다. 괜히 침을 꿀꺽 삼키고는 화면을 뚫어지게 보는데 정국이는 작게 웃고는 입을 연다.
그냥, 눈치도 없구요. 머리 쓰다듬어주는 거 좋아하고, 제가 파랑색 호구 쓰는 거 좋아하고... 항상 제 경기 보러 와주는 사람이요.
카메라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정국이는 그대로 작게 웃는다. 분명 우리는 멀리 떨어져있는데, 그 웃음이 내게만 지어주던 웃음과 여실히 닮아있어서, 나는 또 다시 눈물을 흘릴 것 같다. 정국이의 말에 리포터는 와, 잘생긴 얼굴에, 이제 여성 팬 늘어나는 소리가 들리는데요? 경기장도 항상 채워져 있을 것 같죠, 하고 말해온다. 정국이는 또 능청스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그럼 마지막으로 보고 싶은 사람이나, 하고 싶은 말 한 번 해볼까요?"
"어...네. 일단 금메달을 따게 되어서 너무 영광이고, 앞으로도 더 열심히 노력하는 선수가 되겠구요. 부모님은 어젯밤에 전화해서 실컷 보고 싶다고, 안부 전해드렸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싶어요. 지금 학교에서 야자하고 있을 것 같은데, 내 짝지 많이 보고 싶고. 금방 한국 가서 금메달 걸어줄테니까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이거 네 거야."
정국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또 내 얼굴은 잔뜩 붉어지고, 아이들은 결혼까지 해야겠다며 나를 놀리기 시작한다. 리포터는 당황한 얼굴로 수습하기에 바쁘고, 정국이는 그런 리포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 마디 더 보탠다. 아, 메달 따고 내 마음 보낸 거 봤지? 그리고 그대로 우리반은 초토화가 된다.
며칠 뒤 정국이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휴가를 따내어 집으로 돌아왔고, 그 날 밤 야자를 마친 나를 친히 데리러도 왔다. 정국이와 집까지 천천히 걸어가며 그 동안 못 했던 얘기들도 나누었고, 헤어지기 전에는 정국이가 주머니에서 금메달을 주섬주섬 꺼내 정말로 내게 걸어주었다. 고백하던 날 같다. 정국이는 말간 웃음을 지으며 나를 내려다보았고, 그런 정국이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주었다. 그리고, 음, 우리는 그 날 첫키스도 했다. 응,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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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몇 개월 전의 일을 생각하다 어깨를 감싸오는 정국이의 손에 정신을 차렸다. 집 가자, 데려다 줄게. 정국이와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는데 갑자기 아빠에게서 연락이 온다. 정국이 왔다며, 오늘은 우리 둘이 놀게. 정국이랑 데이트하고 들어와. 오늘은 통금 없음. 대신 외박 금지. 정국이도 옆에서 확인하고는 입꼬리를 한껏 올린다. 밥 먹고, 데이트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열 두시 땡하면 집 가자. 술은... 내일 마셔도 되니까.
정국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정국이는 내 어깨를 감쌌던 손을 내려 내 손을 꼭 잡아온다. 천천히 걸어가며 뭘 먹을지 고민하자 정국이는 먹고 싶었던 게 정말 많았다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린다. 오늘 다 먹자. 살살 달래는 내 말에 정국이는 고개를 끄덕이다 아, 하고 입을 연다. 나 이제 휴대폰 쓸 수 있어. 정국이의 말에 진짜? 하고 고개를 들자 정국이는 가만히 날 내려보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낸다. 이제 훈련 끝나면 카톡도 하고, 쉬는 날에는 전화도 하고, 다 할 수 있어. 정국이의 말에 잘 됐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정국이도 응, 하고는 다시 제 주머니에 휴대폰을 집어넣는다.
아, 그 때 물어보려고 했는데, 너 나 메달 딸 때 봤어? 난데없는 정국이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다 괜히 골려주고 싶은 마음에 눈꼬리를 한껏 늘어뜨려 울상을 짓자 정국이는 아, 그래...? 하고 표정이 약간 굳는다. 아니, 굳는다기 보다는 실망했는데 티는 내고 싶지 않아 하는, 그런 표정. 조금 더 놀릴려다 응, 봤지, 하며 손으로 뽀뽀를 날리자 정국이 얼굴이 잔뜩 붉어진다. 아, 진짜 흑역사. 정국이는 툴툴거리지만 사실 정국이는 그것 때문에 팬이 너무 많아졌다. 그래도 내 존재만 알지 내가 정확하게 몰라서 다행이다. 하긴, 그래도 정국이 연애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아, 배고파, 얼른 가자. 정국이는 부러 발걸음을 빨리 하며 맞잡은 손에 힘을 준다. 그대로 딸려가자 정국이는 붉어진 귀 끝을 만지작거린다. 일단 저기부터. 정국이는 작게 턱짓을 하고는 또 다시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다. 아, 같이 좀 가. 빠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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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국이랑 밥 맛있게 먹고, 데이트까지 하고는 데려다주겠다는 정국이의 말에 사이좋게 집으로 향했다. 정국이는 맞잡은 손을 앞, 뒤로 흔들며 그 동안 하고 싶었던 게 얼마나 많았는지 아냐면서 끊임없이 쫑알거린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주저리주저리 말을 꺼내놓던 정국이는 그대로 자리에 멈춰서 시간을 확인하고는 이제 밀린 데이트도 자주 하자고 말을 끝낸다. 그새 도착한 우리 집 앞에서 가만히 정국이를 올려보자 정국이는 휴대폰을 꺼내 다시 시간을 확인하고는 내게 확인시켜준다. 12시 3분. 그대로 정국이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는 나와 마주 선다. 아, 완벽하게 행복하다.
스무살 축하해.
나긋한 정국이의 목소리에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너도 축하해. 내 말에 정국이는 내 머리를 몇 번 쓰다듬다 그대로 내 입에 짧게 입술을 맞대었다 떨어진다. 아주 잠시였지만 살짝 맞닿은 부분이 뜨거워 입술을 만지작거리자 정국이는 웃음을 터뜨린다. 키스도 했으면서, 놀리는 듯한 정국이의 말에 발끈하자 그대로 정국이는 내 어깨를 붙잡고는 다시 한 번 입술을 맞댄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길게. 얼빠진 상태로 정국이를 올려다보자 정국이는 싱긋 웃고는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본다.
안녕, 스무살의 너.
***
♡2015. 8. 16. ~ 2016. 1. 1.♡
안녕하세요. 빛나는 입니다.
마침내 어린 아빠가 완결이 났습니다. 제가 썼던 글 중에 가장 오래 쓰고 가장 길게 갔던 글인 것 같아요. 그리고 사실 가장 많이 애착이 가는 글이기도 합니다. 안다미로와 쌍벽을 이루는 그런 글이죠.
어... 사실 저는 어린 아빠를 쓸 때 몽글몽글한 느낌과 더불어 태형이와 딸래미의 예쁜 일상, 그리고 첫사랑, 둘의 유대감 같은 것도 보여주고 싶었지만 여러분에게 아빠, 그리고 더 나아가 가족에 대한 것을 생각하게 만들어주고 싶기도 했어요. 그래서 댓글로 어린 아빠는 참 많은 생각을 하는 글입니다. 오늘은 아빠를 안아줘야겠어요, 와 더불어 자신들의 아빠를 자랑하는 독자님들을 볼 때마다 참 뿌듯했어요.
안다미로는 사극물이 없길래, 영꿈너는 그냥 다정한 전학생과 귀가 안들리는 여주, 세상의 끝은 지구가 종말한다면 어떨까, 즐거운 나의 집은 귀신이랑 살면 어떨까, 방연시는 방연시 보고, 기억을 삽니다는 브금 + 과제 때문에 읽은 책 덕분에... 곧 연재 될 오르치데우스는 그냥 해리포터물이 없는데 보고 싶어서 자급자족ㅇㅅㅇ 이라면 어린 아빠는 어린 딸을 키우는 어린 아빠, 그리고 꼭 혈연으로 엮이지 않아도 끈끈할 수 있는 가족관계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생각해보니 시작은 태아빠와 딸래미의 행복한 일상이었는데 어느새 마지막은 각자의 짝과 함께 하고 있네요. 그래도 둘의 관계는 정말로 끈끈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저는 걱정이 되지는 않아요. 가족이 늘면 좋은 거죠, 그쵸?
어린 아빠를 쓰면서 저도 개인적으로 저희 아빠를 많이 떠올렸구요. 음... 실제로 태형이의 모습들 중에서 저희 아빠의 행동에서 따온 것들도 몇 가지 있어요. 아마 너무 사소해서 모를 거예요. 물론 제게서 따온 딸래미의 모습도 있답니다. 하하.
어린 아빠는 유난히 울었다는 댓글을 참 많이 봤던 것 같은데, 사실 울라고 쓴 글은 아니었어요. 머쓱. 제가 쓰면서 감정 이입을 너무 심하게 해서 좀 글썽글썽한 상태로 써내려간 편들은 많았지만... 대표적으로는 정국이 짝사랑이나 19편 정도가 있겠습니다. 하여튼 그렇다는 뜻은 그만큼 어린 아빠가 여러분들께 의미가 있고, 많은 생각을 해준 글이라고 저는 보고 싶어요. 아, 또 감정선이 잘 나타난다는 댓글을 가끔 받았는데... 그건 진짜 너무 과분한 칭찬이라... 하하. 사랑합니다. 제가 딸래미에 이입해서 쓸 때가 많아서, 하나하나 상상하다보니까 그렇게 느껴졌을 것 같아요. 정말로 감사합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5개월 동안 어린 아빠를 함께 달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글을 완결낼 수 있었던 것은 댓글 남겨주고, 추천해주시는 독자님의 덕분이 큰 것 같습니다. 아쉽지만 어린 아빠는 글 속의 딸래미와 정국이, 그리고 실제의 정국이가 딱 스무살이 된 2016년 1월 1일, 끝맺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태아빠, 딸래미, 태권도 유망주 정국이, 태권도 유망주 2 호석이, 지민이 삼촌, 남준이 삼촌, 딸래미 첫사랑 윤기 오빠, 그리고 기회가 없어서 넣지 못했던 석진 센빠이, 꽃집 언니 등등, 아쉽지만 이제 안녕이에요.
물론 여러분들도 아쉽고, 저도 떠나보내기 많이 아쉽습니다. 우리 태아빠를 보내야하다니... 엉엉.
네, 그런 의미에서 저는 세, 네 편 정도의 번외편과 함께 조만간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번외가 끝나면 정말로 어린 아빠는 안녕이겠군요. 정말 슬프네요. 떠나보내기 싫어요.
번외가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이른 시간 내에 올 수 있도록 노력하겠고, 번외가 끝난 후에는 또 빠른 시일 내로 오르치데우스 연재 계획을 잡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요, 여러분. 어린 아빠는 안녕이지만 저랑은 계속 볼 거니까요.
주저리가 길어졌네요. 어린 아빠를 함께 사랑해주신 독자님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사랑해요. 늘 애정합니다.
암호닉
꼬박/탕수육/너를 위해/라현/솜이불/비비빅/뿝뿌/바카0609/슈룰루/구구콘/마틸다/모찌모찌해/오곡/디즈니/햄쮸/연/밥팅이/들레/토마토마/즌즌국/민피디/몽글/맙소사/범블비/샘봄/boice1004/민윤기/슈비두바/눈웃음/초딩입맛/태아빠/우리사이고멘나사이/인사이드아웃/이부/알라/핑구/단쿠키/버블방탄/태꾹/흥탄소년단♥/심지/꾸꾸/다람이덕/판콜에스/독자1/침침맘/플랑크톤회장/현지짱짱/새별/박듀/설탕쿠키/☆☆☆투기☆☆☆/매직핸드/노른자/골드빈/은하/작가님사랑해여/핑슙/꾸꾹/슙기력/바나나/니야/마름달/치즈/룰루랄라/미자정국/빵/닭키우는순영
어린 아빠 처음 연재할 때 암호닉은 두 개로 시작했었는데 어느새 이만큼이군요. 정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