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정국, 일곱 살.
어린아이는 바삐 발을 놀리고 있었다.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들에 걷는 속도를 약간 늦추다가도, 그것도 잠시, 저도 모르게 다시 걸음이 빨라지고 있었다. 저 쪽에서 걸어가고 있는 남자를 발견한 아이의 얼굴에 절로 미소가 피어났다. 황태자의 위엄이니 뭐니 주위사람들이 계속 말해와도 사실 본질은 아직 어린아이인 터라, 정국은 그에게 달려갔다.
"스승님!"
익숙하게 들려오는 앳된 목소리에 걸어가던 남자, 한은 뒤를 돌았다. 어린 정국이 자신을 향해 달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곤란한 듯 애매한 웃음을 짓고 있다가 제 앞에서 딱 서버린 정국을 보고선 걱정스러운 말투로 나무랐다.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십니다."
"안 넘어져요. 예전처럼 넘어질 나이는 지났다고요."
정국이 짐짓 어른스러운 척 대답했다. 어차피 남자도 정국의 이런 성격을 잘 알고 있던 터라 다시 훈계할 생각은 없었다. 그리고 만일 훈계를 하더라도 들을 아이도 아니었다.
어디 갔다 오시는 거에요? 정국의 물음에 남자가 간단하게 설명했다. 리연님을 뵙고 오는 길입니다. 리연, 이라는 이름에 정국의 얼굴이 밝아진다.
"저도 리연님 뵙고 와도 돼요?"
"아, 지금은 아마 아기씨를 돌보시는 중이라 정신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오랜만에 간 건데 금방 나왔거든요. 나중에, 같이 뵈러 가기로 하지요."
남자의 사촌 누이이자 현재 황제가 두고 있는 후궁인 리연을 정국은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아름답고 포근한 여자였고, 자신에게 부드럽게 대해주어서 인상이 좋았다. 비록 어머니는 빨리 돌아가셨지만, 만일 어머니가 살아계셨더라면 리연같은 느낌이 어머니라는 대상이 아닐까 하고 정국은 종종 생각하곤 했었다. 그리고 비슷한 맥락으로, 자신의 스승인 한은 아버지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실제로는 황제가 자신의 아버지이긴 했지만 도통 정이 없었다. 아니,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낼름 인사만 받고 손을 내젓기가 일쑤였고, 실은 인사를 받는 것조차 지겨워하곤 했었다. 방금 보고 온 친아버지, 황제의 모습을 떠올려보던 정국은 한을 올려다보았다. 두 개의 얼굴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겹쳐졌다.
"전하는 어디를 갔다오시는 길입니까?"
"황제 폐하를 뵙고 오는 길이에요."
정국은 친아버지를 황제 폐하라고 꼬박꼬박 불렀다. 그것은 궁에 눈이 많아서기도 하지만, 정국이 황제를 아버지로 인정하기 싫다는 의미도 분명 존재했다. 아직 좋고 싫음을 명확히 구별하기에는 어린 나이긴 하지만, 정국은 자신을 보는 황제의 눈빛이 아들을 보는 따스한 눈빛이 아님을 잘 알고 있었다. 그저, 다음 대 후계자를 대하는 눈빛이었다.
"스승님이 제 아버지셨으면 좋겠어요. 아니, 충분히 지금도 아버지 같아요."
"황제 폐하께서 섭섭해하십니다."
"하지만 폐하는 절 봐주시지도 않는걸요."
정국이 시무룩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한도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공포정치를 하고 수틀리면 아랫사람들을 좌천시키거나 죽여버리는 현 황제는 폭군기질이 다분했지만, 의외로 순정파여서 정국의 어머니였던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정국의 어머니였던 황후는 몸이 원래 약했던 탓에 정국을 낳고서는 시름시름 시들더니 몇 개월만에 죽어버리고 말았다. 황후 자리를 언제까지고 비워둘 수 없지 않겠냐는 말들이 조심스럽게 나오곤 했지만, 황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따라서 황후 자리는 몇 년째 공석인 채였다.
다만 그도 조잘대는 입들에는 지친 건지 후궁, 리연을 한 명 둘 뿐이었다. 비록 리연의 처소를 자주 찾아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황제의 옆에 있는 단 한명의 여자로서 리연은 궁 내에서도 입지가 꽤 굳건한 편이었다.
"그건 폐하께서 일이 바쁘셔서 그런 겁니다. 전하를 미워하시는 건 아니에요."
"괜히 달래주려 하지 마세요."
위로해주는 한의 말에 정국이 한숨을 쉬며 말을 끊었다. 그런 건 폐하를 대하는 제가 스승님보다 더 잘 알아요. 단호한 말에 한은 입을 다물었다. 그 나잇대마냥 주변 눈을 신경쓰지 않고 자신에게 이렇게 달려오면서도 가끔 이렇게 말하는 정국은 일찍부터 현실을 알아가고 있는 것도 같았다. 급격히 무거워진 분위기에 정국이 입을 열어 화제를 전환시킨다.
"아무튼, 그래서 지금은 어디를 가시려고 했던 건데요?"
"수련생들을 보러 가려던 참입니다. 정식으로 지위를 배정받기 전까지는 실력을 갈고닦아야 하니 말이죠."
"저도 갈래요."
"그러죠."
같이 가겠다는 정국을 말리지 않은 채, 한은 수련생들이 있을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일정한 동작으로 검을 내려치고 베고, 휘두르고, 찌르는 광경들을 보던 정국은 눈을 반짝 빛냈다. 황태자의 예고없는 등장에 수련생들은 처음에 당황해서 실수를 몇 번 저지르기도 했으나, 별 말 없이 지켜보기만 하는 정국 덕분에 다시 평소처럼 되돌아온 채였다. 한의 옆에서 그 광경을 보고 있던 정국이 입을 열었다.
"저도 검 배우고 싶어요."
"아직은 안 됩니다. 검을 들기조차 무거우실 겁니다."
"그건 해봐야 아는거지 않겠어요?"
맹랑한 물음에 한은 잠시 정국을 바라본다. 꼭 배우고 싶다는 의지로 활활 불타오르는 두 눈이었다. 흠....고민하던 한이 스쳐지나가는 말로 대답했다. 지금은 안 되고, 내년에는 가르쳐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을 흘려듣지 않은 정국이 고개를 홱 돌려 한의 옷자락을 잡아챈다. 정말요? 저 지금 들었어요, 내년에 된다고 하셨지요, 년초가 되자마자 바로 배울 거에요. 흥분과 설렘으로 가득찬 목소리에 한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알겠습니다, 약속하지요."
"약속도 하신 거에요!"
신난 정국이 들떠서 소리치는 모습을, 수련생들이 흘끔흘끔 바라본다. 하지만 정국은 약속을 받아냈다는 기분에 그런 시선들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어린아이의 신난 모습을 부드럽게 바라보다가, 저 쪽에서 목을 축이려 걸어나오는 한 수련생을 발견한 한이 팔을 들어 이리오라 손짓했다. 한이 부르는 모습을 발견한 소년은 황태자의 모습에 잠시 긴장한 듯 했으나 곧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전하, 이 아이는 제가 아끼는 아이입니다. 아직 어리지만 실력이 많이 뛰어나서 제가 눈여겨보고 있지요. 자, 인사드려라."
정국에게 간단하게 설명을 하고난 후, 소년에게 인사하라 손짓한다. 스승의 칭찬을 받은 소년은 내심 기분이 좋은 듯 입가에 미소를 띄고 있다가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듯 정국의 키에 맞게 무릎을 굽힌 후 인사했다.
"전하, 처음 뵙겠습니다. 김석진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어요. 만나서 반가워요."
황태자가 자신에게 존대를 쓰는 것을 들은 석진의 눈이 크게 튀어나올 듯 했다. 석진은 한을 바라보다가, 정국을 바라보다가, 다시 한을 바라보더니 무척이나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전하, 말씀을 낮추세요...저한테 어찌....
당황스러움이 가득 묻어나오는 석진의 말을 듣고 있던 정국은 고개를 갸웃거린다.
"나이 많은 사람에게는 높임말을 쓰는 거라고 하던데요? 그대는 나보다 나이 많지 않던가요?"
"아니.....스승님...혹시...."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정국의 말에 석진은 더 당황해서 어버버거리다가,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한을 쳐다보았다. 혹시.....?하는 눈빛에 한은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내가 그러지 않았다, 나도 항상 제발 말씀좀 낮춰주시라고 하는데도 계속 이러시는거야...
한이 말을 해도 석진은 여전히 의심쩍은 눈빛이었다. 스승과 제자 간의 불신의 벽이 쌓여지는 것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한 정국은 입을 열었다.
"맞아요, 누가 시킨 게 아니라 제가 책에서 본 거에요."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높임말을 쓰는 것은 맞지만, 황태자 전하께서는 예외입니다. 저희 같은 사람들에겐 말을 낮춰주시는 게 맞는 거에요."
다행히도 한이 속여넘긴게 아니었다곤 해도, 예상치 못한 정국의 대답에 석진이 조금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런 예민한 반응에 손끝으로 볼을 살짝 긁던 정국이 손을 내리곤 다시 묻는다.
"그래도 전 이게 익숙해서 더 편한데, 안되나요?"
눈썹을 살짝 추욱 늘어뜨린 채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정국의 모습에 석진이 입을 다물었다. 저렇게 거절할 수 없는 표정도 문제지만, 황태자가 그렇게 나온다면야 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황태자의 주장을 꺾어버리는 것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으니. 석진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다시 정국의 얼굴이 밝아진다.
"근데 그대도 한 님이 스승인가요?"
"그렇습니다만....?"
"그러면 동문이네요."
"예?"
"저의 스승이자 그대의 스승이기도 하니 동문이라고 칠 수 있지 않을까요."
급작스럽게 단계를 뛰어넘는 친화력에 석진은 멍청하게 눈을 끔벅거렸다. 급전개에 석진의 머리에서 고장이 났다는 것을 알아차린 한이 대신 끊어주었다. 전하, 그렇게 갑자기 말하시면 누구나 당황할 겁니다.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하시는 편이.....
스승의 조언과 계속해서 멍청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석진을 바라보던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그렇게 하죠.
"그럼 다음에 봐요, 안녕!"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고 뒤돌아 사라지는 정국을 바라보는 석진의 표정은 여전히 멍청했다. 한바탕 들이닥친 폭풍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석진을 알아차린 한이 대신 말해준다.
"원래 저러시는 분이니, 크게 신경쓰지 말아라."
"아, 네......"
멍하게 대답한 후 석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 본 황태자의 모습은 뭐랄까, 현 황제의 아들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발랄했다.
황태자가 원래 저런다고 한 말은 틀리지 않았다. 처음에 석진은 자신을 불쑥불쑥 찾아오는 황태자에 기겁할 듯 놀랐지만 그것도 시간이 흐르니 적응이 다 됐다. 수련중 쉬는 시간을 알고 귀신같이 찾아오는 정국과 이야기하며 석진은 시간을 보냈다. 이야기들은 사소한 것들뿐이었지만 그런것 마저도 정국은 재미있게 듣곤 했다. 아, 맞다. 갑자기 찾아든 생각에 석진이 두 손을 마주하여 짝 소리를 낸다. 갑작스럽게 난 짝 소리에 딴 곳을 바라보고 있던 정국이 석진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보니까 지금 생각난 게 하나 있는데,
"저한테 동생이 두 명 있는데, 아마 막내동생이 전하와 비슷한 또래일 거에요."
호기심을 유발하는 말에 정국이 귀를 쫑긋 세운다. 아무래도 궁 안에는 자신과 같은 또래가 없다 보니 좀 심심하기는 했다. 한의 소개로 김석진을 종종 찾아오긴 했지만 그와는 7살이나 차이가 나는 터라 친구같이 대하기에는 약간의 무리가 있었다. 어쩌면 말동무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정국이 덥석 석진이 푼 말을 잡아챘다.
"궁금하네요. 여기 와 있나요? 보고 싶은데."
"아직 나이가 어려서 궁에 정식으로 들어오지는 못했습니다."
석진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몇 년 후면 저와 비슷한 수순을 밟아서, 수련생으로 들어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 아쉬운 말에 정국이 입을 쩝 다셨다. 저와 비슷한 나이는 없어서, 만일 그대의 동생이 들어온다면 꼭 알려주세요. 정국이 신신당부했다. 석진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다가, 석진이 한 말중에서 하나를 용케 잡아챈 정국이 걸음을 멈춘 채 다시 물었다.
"잠깐, '정식으로는' 이라고 하셨죠? 그럼, 비공식적으로는 들어온 적 있다는 말인가요?"
예리한 말에 석진이 웃는다. 방문객으로, 온 적은 몇 번 있죠. 석진의 대답에 내심 기대하고 있던 정국의 얼굴이 환해졌다.
* *
리연은 잠자고 있는 아기를 부드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고귀한 아이였다. 황제와의 아이. 그 자체만으로도 태어날 때부터 존귀했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갓난아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리연은 다가와 뒤쪽에서 멈추어 선 발걸음을 느끼곤 그를 향해 중얼거렸다.
"정말, 예쁘지 않나요. 자고 있는 모습 좀 보세요."
그 말을 듣고, 옆으로 가까이 다가온 한은 똑같이 잠든 아이를 바라보며 대답해주었다. 당연하죠, 누구의 아이인데요. 바로 누님과 황제의 아이이지 않습니까. 만족스러운 대답에 아름답게 미소짓고 있던 리연은 떠오른 생각에 미소를 지우고서는 조용하게 말했다.
"제 아들을 황제로 만들고 싶어요."
리연이 말한 말을, 한은 정확하게 알아들었다. 황제는 어차피 다른 여자를 들일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황제와의 잠자리에서 낳은 자신의 아들은 황제가 될 수 있었다. 다만, 전정국이라는 전(前) 황후에게서 낳은 아이가 없어야지만 그럴 수 있었다. 지금 황태자인, 정국을 없애야지만 리연의 아들이 황태자가 되고 후에 황제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어차피 황제는 황태자에게 딱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들이 아니라 다음 대 후계자로서만 보고 있기 때문에, 조용히 위장해서 죽여버리면 자신의 아들을 황태자로 책봉시킬 게 분명했다. 은근 단순한 황제의 성격을 리연은 잘 파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황태자를 위험에서 지켜줄 만한 세력들도 이제 주변에 남아있지 않았다. 한 때 황후를 지지하던 세력들은 점차 커지는 자신쪽의 세력에 밀려났고, 이제는 황태자를 지키는 건 곧 자신의 눈 밖에 남과 동시에 잡고 있는 권력이 위태로워질 지 모르기에 발을 하나둘씩 빼고 있는 추세였다. 궁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황태자의 사람들은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오로지 정국만이 자신이 궁 안에서 혼자인것을 모르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은 리연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부드럽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황태자 시해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의 얼굴 치고는 매우 평온한 모습이었다.
"적당한 날을 잡아 궁 밖으로 나간 후에, 사고사로 위장시키겠습니다."
"어머....."
"누님께서는 그저 늘 그랬듯이, 황태자의 죽음을 몹시 슬퍼하시면 됩니다. 황태자 책봉은 마음이 아파서 못 받아들이겠다고 해도, 주변 사람들이 다 알아서 할 겁니다. 누님은 그저 가만히 있으시면 돼요."
리연이 웃었다. 늘 고마워요.
* *
"놀러나오기에 정말 제격인 날씨네요."
햇볕이 너무 뜨겁지도 않고, 바람도 많이 불지 않는 최상의 날이었다. 매번 궁에만 있기 지겨워하던 정국은 밖으로 나가보고 싶다고 늘 말하곤 했었는데, 처음에는 안 된다고 거절하던 한은 정국의 고집을 이기지 못해서 결국 말을 들어주고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황태자가 나가는 것이었기에 경계는 삼엄했지만 정국은 그런것도 신경쓰지 않을 만큼 마냥 좋아하고 있었다. 맑은 계곡물 사이에 발을 담그고 있던 정국이 석진을 향해 고개를 든다.
"안 들어오고 뭐해요?"
"네?"
"저만 있기에 심심하잖아요, 들어와요."
원래라면 수련생의 신분인 석진은 따라올 곳이 아니었으나 정국의 말 덕분에 하루를 빠지고 여기를 올 수 있었던 것이었다. 정국은 내심 태형도 같이 왔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어찌되었든 간에 석진은 타고 온 말들을 지키는 별볼일 없는 일을 맡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휴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좋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국이 저더러 계곡에 들어오라는 말을 하자 놀랬다. 주변 사람들은 황태자의 막나가는 행동을 제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건지 그냥 못 들은척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자신을 향해 말한 게 확연한 터라, 석진은 한을 쳐다보았다. 한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국의 말을 따르라는 의미였다. 이래도 되나 싶지만 사실 아까부터 계곡에 들어가고 싶었기도 하고 황태자의 명이니까, 하고 합리화한 석진이 계곡으로 발을 내딛었다.
"좋죠?"
"시원하네요...물이 참 깨끗하고..."
물을 따라 헤엄치는 송사리들을 보면서 석진이 흘러가듯 대답했다. 사실 스승님과도 같이 발 담그고 싶었는데, 절대 거절이라시더군요. 정국이 아쉽다는 어투로 말했다. 석진은 한이 있는 쪽을 보고서는 그 말에 동감했다. 그는 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그늘에서 쉬는 것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보였다.
"역사나 정치나 그런 것도 좋지만 빨리 검술을 배우고 싶어요. 검술 실력이 뛰어나다던데?"
"아니에요, 와전된 것일 뿐입니다. 보통보다 아주 약간 나은 정도일 뿐이에요."
정국의 칭찬에 석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석진의 가문이 그닥 큰 편이 아니라 닿을 연줄도 없어, 오로지 실력으로서만 들어온 석진은 사실 꽤나 뛰어난 정도였지만, 그렇게 말했다. 흐음, 정국이 덧붙였다.
"스승님 말로는 어쩌면 최연소에 단장이 될 수도 있겠다고 하시던데요?"
"그것도 그냥 과장이죠. 단장은 커녕 전 지금 정식 시험에도 벌벌 떠는 정도인데요, 뭐."
석진이 다시한번 겸손하게 말했다. 그 말을 대충 흘러들은 정국은 자기 할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도 빨리 검술을 배우고 싶어요. 날카로우면서도 깔끔하고 아름답게 떨어지는 선이, 어찌나 인상깊던지... 일곱살이 구사하는 말 치고는 진지한 말에 석진이 정국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배움의 열정이 묻어나오는 두 눈을 본 석진이 웃으며 말한다.
"전하가 검을 배우시면 이 나라에서 그 누구보다 뛰어난 실력을 갖추시게 될 거에요."
"에이......"
"장담해요. 전하는 누구보다 습득이 빠르시니, 그럴 겁니다."
보기좋게 포장된 말이어도 듣기에는 좋은 터라, 정국은 비실비실 새어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한 채 발장구를 쳤다. 오래 발 담그시면 건강에 안 좋아요, 이쯤에서 나가시는 편이..... 이어지던 말은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주변에 끊기고 말았다.
어디선가 휙 하고 날아온 화살이 나무에 날아가 퍽 꽃혔다. 꺄악, 비명소리가 들리고 갑작스럽게 날아든 한 화살에 이어 다음 화살들이 하나둘씩 날아오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습격에 주변을 지키고 있던 호위들이 검을 빼들었다. 어디서부터 날아오는지 알 수 없는 화살을 파악하려 애쓰고 있을 때, 계곡에서 빠져나온 정국을 한이 재빠르게 다가가 보호했다. 그 중 누군가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도적떼다!"
투박한 발굽소리들이 들려오고, 계곡물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감히 황태자 일행을 한낱 도적떼 무리가 습격하다니. 아무래도 만일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다보니 호위들을 데려오긴 했지만 설마 도적떼가 들이닥칠 거라곤 생각하지 못해 인원이 현저하게 딸리고 있었다. 날아온 화살에 맞아 신음하는 소리가 종종 들려왔다. 하지만, 어차피 상태는 검술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도적떼임이 분명했다. 그렇기 때문에 체계적으로 검술을 배운 황태자 일행에게는 상대가 되지 못할 게 분명했다. 적은 인원이지만 확실하게 상대할 수 있었다. 하나둘씩 정신을 차리고 말에 올라타 맞받아치려는 호위들에게 한이 명령을 내렸다.
"저쪽에서부터 날아오는 화살이니 세 군데로 나눠져서 포위해! 상대는 단순한 도적떼일 뿐이다!"
명령에 일사분란하게 흩어지는 호위 일행을 보던 한이 아직도 두어 개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선 정국을 안아들어 말 위에 태웠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쉽게 제압될 거라 생각되나, 혹시 모르니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있을게 좋을 듯 합니다. 정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랴!"
정국의 뒤에 올라탄 한이 말을 몰았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하여 숨을 곳이 많은 숲 속으로 말을 모는 두 사람을 다섯 명의 호위가 뒤따라갔다. 이리저리 방향을 바꾸며 달리는 바람에 좀 거리를 두고 따라오던 두 명이 길을 따라오지 못하고 떨어져나갔다. 다그닥, 다그닥 땅바닥에 부딪히는 말발굽 소리만이 현란하게 들렸다. 갑작스러운 와중에도 정국은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일은 처음이었지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얼마쯤 더 달렸을까, 한이 말을 멈추었다. 푸르륵, 말이 더운 콧김을 내뿜으며 제자리에 멈춰 섰다. 정국이 땅으로 내려서서, 앞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낭떠러지로 더 이상 갈 곳이 막혀 있었다. 정국이 뒤를 돌아보았다. 정국을 뒤따라 말에서 내린 한과 두 명의 호위가 걸어오고 있었다.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낭떠러지고, 어차피 단순한 도적떼였으니 지금쯤이면 다 해결되지 않았을까요."
"글쎄요, 단순한 도적떼라면 그렇겠죠."
아리송한 말이었다. 정국이 한을 쳐다보았다. 생각대로 잘 해결했을건지 모르겠네요. 한이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죠?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찜찜함 느낌에 정국이 한을 쳐다보았다. 전하. 생각에 잠겨있던 한이 정국을 불렀다.
"후에, 소중한 사람이 생기던, 사랑하던 여자가 생기던, 이걸 기억하세요."
"네?"
스릉, 하는 소리가 나고 눈 깜짝할 새에 검을 빼든 한이 빠르게 휘둘렀다. 순식간의 행동에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그의 옆에 서 있던 두 명이 털썩, 하고 땅으로 쓰러졌다. 반 동강이 난 시신에서 핏물이 붉게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정국은 한이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움직여야 했지만 왠지 모르게 움직일 수 없었다. 가까이 다가온 한이 정국의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내뱉었다.
"아무도 믿지 마세요. 왜냐하면,"
"스승....."
"그 누구도 전하의 편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푹.
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스승...님....? 정국이 말을 더듬었다. 코 앞에 보이는 한의 두 눈에는 어떠한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무감각한 눈빛. 평소처럼 자신을 따스하게 바라보던 눈빛이 아닌, 거슬리는 것을 해치웠다는 눈빛.
"전하!!!!!!"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한이 정국을 꿰뚫고 있던 검을 빼냈다. 그 바람에 정국이 비틀거리며 자리에 쓰러졌다. 피가 진득하게 묻은 칼로 한은 주저하지 않고 제 목을 베었다.
잘린 한의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솟구치며 제 얼굴로 튀는 광경에도, 가슴께 부근에서 느껴지는 통증보다도 그동안 믿고 따랐던, 아버지처럼 생각했던 스승이 자신을 죽이려했다는 생각에 큰 배신감을 느끼며 정국은 정신을 잃었다.
* *
"안 나오시는데..어떻게 해?"
태형이 자그마한 손톱을 이로 까득까득 깨물며 물었다. 평소같았으면 손톱 물어뜯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을 석진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았다. 벌써 일주일 째였다, 누구도 만나지 않는 것이. 열흘간 사경을 헤매던 정국은 기적적으로 치명상을 입고서도 살아나 정신을 되찾았지만, 상처를 치료하러 들어가는 의원을 제외하고서는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다. 그 의원들마저도 거부당한 적 있으니 어련했다.
혹시 같은 또래라면 경계심이 누그러지지 않을까 해서 그동안 나름 즐겁게 몇 번 만나 대화를 했던 태형을 데리고 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말하게 시켰기도 해봤지만 방 안에서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이쯤 되면 문전박대 당해서 서러운 게 아니라 정국이 잘못될까봐 걱정스러운 일이었다. 혹여나 잘못된 마음을 품을까봐 석진은 그게 너무나 걱정됐다. 처음 며칠간은 아버지가 닫힌 문을 열어보려 애를 썼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대답조차 주지 않는 정국에게 안 된다는 것을 알고 너에게 맡긴다며 물러갔고, 덕분에 석진이 지고 있는 마음의 짐은 더 무거워진 상태였다.
황태자 살해사건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다. 한이 정국을 찌르는 것을 목격한 자들과, 잡은 도적떼들의 자백을 통해 그들은 단순한 도적떼가 아니라 한이 도적떼로 위장하게 시킨 집단이었단게 드러났다. 또한 그 모든 것을 시킨 게 리연이었다는 게 밝혀졌다. 황제는 그녀와 그녀의 아들을 죽였으며 그 가문을 모두 멸하라 시켰다. 황태자였던 정국의 안위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지만 감히 자신이 모르는 사이 발칙한 계획을 꾸며 심기를 건드렸다는 게 그 이유였다.
"전하, 제발 문을 열어주세요. 전하!!"
석진이 양 손으로 문을 힘껏 두드렸다. 그런 석진을 태형은 지쳤다는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황태자가 안 열어준다는데 뭐 어떻게 해.... 그냥 집에 가자, 형. 나 다리 아파. 태형이 징징거렸지만 석진은 들은척도 하지 않았다. 전하, 이 문 안 열어주시면 저 문 부술 거에요!! 어떻게 부순다던지, 정말로 부순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석진은 그렇게 내뱉었다. 쾅쾅쾅 문이 부서져라 두드라고 있던 그 때, 드디어 열리지 않을 것만 같던 문이 열렸다.
"전...!"
마침내 문이 열렸다는 기쁨에 석진이 입을 열었으나 자신을 향해 겨누어진 칼자루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이주일이 넘은 후 처음 보는 정국은 머리가 산발이었으며 살도 빠져 있었지만 눈빛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너도 한통속이냐."
날카로운 칼끝이 짧게 반짝였다. 석진은 입을 다물었다. 정국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석진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것을 발견한 태형이 놀라서 걸어나왔다가 정국의 눈빛에 놀라서 뒷걸음질쳤다. 대답없는 석진에게 정국이 다시 외쳤다. 물었다. 한통속이냐고 물었잖아!!
"저는 아닙니다."
"아닐지 누가 알아, 스승이었던 작자가 날 죽이려고 들었는데 그 제자였던 너도 연관이 없을지 어떻게 알아?"
".........."
눈을 짧게 감았다 뜬 석진이 단호하게 말했음에도 정국은 차가웠다. 정국은 여전히 석진의 목에 칼을 들이댄 채 침묵하고 있다가 내뱉었다.
"이제와서 보니 내 편은 어디에도 없었더라고. 괜히 혼자 착각에 빠져있었지."
"............"
"덕분에 눈을 떴지 뭐야."
정국이 냉소했다. 전처럼 밝았던 모습을 지녔던 정국은 온데간데 없었다. 다만, 너덜너덜해진 상처를 입은 채 적의를 마음껏 드러내보이는 황태자만이 있을 뿐이었다. 죽고 싶지 않으면 꺼져. 차갑게 뱉고 문을 닫으려는 정국을, 석진이 발을 넣어 간신히 버텼다. 끼인 발이 아파왔지만 석진은 필사적이었다. 전하,
"제가, 전하의 편이 되어드리겠습니다."
"............."
"전하가, 진심으로 믿는 사람이 나타날 수 있을 때까지, 제가 그 옆을 지켜드리겠습니다."
".........."
저희가 전하의 편이 되어드릴게요. 언젠가 전하가 진심으로 마음을 열고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 거에요, 저희가, 전하를 지켜드리겠습니다. 거의 닫힌 문 틈 사이로 보이는 정국을 바라보며 석진은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정국은 그런 석진의 말을 비웃었다.
"무슨 수로? 지금 넌 아무것도 아닌 상태인데. 너네 가문도 별 볼일 없잖아. 아무것도 없으면서 어떻게 누군갈 지킬 수 있겠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반드시 전하를 지켜드리겠습니다."
한 치의 흔들림이 없는 눈동자를 보고 있던 정국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물러가세요."
어디, 두고 보죠.
정국이 눈짓했다. 석진은 문 틈 사이에 끼워넣었던 발을 천천히 뺐다. 그러자, 문이 닫혔다. 닫힌 문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던 석진은 태형을 데리고 그 앞을 떠났다.
그 누구도 전하의 편이 아닙니다.
언젠간 진심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날 거에요.
- 다시, 스물.
또다시 바보같아져버렸어.
사담 및 알림사항(??) |
하 오늘 아침에 돌아왔어요...! 저번화에 많은 분들이 잘다녀오시라고 해주셔서 그런가 덕분에 여행 즐겁게 잘다녀왔습니다 ㅇ<-< 감사해요 천사분들ㅠㅠㅠㅠㅠㅠ문명찐따되느라 덧글도 지금..확인했...(말을 흐린다)
일단 본문 전개 전에 언젠가 풀어야 했던 정국이의 과거편을 들고왔어요 여행중에 글쓰고 싶어서 죽는줄.. 음음 생각나는 질문이 몇 개가 있는데 아마 1부와 비슷한 10~11편쯤에서 끝나지 않을까 싶어요 그리고 내일로는 안동-경주-부산 순으로 갔다왔습니다 하하하
다음편 쓰러 사라질게요... 그러므로 질문하실 게 있으시면 조금 뒤에 올라올 Q&A 글에 여쭤봐주세요! 암호닉 신청도 다음 글에 신청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