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우리의 추억
"진짜 한 번만 와라. 어? 나 이번에도 너 안 오면 걔네한테 죽는다니까?" 지금 나에게 딱 한 번만 오라며 온갖 불쌍한 척을 하고 있는 얘는 내 인간관계에서 유일하게 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정수정이다. 고 3때 우연히 같은 반이 되어 친해졌는데 같은 대학, 같은 과로 오게 되었다. 그 덕에 나는 매년 동창회에 나오라는 얘길 듣는 중이고. "걔네 얼굴 보기 싫어. 좋은 관계도 아닌데 뭘 만나. 길 가다 보게 되면 그냥 얼굴 한 번 보고 스치고 싶지 그렇게까지 만나고 싶지 않아." "야, 넌 걔네를 길에서 스칠 것 같냐? 너 빼고 다 유명인사들인데? 전정국이 이번에도 너 안 오면 사람 시켜서 찾는다고 했는데 그래도 안 가?" "어, 안 가."
"너 올해가 딱 5년인 건 알고 있지? 야, 나 종인이 만나기로 했는데 늦었다. 먼저 갈게! 그리고 안 나오면 죽는다. 내일 7시까지 오는 거 잊지 말고!" 정수정은 안 간다는 내 대답은 잊은 건지 남자 친구를 만나겠다며 꼭 나오라는 말만 남기고는 가 버렸다. 걔네를 안 보고 지낸 지 올해가 딱 5년째다. 그 5년동안 나는 죽도록 공부하며 대학에 와서 과제에 찌들어 사는데 걔네는 정말로 잘 지냈다. 어떻게 지내는지 별로 궁금하지는 않았지만 워낙에 유명인사들이 되어서 알고 싶지 않아도 티비를 틀거나 인터넷에 접속하기만 해도 보이는 소식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알게 되었다. 잘 나가는 걔네들 얼굴 보면 어떤 느낌일까. 진짜로 걔네가 나를 보고 싶어는 할까. 가기 5시간 전부터 갈까 말까 고민을 하며 갔다가 슬쩍 분위기만 보고 다시 와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은 한 순간에 무너졌다. 술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를 발견한 정수정이 세상에서 제일 큰 목소리로 반겼고, 덕분에 내가 동창회에 온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되었다.
"내가 너 올 줄 알았어. 와서 애들이랑 한 잔만 하고 저기 룸 들어가봐 걔네가 좀 유명하냐? 걔네만 따로 룸 잡았어. 너 보면 거기로 오라고 전해달라고 하던데." "오~ 너 진짜 오랜만이다. 걔네랑은 연락하고 지내?" 내가 왜 학교 생활이 힘들었는데 연락하고 지내겠냐? 쟤는 학교 다닐 때나 지금이나 비호감이다. 그새 얼굴에는 뭘 한 건지 얼마 안 있으면 흘러내리겠네. 썩어가는 내 표정을 본 건지 학교 다닐 때 전교 임원이었던 김준면이 오랜만에 본 기념으로 건배나 하자고 했다. 역시 눈치 하나는 빠르다니까. 그렇게 건배를 하고 정수정이 알려 준 룸 쪽으로 향했다. 문 앞에서 10분은 흘렀을까 도저히 얼굴 볼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가려는데 어떤 남자와 부딪혔다. 나야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지만 이 사람은 앞을 보는데 왜 날 안 피해? 나는 그냥 미안하다는 뜻으로 고개만 까닥하고는 피해서 가려는데 그 남자가 다시 나를 막았다. 지금 나랑 한 판 하자는 거야, 뭐야. 욕이라도 해 줄까 싶어 고개를 들었는데 모자랑 마스크로 꽁꽁 감싸서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가 않았다. 저래서 앞이 보이겠냐. 지가 연예인도 아니고 왜 저러고 다닌대? "저기요, 앞 좀 보고 다니세요. 그렇게 감싸고 다니면 앞이 제대로 보이기는 하겠어요? 연예인도 아니고. 제가 사과도 하고 피했으면 그냥 가면 되지 가려는 사람은 왜 막아요?"
"와, 역시. 성격 아직 안 죽었네." 목소리가 왜 이렇게 낯익을까. 설마 아는 사람인가? 제발 아니길 바랐지만 말하는 걸로 봐서는 날 매우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았다. 누군지 보기 위해 모자와 마스크 사이로 얼굴을 보려고 하자 그 남자가 모자와 마스크를 벗으며 말했다. "설마 나 잊은 거야? 와, 나 잊은거면 진짜 서운한데." 얼굴을 보는 순간 떠오른 생각은 좆됐다. 그냥 고개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지나갈걸... 내 표정을 본 김태형이 웃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나 연예인 맞는데 이렇게 감싸고 다녀도 보일 거 다 보여. 네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서 앞을 제대로 못 본 거지. 근데 지금 이대로 가려는 거야? 애들 얼굴은 보고 가야지. 얼른 들어가자." 김태형은 그 상태에서 내 어깨를 잡고 돌려 룸으로 들어갔다. 조금은 시끄럽게 술 마시던 소리가 조용해지면서 시선이 우리 쪽으로 집중됐다. "야, 드디어 우리 다 모였네." "병신이냐? 아직 전정국 안 왔거든" "아, 쏘리. 다 온 줄 알았지." "근데 그 앞에 여자는 누구?" "와, 박지민 병신이냐? 우리 이름이를 못 알아봐?" 김태형의 말에 진짜? 야 고개 좀 들어봐.라며 한 마디씩 던졌다. 내가 원숭이냐 구경하게... 아, 얼굴이 원숭이지. 내가 잊고 있었네 ^^ 이렇게 된 거 빨리 인사만 하고 타이밍 봐서 나가자는 생각으로 인사를 했다. 안녕?
"난 안녕 못하는데." 민윤기 저 새끼는 학교 다닐 때부터 싸가지가 없었다. 내가 하는 것마다 시비 걸고 그냥 전교에서 싸가지 없는 걸로는 원톱이었다. 그 싸가지 여전하네. 머리 색은 또 왜 저래 지가 프로듀서지, 아이돌이야? 민윤기는 프로듀서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곡만 썼다 하면 무조건 음원 차트 1위. 모든 아이돌들과 가수들, 랩퍼들까지도 곡을 받고 싶어한다는 기사는 늘 포털 사이트 메인에 걸릴 정도로 쟤한테 곡을 받고 싶어하는 가수들이 넘쳐났다.
"또 우리 윤기 예민하게 군다. 오랜만에 본 건데 말 좀 착하게 하면 어디가 덧나냐? 잘 왔어. 빨리 와서 앉아." 민윤기는 악마라면 김석진은 천사였다. 학교 다닐 때도 내가 민윤기한테 욕 먹을 때마다 김석진은 항상 나서서 보호해 주고 그랬다. 역시 한 번 천사는 영원한 천사다. 갑자기 쿡방이 유행을 타게 되면서 김석진은 한 케이블 채널에서 하는 요리 프로그램에서 최연소 훈남 셰프 타이틀을 달고 출연 중이었다. 학교 다닐 때도 김석진 요리 솜씨는 장난 아니었지.
"넌 어떻게 점점 더 못생겨지냐. 5년 전에도 못생겼었는데 지금은 더 못생겼... 아, 미안. 장난이야." 넌 내 썩어가는 표정을 보고도 장난이라는 말이 나오니? 김남준은 그때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다. 근데 차마 맞는 말이라서 화를 낼 수가 없다... 김남준은 국내외 상관없이 가장 많은 러브콜을 받는 모델로 꼽혔다. 백화점만 가도 김남준 얼굴을 한 열 번은 보니 5년동안 안 보고 싶어도 볼 수밖에 없었다.
"우리 이름이는 지금도 예쁘거든?????????" 쟤는 입 좀 닫았으면 좋겠다. 아니, 왜 얘는 한 마디를 해도 열 마디를 한 것처럼 시끄럽지? 학교 다닐 때도 딱 한 마디했는데 왜 수업 시간에 떠드냐며 혼자만 혼날 때 불쌍했는데 여전하네. 정호석은 국내 안무가 중에서는 거의 탑이었다. 유명한 외국 가수들 안무를 짜게 되면서 굉장히 유명해졌는데 최근에 김태형이 속한 그룹 안무를 짰다는 기사도 봤다.
"아, 쫌! 니는 그 주디 좀 닫아라. 내 시끄러버 살 수가 없네. 그라고 와 이름이가 니 이름이고. 내 이름이지." 무용 때문에 부산에서 왔다던 박지민도 여전했다. 표준어 쓰다가 흥분하면 사투리 나오는 거. 근데 내가 왜 네 ##이야. 나는 우리 부모님 이름인데... 우리나라 무용 하면 박지민이었다. 국내 대회는 물론 세계 대회까지 나가기만 하면 1등. 최근에는 세계 투어 공연까지 했다던데 이렇게 한가하게 놀아도 돼? 김태형은 자리에 앉으며 나를 옆자리에 앉혔다. 우리 다 뭐 하고 지내는지는 알아? 너네 모르면 대한민국에서 병신 취급 받아.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대충이라고 둘러댔다. 데뷔한 지 3년만에 남자 아이돌 원톱을 달리고 있는 그룹에 속한 김태형까지. 김태형이 속한 아이돌 그룹은 앨범만 냈다 하면 음악 방송 1위고, 연말 가요 대상은 다 휩쓸었다. 또, 거기에 김태형은 모든 여자 아이돌들의 이상형으로 꼽히고 있었다. 그룹 내 인지도 1위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아직 오지 않은 전정국을 얘기하자면 그냥 여기서 원톱이었다. 아니 국내 원톱.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전정국네 기업 이름은 알 정도로 유명했다. 모르면 간첩이지. 전정국은 학교 다닐 때부터 똑똑했는데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미국에서 경영 수업을 받고 조기 졸업하여 현재는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고 들었다. 그것도 사원부터.
"근데 전정국 이 새끼는 왜 안 와. 우리 안 오면 죽일 것처럼 말하더니만."
"아까 연락 왔는데, 얘 사수가 장난이 아닌가 봐. 자기 잔업을 몽땅 얘한테 시킨대."
"사수 하나는 잘 만났네. 그 새끼는 고생 좀 해야 정신차린다니까?" 윤기 민윤기의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벌컥 열리며 수트를 차려 입은 전정국이 헉헉대며 들어왔다. 쟤도 양반은 못 되네. 자기 얘기하는 거 어떻게 알고 딱 왔대? 미친 새끼야 왜 이렇게 늦게 와! 정호석의 말은 간단히 씹고 자리에 앉더니 물부터 마신다.
"아니, 사수 새끼가 일 존나 시키잖아. 지 일인데 왜 나한테 시켜? 내가 승진만 하면 그 새끼부터 자를 거야. 야, 근데 김태형 네 옆에 앉은 여자애는 누구냐? 애인?"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만 만지고 있었더니 못 알아보는 듯했다. 그냥 그렇게 평생 못 알아보면 안 되겠니...? 김태형은 나를 툭툭치며 고개를 들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래 어차피 한 번은 다 봐야 되는 얼굴이니까 빨리 보고 나가자. 고개를 들자 안주를 주워 먹던 전정국이 놀란 표정을 하고 박지민 쪽으로 뱉었다. "아, 더러운 새끼야! 먹을 거면 얌전히 먹던가!" "야, 쟤 진짜야?" "그럼 가짜겠냐? 사수 때문에 드디어 미친 건가." "아니, 난 쟤 이번에도 안 올 줄 알았지. 그럼 우리 다 모인 거네." 이번에도 안 오고 싶었는데 안 오면 사람 시켜서 나 찾는다면서요... 무서운 새끼. 쟤는 한 번 한다면 하는 성격이었다. 학교 다닐 때 그 성격으로 피 본 애가 한 두명이 아니었지. 건배나 하자는 김석진의 말에 대충 건배만 하고 술은 못 마신다며 잔을 내려놨다. 씨발 내가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따 집 갈 때 편의점 들려서 맥주나 사서 혼자 마셔야겠다. 그럼 먹지 마.라며 내 잔을 뺏어가는 김남준을 살짝 흘겨 보고는 연락 없는 카톡만 보고 있었다. 제발 아무나 카톡 좀 해 줬으면 좋겠다. 아님 급한 일이라고 아무나 전화 좀. 빨리 이 곳을 탈출하고 싶었다. 나 없어도 잘 놀면서 왜 부른 거래?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을까. 아무도 연락이 안 오길래 포기하고 그냥 멍하게 앉아 있었다. "야, 너 전화 온다. 오세훈? 너 남자랑도 연락해?" 내가 남자랑 연락을 하는 게 뭔 상관이야.라는 눈빛을 정호석에게 한 번 쏴 주고는 전화기를 들고 나가서 받았다. 급한 일 아니여도 무조건 급하다고 하고 나가야지. "여보세요." '지금 어디야? 안 바쁘면 영화 같이 보자.' "죽고 싶냐? 혼자 보면 되지. 왜 날 불러." '지금 나오면 이따 술 사 줌. 아, 한 번만 같이 가자. 어?' 가기 싫어도 무조건 갈 거다. 오세훈에게 지금 위치를 설명해 주고는 근처에서 만나자고 하니 자신도 근처니 여기로 오겠다고 했다. 예스, 이렇게 탈출을 하는구나.
"우리 이름이 우리 몰래 벌써 남자 친구 만들고 그런 거야? 오빠 좀 섭섭한데?"
"왜 네 이름이야. 뒈질래? 이름아 맞지? 그래서 전화 온 걔는 누군데?" "그냥 친구야. 나 갑자기 약속 생겨서 가야겠다. 나중에 보자." 나중은 무슨 평생 안 보고 싶은데. 가방을 챙겨서 나오자 전정국이 쫒아 나왔다. 계집애가 위험하게 혼자 가려고? 데려다 줄게. 아니, 걔가 여기로 오기로 했어. 그럼 같이 기다려 줄게. 그 새끼 얼굴도 좀 보고. 전정국이 언제부터 이렇게 오지랖 넓은 남자였나. 제발 오세훈이 빨리 오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아니 얘는 근처라면서 왜 안 와? "5년동안 뭐하고 지냈냐." "어... 나 그냥 학교 다녔지." "우리는 안 보고 싶었어?" "..." "아니, 우리 생각을 조금이라도 하긴 했어?" "..." "됐다, 내가 너한테 무슨 대답을 기대하냐. 핸드폰이나 줘 봐." 말은 줘 봐.라고 해 놓고 내 손에 있는 핸드폰을 뺏어가는 이유는 뭐냐... 평소에 귀찮다고 잠금을 안 해 놓은 게 이리 큰 잘못이었을까. 전정국이 홀드를 해제하고 내 배경화면을 보더니 너 아직도 강동원 좋아하냐.라며 비웃었다. 아, 빨리 내놔. 번호 저장했으니까 연락하면 받아라. 안 받으면 학교 앞으로 찾아갈 거야. 나는 대충 어어, 대답을 하고는 친구 온다며 전정국을 돌려 보내려고 했다. "아, 오면서 차가 막혀서 좀 늦었어. 많이 기다렸냐? "죽고 싶냐? 이따 풀로 안 쏘면 진심 죽일 거다." "오키오키. 옆에는 친구 분? 같이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야, 빨리 가자. 벌써 아홉 시야." 나는 대충 전정국한테 손인사를 하고는 오세훈과 영화관 방향으로 함께 걸었다. 왜 안 들어가고 계속 보고 있지. 옆에서 누구냐고 묻는 오세훈을 조용히 하라며 한 대 치고는 전정국을 모르는 척 걸었다. 오세훈이랑 술까지 마시고 집에 도착해서 널부러져 있는 옷들을 대충 치우고 침대에 누웠다. 누구 방인지 참 더럽네. 엄마가 봤으면 난 생활비고 학비고 죄다 끊기겠지. 내일 공강이니까 일어나서 좀 치워야겠다. 대충 화장을 지우고 눕자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확인하니 전정국이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전화래. 무시하고 자려는데 다시 한 번 울렸다. 안 받으면 지금 당장 우리 집으로 찾아올 것 같은 기세에 어쩔 수 없이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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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은우 식탐 진짜 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