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폰서 민윤기 X 여배우 너
02.
박지민 기자를 만나기로 한 날은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이였다. 나는 유독 비가 오는 날엔 다른 날보다 컨디션이 나빴다. 어렸을 때부터 그랬다. 내 우울한 현실을 대변하는 거 같기도 하고, 엄마가 집을 나간 날이 비가 엄청나게 퍼붓던 날이였다. 그 날 생각도 나서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아무튼, 오늘은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 인터뷰는 잘 할 수 있을지 걱정됐다. 오늘 하기로 한 인터뷰는 이번에 찍었던 드라마에 대한 것들과 차기작은 어떻게 되나, 뭐 이런 내용이였다. 표면적으로는.
과연 이 사람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건지, 그게 몹시 궁금했다. 소문이라고 해도 어떻게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 나에 대한 소문인데 내가 모를리가 없는데 말이다. 어떻게 알게 된 건지, 정말 소문이 떠돌고 있는게 맞는지 인터뷰가 끝나고 두루뭉술하게 물어볼 심산이였다. 사실 인터뷰는 형식적이였다. 그저 이 기자를 만나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지.
" 안녕하세요 "
" 아, 안녕하세요. "
" 일찍 오셨네요? 아직 시간이 좀 남았는데 "
" 전에 이 근처에 볼일이 있어가지고요. 여주씨도 일찍 오셨네요. "
강남에 한 세트장에 도착했더니 약속시간보다 20분이나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박지민씨가 도착해있었다. 어떻게 생긴 사람인가 궁금했었는데 예상과는 달리 인상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내가 여태까지 본 기자중에 제일 순한 인상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박지민씨는 쓰고있던 안경을 내려놓더니 내게 악수를 청했다. 저 착한 가면속에 철저하게 본인을 숨겨놓는게 틀림없어. 딱히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내민 손을 거절하는건 예의가 아니니 나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했다.
인터뷰는 순조롭게 진행됐다. 이번 드라마는 어떻게 시작했는지, 찍는데 힘든 점은 없었는지, 상대 배우와 호흡은 잘 맞았는지. 뭐 다른 인터뷰들과 다를 게 없었다. 중간중간 잡지에 올릴 사진을 찍으려고 몇 번 박지민씨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만 빼면 소음 하나 없이 조용했다. 인터뷰가 거의 막바지로 치닫을 무렵, 주머니에 넣어둔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진동으로 해놔서 시끄러운 벨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조용한 분위기에선 진동소리조차 크게 들렸다.
" 전화예요? 받고 오셔도 돼요. "
" ..아니예요. 계속 해요. "
핸드폰 액정을 보니 민윤기의 전화였다. 난 화면을 확인하고 깜짝 놀라 바로 주머니에다 핸드폰을 넣었다. 박지민씨는 전화를 안 받는 나를 한 번 이상하게 쳐다보더니 혹시나 의심하는 건 아닐까 불안했는데 다행히 별다르게 생각 안 하는 듯 다시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행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마지막 질문 할게요. "
" 네 "
" 김여주씨는 3년 전 혜성같이 등장해서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죠. "
" ... "
" 무명시절도 없이 단번에 주연을 꿰차면서 말이예요. "
" ... "
" 지금 연기자를 준비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데뷔작부터 주연을 맡은 비결을 좀 알려줄 수 있을까요? "
질문을 한 박지민씨를 한 번 쳐다봤다.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질문에 가시가 돋혀있다는 걸. 그게 진짜로 궁금한 게 아니잖아 그쪽은. 저 악의없는 웃음 속에 어떤 모습을 감추고 있는지 훤히 보였다. 무슨말을 할지 잠시 생각하다, 입가에 미소를 짓고 말했다.
" 많은 분들이 저는 무명시절도 없이 단번에 주연을 맡은 줄 아시더라고요. 그게 아닌데. "
" 아.. 그래요? "
" 첫 작을 맡기 전에 몇 백 번의 오디션을 보러 다녔어요. 어렸을 때부터 배우가 꿈이였거든요. 하지만 번번히 떨어지고 말았죠. "
" ... "
" 이 길이 내 길이 아닌가 생각할 때 쯤, 김정호 감독님을 만나게 됐어요. 제 데뷔작 감독님이요. "
" ... "
" 오디션을 봤는데 감독님이 저를 여주인공으로 최종 선택해주셔서, 그렇게 첫 작을 주연을 맡게 된 거예요. "
" 아.. "
" 제 은인이시죠. 꿈을 포기할 때 쯤 제게 기회를 주신 분이시니까. "
" 그럼.. "
" 네. 저도 다른 배우들이랑 똑같아요. 나름 고생도 많이 하고 좌절도 몇 번 겪고나서 데뷔하게 된 거죠. "
박지민씨가 나를 빤히 바라봤다. 입은 미소를 짓고있지만, 눈은 웃고있지 않았다.
" 뭐 딱히 비결이랄 건 없어요. 엄청나게 노력하고, 또 노력하면 된다는 것? "
" ... "
" 노력은 배신하지 않아요. 언젠간 기회가 오죠. "
이정도면 질문에 답이 됐을라나. 말을 마치고 박지민씨의 표정을 보니, 만족한다는 듯 수첩에다 옮겨적고 있었다. 정말, 한결같은 표정이다. 저 사람. 자신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웃고있었다. 그래, 잡지에 스폰이니 뭐니 이런 내용이 올라가는 건 저 사람도 바라지 않겠지. 진짜 원하는 대답이 아마 저거였을지도 모르고. 박지민씨는 이것저것 적더니 다 적은 듯 수첩을 덮었다.
" 인터뷰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 아니예요. 끝난건가요? "
" 아, 한 가지 더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
" 무엇인가요? "
" 이건 잡지에 실리지 않을 것이니 안심하세요. "
일어나서 갈 준비를 하려는데 박지민씨가 녹음기 레코더 버튼을 끄며 내게 말했다.
" 사실이 아닌지 맞는지 궁금해서 말이죠 "
" ... "
" SY그룹에 엮인 일, 정말 모르는 일 인가요? "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본다는 표정을 하고, 순수한 웃음을 지으면서, 하마터면 그 표정에 속아 넘어갈 뻔 했다. 정말, 연기자는 내가 아니라 그쪽이 해도 되겠어. 나는 그 어떤 표정도 짓지 않은채 대답했다.
" 저번에 대답했던 거 같은데요. 이런 질문 상당히 기분 나쁩니다. "
" 아, 그럼 질문을 바꿔서 "
" ... "
" SY그룹 민윤기 전무를 아시나요? "
들고있던 가방을 하마터면 놓칠 뻔 했다. 저 사람 입에서 나온 민윤기가 내가 알고 있는 민윤기가 맞는지 생각했다. 대체 이 사람,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온몸에 소름이 돋을 지경이였다. 당장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아무도 모르는데, 당신이 그걸 어떻게 알아? 민윤기를 당신이 어떻게 아냐고. 쿵쿵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대답했다.
" ...그걸 저한테 왜 물어보는 건지 오히려 제가 묻고싶네요. 저는 그 그룹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
" 정말인가요? "
" 기자님이 무엇을 원하시고 물어보시는지 모르겠는데, 자꾸 이렇게 캐물어 봤자 저는 대답할 게 없다는 걸 알고계셨으면 좋겠네요. "
난 절대 그쪽을 만족시켜 줄 생각이 없어. 세상은 민윤기와 나의 관계를 몰라야 해. 계속 물어봤자 나는 똑같은 대답을 반복할거고, 사실은 더더욱 꽁꽁 감출거야.
" ...알겠습니다. "
박지민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는 등에 흐르는 식은땀을 느꼈다. 잘했어. 잘한 걸 거야. 태연하게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대답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또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네요. "
"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또 만나겠죠. "
" 그렇겠죠. "
"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
박지민씨에게 인사를 한 뒤 세트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매니저 오빠가 잘 끝냈냐고 물어왔다. 응, 잘 끝냈어. 차로 내려가는 와중에 핸드폰을 들어 민윤기에게 온 연락을 확인했다. 전화 뿐만 아니라 문자도 보내왔었다. 차에 타자마자 민윤기에게 전화를 했다.
" ...아, 민윤기씨. 전화했었어요? "
' 뭐 하는데 전화를 안 받아. '
" 스케쥴 하느라 못 받았어요. 미안해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
' 저녁에도 스케쥴 있어? '
" 아뇨. 오늘은 이제 없는데.. "
' 오늘 저녁에 김석진이랑 같이 밥 먹자고. 오늘 밖에 시간이 안 되는 모양이야. '
" 아. 저는 괜찮아요. 어디로 가면 돼요? "
' 내가 너희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6시까지 앞에 나와. '
" 민윤기씨가 온다고요? 혼자 가도 괜찮.. "
' 나오라면 나와. 끊는다 '
뚝. 무슨 말도 못하게 칼같이 끊어버린다. 끊겨버린 전화에 어이가 없다가도, 이게 민윤기의 성격이니 그려려니 했다. 나도 많이 익숙해졌다. 민윤기한테. 처음엔 너무도 무뚝뚝한 성격에 날 싫어하나?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무뚝뚝 한 거 보고, 아 원래 성격이 이렇구나 알게됐다.
박지민 기자를 만난 거, 민윤기에겐 말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민윤기를 알고 있다는게 걸리긴 하지만.. 그래, 아니라고 했으니까, 그 기자도 그렇게 믿겠지. 때론 거짓이 진실인 척 하고 믿어야 할 때도 있는 것이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믿어주길 바란다.
...아직, 나는 지금 이 생활이 좀 더 지속되길 원한다.
방해같은 건 원하지 않아.
*
" 어 왔다 "
6시가 되기가 무섭게 저기서 민윤기의 차가 보였다. 혹시 몰라서 10분 전부터 나와있었더니 요즘 날씨에 몸이 금방 얼었다. 장갑에 머플러까지 했는데도 이 강추위를 견딜 순 없었나보다. 민윤기 차가 내 앞에 멈추자마자 문을 열고 의자에 앉았다. 으으.. 진짜 춥다. 유독 추위가 약해서 탈이였다. 사계절중에 제일 싫어하는 계절이 겨울이였다. 추운날씨 자체가 싫어서 차라리 더운 게 나았다. 민윤기 차는 히터를 틀어 놓았는지 따뜻했다. 너무 추워서 손을 히터 나오는 곳에다 대니 민윤기가 날 쳐다봤다.
" 추워? "
" 조금요.. 원래 추위를 좀 타요. "
" 이거 덮어 "
" 이거 민윤기씨 옷 아니예요? "
" 어. 덮고있어. 난 지금 안 입으니까 "
" ..고마워요. "
민윤기씨가 운전석에 걸려있던 코트를 내게 건냈다. 얼떨결에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받았는데, 코트를 자세히 보니 어디서 낯이 많이 익는다. 어.. 이거,
" 이 코트 제가 선물해준 코트죠? "
" ..그런가 "
" 맞아요! 작년에 해외촬영 갔다가 사온 거. 입고 다니고 있었어요? "
" 몇 번 입고다니긴 했는데. "
" 아 왠지 뿌듯하네. 이런 맛에 선물 하나봐요. "
작년에 선물해줬을 땐 잘 입고다니지 않길래 혹시 마음에 들지 않아서 안 입는건가 생각했는데 그 뒤로 나도 선물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다가 1년이 지난 오늘 이렇게 보니 뭔가 반가웠다.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건 아니였구나. 혹시 저런 스타일의 코트를 싫어하는 건가, 내가 잘못 선물한건가 했는데 아니여서 다행이다. 괜히 뿌듯한 기분에 웃음이 났다.
" 오늘 무슨 스케쥴 한거야? "
" 아, 그냥 인터뷰요. "
" 무슨 인터뷰? "
" 드라마 찍은 거랑, 차기작은 뭐 어떻게 될지.. 잡지 인터뷰였어요. "
" 별 내용 아니네. 차기작은 정한거야? "
" 두세개로 추려놨어요. 조만간 고르려구요. "
" 공백기는 없는 게 좋아. "
" 네 알겠어요. "
그렇게 한동안 우리 둘은 대화가 없었다. 정적이 이어질 때 쯤, 민윤기의 전화벨이 울렸다. 핸드프리로 전화를 받더니 말을 이었다.
" 여보세요? ..어. 아니, 조금 있음 도착해. 한 5분 안으로. "
아마 석진씨 인 것 같았다. 시간은 6시 20분을 지나가고 있었다. 원래 만나는 시간을 모르니 이게 늦은건지 빠른건지 알 수가 없었다. 민윤기는 이것저것 말하더니 전화를 끊었다. 궁금한 표정으로 민윤기를 쳐다보니 입을 열었다.
" 김석진. 언제 오냐고 "
" 그런데 원래 몇시에 만나기로 한 거예요? "
" 6시 반 "
" 아.. 어디로 가는거예요? 무슨 식당? "
" 나도 몰라. 김석진이 알려주는 대로 그냥 가는거야. "
" 그렇구나.. "
민윤기는 한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핸들을 이리 저리 꺾었다. 되게 구석에 있나보네.. 골목에서 또 골목으로 들어간다. 이런데에 식당이 있나 생각할 때 쯤, 민윤기가 차를 세웠다.
" 내려 "
" 여기예요? "
내리라고 해서 일단 내렸는데, 정말 주변에 아무것도 없었다. 뭐 숨겨진 맛집이라도 되는건가. 민윤기가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 서울에 이런 데가 있는지 처음 알았어요. "
" 나도야. "
" 어디예요? "
" 김석진이 나와있겠다고 했는데.. 아, 저깄네. "
저기서 익숙한 인영이 보이더니, 석진씨가 우리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정말 아무것도 없고 식당 하나만 달랑 있는 곳이였다. 이런 데 찾기도 쉽지 않겠네. 석진씨는 대체 이런 곳을 어떻게 알고 있는지 신기했다.
" 오랜만이예요 여주씨. 잘 지냈어요? "
" 잘 지냈죠. 석진씨는요? "
" 저도 뭐 잘 지냈죠. 아, 스테이크 좋아해요? 여기 스테이크 집인데 "
" 네 좋아해요. "
" 다행이네요. 들어갈까요? "
석진씨의 안내에 따라 안에 들어가보니, 조용한 분위기에 아담한 곳이였다. 손님도 오로지 우리 뿐이였다. 가게 소품들이 다 심플하고 예뻐서 인테리어는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가게 주인이 자리를 안내해준 자리에 앉았다.
" 일부로 사람들 발길이 뜸한 곳으로 골랐어요. 그래야 편할 것 같아서 "
" 가게 분위기랑 인테리어 다 괜찮은 거 같아요. 마음에 들어요. "
" 그래요? 다행이네요. "
" 어떻게 이런 곳을 알게 된거예요? "
" 전에 한번 와 본 적이 있어요. "
" 그렇구나.. "
신기해서 가게를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조명도 은은하게 주황색으로 비추고, 벽에는 파스텔 톤의 그림들이 전시되고 있었다. 사장님이 우편을 모으시는게 취미인건지 한 쪽에는 옛날 우편부터 다른나라 우편들까지 쭉 나열 되어 있었다. 되게 신기하다. 바깥세상과 다른 세상에 온 듯한 기분이였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었다니.
" 이렇게 셋이 모인 것도 오랜만이네요. "
" 그러게요. 아무래도 셋 다 바빠서.. "
석진씨는 아무래도 병원 일로 많이 바쁘다 했다. 이런 저런 얘기를 하다가 어쩌다 보니 석진씨와 민윤기의 고등학교 이야기가 나왔다. 민윤기와 석진씨가 처음으로 만났을 때 얘기를 하는데, 하마터면 웃겨서 웃음이 나올 뻔 했다.
" 저한테 다짜고짜 너 돈 있냐? 이렇게 물어보는데, 정말 돈 뜯는 줄 알고 식겁했잖아요 "
" 왜요? 왜 물어 본 거예요? "
" 민윤기가 반장이였거든요. 알고보니 학급비를 걷어야 됐었는데, 그렇다고 너 돈 있냐? 이렇게 물어보는 애가 어딨어요. "
" 내가 언제 그랬다고 "
" 그랬거든. 학급비 걷는다고 돈 내라고 하면 되는걸, 앞뒤 싹 다 자르고 그렇게 말해가지고. "
" 많이 당황 했겠다. "
" 그런데 애가 알고보니 원래 성격이 저렇더라구요. 그 때 부터 민윤기 무뚝뚝한건 알고있었죠. "
" 그런데 둘은 어떻게 친해진 거예요? "
" 뭐 그런게 궁금하냐 "
" 우리 둘이요? "
내가 모르는 10년전 민윤기 이야기를 듣는건 꽤 흥미로웠다. 나의 학창시절은 우울하다 못해 암울한데 민윤기와 석진씨는 정말 제대로 된 학창시절을 보낸 것 같아 신기했다. 민윤기는 자신의 얘기를 듣는 게 쑥스러운 듯 말없이 묵묵히 음식만 먹고 있었다. 석진씨는 잠시 생각하는 듯 싶더니 말을 이었다.
" 한번은 같은 짝꿍이 된 적이 있었어요. 자리는 맨 뒷자리였나.. 그 앞자리였나 그랬을 거예요. "
" ... "
" 민윤기도 원래 말을 별로 안 하는 스타일이고, 저도 말 걸어주지 않으면 딱히 먼저 말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우리 둘은 짝꿍인데도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었어요. "
" 우와.. "
" 그런데 민윤기가 어느날 갑자기 뜬끔없이 '너 공부 잘하냐?' 이렇게 물어보는 거예요. "
" 왜요? "
" 그래서 왜 그러냐고 물어봤죠. 그랬더니 한껏 짜증나는 얼굴을 하면서, "
" ... "
" 요번에 성적 떨어지면 아버지한테 혼난다고. 나올 만한 것들 좀 알려달라는 거예요. "
" 정말요? "
" 민윤기 아버님이 알다시피 회장님이잖아요. 그런데 저렇게 말하는 거 보니까 갑자기 동질감같은게 생기는 거 있죠? "
" ... "
" 저런 집 애들도 성적 떨어지면 부모님한테 혼나고 그러는구나. 다른 애들이랑 다를게 없구나 하고. "
" 난 기억도 안 나는구만 "
" 그래서 알려주다 보니, 애가 말 하는 것도 저랑 잘 맞고. 아마 그렇게 친해진 거 같아요.
" 신기하다.. "
뭔가 그때의 민윤기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공부에 대한 걱정도 없고 학업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을 것 같았는데 다른 평범한 고등학생과 별다를 게 없었다는 게. 민윤기는 기억도 안 나는 얘기를 하고있다며 둘러댔다. 좋겠다. 학창시절을 둘 다 재밌게 보낸 것 같아서 부러웠다. 그저 졸업장만 얻으려고 겨우 다녔던 나와는 달랐다. 친구같은 거 없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저 둘을 보면 한 명 쯤은 있어도 좋았겠다 생각도 들고.
" 다 먹었으면 가지? "
계속 이야기를 하며 먹다보니 음식들을 거의 다 먹었다. 저녁을 많이 먹으면 아침에 얼굴이 부어서 일부로 음식을 남긴 나에 비해, 석진씨와 민윤기는 음식들을 다 해치웠다. 석진씨가 내 그릇을 보더니 왜 먹지 않냐고 물어봤다.
" 저녁을 많이 먹으면 이상하게 아침에 얼굴이 붓더라구요. 또, 이제 새 작품 들어가야 되서 관리도 해야되고.. "
" 연예인이란 참 힘든 직업인 거 같아요. "
" 더 안 먹어도 되겠어? "
" 네, 괜찮아요. 다 먹었음 가요. "
나도 남긴 음식이 아까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먹으면 먹은 만큼 살을 빼야되서 차라리 애초부터 적게 먹는게 나았다. 우리 셋은 계산을 마치고 가게를 나왔다. 밖은 금방 해가 저물어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 다음에 또 봐요. "
" 네 석진씨도요. "
" 잘 들어가요. 민윤기 너도 잘 가고. "
" 들어가라. "
석진씨와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차에 탔다. 민윤기는 곧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했고, 금방 골목을 빠져나와 대로변으로 진입했다. 퇴근시간이라 그런지 차가 좀 밀리는 거 같았다. 나는 밖에 풍경을 바라보다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밝게 웃으면서 지나가는 걸 보고 혼잣말로 좋겠다.. 라며 중얼거렸다. 민윤기가 날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뭐가? "
" 저기 여학생들이요. "
" 그게 왜? "
" 그냥, 밝아보이잖아요. "
" 별게 다 "
그러게요. 별게 다 좋아보이네요. 나도 다시 저 때로 돌아가면 저렇게 밝게 웃을 수 있을까요. 하지만 이내 생각을 거뒀다. 상황이 바뀌어 있지 않는 한 똑같은 암울한 생활이였겠지. 지금은 다시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 저는요, 가끔 제가 살고있는 생활이 안 믿겨질 때가 있어요. "
" 왜? "
" 이런 생활을 할 거라고 평생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
가끔 TV에서 내 이름을 듣게 되면 나도 모르게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데뷔한지 3년이나 지났지만 아직도 내가 대중에게 알려진 배우라는게 안 믿길 때가 있었다. 익숙해 질 때도 됐는데 아직 멀었나보다. 이렇게 큰 관심을 수용하기엔 아직 내가 덜 성숙했나 싶기도 하고.
" 너무 좋아요. 너무 행복하고. 그렇긴 한데, "
" ... "
" 마음 한 켠이 불안하기도 해요. 가끔은. "
데뷔를 하고, 배우라는 삶이 시작되고나서 제일 많이 생각했던게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싶은 거였다. 행복하면 안 될 것 같았고, 관심을 받는게 부담스러웠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관심을 주는거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데. 촬영을 하러 촬영장을 가도 여기가 내 일터임에도 불구하고 이질적으로 느껴지고 그랬다. 한동안 지속됐었다. 이런 생각이.
" 내가 말했지. 독해지라고. "
" ... "
" 여태까지 네가 살았던 삶보다 몇 배는 더 독하게 생활해야 돼. 그럴 수 없어도 그런 척 행동해야 하고. "
" ... "
" 대중들이 원하는건 배우 김여주지, 23살 평범한 여자 김여주가 아니잖아. "
" ... "
" 처음엔 다들 어려워해. 하지만 다들 잘 해내잖아. 너라고 못 할 게 있어? "
내가 데뷔할 때 부터 민윤기씨는 말했다. 독해지라고. 그래야 여기서 살아남는다고 그랬다. 연차가 쌓이고 나서 보니까 그 부분에 나도 공감을 했다. 확실히 독해져야 하는 건 맞다. 하지만 여태까지 내가 살았던 삶과 너무 달라서 불안함이 느껴지는 게 어쩔 수 없었다. 이것도 내가 연차가 더 쌓이면, 연예계에 더 오래 있으면 해결이 될 문제겠지만, 아직까진 이랬다.
" 알겠어요. 명심할게요. "
그래, 민윤기씨 말대로 더 독해지는 방법밖에 없나보다. 배우로서의 삶을 선택할 때 무엇이든 할 거라고 결심했다. 더 독해져야 한다면, 그래야 했다. 약해지지 말아야지. 마음가짐이 약해지면, 사람이 약해진다. 내가 데뷔하기 전 까지의 삶이 그랬었다. 지금은 그때와 너무나도 다르니까. 나도 달라져야지. 더 강하게 마음을 먹어야지.
그리고, 민윤기와 함께라면... 괜찮을 거 같거든. 그게 무엇이든.
*
몇 번을 고민한 끝에 드디어 다음 작품을 정했다. 16부작의 의학드라마였다. 의학드라마는 처음이라 고민을 좀 많이 했지만 도전해보겠다는 정신으로 하겠다고 말했다. 의학 용어도 많았고, 외워야 할 것도 너무 많았지만, 대본 하나는 잘 외울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다 괜찮았다. 민윤기에게 이 드라마를 하겠다고 하니 잘 해보라고 격려도 해주었다.
배우들이 다 모여 첫 대본리딩을 하는데, 쟁쟁한 선배님들이 너무 많이 계셔서 나도모르게 처음엔 주눅이 들고 말았다. 하지만 분위기는 정말 좋았다. 시종일관 웃음이 끊이질 않았고, 다들 성격이 좋은 분들이신 것 같았다. 주눅이 들었던 나도 어느새 같이 어울려 웃고있었다.
" 여기서 제일 막내가 누구지? 여주씨? "
" 네 저요! "
" 참 세월 빨라. 나도 막내였을 때가 있었는데 말이야. 선배들만 너무 많아서 놀랐죠? "
" 아니예요! 괜찮아요. "
" 우리 잘 해봐요 "
배우중에 제일 연차가 높으신 선배님이 내게 먼저 말을 걸어주셨다. 먼저 다가가기 힘든 분이셨는데 이렇게 먼저 말을 걸어주셔서 고마웠다. 다른 선배 배우들도 내게 잘 해보자며 용기를 복돋아주셨다. 한 분 한 분 하나같이 다 감사했다.
" 여주씨, 처음 뵈요. 만나서 반가워요 "
" 아, 안녕하세요. "
" 저 알죠? "
" 당연히 알죠! 민다희 선배님. "
이번에 드라마를 같이 찍는 배우 중에 민다희씨도 포함 되있었다. 너무 유명하신 분이라 모를 리가 없었다. 실물로 보니 훨씬 더 예쁘셨다. 역시, 괜히 톱배우가 아니야. 같은 여자가 봐도 너무나 멋진 분이셨다.
" 같이 찍게 되서 영광이예요. "
" 저도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아, 참 그리고 "
" 네? "
" 기사 봤어요. SY그룹 다음 홍보 모델이시라고.. "
" 아.. 네. "
" 축하해요. "
" 감사합니다. "
이번 달을 끝으로 민다희씨는 SY그룹 홍보모델 계약이 끝나게 된다. 누가 봐도 다시 재계약 할 줄 알았는데 내가 맡는다는 기사가 나와서 사람들이 많이 의아해했다. 나도 잘 알고있었다. 내가 맡기엔 아직 큰 자리라는 걸. 괜히 민다희씨에게 미안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내가 그 자리를 뺏은 거 같기도 하고..
" 만만히 보면 안 되는 자리에요. 전 모델로서 충고 하나 하자면. "
" 네.. "
" 뭐, 그 쪽 들도 생각이 있으니까 여주씨를 뽑았겠죠. "
" ... "
" 잘 해봐요. "
민다희씨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지나갔다. 감사하다고 인사하는데, 뒤도 돌아보지 않으시고 걸어가신다. 못 들으셨나.. 인사한 내가 약간 민망해졌다. 못 들으셨나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대본 리딩 하는 곳으로 들어갔다.
*
안녕하세요! 슈가콘입니다!
이렇게 2화를 들고오게 됐습니다!
암호닉 신청해주신 분들, 댓글 달아주신 모든 분들 감사드립니다 흐엉엉 ㅠㅠ
암호닉
슙럽, 안녕윤기야, 봄잠바의 비밀, 딜라잇5, 동룡, 두둠칫, 요거트할매, 희망빠, 달려라 슙슙, 링링뿌, 꾸기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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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님들 사랑해요!!!!!!!♥
저는 3화를 들고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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