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돌아 온 덕선은 힘없이 침대에 걸터앉았다. 정환의 고백을 들은 후, 덕선의 마음은 내내 불편했다.
「됐냐?」
정환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얼버무렸지만, 고백의 말을 쏟아내던 정환의 모습은 결코 장난만은 아닌 듯 보였다. 문득 학창시절의 그가 떠올랐다. 대문 앞에 서서 어색하게 신발 끈을 묶고, 비가 오던 날 우산을 들고 자신을 마중 나오던 그가. 서툴지만 따뜻하게 자신을 배려하며 제 곁을 서성이던 정환이 떠오르자 덕선의 머리가 뜨거워졌다. 복잡함에 머리를 흔들던 덕선은 문득, 서랍 위에 놓인 액자를 보았다.
해맑게 웃고 있는 다섯 명의 어린 아이들. 덕선에게 있어 가족만큼이나 소중한 관계들이었다. 힘들 때도 기쁠 때도, 골목 친구들은 조용하지만 꾸준하게 서로의 곁을 지켜왔으니까. 동룡은 자신에게 네가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고 질문했었다. 덕선은 그 날, 끝끝내 그 질문에 대답하지 못했고, 며칠을 얕은 열병에 앓았다. 선우를 좋아한다 생각했지만 너무도 쉽게 마음이 식었다. 어쩌면 정환을 향한 자신의 마음도 그렇게 가벼운 것은 아닐까, 1988년 어리던 덕선을 덜컥 겁이났었다. 정환과 택에게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네명의 골목 친구들은, 덕선에게도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얕은 열병이 사라졌다 느낀 그 날 이후로 덕선은 정환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그 후 자신이 진정으로 좋아하는 이가 누구인지 알아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저 정환의 생각 밖에 나질 않아서, 졸업을 하고 항상 함께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골목에서 사라질 때 까지도 덕선은 그 답을 찾지 못하고 헤매었다. 자신이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주위 남자들인지, 항상 챙겨주고픈 택이인지, 아직까지도 마음 한 구석에 애틋하게 자리한 정환이인지, 덕선은 정환의 가짜 고백을 받은 오늘까지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액자 속 환하게 웃고 있는 아이들. 나란히 앉아 웃고 있는 아이 중 단 한 명 만이 유난히도 빛났다. 무심하게 주위를 챙기고, 조용하지만 꾸준하게 덕선을 향해 마음을 표현해왔던 그 아이. 아주 긴 시간 부정해왔지만, 덕선의 마음엔 항상 그 아이가 있었다.
한참을 헤매고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 온 자신의 마음에, 덕선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덕선은 겉옷을 챙길 겨를도 없이 집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제야 동룡에게, 답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
「야 김정팔!!」
시끄럽게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침대에 누워있던 정환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 기지배가 미쳤나- 자고있는 가족들이 깰라 정환은 곧바로 문 앞으로 다가갔다.
문고리를 잡은 정환은 잠시 숨을 골랐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조금도 떨리지 않는 척 연기를 해야 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아픈 형과 함께 자라 온 정환에게 양보는 너무나도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정환은 차가운 손으로 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린 후 문을 열었다. 티내면 안돼, 속으로 무한히 반복하면서.
「미쳤냐? 새벽에 무슨 짓이야 이게」
방긋 웃는 덕선의 얼굴에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무뎌지는 법을 수백 번 연습했는데, 덕선의 얼굴을 보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 버렸다. 제 마음도 모르고 항상 실실 웃는 이 못생긴 여자애가, 자신의 눈엔 너무나도 예뻐 보여서, 정환은 가슴이 저렸다.
「야, 개정팔」
「왜, 뭐. 빨리 말해. 가족들 깨.」
덕선은 후, 하고 숨을 내쉬고는 정환의 앞에 주먹을 들이밀었다.
「뭐냐?」
덕선이 다시 한 번 빙그레 웃는다. 저 작은 미소를, 아주 오래전, 기억조차 희미할 때부터 사랑해왔다. 멈출래야 멈출 수 없는 마음이었다.
「원래 아주 옛날에 말하려고 했는데, 지금 말한다」
「뭐?」
정환의 눈을 뚫어져라 쳐다 본 덕선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 너 좋아해」
「...뭐?」
「좋아한다고. 야, 내가 너 때문에 무슨 짓까지 했는지 알아?
너랑 같이 학교 가려고 몇 시간이나 일찍 일어나서 너 기다리고, 너 한번이라도 더 보려고 매일 심부름 도맡아 했어. 너 표정이라도 조금 안 좋아 보이는 날엔 얘가 무슨 일이있나? 아님 내가 부담스러운가?」
정환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제 앞에 선 이 조그만 아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짐작 조차 되지 않았다. 설마, 설마..
「내 신경은 온통 너였어, 너.」
덕선이 꼭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펼쳐 보였다. 그 안에는 정환이 마음을 떨쳐내듯 버리고 온 , 자신의 유일한 사랑인 덕선에게 주고자 아주 오래 간직해왔던.. 붉은 빛의 반지가 있었다.
「하루에도 열두번도 더 보고싶고, 만나면 그냥 좋았어. 내 마음을 나도 잘 몰라서, 좀 오래 헤매느라 늦긴 했지만.. 사실 아주 옛날부터 말하고 싶었는데,」
정환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졌다. 아주 오랫동안, 간절하게 소망해왔던 기적이었다.
「나 너 진짜 좋아, 사랑해.」
덕선이 환하게 웃었다.
그순간 정환은 그 어떤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자신을 찾아 온 제 사랑을 꽉 품에 안았다.
쉽지 않은 길들이 남아있었다. 죽을 때 까지 지키고자했던 친구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정환은 인정하기로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이유에도 포기할 수 없을 만큼, 이 아이를 아주 많이, 좋아한다는 것을.
자신을 안은 온기를 느끼며 덕선도 정환의 등을 끌어안았다. 오랫동안 헤맨 끝에 찾은 제 자리를 느끼며 덕선은 눈을 감았다. 툭, 행복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긴 시간 정환과 덕선을 괴롭혀 온 열병이, 오랜 방황 끝에 그들의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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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팔보고 맘아파서 쪄보는 글 ㅠㅠ
나라도 이렇게 만족해야지.... 내 최고 캐릭터 정환아 행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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