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했다, 너무 사랑해서. 그 예쁜 눈이, 나만을 바라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조물조물 움직이는 그 작은 손이 나만을 만졌으면, 한사람 한 사람 눈을 마주하며 웃어주는 그 예쁜 입가에서 내 이름만을 불렀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너는 오롯이 나의 것이었으면 좋겠다고. 이 사실을 너는, 알고 있을까. 민석아. 나는 너를 내 방식대로 사랑하고, 함께 할 거다. 민석아, 나는 우리가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너를 잊은 적이, 네 곁을 떠난 적이 없다. 그리고 지금, 네 마음이 홀로 외로움에 사무쳐 나를 찾아 떠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있다.
[루민] 봄은 있었다.
W. 르망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 이었다. 미친 듯이 덮쳐오던 더위도 새벽부터 내려오는 비로 인해 한층 누그러져 서늘하다는 느낌이 날 만큼, 어느새 여름은 한발 물러 서 있었다. 쫘르륵 촤르륵. 빗소리에 맞춰 돌아가는 물레 소리와, 작업실을 가득 채우는 젖은 흙 내음. 잔잔히 귓가에 퍼지는 음악은, 민석의 기분을 한껏 끌어올려 주었다. 자신의 라면 그릇을 만들어 바치라는 형의 반 협박에 의해 이른 아침부터 물레 앞에 앉은 민석은 작은 손을 이리 저리 꿈지럭대며 어느새 그릇 하나를 뚝딱 만들어 냈다. 만들어 낸 그릇을 건조대에 올리고는 손을 씻어내며 화이트보드를 바라봤다, 조금 있으면 아이들이 수업을 받으러 올 참이다, 방학마다 여는 도자기 교실은 의외로 인기가 있었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흙을 조물 대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민석의 흥밋거리 중 하나였다.
콧노래를 부르며 작업실을 청소하고, 흙을 손질 해 최적의 상태로 만들어 놓았다. 뻐근한 어깨를 두드리며 의자에 앉은 민석은 휴대폰을 집어 들어 익숙하게 게임을 켰다. 삐용삐용 귀여운 캐릭터를 열심히 달리게 하다 곧 싫증이 났는지 휴대폰을 내려두고 기지개를 켰다.
대충 아이들이 올 시간이었다. 밖에선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민석은 자신의 앞치마를 꺼내어 입고 아이 용 작은 앞치마 여러 벌을 꺼내어 각 의자위에 내려놓았다. 문이 열리고 밝게 웃으며 아이들이 들어왔다. 선생님 하고 부르며 끊임없이 재잘대는 아이들에게 민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하나 앞치마를 입혀 주었다. 인원수를 체크하고 출석부를 정리 하는중, 딸랑, 종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종이에 박아 놓은 시선을 들어 아이의 손을 잡고 들어 온 남자의 얼굴을 눈에 담은 민석은 머릿속을 뒤 흔드는 오래 된 기억에 인상을 찌푸렸다.
다정한 웃음을 가득 지어내며 아이를 데려다 주고, 볼에 뽀뽀를 하는 저 남자는, 분명 루한이었다. 몇 년만에 본 루한은, 여전히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이 물씬 풍겨왔다. 잘근 입술을 깨물던 민석은 앞치마를 가지고 아이에게 다가갔다.고개를 들어 다가오는 민석을 바라 본 루한은 잠시 기억을 더듬는 듯하더니 생각이 난 듯 눈을 크게 떠 저를 바라봤다.
"김민석?"
*
새 학기, 교실을 감싸는 어색한 기류에, 민석은 괜히 손가락만 만지작대며 눈을 굴려 주위를 살폈다. 새 학기의 설렘에 조금 서둘러 집을 나서 도착한 민석의 반에는, 아직 비어 있는 자리가 많았다. 멍하니 제 옆자리를 쳐다보며 생각에 잠겨 있던 민석은 옆자리로 떨어지는 가방을 놀란 눈으로 쳐다봤다. 짙은 쌍커플의 두 눈이 참 매력적이었다. 올망졸망 하게 들어 찬 이목구비에 민석은 힐끗 힐끗 눈을 굴리며 루한을 훔쳐 봤다. 그 시선을 느낀 루한은 웃으며 민석을 바라보다, 민석의 가슴언저리에 걸린 명찰을 톡톡 손으로 두드렸다.
“김민석?”
갑작스런 질문에 고개를 살짝 끄덕인 민석은 요상한 표정을 지으며 옆자리에 앉는 루한을 또 다시 힐끗 쳐다봤다.
가방을 내려두고, 기지개를 켜던 루한은, 몸을 돌려 민석을 바라봤다.
“나는, 루한”
*
하루 종일 복잡한 마음에, 민석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제 발에 걸려 넘어지지를 않나, 잘 만들던 그릇을 부숴버리지 않나.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와 민석을 뒤 흔들어 놓았다. 하마터면 아이들이 만든 도자기를 죄다 깨 부숴버릴 뻔 했다. 어느덧 창밖으로 내려오는 빗줄기는 조금 강해 져 있었다. 초록색 우산을 펼쳐 든 민석은 거리에 진동하는 비 내음을 느끼며 집으로 향했다. 온 몸이 바닥으로 꺼지는 느낌이었다. 피곤해, 하고 중얼대며 집 안으로 들어 온 민석은 그대로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늦은 아침, 잠에서 깬 민석은 멍하니 자리에 앉아 밍기적 거리며 느릿하게 하품을 해 댔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더라. 하고 곰곰이 머릿속을 헤집다 저를 향해 말갛게 웃어 보이는 한 얼굴을 떠올려 내고는 깊은 한숨을 내 쉬었다.
"결혼을 한 건가."
어쩐지 마음이 갑갑하게 조여 오는 듯 했다.
‘사랑해, 민석아.’
머릿속을 울려오는 낮은 목소리에 찌르르 가슴이 울렸다. 민석은 자신을 뒤 흔드는 복잡한 생각을 털어내려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티비를 틀었다. 왁자지껄 한 예능 프로그램을 멍하니 바라보며 기계적으로 웃음 짓던 민석의 얼굴은 어느새 눈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얼굴 가득 눈물범벅이 된 민석은 옷장 속의 상자 하나를 꺼내었다. 손때가 가득한 낡은 상자를, 민석은 아픈 눈으로 내려다보며 쓰다듬다 뚜껑을 열었다. 상자 속에는 낡은 핑크색의 핀과 쪽지, 그리고 한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한참을 멍하니 상자 속을 바라보던 민석은, 커다란 청 테이프를 꺼내들어 박스를 봉하기 시작했다. 테이프 하나를 죄다 쓸 때 까지.
며칠이 지나고, 루한을 만난 일은, 꿈 이었던 것 마냥. 민석의 하루는 다시 제 궤도를 찾았다. 아이들이 만든 도자기를 하나씩 포장하며 민석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포장을 마친 도자기들을 모두 택배로 보낸 후, 작업실로 돌아 가는 길에 민석은 편의점에 들러 초콜릿을 하나 샀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에 민석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 차올랐다.
작업실에 도착해 청소를 하던 중. 전기 가마 속 미처 보지 못 했던 작은 그릇 하나가 놓여있었다. 아무래도 아이들 것 중 하나를 빼 먹은 듯 했다. 제 그릇이 오기만을 기다릴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 민석은 직접 가져다 줘야겠다. 생각하고, 그릇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그릇 바닥에 삐뚤삐뚤 적혀있는 이름을 보고 주소를 찾아내려갔다. 집 앞에 도착한 민석은 초인종을 눌렀다. 곧 문이 열렸고, 놀란 눈으로 민석을 바라보는 남자는, 루한이었다.순간 망치로 머리를 두드리는 듯 한 기분에 멈칫 해 있던 민석은 더듬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
“아니, 원래는 저 택배로, 내, 아니 제가 깜빡해서 이걸 빼먹어서, 그러니까…….”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민석은 횡설수설 설명을 해 대었고. 그걸 바라보는 루한의 얼굴은 미묘하게 풀어졌다. 빼꼼 열린 대문 안에선 무척이나 즐거운 듯 한 아이의 웃음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자기야, 누구야?”
입술을 짓뭉개듯 물어뜯으며 애써 생각을 정리하던 민석의 머릿속으로 들려오는 여자의 목소리에, 민석은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가슴이 아팠다. 루한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제 손에 들린 종이팩을 받아들었다. 스치듯 지나간 손은, 무척이나 따뜻하고 부드러워서. 민석은 왈칵 울음이 나오려는걸 참고 도망치듯 뒤 돌아 자리를 벗어났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릇 만 든 거 배달 왔네.”
루한의 목소리가, 민석의 가슴에 비수와 같이 꽂혀들었다.
**
민석의 새 학기는 순조롭게 진행 되는 듯 했다. 낯가림이 심한 터라 새 학기엔 친구를 사귀는데 에 꽤나 마음고생을 많이 하는 편이었는데, 동글동글하니 유순한 민석의 생김새에 모두 호감을 느끼며 먼저 다가왔고, 쉬는 시간이면 민석의 주위는 조용 할 틈이 없었다. 그리고 점점 루한과는 멀어져갔다.
“김민석! 매점가자"
수업을 끝나는 종이 울리자마자, 찬열은 민석을 잡아끌어 매점으로 향했다. 쬐깐한게 꼭 제 동생 같다며 찬열은 민석을 무척이나 챙겨 주었다. 민석의 동그란 어깨위로 찬열의 팔이 걸쳐졌고,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루한은 눈을 찡그렸다.
“거슬려.”
그들을 빤히 바라보며 작게 중얼거리던 루한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민석과 찬열에게 다가갔다. 민석의 어깨 위에 있는 손과 찬열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루한은 민석을 세게 잡아당겨 제 곁으로 끌어왔다. 순식간에 뒤로 밀려 난 찬열의 눈에 황당함이 깃들었다. 찬열은 인상을 찌푸리며 루한을 바라보았다. 루한은 나른하게 웃으며 민석의 얼굴만을 바라봤다. 예상치 못한 전개에 민석 또한 눈을 크게 뜨고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둘을 번갈아 볼 뿐 이었다.
"김민석은, 나랑 갈 곳이 있는데."
여전히 시선은 민석에게 고정 한 채로, 루한은 민석을 잡아끌어 매점으로 향했다. 빵과 우유를 한 가득 사 민석의 품으로 던져 준 루한은,
민석을 의자에 앉히고 다시 민석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부담스러운 그 시선에 민석은 괜히 머리를 만지며 이쪽 저쪽으로 시선을 피했다.
"김민석"
저를 부르는 나긋한 목소리에 민석은 시선을 들어 루한을 바라봤다. 루한의 표정은, 마치 다섯 살 난 아이가 사탕을 뺏긴 듯 잔뜩 심통이 나 있는 것 같았다.
"왜. 너……."
할 듯 말듯, 입술만 달싹이던 루한은 곧 고개를 두어 번 휘젓더니 다시 얼굴 가득 그 나른한 미소를 피어 올렸다. 영문도 모른 채 그 변화를 멍하니 바라보기만 하던 민석은 먹으라며 우유를 뜯어 제 앞으로 내미는 루한에게 고맙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을, 루한은 그저 멍하니 바라 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루한의 알수 없는 행동은 그로부터 쭉 계속되었다. 입시를 위해 밤 늦도록 학원에서 날을 지새어 아침이면 비몽사몽 제 몸을 가눌 힘 조차 없이 졸리워 하는 민석의 책상위엔 매일 아침 대용의 빵과 우유가 올려 져 있었다. 나는 피자빵이 좋아, 하고 지나가듯 얘기 한 취향을 100% 반영하여. 그리고 매 아침, 그 곁에선 루한이 민석이 빵을 먹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점점 민석의 주변은 잠잠 해 지기 시작했다.
그 변화를 민석이 알아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언제나와 같이 민석은 헐레벌떡 교실로 들어왔다. 조금만 더 늦었으면 운동장을 열 바퀴 돌아야 할 뻔 했다. 자리에 앉아 가방을 내려놓고, 가쁜 숨을 고르며 시선을 떨구었을 때. 민석은 제 책상위에 놓인 종이를 발견했다.
종이의 내용을 확인 한 민석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굳어가기 시작했다. 한 장의 종이 속에는 사내 둘이서 난잡하게 얽혀있는 그림이 적나라케 나와 있었고, 빨간 매직으로 그어 진 문구는 민석의 마음을 난도질했다
[게이새끼]
종이를 치울 생각조차 하지 못 한 채 민석은 하얗게 굳을 얼굴을 하고 숨 쉬운 것조차 잊어버린 듯 작게 몸을 떨고 있었다. 어쩌면 좋지, 이걸 어쩌면. 나는, 나를. 복잡한 머릿속이 상황을 이해하려 급하게 돌아갔다. 주위에서 민석을 향한 웃음소리가, 민석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민석의 시선은 불안하게 이리 저리 굴러갔고 당황과 두려움에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 간헐적으로 숨을 내 쉴 뿐이었다.
“김민석, 김민석!”
민석은 토해내듯 숨을 내쉬었다. 눈물과 식은땀으로 흠뻑 젖은 민석은 몸을 일으켜 절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종인을 바라보았다. 집이었다. 민석은 깨질 듯 아파오는 머리를 부여잡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괜찮아 진 것 같았는데. 몇 년이 지나도, 그 기억은 제게 커다란 아픔이었다.
“돌아가고 싶어.”
“뭐?”
“돌아가고 싶어.”
민석은 초점 잃은 눈으로 중얼댔다, 종인은 부엌으로 가 냉수를 한 컵 떠와 아직 멍하게 앉아 몸을 웅크린 민석의 손에 쥐어 줬다.
“먹고 정신 좀 차려, 전화해서 비 맞은 개새끼마냥 낑낑대다 뚝 끊으면 어떡하냐, 사람 걱정 시키는것도 정도가 있지.”
그제야 민석은 멍하니 생각을 되짚었다. 루한의 집 앞에서 도망치듯 뛰어 나온 것 이후로는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정신을 어디다 놓고 다니는지, 이렇게 가다가는 조만간 큰 사고라도 날 것 같았다. 어느 정도 정신을 차린 민석은 그제야 늘 종인과 세트로 붙어 다니던 경수가 보이지 않는다는걸 생각 해 냈다.
“도경수는?”
“죽 사러갔다.”
“죽?”
민석이 의아한 눈으로 종인을 올려다보았다. 종인은 한심하다는 듯 민석의 머리를 툭 치고는 대답했다.
“니가 전화 와서 질질 짜다가 뚝 끊어서 얼마나 놀랬는지 아냐, 그대로 바로 도경수 들고 왔더만 땀에 눈물 범벅을 해선 자고 있고, 도경수
가 너 일어나면 뭐라도 먹어야 한다고 죽 사러갔다. 야, 아무리 봐도 존나 예쁘지 않냐?”
제 걱정으로 시작해 애인 자랑으로 끝이 나는 김종인의 특이한 화법에 민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고맙네. 건성으로 대답 한 민석의 머릿속은 다시 루한으로 가득 차올랐다. 얼마나 지났더라, 민석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보았다, 하나, 둘, 셋. 4년은 지난 것 같다, 루한을 못 본 지.7년 만에 제 앞에 나타난 루한은, 아이와 여자. 결혼, 결혼…….
‘루한, 너는 결혼 할 거야?’
‘아니, 안 할 건데.’
‘왜, 너 닮은 아이랑 토끼 같은 마누라. 그게 꿈이라며’
‘글쎄, 왜 안 할까.’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지난 기억의 조각들이 다시 민석을 조여 왔다. 눈물이 날 듯 코가 시큰거렸다, 다 거짓말, 아이가 루한을 꼭 빼 닮은 것 같았다. 그 여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거기까지 생각 했을 무렵, 요란하게 문이 열리고 동그란 머리통이 집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민석형, 일어났네, 왜 아픈데 혼자 끙끙 앓아요!”
경수는 가쁜 숨을 내 쉬며 아직 따듯한 죽 통을 내밀었다. 민석의 일이라면 물 불 안 가리고 달려드는 경수가 고마웠다, 민석이 아프다고 헐레벌떡 뛰어 다녀왔을 경수를 생각하니 푸스스 웃음이 나왔다. 어느새 숨을 가쁘게 내 쉬는 경수의 곁에 종인이 다가가 등을 토닥여주고 있었다. 제 애인이라고 챙기기는 더럽게 챙겨요. 입을 삐죽이던 민석이 죽을 조금 떠 입에 넣었다.
“맛있네, 고마워 도경수.”
“뭘 이런 걸로, 말만 해요 형, 내가 다 해 줄수 있다니까?”
자랑스레 웃으며 제 가슴팍을 툭툭 치는 경수를 보며 민석은 힘없이 웃었다.
“경수야,”
“예?”
“진짜 다 해 줄수 있어?”
경수는 의아한 눈으로 민석을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왜요 뭐 필요한거 있어요 형?”
“어, 아. 아니야.”
민석은 웃으며 다시 죽으로 시선을 돌렸다, 경수는 그런 민석을 바라보다 종인이 건네주는 물 컵을 받아들며 종인에게 짧게 입 맞추었다. 힐끗 그들을 훔쳐보던 민석은 금방이라도 입 밖으로 튀어 나올 것 같은 한 마디를 꾸역꾸역 죽과 함께 속으로 집어삼켰다.
경수야, 루한 좀 데려다 줘.
-
며칠 새에 왜 이리 말랐냐며 민석을 타박하던 경수는 종인의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어 무작정 민석을 잡아끌어 고기 집으로 향했다, 종인이는 오늘 약속 있대, 카드의 주인은 쏙 빼 놓은 채, 경수는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 벙글 웃으며 주문을 했다,
“도경수 뭘 그렇게 많이 시켜, 다 못 먹어”
“형, 형만 먹을 거야? 나도 먹을 거거든.”
경수는 장난스레 웃으며 민석의 앞에 수저를 놓아 주었다. 고기가 나오기 까지, 경수는 끊임없이 수다를 떨었다, 그 이야기의 90% 이상은 종인의 이야기였다. 어제 종인이 이랬는데, 제가 어쨌더니 종인이 바로 사과를 했다느니, 종인과 뭘 먹었는데 참 맛있었다느니. 마치 종인과 경수의 연애 일기장이 되어 버린 것 같은 느낌에 민석은 간간히 고개를 끄덕이며 반찬을 깨작였다. 어느덧 주제는 종인의 뒷담화로 이어졌고, 민석과 경수는 종인의 단점을 하나하나 파헤치고 있었다.
“아니 형 들어봐, 김종인이 뭘 안 먹는 줄 알아요? 콩이라니까! 아니 다섯 살 난 애도 아니고, 콩을 안 먹어요!”
“그건 도경수 너 아니고?”
“아 형, 내가 무슨 앤가!
조금 오버스럽다 싶을 만큼 강하게 부정을 하던 경수는 테이블을 탕탕 내려쳤다, 그 반동에 아슬아슬 놓인 콜라가 민석의 바지위로 엎어졌다. 커다란 눈을 더 크게 뜨며 경수는 놀란 표정을 지으며 엉거주춤 일어나 어쩔 줄 몰라 했다,
“형 괜찮아요? 뜨겁, 아니 차갑죠, 끈적끈적하죠, 아 형 내가 그러려던 게 아니라…….”
“도경수 불만 있으면 말로 하라니까? 화장실 다녀올게 괜찮아.”
장난스럽게 경수의 이마를 한 대 때려주곤 민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아 끈적끈적 해, 잔뜩 콜라가 뭍은 제 손을 들어 냄새를 맡아봤다, 옅은 흙냄새와 함께 달큰한 콜라의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너한테는 흙냄새가 나, 민석아.’
‘내가 좋아하는 냄새.’
‘흙냄새, 비 냄새 바다냄새’
그리고 루한,
고기를 먹고, 어쩌다 보니 음주로 까지 이어 진 민석과 경수의 저녁은, 한잔이 두 잔이 되었고, 두 잔이 병으로 늘어나 꽤나 많은 술병들이 민석과 경수의 곁에 쌓여있었다. 경수는 거의 정신을 놓다시피 테이블 위로 쓰러졌고, 그런 경수를 멍하니 바라보던 민석은 종인에게 전화를 걸어 경수를 부탁했다. 너도 그 자리에 딱 붙어 있으라던 종인의 말을 무시 한 채, 민석은 제 카드를 꺼내 계산을 하고 비틀 비틀 밖으로 걸어 나왔다.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민석은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그 얼굴이 무척이나 그리워졌다. 다정하게 저를 끌어안아 토닥여주던 그 손길도, 늘 제 안부를 묻던 다정한 목소리도, 무척이나 그리워서 눈물이 날 것 만 같았다.
*
바람에 흩날리는 머릿결이 참 부드러워 보였다, 민석은 멍하니 루한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루한은 고개를 돌려 민석을 발견하곤 미소를 피어 올렸다.
“민석아 왜 이제 와.”
“늦잠을 잤어.”
“그러게 일찍 좀 자라니까, 대학 가기 전에 니 몸이 다 닳겠다.”
영양가 없는 대화를 몇 번 주고받다 민석은 제 손에 든 작은 쇼핑백 하나를 루한에게 건네었다. 쇼핑백을 받아든 루한은 웃으며 쇼핑백 속의 물건을 꺼내들었다. 매끈하게 잘 만들어진 작은 두 개의 술잔. 루한은 의아한 눈으로 민석을 바라보았다. 민석은 민망함에 머리를 긁적이며 루한의 발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나중에, 우리 수능 끝나고 나면 너랑, 나랑 그 잔에다가..”
루한의 웃음소리와 섞여 불어오는 바람은, 참 따스하다고 느껴졌다.
루한, 그 때가 오면, 널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을까?
*
민석은 한참을 그렇게 멍하니 서서 하늘만 바라보았다. 그저 발걸음이 가는대로 몸을 움직였고, 어느 아파트 앞 화단에 쭈그려 앉았다 민석은 작은 몸을 웅크린 채 고개를 느릿하게 흔들며 노래를 흥얼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민석은 까무룩 잠이 들어 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웅크려 잠든 민석의 곁에 누군가가 와 앉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한참을 곁에 머무르다 그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민석아, 너는 내 빛이자, 내 모든 것 이었다. 너를 향한 사랑이라는 명목 하에 시작한 이 일들은, 과연 네게 용서 받을 수 있을까.
너를 처음 본 건, 2학년이 끝나 갈 즈음, 모두가 곧 닥쳐 올 입시의 중압감과, 기대로 부풀어 늘 뜬 구름 같은 분위기가 교실을 잔뜩 휘감아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달큰한게 끌려 매점으로 내려갔는데, 거기서 빵과 씨름을 하는 네가 눈에 들어왔다. 빵을 입으로 먹는 건지, 코로 먹는 건지 모르게. 너는 빵에 코를 박고 아침 햇살을 맞으며 병든 닭 마냥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 모양새가 우습기도, 귀엽기도 해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얼마나 너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크게 울리는 종소리에 화들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 난 너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나를 지나쳐 뛰어갔다.
그렇게 내 시야에서 사라지는 네 뒷모습을 계속해서 내 눈에 담았다.
나는, 어른들이 흔히 말 하는 ‘질이 좋지 않은’ 부류에 속했다. 공부 보다는 친구들과의 우정이 더 중요했고, 놀러 다니기를 좋아했다. 시비를 걸어오는 놈들이 있으면 가끔 주먹다짐을 하기도 했었고, 이런 제 소문은은 이리저리 떠돌고, 소문이 더해지며 유명인사가 된 것 같았다. 저를 대하는 태도는 두 종류였다, 잘 보이려 하거나 없는 놈 취급을 하거나. 옆에서 엉겨 붙어 오는 것 보다야, 없는 사람 취급 해 주는 게 편하기는 했지만. 그리고 매일 밤, 잠이 들 기전엔 매점에서 빵을 먹던 그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3학년이 되었다. 배정받은 반으로 들어가 아직은 띄엄띄엄 앉아있는 놈들을 눈으로 쭉 훑었다. 그러다 너를 발견했다.
민석아, 그때 내 기분이 어땠는지, 혹시 너는 알까. 입 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꾸역꾸역 참아가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침 네 옆자리는 비어있더라고, 네 옆에 가방을 내려놓자. 기대와 긴장이 가득 들어찬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 모습이, 정말 말로는 할 수 없을 만큼 예쁘더라. 민석아, 그날 밤은 늦도록 잠에 들지 못했다. 계속 네 생각이 나서. 지루한 수업 시간을 참지 못 하고 꾸벅꾸벅 졸아대는 네 얼굴이, 말을 걸면 화들짝 놀라며 어색하게 웃을 듯 말 듯 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 얼굴이. 계속 내 머릿속을 휘저어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더라.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네 곁으로는 많은 친구들이 모여들더라, 그리고 너는 내게서 멀어져갔다. 속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너는 나만의 것이어야 하는데. 다른 놈들에게 지어주는 그 웃음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너는 나만의 것이어야 한다 민석아.
찬찬히 머리를 굴렸다. 어떡하면 우리 민석이가, 나만 바라볼 수 있을까. 곧 떠오르는 생각에 작게 웃음을 지었다. 민석아 너는 나만의 것이어야 한다.
점심시간, 삼삼오오 모여 있는 무리들 중, 네게 가장 치근덕대는 놈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나를 보고는 긴장이 역력한 얼굴을 하고 나를 올려다보더라.
“너네, 심심하지 않냐.”
민석아.
“내가 재미있는걸 하나 알고있는데.”
너는
“김민석, 남자 좋아한다, 게이라고 "
나만의 것이어야 한다.
-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불안 불안하던 민석의 하루는 다시 곧게 흐르는것 같았다. 아이들을 가르치고, 형에게 협박을 받으며 그릇을 만들어 바치고, 종인과 경수에게 이끌려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며 민석은 다시 웃으며 하루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매일 밤, 몇 년이 흘러도 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다.
‘루한은, 왜 나를 떠났을까.’
민석아, 하고 부르는 루한의 달큰하고 낮은 목소리가 머리를 울렸다. 낮게 흥얼대던 그 노래들이 머리를 흔들었다. 루한, 나는 아직도 네가 많이 보고싶어.
뜨겁던 태양이 어느덧 저 너머로 지고 있었다. 옥상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어와 민석의 이마를 간질였다. 잠깐만 기다리라며 급하게 뛰쳐나간 루한은 한 시간 넘짓 돌아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은 마음에 민석은 초조하게 손톱을 뜯었다. 배가 고팠지만, 혼자 급식 실에 내려 갈 용기는 없었다. 제 몫으로 던져질 조롱과 욕설, 그 상처들에 민석은 어깨를 움츠렸다. 괜찮아, 루한이 있으니까. 아주 작게 읊조리던 민석은 고개를 길게 빼 학교 근처를 둘러보았다, 루한은 어디에 간 걸까, 그렇게 한참을 먼 곳만 바라보던 민석의 눈이 반짝였다, 멀리서 뛰어오는 익숙한 형체를 발견하고 민석의 입 꼬리는 높게 올라갔다,
곧이어 무거운 철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루한이 숨을 몰아쉬며 민석의 앞으로 다가왔다. 루한의 손에는 쇼핑백이 하나 들려있었다, 아무렇게나 옥상 바닥에 주저앉은 루한은 쇼핑백에서 초밥 통들을 꺼낸 후, 쇼핑백을 찢어 민석의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렇게 작은 것 하나까지 세심하게 챙겨주는 루한의 행동에 민석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쇼핑백 위로 루한을 마주보며 앉았다.
“이게 다 뭐야, 비싸겠다.”
“아까 초밥 먹고 싶다 그랬잖아.”
“그냥 한 소리지, 그걸 또 사와 번거롭게. 급식 먹어도 괜찮은데…….”
루한은 웃으며 젓가락을 민석의 손에 쥐어 주었다. 여기 맛있어, 한번 먹여주고 싶었거든. 루한의 달큰한 목소리가 민석의 머리위로 내려앉았다. 곱게 싸여있는 초밥을 보니 군침이 돌았다, 잘 먹을게. 배가 많이 고팠는지, 턱을 괴고 민석이 먹는 모습을 빤히 바라보는 루한은 안중에도 없는 듯, 금방 초밥 한통을 비워냈다. 한참을 그렇게 민석을 바라보던 루한은, 주머니에서 핑크색의 작은 핀 하나를 꺼내들었다, 유치원에 다니는 작은 여자아이들이 할 것만 같은 유치찬란한 핀을 꺼내든 루한은 민석의 머리에 분홍 핀을 꼽아주었다.
“김민석 저 노란 가방매고, 유치원 가도 되겠어.”
“야, 이게 뭐야. 내가 여자애도 아니고”
말은 퉁명스레 하면서도 제 머리에 꼽힌 핀을 만지작대는 민석을, 루한은 어느새 휴대폰을 꺼내들어 정신없이 찍어대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울려대는 셔터소리에 민망해진 민석은 귀를 붉히며 루한의 휴대폰을 뺏으려 달려들었다. 이리 내! 민석의 몸짓을 잘도 피해가던 루한은 그 순간에도 쉴새없이 셔터를 눌러대며 잔뜩 민석의 약을 올렸다. 그렇게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옥상 바닥에
드러누웠다. 숨을 고르며 잔잔히 흐르는 구름을 바라보던 민석은 조심스레 루한에게 말을 붙였다.
“루한, 너는 왜 나한테 잘해줘?”
“루한, 너는 나를. 좋아해?”
실없는 웃음을 흘리던 루한은 입을 열었다, 허나 음소거가 된 듯, 어지러이 루한의 입 모양만이 시선을 흔들었다. 그러다 루한의 입이 하나, 둘, 셋 점점 겹쳐 보이기 시작했다. 루한?
그때, 루한이 뭐라고 했더라. 그때, 루한이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꿈에서 깨어 난 민석은, 허탈한 마음에 한숨을 내 쉬었다.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빛바랜 추억들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띄엄띄엄 단편의 기억만이 가끔씩 민석을 찾아 올 뿐.
민석은 침대에 앉아 멍하니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문득 혼자라는 느낌이 뼈끝까지 사무쳐와 손끝이 떨려왔다. 바닥에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리모컨을 집어든 민석은 티비를 틀었다. 볼륨을 끝까지 올려두고는 몸을 잔뜩 웅크렸다. 요란스럽게 웃어대는 예능 프로그램 속 목소리들이 민석의 기분을 가라앉혔다, 혼자가 아닌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경수라도 부를까, 싶은 마음에 휴대폰을 집어 들었지만, 배터
리가 없는지 작동하지 않는 휴대폰을 짜증스럽게 저 멀리로 던져버렸다.
외로워,
민석의 쓸쓸한 목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워갔다.
루한.
민석의 쓸쓸한 목소리가, 곧 방 안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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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리멍텅한 완결입니다, 수정 된 부분도 많고.
많은 의문점을 해결해 드릴 루한의 번외로 조만간 찾아뵐게요
혹 텍파를 원하시면 댓글로 메일주소 남겨주세요~
감사합니다. 좋은 하루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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