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아무리 비싸고 좋은 의자라지만 오래도록 앉아있으면 엉덩이가 베기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제는 쭈그려 앉는 옛습관보다는 곧은 자세가 내겐 더 편했지만, 그래도 몇시간이고 일만 하며 한자리에 앉아있다면 역시 이곳저곳 안결리는 곳이 없다.
일어나서 기지개라도 한번 필까, 아니면 조금만 쉬었다 할까. 여전히 펜을 잡은채 굳은 목을 좌우로 풀어주는데 그럴수록 뭉친 근육들이 시원해지기보다는 더 무거워 지는걸 보니 아무래도 끝나기 전까지 쉬면 안되겠다. 제 자신을 채찍질 하며 대신 펜을 쥐지않은 반대편 손으로 눈가를 꾹꾹 누르고, 계속하자, 다독인다.
앉아있는 내 키보다 큰 의자에선 아무리 눈을 굴려도 창가가 보이지 않았지만 벌써 해가 지기 시작했는지 노을빛에 하얀 책상이 붉게 밝게 반짝였다. 하얀 종이도 금새 주황색으로 물든다. 펜을 고쳐쥐고 서류를 읽다, 되돌아 전 페이지를 다시 읽었다. 조심해서 나쁠건 없지. 빠르게 눈을 굴려 체크해둔 사항들을 다시 확인을 하고 총 두번을 점검한 후에야 최종 싸인을 할 수 있었다.
이제 세개만 더 하면된다. 마음은 들떴지만 혹시나 이 들뜬 마음이 실수라도 하게될까봐 신났던 마음도 큰 숨과 함께 진정시켰다.
"이사님"
퇴근전 최종보고를 하던 비서실장이였기에, 그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으며 현재시간을 예측했다. 방안에는 시계가 없었다. 시계를 보며 언제 시간이 가나 멍청히 서있기도 싫었고, 반대로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 시간을 붙잡고 나를 재촉하기도 싫었기 때문에 예전부터 내가 생활하던 방이면 모두 시계가 없었다. 하지만 불편할것도 없다. 집에있을땐, 일하는 아주머니께서. 회사에선 비서들이 스케쥴이 되거나 부탁한 시간이 되면 알아서 척척 와 시간을 알려줄테니까. 오히려 맞춤 서비스인 이쪽이 내겐 더 편한셈이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요"
그렇게 급한것도 아니면서도 들어오는 비서를 한번 돌아보질 않고 서류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분나쁠법도 한데 어떤 기색도 없이 제말만 하는 그의 무심한 성격 덕분에 그와 함께 일한지도 어연 4년. 그리 긴것같진 않더라도 지랄맞은 이 성격에 4년이라면 꽤 오랫동안 같이 일한거다.
여전히 나는 그가 보고할만한 것들을 예상하며 그가 말하기를 기다리는데 어쩐지 되돌아오는 말이 없었다. 오늘은 좀 곤란한 일이 생긴건가, 그제서야 고개 들어 그를 보니 당황해하는 비서의 모습 뒤로 머리 하나가 더 큰 백현이 서있었다.
"비서실장님. 제가 아침에 단단히 부탁드렸을텐데요"
변백현이 오면 절대 방에 들여보내지 말아 달라고. 인상을 찡그리는 내게 어깨를 으쓱이는 변백현이 씩 웃는다. 안된다는거 막무가내로 왔어, 그리고 제멋대로 그 길지도 짧지도 않는 다리를 쭉쭉 뻗어 책상앞을 지나 쇼파에 앉는다. 그 모습이 얼마나 편해 보이는지 대채 앉은건지 누운건지 구별할수가 없다.
"커피 좀"
"비서실장님"
내보내라는 뜻으로 한번더 비서를 부르지만 백현은 내 말을 자르고 진하게요, 라고 태연히 커피를 부탁한다.
"아닙니다. 나가보세요"
비서가 가볍게 인사를 하는것을 끝으로 나도 백현과 눈이 마주치는게 싫어 서류더미로 고개를 돌렸다. 빤히 바라보는 백현의 시선을 느껴지지만 무시한채, 나는 내일에만 집중한다. 하지만 대채 이게 무슨 얘기인지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짧은 문장을 몇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른다.
펜을 바닥에 튕기며 흰 종이에 수많은 의미없는 점들을 그리고 손안에는 점점 땀이 차 펜을 바로 잡기도 미끄러웠다. 일을 하고자하는 내 바램과는 달리 나는 이미 온 정신이 변백현에게 가있었다. 그 시선이 뜻하는 의미, 변백현이 이곳에 온 이유, 그리고 어제일을 회상하며 아까처럼 중간중간 밑줄을 긋기도 하고 동그랗게 체크를 해두기도하지만 어쩐지 내가 표시하는 곳들은 요점과는 전혀 관련없는 문장들 뿐이다, 결국 이게 무슨 내용의 서류인지도 모르고 페이지는 마지막페이지, 싸인해야될 곳에 이르렀다.
종이 가장 아래 써있는 내 이름, 도경수, 그 비어진 칸 아래에 펜을 내려놓고.
"좋은시간 보냈어?"
펜을 꾹 누르자 종이에 잉크가 조금씩 고인다.
"어"
힘을 주어 날카롭게 싸인을 하니 싸인한 공간에는 다른곳보다 훨씬 깊게 페인 볼펜 자국이 남았다. 조금만 더 힘을 주었다면 아마 종이가 찢어졌을거다.
개의치 않고 거칠게 페이지를 넘기는데 과격했던 행동만큼이나 종이넘어가는 소리도 민망하게 컸다. 그리고 쪽팔리게도 그 다음페이지는 없었다. 빈 까만 서류파일 표면을 보며 입술을 깨물어 다시 전페이지로 넘겼다.
"내덕이지. 피임은 확실하게 해둬."
"...."
"내가 준비한 와인은 어땠어?"
"미친놈"
어제 직원이 들고 오던건 콘돔과 와인이였다. 변백현이 어째서 그 호텔에 있었고 어떻게 내 방을 알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주문자를 확인해본 결과 틀림없이 변백현이라는 이름이 검색되었다. 일일히 저녀석이 어떻게 찾아왔는지, 내막을 알고싶진 않다. 그냥 저 재잘재잘 거리는 저 입을 기회가 된다면 한번이라도 주먹질 하고 싶었다. 그것마저 안된다면 욕이라도 한바가지 얹어주고 싶은데 그 어떤 욕도 그에겐 약과다.
"오랜만에 밥이나 먹자"
"배안고파"
지금이 몇시인지 몰라도 배꼽시계는 아직 알람을 울리기 한참 전이였기에 딱잘라 거부하고 물론 배가 고프다 하더라도 변백현과 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다. 쇼파에서 그가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자꾸만 신경을 자극했지만 그에대한 모든걸 무시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에게 반응을 하면 분명 더 좋아라 내 신경을 건들일게 뻔한 변백현이니까. 더 태연하게 서류파일을 닫고, 새로운 파일을 열었다.
"난 배고파. 밥먹자"
"보다시피 지금 난 바빠"
언제나 딩가딩가 놀러다니는 너랑 다르게.
"응, 알어 그니까 잠깐 쉬고 해"
"..."
"응?"
"..."
"응?"
욱하는 마음이 치밀자 급기야 나는 펜을 내려놓고 나를 보는 시선을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했다.
매일 이런식이지. 너는 제멋대로 나를 찾아와 제마음대로 나를 후리고 내 정신 쏙 빼놓게 해,
"싫어"
"아, 까칠해. 도경수는"
"그러니까 혼자 먹으라고"
"나도 싫어."
그리고 넌 언제 그랬다듯 태연히 내 뒤에 서있어.
나만큼이나 참을성없고 욱하기 잘하는 변백현도 슬슬 화가 났는지 눈썹에 힘이 들어가고 표정이 굳는다. 그리고 곧 홱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바로앞까지 걸어왔다. 경쾌하게 울리는 굽소리에 그제서야 그가 구두를 신고 어울리지 않게 오랜만에 정장을 모두 빼입었다는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래봤자 오늘도 여자 만나고 왔을테지. 콧방귀가 나온다.
변백현이 무슨 행동을 할지 눈에 선하게 보인다. 너도 범위안에서 크게 달라져 본적이 없는 녀석이니까. 아마 지금 너는 내 옆으로 다가와 잡고있는 펜을 잡고 그리고 내 팔을 잡아 나를 자리에서 일으킬거다.
"도경수."
역시나 다가와 잡고있던 펜을 뺏는 녀석의 행동이 저항할 틈도 없이 미끄러운 손때문에 손쉽게 뺏겼다. 펜을 빼앗은 백현의 굽소리가 조금더 가까이 다가온다. 붉은 조명처럼 비추던 노을빛이 가려지고 더 큰 그림자가 바로 옆으로 달라 붙는다. 나를 억스럽게 잡는 팔이 아팠다. 반항하는 나를 억지로 힘을 써서 일으키는 너의 행동엔 배려같은건 없었다. 덕분에 일어서며 앉아있던 의자도 요란하게 소리를 냈고 장시간 앉아있던 내몸도 이곳저곳 요란히 쑤셔왔다.
그다음 그는 내 손목을 잡고 방을 나갈거다.
그전에 이 손을 놔야한다.
'놔' 말로는 안될걸 알면서도 혹시나하는 마음에 두어번 말하고 팔을 강하게 흔들어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의외로 악력이 쎈 변백현에게서 이것만으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을리라 물론 나도 생각하진 않다. 예상대로 실패다.
그럼 짜증을 내고 화를내는 수밖에 없다. 넌 내가 소리를 지르면 내가 하던대로 다 들어줬으니까.
"놓으라고했잖아!!"
거봐. 걸음을 멈추고 화가난 나를 돌아본다. 이때다 싶어 팔을 비틀어 재빨리 빠져나왔다. 잡혔던 손이 시큰거렸지만 티낼 수가 없었다.
"어제일때문에 화난거야?"
"..."
"그럼 우리 술먹을까?"
"됐어"
손목을 털면서 백현을 등졌다. 누군가 머릿 속을 펌프질하듯 머리가 뻥, 하고 터질것만 같이 짜증이 밀려왔지만, 화가 나는데에도 하늘은 왜이렇게 전혀 어울리지도 않게 이쁜건지. 누구 좋으라고. 노을빛이 쓸때없이 장경을 펼치고 있었다. 숨을 크게 쉬어 화로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켰다.
장엄하게 깔린 노랗고 붉은 노을이 세상을 따스히 껴안고 있는것만 같았다. 웃긴노릇이다. 세상을 포옹하려 한다니. 하늘 무서운지 모르고 거만하게 치솟은 높은 건물들을 되려 태양은 이제는 이 삭막한 도시마저 안으려하고있다. 유리창에 비친 변백현이 나를 보고있었다. 나는 유리창을 통해 백현을본다. 백현의 머리가 노을빛을 받아 반짝이는데 내모습도 그처럼 반짝이는지 모르겠다.
저 망할 태양은 변백현 마저 안아주는구나.
"우리 옛날엔..."
"추억팔이 할생각이면 그만 가봐. 난 옛일까지 신경쓸정도로 한가하지 않아."
"..."
"몇살인데 옛날 얘기를 하는거야"
더이상 그가 말하는걸 막아야한다.
"그런가? 이제는 옛날이지?"
변백현 웃는소리가 낮게 들린다. 제발 가.
"그런데 우리의 옛날일엔 형도 뺄 수 없잖아. 이런말을 하는걸 보니 넌 이제 많이 괜찮아졌구나"
"...."
"형일도 이제 신경 쓰이지 않고"
"..."
"너야말로 개새끼네."
오늘은 그냥 갈게, 변백현이 나를 등진다. 창가엔 벽백현의 뒷모습만 보였는데 그건 실로 오랜만에 보는 그의 뒷모습이였다. 도경수의 책상에는 언제나 뒤집혀 있는 액자 하나가 있었다. 그건 다름아닌 가족사진, 그 어느 가족사진보다 딱딱하고 대외적인, 값 싼 허울감만 있는 싸늘한 사진이였다. 그리고 그 뒤집혀 있는 액자가 가족사진이라는걸 아는 사람도 백현밖에 없였다.
너가 나에게 옛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오랜만이였다.
망할,
백현이 나가고 나는 다시 자리에 앉았지만 아까처럼 펜을 들 수가 없었다. 펜을 쥐려해도 자꾸만 미끄러지는 펜이 계속 바닥으로 떨어져 아무것도 할수가 없었다. 구석구석이 쑤시고 지끈거린다. 예전 버릇처럼 허리를 굽히고 턱을 괴어 눈을 감았다. 하지만 눈을 감았는데도 자꾸만 아른거리는 노을빛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린다. 평소라면 이런 꼴사나운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싫어 기겁하고 자세를 고쳐앉았을테지만 지금은 무슨일인지 아무런 제스처도 취하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감고 구부정한 자세로 .그리고 비서는 이런 내모습에도 당황하지도 않고 놀라지도 않았으며 무슨일인지 묻지도 않았다.
사장님 퇴근시간입니다. 오늘하루 업무는, 고장난 로봇처럼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다 같은 말이다.
"됐어요. 오늘은 그만 가봐요."
눈을 감았는데에도 비서가 나가는 모습이 생생이 보이는것만 같아 눈을 떴더니 상상했던 모습 그대로 방을 나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얼마나 앉아있었는지 모르겠지만 노란 하늘이 깊은 밤에 잡아먹힌다. 강한 빛도 이제는 건물들 사이로 가려져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 이제 남은 서류 하나, 그 옆 몇 통째 부재중으로 울리는 전화기.
나를 찾는 전화 소리는
서혜진,
전화를 받았다.
혜진아. 미안 늦게 받았지. 만날까? 알았어. 데리러 갈게.
***
느슨하게 걸친 샤워 가운이 아슬하게 몸을 가린다. 씻고 나오는 사이 혜진은 벌써 침대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깨우지 않고 곧장 침대에 눕지도 않고 그 앞 탁상에 앉아 한참이나 잠에들은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불로 겨우 가려진 혜진의 나체가 곳곳이 어제의 흔적일지 오늘의 흔적일지도 모를 반점으로 얼룩져 있었다.
양주에 넣은 얼음이 이제는 다 녹아 한입크기로 조그마 해져 있었지만, 그간 잔은 잡지도 않았는지 이슬맺힌 겉유리엔 손자국도 없이 깨끗했다.
늦은시간이였지만 예의도 잊고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수신자는 변백현이 아니였다.
-지난번 말씀하셨던 인수건 하겠습니다
다름아닌 내 아버지.
- 네. 그렇게 할게요.
- 필요하다면 결혼도 이용하겠습니다. 장기말은 최대한 많이 필요하니까.
내가 극히도 싫어하는 사람. 절때 아버지같은 어른이 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어린 소년은 소년의 바램과는 다르게 그보다 더 극악한 어른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난 너에게만은 지기 싫다. 변백현. 네 웃는 얼굴을 더이상 보기도 싫고, 아무렇지도 않게 나를 조롱하기 위해 옛이야기를 꺼내는 니 입도 당장이라도 찢을 수있다면 좋겠어.
글이 자꾸 길어지네요, 자업자득하고 근처에 백도를 영업하고자 썻던 글이 친구의 권유로 인티까지 오게되고 사실 1화를 썼을때만해도 아직 그 어떤 컨셉, 스토리조차 잘 짜여지지 않았던 조각글 수준의 글이 3화까지 이어졌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좋아라하는 작가라 말그대로 취향대로 손가는대로 쓰기 시작한게 저뿐만 아닌 다른 여러 독자님들이 같이 좋아해주시면서 뒤늦게서야 저를 기다려주시는 독자님들에게 이 감사한 마음을 보답하기 위해 나머지 스토리를 짜냈어요 겨우겨우 큰 기둥들은 세우긴 했지만 역시 막무가내로 시작한 글이라 회를 거듭할수록 스스로에게도 실망스럽고 점점 필력은 떨어지는것 같고 큰 스토리는 잡혔지만 이 스토리를 글에 어떻게 심어서 물은 또 얼마나 줘야할지 어떻게 줘야할지조차 모르는 상황이에요, 메모장 앞에서 매일 멍하네요. 최대한 잘 이끌어볼게요 3화로 1부는 끝입니다. 총 3부로 나누어져 있는 스토리입니다. 1부의 부제가 남자는 수트를 입는다 였으면 2부의 부제는 반격, 3~4화 분량입니다.작까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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