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신경한 네 태도에 울음을 터트릴 마냥 얼굴이 빨개졌다. 너는 손을 뻗어 눈물을 닦아줬다. 하지만 표정에선 다정함이라곤 찾아볼 순 없었다. 제 볼을 감싸는 네 손을 두 손으로 맞잡았다. 차가운 네 손을 맞잡은 내 손이 너의 냉기를 녹였다. 웃으며 너를 봤다. 여전히 감정 없는 눈에 울림이 생겼고, 그 눈동자 안에 비치던 내가 울렁인다.
넌 누구야?
권... 순영.
나는 듣고 싶지 않은 소리가 들린다. 귀를 틀어막아도 눈을 감아도 그 목소리는 제 귀에 똑똑히 박혀, 나를 송두리째 흔든다. 눈을 뜨면 내 앞의 사람은 웃고 있는데, 마음이 울고 있다. 그리고 나한테 말한다. 그만하자고, 힘들다고. 그러나 내 앞에 있는 사람은 말했다. 괜찮다. 다 괜찮아질 거다. 안 괜찮은데…, 심장이 울고 있다.
속보입니다. 서울 ㅇㅇ동에서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윗집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 주민의 신고로 10대 학생과 30대 중반의 여성이 발견되어 바로 병원...
저때 일 기억 나세요? 기억난다고 해. 귀찮으니까. 손님도 많은데... 무슨 돈도 없는 환자야. 어지러운 머릿속에서 제 귀에 들리는 목소리에 그냥 고개를 숙였다. 괜찮아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흔들리는 다리와 어지러운 머리에 그 자리에서 풀썩 쓰러졌다. 뭐야, 왜 쓰러지고 그래?! 약이 안 맞나? 의료사고면 안 되는데. 아씨! 한 껏 걱정하는 간호사 얼굴 뒤로 들리는 마음속 소리에 그냥 웃고 괜찮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름한 옷을 입고 응급실을 나가려고 하자 제 앞을 가로막는 기자들에 놀라 멈춰 섰다.
" 어머니가 죽은 건 알고 계십니까? 어머니가 죽기 전에 남긴 말이 뭡니까? "
" 아버지로 인해서 죽은 겁니까? 아버지는 어디에 계십니까? "
" 어머니가 죽기 전에 여주양에게 아무 말도 안 하셨습니까? "
빨리 말해, 네가 말 하면 이건 완전 대박 특종이라고. 딱 봐도 애 엄마가 어린 걸 보니까 사고치고 애 키우다가 힘들어서 죽은 거네! 이미 다 나왔고, 딱 한마디만 해라! 앞에 있는 기자들의 질문보다 속마음이 저를 더 괴롭혔다. 제 귀를 막으며 뒷걸음질 치다 빠르게 밖으로 뛰쳐나왔다. 뒤에 따라오던 기자들을 따돌린 채 좁은 골목으로 들어 갔다. 허리를 숙이며 숨을 고르던 중, 제 귀에 들리는 흐릿한 소리에 고개를 들어 보이니 담배를 피우고 있던 노란 머리인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제 짤막한 소리에 가만히 있던 남자의 안에서 소리가 들린다, 꺼내줘. 날 살려줘. 남자의 표정은 차갑도록 아무런 표정이 없는데 속에선 울고 있었다. 아프구나, 살려달라는 네게 조심스럽게 뭐에 홀린듯 다가갔다. 그저 멍하게 나를 보는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가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놀란 남자가 몸을 뒤로 빼자 팔을 뻗어 허리를 감싸 안아 가슴에 귀를 댔다.
" 살려줘, 나를 도와줘. 내 목소리가 들린다면, 여기서 날 꺼내줘. "
" 뭐? 뭐라는 거야, 비켜. "
" 너, 여기 안에 있는 네가, 살려 달래. 도와달래. "
윽, 갑자기 제 목을 잡고 벽에 밀어붙이는 네 행동에 놀라 손을 잡았다. 죽일 듯이 쳐다보는 너는 나를 보며 눈을 크게 떴다. 눈에 보이는 또 다른, 인영에 나는 손을 올려 네 눈을 쓰다듬었다. 여기. 여기 너가... 살려 달래. 제 말에 순간 멈칫한 너는 다시 세게 제 목을 조른다. 시야가 아득해져 단말마의 비명만 짧게 질렀다. 남자의 다부진 손을 잡고 떼어 내려고 노력해도 그 힘을 막을 수 없어 몸을 버둥거리며 어깨를 밀어내다 몸에 힘이 풀리며 눈물이 났다. 얼굴 가까이 다가온 너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 니가 뭘 안다고 입을 함부로 놀려. "
" 윽, 이거 놔. "
" 죽기 싫으면,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모른 척해. "
말을 끝내고 제 목을 놔주자 막혔던 숨을 다 내쉬며 너를 보니, 여전히 차갑게 나를 내려다보던 넌, 그대로 나의 손을 밟고 지나갔다. 아! 밟힌 손가락이 얼얼해 쳐다보면 너는 말 없이 그냥 앞으로 걸어나갔다.
아파. 뭐야…. 쟨,
아무도 없는 집 안에 매캐한 연기에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우리 엄마가 죽었구나, 아무도 없는 집 안에 그대로인 가구에, 이불 옆에 놓인 다 타버려 하얗게 되어버린 연탄을 보고 무릎 꿇었다. 왜, 난... 아빠도 없이 태어난 삶에, 엄마도 제 곁을 떠나 버렸다. 작은 원룸에 놓인 탁자에 올려진 둘만 있는 가족사진 속 엄마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울어도, 아무도 없는 집안에 나를 달래 줄 사람이 없었다. 내 책상 위에 올려진 엄마의 글씨가 적힌 종이를 봤다. '유서' 라고 적힌 글자에 입을 막고 울었다.
제일 아래 서랍을 열어 보니, ㅇㅇ은행이라고 적힌 통장을 펼쳤다. 여주꺼, 여주가. 엄마가 차곡차곡 모아 논 통장에 마치 이 일을 예상 했듯이, 같이 죽으려는 게 아니라, 죽기 직전까지 제 코를 막아주던 엄마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것 같아 멈춰지지 않는 눈물에 입술을 꾹 깨물었다.
왜, 마음속에서라도 이야기하지, 나 오늘 밤에 죽는다고... 더는 살기 싫다고. 그럼, 내가 말렸을 거잖아.
엄마가 누웠던 그곳에 똑같이 누웠다. 혼자 살아갈 수 있을까? 세상은 이미 기자들로 우리의 이야기로 떠들썩할 텐데, 내가 잘 지낼 수 있을까? 고아로, 부모가 없는 청소년으로 내가 이 험한 세상에서 살 수 있을까? 내일 학교에 갈 수 있을까... 오지 않는 잠을, 엄마가 덮었던 이불로 찬 기운을 감싸 안았다. 잠이 들면, 꿈에서 엄마를 만나기를. 아니, 내가 눈을 떴을 때, 엄마가 내 옆에서 자고 있기를 빌었다.
살려줘, 제발, 그 애를 멈춰줘.
까만 어둠 속에 들리는 목소리는, 아까 내 목을 조르던, 남자와 같은 목소리였다. 눈을 떴을 땐,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제 귀엔 목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그 애를 막아줘. 나를 위해, 멈춰줘. 듣기 싫어! 귀를 막고, 몸을 웅크려도 들리는 목소리에 주위를 둘러봤다. 여전히 난 이 어둠에 혼자였다. 꿈, 꿈이라면 깨야 한다. 이 어둠 속에서 혼자인 내게 들리는 목소리가 무서웠다. 허벅지를 꼬집고, 혀를 세게 깨물어도, 깨지 않는 꿈에 포기할 때쯤, 제 손을 감싸는 느낌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침이었다.
학교…, 가기 싫다. 상처 난 목에 손수건를 매고 집 앞을 나서는 발길이 머뭇거렸다. 학교에 가면, 다 알겠지? 같은 반 애들이 놀리겠지? 끔찍한 생각에 선뜻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멍하게 문고리만 보다가 밖으로 나왔다. 햇살이 눈 부셔 인상을 찌푸리고 나서는 등굣길이 낯설었다. 매번 엄마의 배웅으로 시작했던 골목이었는데, 엄마가 서 있던 그곳에 지금은 내가 서 있었고, 내 앞엔 웃고 있는 어린 내가 없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 하늘에 계신 엄마에게 하는 조용한 인사말이었다. 혼자 골목을 걸으며 동네 슈퍼를 지나치자 나를 안타깝게 쳐다보는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린 게 쯧, 안타까워... 라는 아주머니의 목소리에 그저 웃으며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이렇게 해서 안 들리면 얼마나 좋을까? 잔잔한 노래 뒤로 울리는 아주머니의 안타까운 탄식에 빠르게 지나쳤다. 핸드폰을 보는 직장인이 또, 부장이네. 라는 투정도, 오늘은 그냥 지각할까? 라는 중학생의 귀여운 생각도 다 제 귀에 들려 노래가 사람들의 말소리에 묻혔다.
" 조심해요, 앞 좀 보고 다니시던가. "
제 손을 세게 잡는 남자의 목소리 뒤로 끌어 당겨진 강한 힘에 고개를 들었다. 어제 그 남자가 인상을 쓰며 나를 쳐다보자 급하게 이어폰을 빼고 나 역시도 널 봤다. 어? 지금은 얌전해진 아니, 차분해진 어제 그 남자와의 다른 분위기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 행동에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남자의 행동에 그때의, 살려달라는 외침이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한 것 단정해진 머리와 복장에 이상함을 느껴 나를 지나쳐 가는 남자를 급히 붙잡았다.
" 어제…. 어제 저 기억 안 나요? "
" 뭐? "
" 어제, 일 기억 안 나세요? "
제 목에 둘러진 손수건를 급히 벗어 너에게 보여주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나를 빤히 쳐다본다. 정말 몰라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머리를 긁적이다 죄송하다며 자리를 급하게 피했다. 같은 학교 교복에 붙여진 명찰에 적힌 이름 권순영을 곱씹으며 그 남자가 갔던 길을 따라갔다. 학교로 들어가자, 보이는 애들의 시선에 고개를 숙였다. 어떡해... 우리 엄마가 그랬는데, 쟤래. 들리는 목소리에 같이 들리는 속마음이 더 나를 비참하게 만들었다. 불쌍해, 어떡해. 아빠도 없는데, 엄마도 죽었다지? 사람들은 내가 말해주지 않는 것도, 금방 소문이 났고 그걸 가지고 자기들의 반찬으로 써 먹는다. 난 그저 반찬이 되어 그들의 입에서 갈기갈기 찢어질 뿐, 아무런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듣지 마. 아무런 소리도 듣지 마. 혼자 마음 정리를 하며 자리에 앉자 제 옆에 앉은 짝은 책상을 조금 뗐다. 뭔가 불길해. 같이 죽는 거 아냐? 짝의 속마음이 제 마음을 후벼 파도 그냥 말없이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이렇게 살아서 뭐해, 죽고 싶다. 누군가 제 말을 들어줬으면 좋겠다. 나처럼, 그리고 말없이 위로해줬으면 좋겠다. 아무런 쓸모없는 희망에 목숨을 걸면 결국 피폐해지는 건 나니까, 여전히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 또, 부딪힐 뻔했다. 정신 좀 차리고 다녀요. "
" 아…. 감사합니다. "
제 허리를 잡아 주는 순영의 행동에 고맙다고 고개를 까닥이면 웃으며 괜찮다고 같이 고개를 끄덕이고 지나치는 행동에 멍하게 뒷모습만 쳐다봤다. 왜? 사람이 하루 만에 저렇게 바뀔 수 있는 거야? 나를 당장에라도 죽일 듯이 쳐다보던 어제, 그 남자와 다른 친절한 순영의 모습에 혼자 혼란스러웠다. 남들도 다 읽히던 마음도, 저 남자만 읽을 수 없으니 신기한 기분도 들지만 혼란스러운 마음이 더 커, 순영이 궁금했다.
" 왜 자꾸 따라와. "
" 그냥…. 이유 없는데. "
" 따라오지 마. "
단호한 순영의 태도에 걸음을 멈춰 울상을 짓고 널 보자 그 자리에 멈춰 나를 보던 순영이 인상을 썼다. 뭐가 궁금한... 갑자기 머리를 붙잡고 쓰러지는 순영의 행동에 놀라 가까이 다가가자 제 귀에 똑똑히 들리는 목소리에 그 자리에서 멈춰섰다.
안돼. 나오지 마. 넌 그 안에 그대로 있어.
고통스러워 보이는 남자의 모습 뒤로 들리는 목소리는 처절했다. 제발, 나오지 마. 넌 안돼. 라는 목소리를 끝으로 똑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병신. 이라는 목소리에 남자는 실성한 듯 그 자리에서 웃었다. 하하. 크게 웃는 목소리에 놀라 뒷걸음질 치자 나를 보는 눈이, 다시 달라졌다. 어제의 그 남자의 분위기와 같았다. 천천히 내게 다가와 거칠게 뒷목을 잡고 속삭이는 순영에 온몸에 근육이 굳었다.
내가 말했지?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모른 척하라고.
….
미친년, 그만 우리 순영이 괴롭혀. 내가 나오기 힘들잖아.
자신의 심장을 쿡쿡 찌르며 말하는 순영의 행동에 입을 막았다.
넌 누구야?
나? 난, 호시.
호시, 처음 듣는 이름과 내 앞에 웃어 보이는 얼굴에 괜히 소름이 돋았다. 처음 우리가 만났던 그 때처럼 숨이 막혀 오는 느낌에 나는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 내 숨소리에 어깨를 떨며 웃던 너는 순영이 단정히 맸던 넥타이를 풀어 헤쳤다. 차분히 내려 앉은 머리를 흐트리며 내게 천천히 다가 온 넌, 내 목에 감긴 손수건을 풀어 자국이 난 그 곳을 쓰다듬었다.
뭐 하는 거야.
…. 예쁘다.
하지 말라니까.
다음, 21번? 21번 누구야.
선생님의 물음에 애들이 움찔했다, 그렇다. 나였다. 조심스럽게 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애들은 나를 보지 않고도 나란 걸 알아 마음 속으로 씹어 댔다. 다 들리는 것을 안 들리는 척 하기도 힘들지만, 그래도 참아야 하기에 나는 칠판으로 나와 문제를 봤다. 난잡한 기호와 숫자가 하얀 배경에 어질러져 있었다. 그 숫자와 기호를 정리 하기엔, 뒤에 애들의 침묵이, 아니 비꼼이. 내 귀에 들려, 나도 모르게 마카펜을 떨어트렸다.
모르겠어요….
제 중얼거림에 선생님이 웃으며 장난으로 내 머리를 툭 쳤지만 그 뒤에 들리는 그럼 그렇지라는 단어가, 속마음이 제 귀에 더 똑똑히 박혔다. 몇몇 애들은 나를 보며 웃었고, 몇몇 애들은 여전히 엄마와 나의 사건에 안타까워 했다. 너희가 뭐라고, 날 안타까워 해. 라고 외치는 속마음 말이, 나처럼 마음을 읽는 누군가에게 들렸으면 좋겠다. 라고 생각했다.
단조롭게 들리는 종 소리에 애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급식실로 뛰어 간다. 여자들은 모르지, 지금 점심을 먹으러 가는 웃음 속, 뒤로는 다음엔 누굴 빼지? 라는 마음으로 같이 걷는다는 걸. 여자들의 가식속에 나는 혼자였다. 누가 그랬지? 무관심이 제일 무섭다고. 난 그 말에 부정을 표했다. 무관심, 어쩌면 최고의 배려일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오지랖과 무관심의 중간을 모른다. 그게, 사람을 다치게 하는지도 모르면서. 급식판을 들고 구석으로 찾아 들어가 앉았다. 나를 보며 왈가왈부 할 시간에 앞에 있는 국 식는 거나 걱정하지... 고개를 푹 숙이고 밥만 먹는 중에 누군가 제 앞에 식판을 내려 놓는다.
야, 손수건.
어? 권순영?
죽을래? 호시라고 했지.
아. 호시, 제 앞에서 묵묵히 밥을 먹는 네 손만 보다 나 역시도 식어 버린 국물을 한 입 떠먹었다. 너 정체가 뭐야. 오늘 점심 뭐야. 라는 말투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뱉은 너에게 모르겠단 얼굴로 쳐다보자 손을 뻗어 삐뚤어진 내 명찰을 바로 잡아줬다. 김여주. 중얼 거리는 네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응, 이라고 대답 할 뻔했다. 급식실은 엄청 소란스러운데, 우리만 조용하게 밥을 먹고 있었다. 제 귀에 들리는 작고 작은 소음들도, 너를 앞에 두면 조용해졌다. 그저, 마음 속에서 울리는 권순영의 고통과 호시의 덤덤한 말투만 제 귀에 남을 뿐, 우린 고요했다.
나 이거 안 먹어.
야, 손수건. 편식 하지 마.
근데, 나 진짜 이거 안 먹어.
그럼, 이거 먹어.
내 급식판 옆에 놓여진 삼각 커피 우유에 널 보자 넌, 씨익 웃고 말했다. 순영이 꺼내지 말라는 뇌물. 너는 왜... 자꾸, 순영이를 두려워 하는 거야? 꺼내지 못하는 내 속 마음에 그저 먹기 싫어 걸러놓은 까만 콩만 보고 있자, 콩 위에 올려진 길고 얇은 예쁜 손가락이 옆으로 넘어간다. 그 손가락의 시선을 따라 간 곳은, 호시. 그래, 호시가 놔둔 커피우유였다. 그 옆에 놓인 빨대까지, 완벽하게 세팅해서 놓여진 커피우유를 보고 나도 모르게 미소가 슬쩍 지어졌다. 뇌물 받아라. 콩도 먹고, 자기 말만 하고 일어서던 호시는 누구보다 여유롭게, 하지만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얘는…, 정체가 뭘까. 볼펜으로 커피 우유를 툭 쳤다. 울렁이는 커피우유에 한숨을 푹 쉬자, 짝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자리 바꿔주는 거야. 불길해. 라는 목소리가 제 귀에 들렸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책상을 벽으로 더 붙였다. 움찔하는 짝의 실루엣에 고개를 픽 돌려, 운동장을 봤다. 체육을 하던 애들이 분주하게 머리를 가렸고, 곧 투둑, 투둑. 비가 와 창문을 두드렸다. 주위 애들은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다며 투정을 부렸다. 나 우산 있는데. 가방 안에 언제 넣었는지도 모르는 우산이 생각이 났지만, 선뜻 누군가에게 같이 쓸래? 라는 말을 건내지 못해 그냥, 없는 척 굴었다.
손수건. 우산 있냐?
아! 깜짝이야.
나에게 쉬는 시간이라곤, 애들에겐 입을 털 시간, 나에겐 그 소리를 다 들어야 하는 최악의 시간이였다. 귀에 숨 돌릴 틈이 없이 들어 오는 뒷담화에, 또는 나도 모르는 애 소식에 이어폰으로 귀를 막고 책상에 얼굴을 묻었다. 10분이잖아. 조금만 참자, 눈을 감고 이어폰의 소리를 키우는데 누군가 제 귀에 있는 이어폰을 빼가서 쳐다보니, 권순영. 아니, 나를 손수건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호시였다. 우산 있냐고. 쭉 째진 눈으로 나를 흘겨보는 호시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니 씨익 웃곤 어깨를 툭 치고 간다. 또, 자기 할 말만 하고 간다.
비가 오는데. 넌 왜 나오질 않는 걸까. 하교 하는 시간, 저마다 다 친구와 함께, 아님 부모님이 데리러 와 우산을 쓰고 뛰어가는 애들 사이에 멍하게 서 있었다. 우산 없어서 물어 본 게 아닐까? 제 손에 들린 빨간 레이스 우산 손잡이를 만지작 거리며 여전히 널 기다렸다. 씹. 비 오네. 보지 않아도 들리는 말소리에, 아니. 네 속마음 소리에 고개를 돌려 봤다.
어? 권, 순영?
내 말에 무심하게 쳐다보는 건, 호시가 아니라 권순영이였다. 차분해진 머리에, 단정해진 넥타이를 한너의 텅 빈 눈동자에 비친 내가 조금 더, 크게 보여졌다. 놀란 얼굴로 보던 너는, 금방 표정을 감추며 인상을 찌푸렸다. 호시가 아니야? 중앙 계단에 서 있는 건, 우리 둘 뿐. 조용한 정적이 어색했다. 너는 나를 보고 아무런 생각이 없어? 난 네게 묻고 싶은 게 많은데. 빤히 쳐다보는 내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고개를 돌려 뛰어 갈려는 행동을 보이는 순영에 급하게 팔목을 잡았다.
커피 우유...
뭐? 뭐 하냐.
저기, 우산, 같이 쓰고 갈래?
어? 뭐. 나야 고맙지.
숨 막히게 어색해진 공간에, 한 쪽 어깨가 젖어 가는 것도 모르고 그냥 너와 최대한 떨어져 걷고 있었다. 투둑, 투둑.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쳐다보면 뭘 보냐는 식으로 더 세게 비가 내렸다. 손을 뻗어 비를 잡을려는 순간, 제 오른쪽 어깨를 감싸 안아 안 쪽으로 당기는 손길에 고개를 들어 무표정한 순영을 봤다. 어깨 젖잖아. 단조로운 말투, 무심한듯 툭 던지는 말이 제 귓속을 파고 들어 심장을 쿵쿵, 쳤다. 고마워. 나를 힐끗 쳐다보는 시선에 살짝 미소 지었다. 호시도, 순영이도 착하네.
버스 정류장까지 온 너는, 우산을 접고 나에게 넘겨 줬다. 고마워. 툭 던진 네 말투에 고개를 끄덕이자 제 명찰 가까이 얼굴을 가져다 댄 순영이 씨익 웃으며 제 볼을 툭 쳤다. 김여주 고맙다. 아…, 화르륵, 타오른 뜨거운 불이 네 손끝에 모여 있었는지, 니가 건들인 그 곳이 뜨거워, 아니 뜨겁다 못해 제 얼굴 전체를 덮은 느낌에 고개를 푹 숙이자 내 반응이 귀엽다는듯 웃는 네 얼굴 뒤로 들리는 목소리에 나도 너를 따라 그만 웃어 버렸다. 김여주. 생긴 건 안 그래서 꼴에, 수줍음은.
야. 김여주.
어?
그렇게 웃지 마.
왜?
오늘 아침 호시가 했던, 그 행동 그대로 순영이 제 심장을 손가락으로 쿡쿡 찔렀다.
얘가 나올려고 해.
뭐? 그게 무슨 말이야.
니가 그렇게 웃으니까, 얘가 나올려고 한다고.
네 말을 듣고 가만히 손을 뻗어 네 허리를 감싸 안았다. 처음에, 네 목소리를 듣고 호시에게 했던 것처럼 너를 안았다. 쿵쿵 거리는 심장소리 뒤로 목소리가 들린다. 하지 마. 순영인지, 호시인지. 누구의 목소리일까. 누구의 속마음일까. 제 팔을 단단히 잡는 너의 손에 나 역시도 더 꽉 껴안았다. 누구야? 살짝 내뱉은 말에 안돼. 라는 고통의 소리가 묻히고, 다시 주위가 조용해졌다.
너는, 누구야.
권, 순영.
그럼 얘는.
뭐?
얘는 누구야.
손가락으로 쿡 찌른 네 가슴팍을 보다 굳어 있는 네 얼굴울 봤다. 까만 눈동자 속엔, 내가 있었다. 오로지 그 안엔 나로만 채워져 있었다. 너는 무심하게 말했다. 호시. 호시란 이름에 가방에 있는 우유가 울렁이는 것 같았다. 버스가 왔다. 버스가 세 대가 지나갔다. 그럴동안 우린 아무 말도 없이 서로 마주 보고만 있었다. 세상의 소음이 모두 없어진 지금 이 순간이 나에게 너무 신기했고, 어색했다. 권순영은 무슨 생각을 할까? 누군가가 궁금해진 적은 처음이였다. 아무것도 담아 내지 않은 까만 눈동자가 여전히 나만 담아 내고 있었다.
빠앙. 빵! 앞에서 울리는 클락션 소리에 고개를 돌린 건, 내가 아니라 권순영이였다. 입술을 축이던 권순영은 내 팔을 잡고 떼어냈다. 정말 악 소리가 날만큼 내 손목을 세게 잡고 떼어내는 순영의 행동에 놀라 쳐다보면, 싸늘하게 식은 표정으로 비켜. 라는 짧게 단어만 내뱉은 채 나를 지나쳐갔다. 차에 올라타려고 문을 연 순간 안에 있는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날카롭고 아주 차갑게 생긴 여자는 선글라스를 내려 날 봤고 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고개를 돌렸다. 곧 차에 시동이 걸리더니 앞을 지나쳐갔고 난 멍하게 그 차를 쳐다만 봤다.
알바를 찾기 위해 하루종일 시내를 걸어다녔다. 그래도 찾지 못한 일자리에 집으로 돌아 가는 길, 너와 처음 만났던 그 골목을 지나 친다. 너는 그때, 가로등 옆 주차거울이 있는 그 곳 밑에서 독한 담배를 입에 물고 연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 골목 코너를 돌자마자 보이는 네 모습은, 담배를 피는 모습이 아닌 쪼그려 앉은 모습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권순영의 손에 얼굴을 부비는 강아지를 보며 옆에 앉자 강아지는 꼬리를 흔들며 내게 다가온다. 등을 쓰다듬자 주머니에서 강아지 사료와 참치를 꺼낸 너가 참치와 사료를 비벼 강아지에게 넘긴다. 캔에 혀 베일텐데, 내 걱정과 다르게 너는 손에 올려 강아지에게 먹여줬고 나는 그런 너의 행동을 보고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