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왜 여기에서 계속 계세요?"
"..."
"할아버지."
"연주 하나 들을테요? 내가 들려줄테니."
청년은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청년의 대답은 처음부터 상관이 없었다는 듯이 노인은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부지런히 움직이는 입과 손에서 나오는 아코디언 연주는 기이했고, 아코디언이 내는 소리는 어떤 면에서 음울하기도 했다. 노인의 연주는 왜인지는 몰라도 오싹한 느낌까지도 주었다. 청년은 노인의 연주가 절반도 흐르기 전에 자리를 떴다. 노인은 연연치 않고 계속해서 아코디언을 움직였다. 아코디언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묵직한 소리와 함께 백현의 발 밑으로 불타오르는 단도가 박혔다. 백현은 몸을 떨었다. 더 묵직한 소리와 함께 이번에는 백현의 얼굴 옆으로 단도가 박혔다. 단도가 박히며 튀어오른 불꽃에 백현이 눈을 질끈 감았다. 칼을 던지는 남자는 망설임이 없었다. 백현은 손과 발이 고정된 체 다시 눈을 부릅 떴다. 몸은 점점 뜨거워졌다. 단장은 이것을 '불꽃놀이'라고 불렀다. 판을 빼곡히 채우는 불에 타는 단도를 보며 멀찍이 떨어진 단장은 만족한 웃음을 지었다. 백현은 뜨거워지는 몸에 표정을 찡그렸다. 그런 백현과 달리 사람들 또한 만족한 듯이 박수를 쳤다. 역설적이게도 백현이 겁을 먹을수록 사람들은 즐거워했다. 건너편에서 백현을 향해 칼을 던지더 남자는 기품 있게 관객을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백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수고했다."
"..."
관객이 다른 쇼를 보기 위해 떠나자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던 단장은 백현에게 다가와 직접 백현 위로 물을 부었다. 백현은 눈을 질끈 감았다. 몸이 다시 차가워졌다. 단장은 백현의 손에 채워진 족쇄를 풀어주곤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떴다. 백현은 어깨에 묻은 젖은 재를 털었다. 조심히 몸을 움직여 발의 족쇄도 푼 백현은 땅바닥에 섰다. 백현은 표정 없이 단도를 쥐었다. 아직까지 단도는 뜨거웠다. 백현의 눈가가 떨렸지만, 단도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백현은 고개를 돌렸고,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찬열과 눈이 마주쳤다. 멀리에 있어 자세히 볼 수는 없어도 분명 찬열은 아무런 표정도 짓지 않았다. 백현은 찬열을 물끄러미 보았다. 눈을 마주친 찬열은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백현은 다시 고개를 돌려 단도를 마저 뽑았다.
"도경수는?"
"쇼를 하고 있어."
"뭐라고? 그 몸을 하고?"
"어쩔 수 없지."
"드디어 정신이 나갔군."
백현은 신경질적으로 손을 닦던 수건을 던졌다.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얼마 전, 경수는 다리를 다쳤다. 그런 몸을 이끌고 쇼라니? 백현은 으르렁댔다. 이럴 때면 백현은 짐승과도 같았다. 민석은 화가 난 백현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으므로, 백현을 두고 방을 나갔다. 백현은 침대에 걸터앉아 화를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화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해가 저물고 사람들은 물밀듯이 빠져나갔다. 관객들이 빠져나간 후 단원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고 정리를 시작했다. 혹은 연습에 매진하기도 했다. 백현은 분주한 단원들을 지나쳐 서커스장의 중심으로 갔다. 중심에 높게 매달린 공중그네에는 경수가 걸터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백현은 공중그네 바로 밑까지 갔다. 발소리를 들은 경수는 눈을 떴다. 경수는 백현을 내려봤다.
"왔어?"
"도경수."
"화를 내기 위해 왔겠지."
백현은 경수를 올려다보았다. 경수의 발목에 묶인 하얀 붕대는 경수를 더 유약하게 보이게 했다. 그네가 흔들렸다. 경수가 몸을 움직인 탓이었다.
"...안 내려와?"
"백현은 모르겠지. 여기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기분을."
"어떤 기분인데."
경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 대신 경수는 백현을 물끄러미 보았다. 백현은 목이 뻐근했다. 높이 있는 경수를 계속 올려다본 탓이었다. 경수는 백현에게 줄을 내려달라고 부탁했다. 백현은 몸을 움직여 줄을 내렸다. 줄을 움직이자 경수가 점점 땅으로 내려왔다. 정확히는 경수가 몸을 실은 공중그네가. 경수의 발이 거의 땅에 닿을 정도로 내려오자 백현은 줄을 고정시켰다. 경수는 여전히 백현만을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다리는 아프지 않아?"
"단장님께서 오늘은 몸을 그렇게 크게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어. 다리에 무리가 갈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어."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경수는 그제야 그네에서 내려 백현에게 다가왔다. 걸음은 더뎠다. 절뚝이는 발 때문이었다. 백현은 표정을 찡그렸다. 그러나 경수는 입꼬리를 올렸다.
"또 찡그리는구나. 백현은 왜 웃지 않아?"
"너는... 어떻게 웃을 수 있는데?"
"웃음이 나오니까."
경수는 백현의 어깨에 묻은 재를 털었다. 덜 털었네. 중얼거리며 뒤돌아서는 경수의 뒤통수를 백현은 바라봤다. 경수는 계속해서 다리를 절뚝였다. 백현은 또 얼굴을 찡그릴 수 밖에 없었다.
백현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뚫어져라 보았다. 서커스장의 일부를 개조한 곳을 숙소로 썼기에 유난히 천장이 높았다. 백현은 경수를 생각했다. 서커스에서 경수는 유명했다. 사람들은 경수를 나비라고 불렀다. 이유라면 경수가 선보이는 것이 공중그네를 이용한 서커스였기 때문이고, 또 공중에서 몸을 움직이는 경수가 정말 나비같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백현은 단 한 번도 경수를 나비라고 부르지 않았다. 경수는 그저 경수였다.
백현은 몸을 일으켰다. 경수의 방으로 가기 위해서였다. 아까부터 비가 오기 시작하더니 이제 제법 비가 쏟아지는 것이었다. 경수는 비가 오는 밤이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직 경수에게 화가 났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수를 재우지 않을 생각은 없었다. 경수의 방 앞으로 간 백현은 경수의 방문을 두드리려다 작게 들리는 소리에 방문에 거의 갖다댄 손을 내렸다. 백현은 경수의 방문에 귀를 기울였다.
"...하지 마세요."
"가만히 있어."
하나는 경수의 목소리였고, 하나는 굵직한 목소리였다. 백현은 더 유심히 귀를 기울였다. 다른 목소리의 정체는 단장이었다. 말소리는 끊겼다. 이어 갸냘프게 끙끙대는 소리가 들렸다. 백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문틈으로는 침대 위로 흔들리는 붕대 묶인 다리가 보였다. 백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왜 안 왔어?"
아침은 묽은 스프였다. 맛은 없었지만 하루동안 움직이기 위해선 먹어야했다. 숟가락질을 하던 경수가 고개를 들지 않고 백현에게 물었다. 백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도 화났어?"
경수는 스프를 뜨기 위해 움직이던 손을 멈추고 백현에게 물었다. 백현은 고개를 들어 경수를 보았다. 경수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
경수는 다시 손을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경수는 스프를 떠 입 안으로 넣었다. 백현은 경수에게 물었다.
"깜박 잠들었어. 그래서 어제 못 잤어?"
"...아니."
경수도 백현과 똑같은 대답을 했다. 다만, 경수는 뒤에 덧붙였다.
"...비가 오기 전에 잠에 들었어."
오늘은 발목이 더 아픈 이유로 단장은 경수가 그네에 오르지 못하도록 했다. 대신 경수는 마술쇼를 했다. 경수가 그네에 오르지 않는 날이면 보이곤 하는 마술은 끝없이 옷의 색을 바꾸는 마술이었다. 경수의 공중그네만큼이나 인기가 있었는데, 유난히 여성보다는 남성에게 인기가 많았다. 색을 끝없이 바꾸는 나비는 매혹적이었고, 관객의 반응이 좋으면 때때로 경수는 옷을 벗고 춤을 추기도 했다.
백현은 일부러 경수와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쇼를 하기로 했다.
단장은 단도의 일부분에 종이를 감았다. 쉽게 불에 타오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백현은 몸을 고정시키는 커다란 판 앞에 섰다. 백현의 '불꽃놀이' 또한 꽤 인기가 많았는데, 사람들은 아슬아슬한 묘기를 즐기는 듯 했다. 특히 오늘처럼 단장이 직접 선보이는 날에는 더욱 사람이 몰렸다. 백현은 눈을 감고 발판 위에 올라서 대(大)자로 섰다. 다른 단원은 백현의 팔목과 발목에 족쇄를 채웠다. 단장은 모든 단도에 종이 감는 것을 마쳤다. 단원이 화로에 불을 붙였다. 불은 무섭게 타올랐다. 사람들은 기대에 찬 눈을 했다. 단장이 손뼉을 치자 찬열이 아코디언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아코디언 연주는 쇼의 시작을 뜻했다.
단장은 '불꽃놀이'를 시작했다.
백현은 눈을 감았다.
시간이 꽤 흘렀다. 백현은 어제 경수의 붕대가 꽤 더러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보니 깔끔한 붕대로 바뀌어 있었다. 괜찮냐고 물으니 이상하게 빠르게 나아지지 않는다고 경수는 답했다. 백현은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고, 경수는 그런 백현을 멀뚱히 보다가 자리를 떴다. 백현은 실외로 나왔다. 공기는 눅눅하고 습했다. 백현은 뒤돌아 천막의 가장 위에 쓰인 글씨를 보았다. Midnight circus. 백현이 속한 서커스단을 부르는 말이었다.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꽤나 깊은 숲 속에 위치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기지 않았다. 고난도의 묘기를 많이 선보였고, 단원들의 외모가 출중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평판도 좋았다. 그러나 백현에게는 증오의 대상이었다. 백현은 늘 자유를 꿈꿨다. 백현에게는 감옥일 뿐이었다.
Midnight circus에서 다른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단원들에게 붙는 이름이었다. 경수의 나비처럼 대부분의 서커스 단원들은 동물의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고 백현을 사람들은 불새라고 불렀다. 새라.
"...우습네."
발목을 묶어놓고 새라고 부르다니. 아이러니했다.
모든 쇼가 끝나고 경수는 그네에서 내려왔다. 짬밥이 차 굳이 정리를 할 필요도 없었고, 애초에 경수의 쇼는 정리할 것이 별로 없기도 했다. 경수는 발을 절뚝이며 움직였다. 한 곳에 가만 있지 못하고 경수는 몸을 계속 움직였다. 그러다가 앉아서 아코디언을 만지고 있는 찬열 앞에 닿았다. 경수는 걸음을 멈췄다.
찬열은 아코디언을 손보던 움직임을 멈추곤 경수를 올려다보았다. 경수는 물끄러미 찬열의 아코디언을 보았다. 정성스레 닦아 새 것처럼 빛이 났다.
"왜 그러세요?"
찬열의 목소리는 낮고 굵었다. 경수는 별 말이 없었다. 찬열은 대답을 종용하지 않았다.
"...누구세요?"
찬열은 경수의 눈이 아닌 인중을 보았다. 경수는 얼굴에 뭐가 묻었나 싶어 인중을 손으로 닦았다. 손에는 아무 것도 묻어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찬열은 경수의 인중을 보았다.
"찬열. 맞죠?"
"맞아요. 그러는 당신은..."
"경수에요."
"경수... 들어본 것도 같군요."
"나를 모른단 말인가요?"
"알아야만 하나요? 꽤 유명한 이름인가 보네요."
"이름이 아니더라도... 연주를 하면서 한 번은 봤을텐데요."
"뭘요?"
"내가 그네를 타는 것을요."
"그렇다면 당신은 나비로군요."
"...사람들은 그렇게도 나를 불러요."
찬열은 웃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별명인가요? 찬열은 저음의 목소리로 물었다. 경수는 고개를 저었다.
"...좋지도 싫지도 않아요. 하지만 그들이 나쁜 이유로 부르는 것은 아니니... 상관 없죠."
"그렇군요."
찬열은 다시 아코디언의 건반을 하나씩 누르기 시작했다. 경수도 흥미가 사라졌는지 찬열에게서 뒤돌아섰다.
Midnight circus는 휴식기에 돌입했다. 일 년에 두 번 정도는 꽤 오랜 시간을 쉬고는 했다. 몸을 풀 시간도 필요했고, 더 난이도 높은 묘기를 연마하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사실 휴식의 시간이라기보단 정비의 시간이라고 부르는 게 더 정확했다. 쉴 시간이 많지는 않기 때문이다.
경수는 백현의 등에 손으로 낙서를 했다. 백현은 간지럽다며 그러지 말라고 했지만 경수는 아랑곳 하지 않고 백현의 등에 손가락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뭐라고 쓰는 건지 맞춰보라며 경수는 백현의 등을 쳤다.
"모르겠는데."
"그것도 몰라? 쉬운 단어였는데."
경수는 다시 손을 움직였다. 백현은 등을 움직이는 경수의 손가락에 집중했다
"...나비?"
"맞아."
백현은 뒤돌아 경수를 보았다. 경수 또한 눈을 피하지 않았다.
"너는 너를 나비라고 부르는 거 어때?"
"요즘 물어보는 사람이 많네."
"또 누가 물어봤는데?"
"있어. 하여튼 좋지도 않고 싫지도 않아."
"왜?"
"이유는 없어. 좋아할 이유도 없고, 싫어할 이유도 없으니까. 그럼 백현은 불새라고 불리는 거 어때?"
"난 싫어."
"왜?"
"나는 새가 아니니까."
경수는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왜?"
"자유롭지 않으니까."
"어째서?"
경수는 오히려 되물었다. 백현은 경수가 말장난을 치는 것이 아닐까 잠시 고민했다.
"...이게 자유라고 생각해?"
"우리는 자유롭게 묘기를 선보일 수 있어. 그 누구도 우리가 어떤 묘기를 선보인다고 해서 나무라지 않잖아."
"그게 자유란 말이야?"
이번에는 백현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했다.
"그럼 백현에게 자유란 뭔데?"
"...자유란, 내가 원하지 않으면 묘기를 선보이지 않아도 되는 거야."
"글쎄."
경수는 뚱한 표정을 했다. 백현은 이런 경수에게서 순간 이질감을 느꼈다. 백현은 벌떡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경수의 발목에 묶인 붕대를 보자 백현은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백현에게는 경수의 붕대가 마치 족쇄처럼 보였다.
속이 메슥했다.
백현은 13살에 이곳으로 왔다. 11살에 부모를 여읜 백현은 결국 고아원에 맡겨졌는데, 백현은 고아원에서도 꽤 똑똑한 편에 속했다. 높은 성적도 받았고, 재주도 출중했으나 나이가 많은 이유로 쉬이 입양이 되질 않았다. 그러던 백현을 데려가겠다는 사람이 있었다. 백현이 처음 본 단장은 말끔한 사내였다. 꽤 위풍도 있었다. 그렇게 백현은 단장을 따라 깊은 숲 속으로 들어갔다. 숲 속에서 백현은 경수를 만났다.
백현은 남자가 서커스의 단장이라는 것을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알았다. 그리고 전국을 떠돌며 자신과 같은 고아를 모아 서커스를 가르친다는 것 또한 알았다. 처음 한 달 정도는 허드렛일을 했다. 백현은 자신은 서커스를 배우지 않고, 다른 일을 할 수 있을 수도 있다는 기대를 가졌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자 단장은 백현도 서커스를 배우게 했다.
과정은 혹독했다. 고난이도의 묘기를 가르치고, 그것을 완벽히 할 때까지 잠을 재우지 않기도 했고, 훈련 중 동작을 틀리기라도 하면 손으로 몸을 얻어맞거나 채찍이나 매로 종아리를 맞기도 했다. 백현은 손재주가 좋은 편이었고, 대부분의 동작을 쉽게 배웠다. 그러나 경수와 배우던 동료 단원 중 유난히 배움에 더딘 아이가 있었다. 체구가 작고 피부가 하얀 아이는 종아리에 피딱지가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백현은 아이의 이름을 알 수는 없었지만, 티나지 않게 아이를 챙겨주곤 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아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백현이 자신을 챙겨준다는 것을 알아챈 듯 했다. 아이 또한 주먹밥 2개를 받으면, 하나를 백현에게 주고는 했다. 물론 다시 아이에게 주먹밥을 돌려주었지만.
백현이 Midnight circus의 명성을 비웃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사람들은 화려한 서커스의 뒤에 숨겨진 불편한 진실을 몰랐다. 알 수도 없었고, 알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돈을 주고 서커스를 봤고, 그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서커스를 보여주는지에 대해서는 흥미가 없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유희와 유흥 뿐이었으니.
키가 더 크고, 목소리가 더 굵어질 때 쯤 백현은 서커스에 올랐다. 1년이 더 지나 백현은 그네에 올라 하늘을 움직이는 아이를 봤다. 아이의 종아리에는 더 이상 피딱지가 앉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백현은 아이의 이름이 경수라는 것도 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Midnight circus는 다시 불을 밝혔다.
서커스장이 아침부터 분주했다. 씻고 나온 백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민석에게 물었다. 그러자 민석은 오늘 중요한 손님들이 온다고 백현에게 귀띔을 주었다.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귀빈을 모시는 날이면 서커스의 문을 일반인에게 열지 않았다. 며칠 전에 공지를 했겠지만, 워낙에 관심이 없는 백현인지라 모르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백현은 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꾸벅 조는 민석의 어깨를 툭 친 백현은 민석을 데리고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경수가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백현은 경수의 옆에 서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경수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백현의 얼굴을 보자 곧 경수는 얼굴을 풀었다.
백현은 밥을 잔뜩 펐다. 경수를 마주 보고 앉은 백현은 경수를 나무랐다. 밥이 너무 적은 이유였다. 경수는 덩치가 작은 만큼 밥 또한 적게 먹었는데, 어떻게 이런 양을 먹고 하루종일 버티는지 백현으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경수는 또 잔소리를 한다며 입술을 삐죽였다. 백현은 아프지 않게 꿀밤을 주었다.
"오늘 손님들이 온다던데."
"들었어. 그래서 오늘은 그네도 타고..."
경수는 말을 하다가 백현의 눈치를 봤다. 백현이 경수의 마술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경수도 잘 알았다. 백현은 그런 경수를 눈치 채고 최대한 덤덤한 척을 하기 위해 애썼다. 그러나 씰룩이는 눈가는 어쩔 수가 없었다.
"...마술쇼도 하기로 했어."
"...힘들겠네. 많이 먹어둬."
경수는 밥을 입 안으로 퍼넣느라 대답을 하지 못했다. 백현도 경수를 따라 밥을 입 안으로 퍼넣었다.
귀빈들이 도착하자, 단장은 그들을 맞았다. 단장의 뒤로 서커스 단원들은 대열을 맞춰 서 그들을 반겼다. 백현은 뚱한 표정으로 그들의 얼굴을 살폈다. 하나 같이 호화로운 옷을 입었다. 물론 그만큼 돈이 많으니 서커스장을 하루 사서 공연을 보는 것이겠지. 백현은 침을 뱉었다. 경수는 화들짝 놀라 백현의 손등을 찰싹 때렸다. 백현은 웃으며 경수의 허리를 감쌌다.
백현이 불새로 불리는 이유는 백현이 선보이는 묘기가 주로 불을 이용하기 때문이었다. 불꽃놀이 외에 백현이 선보이는 묘기 중 하나는 불타오르는 몇 개의 링을 오가며 몸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백현의 묘기는 아슬함에서 오는 스릴이었다. 사람들은 백현의 묘기를 보며 혹여 다치지라도 않을까 마음을 졸였지만, 백현이 성공적으로 링을 빠져나오는 것을 보며 박수를 쳤다. 왜 그것을 즐기는지 백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이해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백현은 자신의 쇼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으며 경수를 찾아 눈알을 굴렸다. 백현은 금방 경수를 찾을 수 있었다. 대부분 경수는 높은 곳에 있었으므로, 항상 눈에 띄었다. 경수는 두 개의 그네를 오가며 묘기를 부리고 있었다. 백현은 경수를 나비라고 부르는 것을 즐기지 않았지만, 그네 위에서 경수는 정말로 나비처럼 보였다. 백현은 손을 마저 털었다.
마지막 공연이 끝나고, 백현은 오늘은 숙소에서 잘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백현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어째서? 백현이 묻자 막내는 우물쭈물 말했다. 날이 어두워져 손님들이 하룻밤 머물고 하산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는 것이다. 백현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괜히 막내를 잡을 필요는 없었다. 백현은 천막 밖으로 빠져나왔다. 바깥 공기는 여전히 습하고 눅눅했다.
백현은 경수와 조금 걸어나와 강가에서 잠을 자자고 제안하기로 마음 먹고 경수를 찾았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도 경수가 보이질 않았다. 경수와 함께 방을 쓰는 세훈에게 물어도 경수의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슬슬 백현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발이 다쳐 걸음도 성치 않은데 또 어디에 간 것인지 모르니 답답했다. 백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백현은 계속해서 경수를 찾았지만, 경수를 본 단원은 없었다. 신경질적으로 벽을 걷어차자 모두 움찔했다. 백현은 성깔 있기로 단원들 사이에도 유명했다. 괜히 건들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는지, 다들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저, 백현이 형."
막내가 벽에 기대어 선 백현에게로 왔다. 우물쭈물 선 막내에게 백현은 왜 그러냐며 물었다.
"그러니까... 사실 제가 아까 경수 형을 봤어요."
"뭐? 언제? 어디서?"
"아까 형과 누나들에게 오늘 숙소라는 말을 전하라고 단장님께서 지시할 때요..."
"단장과 함께 있었어?"
"네... 그리고 경수 형을 데리고 손님들에게 갔어요..."
백현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백현은 결국 뜬 눈으로 밤을 지새는 수 밖에 없었다. 숙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백현은 바닥에 주저앉아 경수를 기다렸다. 새벽이 되어서야 경수는 숙소를 빠져 나왔다. 몹시 지친 표정이었다. 다리를 절뚝이며 나오던 경수는 백현과 눈이 마주쳤다. 경수는 백현을 보자 흠칫했다.
"...도경수."
백현은 경수가 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된 훈련을 받을 때면 경수는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을 보이곤 했다. 경수는 마음이 여렸고, 힘든 것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백현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경수는 오히려 지나칠 정도로 표정이 없었다. 백현에게 거의 닿았을 때엔 힘겹게 입꼬리를 올리기도 했다. 경수는 왜 잠을 자지 않았냐며 되려 백현을 타박했다.
"할 말 없어?"
백현은 화가 나 경수에게 물었다. 경수는 아무 것도 묻지말라는 듯이 고개를 내저었다. 경수는 불편한 걸음으로 백현을 지나쳤다.
백현은 왜 이토록 화가 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경수의 잘못이 백 번 아니었음에도 경수에게 화가 났다. 왜 경수에게 화가 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경수는 경수 나름대로 백현을 피했다. 일이 있은지 일주일이 지날 때까지 둘은 말 한 마디 섞지 않았다. 민석은 경수와 싸웠냐고 물었지만 백현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이걸 싸웠다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늦은 밤에 백현은 경수의 방을 찾았다. 경수의 얼굴을 보면 미안하다고 할 지, 아니면 괜찮다고 할 지 아직 정하지 못 했지만 그래도 무작정 경수의 방으로 향했다. 백현은 경수의 방을 두드리기 전, 결정을 해야했다. 어떤 말을 가장 먼저 해야할 지.
백현은 경수의 방문을 두드리려다 손을 멈췄다. 백현은 머릿 속이 아찔해졌다. 얼마 전과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 때와 달리 방 안에서는 두 개의 목소리가 들리진 않았지만, 여전히 끙끙 앓는 경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백현은 고민했다. 그 때처럼 지나칠 것인가.
백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백현은 방문을 발로 차며 들어갔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침대에는 불쾌하게 두 개의 살덩이가 섞여 있었다. 백현은 이후의 기억은 나지 않았다. 다만, 기억나는 것은 놀란 단장의 얼굴에 주먹을 날렸다는 것 하나였다.
백현이 정신을 차렸을 때는 온 몸에 멍이 가득한 체 마굿간 건초 더미 위에 던져져 있었다. 눈이 얼마나 부었는지 한 쪽 눈을 뜰 수도 없었다. 흠씬 두들겨 맞은 모양이었다. 와중에도 백현은 경수를 걱정했다. 경수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맞았는지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움직이려고 하면 몸이 부숴질 듯이 아팠다.
"...젠장."
백현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백현은 몸의 긴장을 풀었다. 몸에 긴장을 줘봤자 움직일 수도 없는데, 아프기만 하기 때문이었다. 온 몸에 힘을 풀고 백현은 꼼짝없이 한참을 바닥에 누워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거의 두어 시간은 지난 듯 했다. 백현은 끼익하고 열리는 문소리에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한 쪽 눈만으로 봐야했으므로 누군지 알아챌 때까진 시간이 걸렸지만, 사내는 찬열이었다.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찬열과 말을 섞어본 적은 없었지만 종종 마주치고는 했다. 찬열은 백현을 아랑곳하지 않고 백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엉덩이를 붙였다. 백현은 다시 몸을 일으켜보려 애썼다. 백현이 움직이자 건초더미가 넘어졌다. 찬열은 그제서야 흠칫했다.
"...누굽니까?"
찬열은 소리가 난 곳을 뒤돌아봤다. 백현과 눈이 마주친 찬열은 눈을 깜박였다.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전 변백현이라고 합니다. 꼴이 이 모양이라... 대답을 하기가 힘들군요."
찬열은 땅을 더듬으며 일어나 경수에게로 다가왔다.
"그 꼴이라뇨?"
"...얻어 맞은 모양이네요."
"누구에게 말입니까?"
"단장이겠지요."
찬열은 놀란 기색이었다. 어째서? 찬열은 물었다.
"설명하자니... 길군요. 후우..."
"얼마나 다친 겁니까?"
"보면 알지 않습니까. 말조차 하기가 버겹군요."
백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켜 벽에 몸을 걸터 앉았다. 찬열은 어느새 백현의 코앞까지 다가와 백현의 얼굴을 만졌다. 찬열은 얼굴을 찡그렸다.
"많이도 부었군요. 아프진 않나요?"
"질문이라고 합니까?"
"단장님께서 이렇게까지 때리실 분이 아닌 것 같은데..."
이번에 얼굴을 찡그린 것은 백현이었다. 와중에 단장을 옹호하는 소리를 들으니 기분이 나빠진 이유였다.
"됐습니다. 헌데 그 쪽은 왜 여기로 온 겁니까?"
"오늘 이상하게 바깥이 춥더군요. 그래서 잠을 자기 위해 왔습니다."
"숙소는 어떻게 하고..."
"제게는 숙소가 없습니다."
찬열은 백현의 옆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백현은 놀라서 되물었다.
"숙소가 없다뇨?"
"제겐 숙소가 없어요. 그래서 대부분 바깥에서 자거나, 추운 날은 이 곳에서 눈을 붙이죠."
"...몰랐어요."
"알 필요도 없죠."
찬열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답했다.
"피곤해서 그런데 먼저 눈을 붙여도 되겠습니까?"
찬열은 물었다. 백현은 그러라고 했다. 찬열은 그대로 스르륵 바닥에 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새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백현은 몸이 아파 쉬이 잠에 들지 못했다.
백현이 일어나자 찬열은 온데간데 없었다. 먼저 나선 모양이었다. 시간을 알 수 없었다. 백현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자고 일어나니 몸은 더 아팠다. 온 몸이 묵직해 자기 전보다 몸을 일으키기가 더 힘들었다. 눈은 더 부어서 눈두덩이가 눈알을 덮은 모양이었다. 한 쪽 눈에만 의지해 앞을 보자니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곧이어 끼익하고 문이 열렸다. 찬열인가 해서 문을 본 백현은 얼굴을 찡그렸다. 단장과 경수였다.
"쯧쯧. 일어났나?"
백현은 반항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답은 하지 않았다. 경수는 걱정스레 백현을 내려다보았다. 단장은 아랑곳 않고 백현의 앞으로 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왔다. 백현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은 단장은 배려 없이 백현의 고개를 치켜세웠다. 백현은 목이 꺾이자 목이 부러지는 듯한 고통이 들었다.
"윽..."
"아프나? 그러게 까불지 말았어야지..."
단장은 기분 나쁘게 웃었다.
"당신... 경수를 그렇게..."
신경질적으로 단장의 팔을 쳐낸 백현은 분노에 가득 차 단장을 노려보았다. 단장은 그게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잘 들어. 나는 억지로 나비를 탐한 게 아냐... 그렇지?"
단장을 고개를 돌려 경수에게 물었다. 경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현은 소리를 질렀다.
"왜 거짓말을 하는 거야! 도경수!"
"...거짓말이, 아니야."
경수는 눈을 떠 백현에게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경수는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다.
"다 내가 부탁드린 거야... 백현아, 그러니 단장님께 죄송하다고 사과 드려. 응?"
"들었지?"
"...당신!"
"변백현... 잊지 않는 것이 좋아. 네 처지를. 꼭두각시 노릇에서 벗어난 지가 얼마 되었다고 주제를 모르고 까불어, 까불긴. 쯧."
단장은 백현의 뺨을 툭 치곤 몸을 일으켰다. 사과는 필요 없다며, 단장은 경수를 데리고 빠져나왔다. 이곳에서 몸을 추스리라는 말을 남기고. 단장이 경수를 데리고 마굿간을 빠져나가자, 백현은 분노에 차 악을 질렀다.
이후에 백현은 경수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말을 걸려고 했어도 경수가 백현을 피해 다녔으니 기회조차 없었을 것이었지만. 곁눈질로 훔쳐본 경수는 날이 갈수록 더 말라가고 있었다. 다리를 다친 지가 언젠데 여전히 경수는 붕대를 풀지 않았고, 다리를 절었다. 이대로 절름발이가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었다. 치료를 제대로 하는 것이 있냐고 묻고 싶었지만 백현은 경수에게 다가갈 수도 없었다.
백현은 점점 환멸을 느꼈다. 굴레를 벗어나고 싶었다. 가짜 새가 아닌 진짜 새가 되어 훨훨 날고 싶었다. 백현은 더 이상 날아오는 단도에 몸을 떨지도, 눈을 감지도 않았다. 백현의 빳빳이 든 고개에 사람들은 더 큰 박수를 줬다. 미친 세상이라고 백현은 생각했다.
백현과 찬열은 이후에도 몇 번 마주쳤지만 찬열은 백현이 지나가도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백현을 보지 못하기라도 하는 듯이. 억지로 붙잡고 인사를 하거나 말을 걸 필요는 없었으므로, 아코디언을 연주하는 찬열을 지나친 백현은 천막의 안으로 들어갔다. 무대에선 막내들이 꼭두각시쇼를 선보이고 있었다. 백현은 멈춰서 쇼를 구경했다. 몸과 팔에 고정된 와이어에 기대 몸을 축 늘인 막내들은 와이어의 움직임대로 뭄을 움직였다. 정확히는 몸을 축 늘이는 연기를 하고, 줄에 의해 움직이는 꼭두각시 흉내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줄을 움직이는 것은 단장이었다. 높은 곳에 올라선 단장은 줄을 움직였고, 단장이 움직이는 줄에 의해 꼭두각시는 움직였다.
백현과 경수 또한 서커스를 시작하기 직전에는 꼭두각시 흉내를 냈다. 모든 서커스 단원들이 거쳐가는 관문과도 같았다. 백현은 떠올렸다. 꼭두각시 흉내를 낼 때에 단장히 늘 하던 말을.
'너희는 나의 꼭두각시인 척을 해야만 한다. 아니, 연기를 하는 순간에는 반드시 꼭두각시가 되어야만 한다.'
백현은 기분이 나빠졌다.
백현이 경수가 여전히 단장과 잠을 잔다는 것을 알았다. 귀빈들의 접대를 한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백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경수는 백현을 피했고, 점점 말라갔다. 이제는 뼈마저 보일 지경이었다. 아침 식사를 하는 곳에서도 경수를 볼 수가 없었다. 경수와 함께 방을 쓰는 세훈은 경수가 거식증에라도 걸린 것이 아니냐며 걱정 섞인 말을 말을 하곤 했다.
백현은 더 이상 경수를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경수는 쇼가 끝나고 그네에 걸터앉은 경수를 억지로 끌어린 백현은 경수를 붙잡았다. 경수는 놀란 눈을 하고 억지로 팔을 빼내려 했지만 악력에서는 백현에게 밀렸다. 백현은 버티려는 경수를 아예 업어들고 천막을 빠져나왔다. 눅눅했던 공기는 이제 꽤 차가워져서, 백현은 순간 몸을 떨었다. 천막에서 꽤 멀리 떨어진 곳까지 와서야 백현은 경수를 내려놓았다. 경수는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화를 냈다.
"너 죽을 셈이야?"
"뭐?"
"요새 아무 것도 안 먹는다며. 뭐하는 짓이야?"
"그건... 백현이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냐."
"왜 아닌데?"
"그건..."
경수는 마땅히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대신 경수는 찡그린 얼굴을 했다. 백현은 찡그린 얼굴이 미워 경수의 얼굴을 꼬집었다. 제법 세게 꼬집었는지 경수는 신음소리를 냈다.
"뭐하는 거야!"
"...차라리 나와 도망가자."
"뭐?"
경수는 들어선 안 될 말을 듣기라도 한 듯이 몸을 떨었다. 방금 뭐라고 했냐며 경수는 되물었다.
"...나랑 도망가자고."
"백현! 지금... 무슨 위험한 말을 하는 거야."
"여기에 더 있다간 네가 죽을 것만 같아. 나는 두려워. 도경수, 나와 떠나자."
"어떻게 떠난다는 거야. 도망치면 어떻게 되는지... 너도 잘 알잖아."
가끔씩 서커스단을 도망치는 단원들이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항상 똑같았다. 그들은 주검으로 돌아왔고, 본보기라도 되는 듯이 공중에 매달려 하루를 있고는 했다. 도망가면 모두 이렇게 된다는 단장의 경고였다.
"방법이 있어."
"무슨 방법이든 허튼 생각이야. 백현아, 제발 이상한 생각하지 마. 나는 네가 위험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지금도 충분히 위험해. 나는 새가 되고 싶어."
"...새장에 갇혀서도 살아갈 수 있어."
"너는 그 삶에 만족해?"
경수는 망설였다. 백현은 다시 한 번 물었다. 너는 그 삶에 만족해?
"...만족해."
"거짓말."
"거짓말이.. 아냐. 갈게. 백현아, 제발 위험한 생각하지 마. 나는 너마저 잃는다면..."
경수는 침을 꼴깍 삼켰다. 뒷말은 하지 않았다. 경수는 다리를 절뚝이며 천막으로 돌아갔다.
백현은 단장이 자리를 비운 오늘이 계획을 실행할 최적의 날이라고 생각했다. 백현은 여벌의 옷과, 모아온 돈을 챙겨 간단하게 짐을 꾸렸다. 짐이 많아봤자 사치였다. 백현은 경수의 방으로 갔다. 경수의 방문을 두드리자 경수가 방문을 열었다. 놀란 기색으로 백현에게 경수는 왜 왔냐고 물었다. 백현은 이번에도 경수의 팔을 억지로 끌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경수는 문을 붙잡고 끌려가지 않으려 악을 썼다. 시끄러운 소리가 나면 안 됐으므로, 우선 백현은 경수를 놓아주었다.
"가자, 도경수."
"가자니? 어딜?"
"밖으로. 오늘 떠나자."
"백현아!"
경수는 누가 듣기라도 했을까 주위를 둘러보았다. 방 안을 들여다보니 세훈은 곤히 잠이 들었다. 경수는 백현을 떠밀었다.
"허튼 생각 말고 방으로 돌아가."
"허튼 생각이 아냐. 지금 나가면 도망갈 수 있어."
"나는... 떠나지 않아."
"지금 가면 갈수 있다니까!"
"나는 떠나고 싶지 않아!"
경수는 다시 한 번 백현을 떠밀었다. 백현은 놀란 눈을 했다. 진심이야? 백현은 물었다.
"진심이야. 나는 떠나지 않을 거야. 나는... 지금의 삶에 만족해. 나가봤자 얼어죽기야 더하겠어."
"다른 걸 할 수 있어. 도움도 받을 수 있을 거야."
"변백현. 어린 생각하지 마. 단장님은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든 우리를 찾을 수 있어."
백현은 답답했다. 소비적인 실랑이를 벌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당장 경수를 데리고 도망을 가야만 했다.
"네가 가지 않으면... 나 혼자라도 가겠어."
"백현아, 제발..."
경수는 허튼 짓 하지 말라며 애원했다. 어쩔 수 없었다. 경수가 버티고 있는다면 억지로 데려가는 수 밖에 없었다. 백현은 바닥에 둔 짐을 한 쪽 팔에 쳐메고, 경수의 입을 틀어막고 경수를 들쳐멨다. 백현의 커다란 손에 막혀 경수의 말은 욱욱대는 소리로 들릴 뿐이었다. 백현은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천막을 빠져나왔다. 꽤 늦은 시간이었으므로 서커스장은 고요했다. 백현은 오랜 시간동안 소란을 피우지 않고 산을 빠져나가는 길을 알아봤다. 천막 뒤로 난 길을 따라서 가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손님들에게 듣기론 마을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다. 여전히 경수는 몸부림을 쳤으나, 마른 몸으로 건장한 백현의 악력을 이길 수는 없었다.
경수를 들쳐메고 어두운 산을 빠져나와야만 했으므로 백현은 힘이 들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최대한 멀리 벗어나야만 했다. 아침에 단장이 돌아올테고, 금방 백현과 경수가 사라진 것을 알아챌 것이다. 백현은 마을로 가 최대한 빨리 마차를 구해 멀리 도망갈 생각이었다. 경수는 몸부름을 치다가 지쳤는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백현은 틀어막은 손을 뗐다. 그러자 경수는 백현이 손을 떼자마자 백현에게 말했다. 혹여 들릴세라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지만.
"이게 뭐하는 짓이야..."
"어쩔 수 없었어. 도망가자. 거기에 너만 두고 도망갈 수 없어."
"나가서 어쩌자는 건데... 백현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돌아가자. 응?"
백현은 경수의 말을 무시했다. 백현은 주위를 살피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경수는 불안에 가득 찬 눈빛으로 백현을 따라 주위를 두리번댔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백현은 불빛을 발견했다. 마을의 입구를 알리는 가로등이었다. 백현은 잠시 멈춰서 한숨을 돌렸다. 백현은 경수를 내려주었다. 경수는 되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더 이상 반항하지는 않았지만, 불안한 눈빛을 풀지 않았다. 백현은 경수의 손을 쥐고 마을로 들어갔다. 옆으로 둘러멘 가방에서 백현은 모자를 꺼내 경수에게 건넸다. 경수는 모자를 푹 눌러썼다.
"계십니까?"
백현은 마차를 탈 수 있는 곳을 묻기 위해 인근의 불켜진 집의 문을 두드렸다. 곧이어 집의 주인으로 보이는 노파가 나왔다. 노파는 잔뜩 경계를 한 눈으로 백현을 보았다. 경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왜 그러쇼?"
"마차를 타려고 합니다. 어디서 탈 수 있을까요?"
"마차를 말이요? 이 이른 시간에 마차는 어찌..."
누가 봐도 수상했다. 경수는 극도의 긴장감에 손을 덜덜 떨었다. 노파는 그런 경수의 손을 보더니 문을 쾅 닫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경수는 안절부절 못하며 몸을 떨었다. 백현은 그런 경수의 어깨를 감쌌다. 백현은 경수를 다독였다.
"걱정 마. 잘 될 거니까..."
벌써 두 군데나 허탕을 친 백현은 망연자실했으나 가만히 서있을 수는 없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 마을에 머물러 있는 것은 위험했으므로, 차라리 조금 더 걸어 다른 마을을 찾기로 했다. 그나마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야했다. 경수가 걱정이 되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경수는 숨을 헥헥대며 백현을 뒤따랐다. 어느새 해가 떠올랐다. 백현은 조금 더 급하게 움직였다. 경수는 힘겨워했다.
"힘들어?"
"...괜찮아."
경수는 불안한지 계속 뒤를 돌아봤다. 백현은 경수의 손을 잡고 끌었다.
"마차를 이용하고 싶은데요."
백현은 여관을 찾아 물었다. 여관 밖에 마차를 이용할 수 있다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관 주인은 백현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백현은 당황해 모자를 더 눌러썼다. 여관 주인은 곧장 웃음을 지었다.
"지금 바깥 사람이 잠시 나가서요.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시겠어요? 곧 돌아올 거에요."
"아, 네."
"어디까지 가시려고요?"
"일단은 대도시까지 나가려고 하는데요."
"대도시라고 하면..."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죠?"
여관 주인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타지에서 오셨나요?"
"...아... 네."
백현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주변 지리를 잘 모르는 것에 의아함을 느낀 모양이었다. 잠시 둘러샌 백현은 혹시 목을 축일 수 없겠냐고 물었다. 오랜 시간 걸어 지쳤을테니 경수가 목이라도 좀 축일 수 있게 해줘야했다. 의자에 앉은 경수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괜찮아? 곧 마차를 탈 수 있을 것 같아. 조금만 쉬고 있자."
"...응."
경수는 손톱을 물어 뜯었다. 고친 줄로만 알았더니 아닌 모양이다. 경수는 불안할 때면 미친 듯이 손톱을 물어 뜯어 상처를 내고는 했다. 백현은 물어뜯지 말라며 경수의 손을 내렸다. 경수의 손이 여전히 떨리고 있었다.
"여기 물이라도 드세요. 마땅히 시원한 게 없네요."
"아닙니다. 감사해요."
여관 주인이 내미는 물컵을 받아든 경수는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지나치게 고개를 숙이자 모자가 떨어졌다. 백현은 경수의 모자를 주워들었다. 경수는 다시 고개를 들어 물을 마셨다. 여관 주인은 그런 경수의 얼굴을 보았다.
"어디서 뵌 분이네요."
"네?"
백현은 당황했다. 여관 주인은 경수의 얼굴을 뚫어져라 보았다. 백현은 놀라 경수에게 모자를 씌워 주었다. 경수 또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어디서 뵌 것 같은데. 기억이..."
"잘못 보신 것 같네요."
백현의 목소리가 떨렸다. 백현은 어떻게 할 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시간을 조금만 버티면 마차를 타고 마을을 떠날 수 있다. 하지만 바깥 사람이란 자가 언제 돌아올 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퍼졌을리야 없지만 백현은 어떻게 해야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도 꽤 부지런히 걸었으니 오후까지는 안전할 것이다. 백현은 불안에 떠는 경수의 손을 쥐었다.
"이 곳에서 가장 가까운 대도시라고 하면 미들타운 정도가 되겠군요.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습니다. 부지런하게 말을 움직이면 밤 늦게는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당장 출발할 수 있습니까?"
"예. 상관 없습니다."
"준비해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하죠. 안사람이 금방 올 겁니다. 안사람이 오는 데로 출발하지요."
"고맙습니다."
여관 주인의 남편은 풍채가 크고 인자한 인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밤 늦게 도착한다고 하니 도착한 후에 하루만 머물렀다가 그곳에서 다시 마차로 다른 곳으로 이동할 생각이었다. 최대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도망가야 했다. 백현은 돌아와 지쳐 앉아있는 경수에게 곧 이동할 거라고 말했다. 경수는 거의 넋이 나간 지경이었다. 밤새 걸었으니 피곤한 모양이었다. 백현은 다시 한 번 곧 이동할 거라고 말했다. 그제야 경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어?"
"조금."
"마차에서는 눈을 붙일 수 있을 거야."
"알았어."
몇 분도 체 안 지나서 여관 주인이 들어왔다. 여관 주인은 백현과 경수를 유심히 쳐다봤다. 뒤돌아선 백현은 경수의 어깨에 묻은 먼지를 털어주었다. 경수는 여관 주인과 눈을 마주쳤다. 여관 주인은 여전히 경수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경수는 백현의 귀에 입을 갖다댔다.
"...여관 주인이 약간 이상해."
경수의 말을 들은 백현이 다시 뒤돌아봤다. 여관 주인은 경수를 살펴보고 있었다. 백현은 침을 꼴깍 삼켰다. 여관 주인은 금새 아무 것도 아닌 듯이 웃더니 자신의 남편의 귀에 대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남편 또한 백현과 경수 쪽을 힐끔 쳐다보았다. 백현은 경수의 손을 잡아 일으켰다.
"...이제 떠날 수 있을까요?"
백현이 묻자 여관 주인의 남편이 난처한 얼굴을 하며 답했다.
"이걸 어쩌죠? 방금 안사람이 확인하고 왔는데 마차에 약간 이상이 생겼다는군요. 수리공을 불러올 겁니다. 한 시간이면 충분해요."
"...한 시간이나요?"
"식사나 좀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어차피 부지런히 움직이려면 저녁도 먹기 힘들텐데 출발 전에 먹고 가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만..."
"끼니를 제공하는 것이 도리지요. 금방 식사 준비를 하겠습니다."
"마을에서 다른 마차를 이용할 수 있는 곳이 없나요?"
"이 근방에선 이 곳 뿐입니다. 왜 그렇게 급하게 이동하려고 하시나요?"
"...아닙니다. 그렇다면 기다리도록 하겠습니다."
"제 아내의 요리 솜씨는 마을에서 유명한 편이죠. 만족하실 겁니다."
여관 주인의 남편은 클클대며 말했다.
식사를 마치고 마차에 오른 백현은 경수를 위해 웃옷을 벗어주었다. 경수는 됐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백현은 억지로 경수에게 옷을 덮어주었다. 곧 마차가 움직였다. 백현은 밖을 잠시 보았다. 마차가 마을 어귀를 향해 가는 듯 했다. 백현의 배에서 꼬르륵대는 소리가 났다. 경수는 그제서야 조금 웃었다.
"먹고도 배가 고파?"
"하나도 안 먹었어."
경수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하나도 안 먹었다니?"
"먹는 척만 한 거야."
"어째서?"
"그냥 이상하게 먹으면 안 될 것 같았어."
"하루종일 굶는 거잖아. 평소엔 그렇게 많이 먹으면서... 괜찮겠어?"
"도착하면 뭐라도 조금 먹을 수 있을 거야."
"그래도..."
괜찮다며 백현은 경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경수는 여간 눈을 깜박였다. 많이 졸린 모양이었다.
"잠 와?"
"졸려. 아까도 졸리긴 했는데 유난히 밥 먹고 나니까 더 졸리네. 배가 불러서 그런가..."
"그러면 좀 눈을 붙이도록 해."
"알겠어."
경수는 금방 새근대며 잠에 들었다. 백현은 웃옷을 끌어올려 덮어주었다. 마차는 삐걱대며 바삐 움직였다.
조는 경수를 보고 있자니 피곤해서 참을 수 없었던 백현은 경수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었다. 마차가 크게 한 번 움직이자 놀라 깬 백현은 바깥을 보았다. 그렇게 많이 자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런데 백현은 흠칫했다. 방금 벽에 뭔가가 붙은 것을 보았는데, 백현 자신과 매우 닮아있었다. 수배지처럼 생긴 종이였다. 백현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선 경수를 깨워야했다. 백현은 일어나라며 경수를 흔들었다. 그런데 경수가 도통 일어나지를 않았다. 아주 깊게 잠에 빠진 모양이었다. 백현은 고민했다. 여관 주인과 그 남편이 저 수배지를 보았을까? 당장 갈 수 있다더니 갑자기 시간을 미룬 것이 이상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백현은 계속 경수를 흔들었다. 이상할 정도로 깊게 잠들었다.
"도경수."
불안하다. 백현은 주먹을 꽉 쥐었다.
백현은 계속 주위를 살폈다. 이제는 거의 분명했다. 마차는 거꾸로 가고 있다. 자세히 모르는 곳이고, 밤에 지나친 곳이라 확실하지 않았는데 커다란 고목나무를 지나치면서 확신했다. 마차는 지금 서커스를 향해 가고 있다!
백현은 경수가 일어나지 않자 경수를 품에 안았다. 여차하면 뛰어내려야만 한다. 마차가 쿵 소리를 내며 들썩였다. 뭔가에 부딪힌 모양이다. 마차가 속도를 잠시 늦췄다. 백현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짐와 경수를 부둥켜안은 백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백현은 마차에서 뛰쳐내려 풀숲으로 몸을 던졌다.
하필이면 뛰어내린 자리에 돌부리가 있었던 모양이다. 돌부리에 허벅지를 정통으로 맞은 백현은 소리를 질렀다. 경수까지 안고 충격을 받았으니 원래보다 2배의 충격을 받은 셈이다. 백현은 고통에 차 끙끙댔다. 와중에도 백현은 들키기라도 할까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다. 경수도 바닥에 떨어질 때의 충격으로 순간 정신을 차린 모양이었다.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두리번거린 경수는 땅바닥에 엎드려 신음하는 백현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백현아!"
경수는 백현을 살폈다. 풀숲이기는 해도 구르며 얼굴이며 팔이며 생채기가 나있었다. 무슨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우선 백현을 나무에라도 기대게 해야했다. 경수는 백현을 끙끙대며 나무로 옮겼다. 여간 무거운 게 아니였다. 백현은 식은 땀까지 흘리기 시작했다. 도움을 청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경수는 최대한 조심을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현도 점점 정신을 차렸기 때문이다. 약간 정신을 차린 백현은 자신이 아닌 경수부터 걱정했다. 경수는 울컥했다.
"너... 너가 이 모양인데 나한테 괜찮냐고 물으면 어떡해..."
"괜찮아. 좀 걷다보면 괜찮아질 거야. 마부가 우리를 속였어. 빨리 도망가야해."
얼마 가지 않아 백현과 경수가 뛰어내렸다는 것을 알게될 것이다. 그 전에 도망가야만 했다. 어떻게 거리를 벌려놨는데 부주의로 인해 다시 거리를 한참을 좁힌 셈이다. 빨리 눈치를 챘어야했다. 하지만 자책할 시간조차 없었다. 백현은 일어나려고 했으나 다리에 거의 감각이 없었다. 경수는 손톱을 깨물었다.
"어떡하지? 많이 다친 것 같아."
"우선... 몸을 숨기자. 여기에 이러고 있을 순 없으니까."
백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아직 경수의 다리도 성치않은데 자신까지 다리를 다쳤으니 큰일이었다. 가방을 둘러메고, 경수의 손을 잡으며 주위를 살폈다. 그래도 숲의 중간쯤 되는 모양이다. 사람이 많이 다니는 길목 같지는 않았다. 백현은 경수를 데리고 몸을 숨길만한 곳을 찾아서 움직였다. 여기가 어디쯤인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날도 저물었다.
"너 움직여도 괜찮겠어?"
"괜찮아. 일단 몸을 좀 숨기자."
다행히 근처에 몸을 숨길만한 동굴이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곳이니 하루 정도 머무를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다리를 좀 맞춰야했다. 아무래도 떨어지며 다리가 어긋난 모양이다. 백현과 경수는 동굴에 짐을 풀었다. 아까부터 백현의 배가 꼬르륵대는 소리를 냈다. 어제부터 거의 아무 것도 먹지 못했으니 당연했다.
"주변에 뭐라도 먹을 수 있는 게 있지 않을까? 내가 나가서 좀 볼게."
"아냐. 위험하니까 그냥 가만히 있어. 밖에 뭐가 있을 줄 알고."
"그렇게 계속 굶으려고?"
"버틸 수 있어. 됐고 나 좀 도와줘. 다리를 좀 맞춰야겠다."
"뭐? 다리를 왜?"
백현은 바위에 앉아 다리를 움직였다. 다리를 만질 때마다 통증으로 신음이 흘렀다. 경수는 걱정스레 백현에게 다가왔다.
"혼자서는 안 될 것 같네."
"우선 좀 뭐라도 감고 있으면 어때? 그리고 너 팔에 피도 많이 났어. 내가 물을 좀 떠올게. 아까 지나오면서 강가가 있는 것 같았어."
"너무 멀리 나가지 마."
"알았어."
경수는 백현의 가방에서 물을 뜰 만한 것이 있는지 뒤적였지만 마땅한 것이 보이지 않았다. 아까 벗어준 백현의 겉옷에 물을 적셔오는 수 밖에 없었다.
백현의 겉옷에 물을 잔뜩 뭉쳐 품에 감싸온 경수는 상체를 탈의한 백현에 화들짝 놀랐다. 다리를 감는데 사용한 모양이다.
"좀 어때?"
"감으니까 그나마 괜찮아."
"옷에 물을 적셔왔어. 피 좀 닦아내자."
"어."
"...나가면 하고 싶은 거 있어?"
"응?"
"이대로 도망가서 하고 싶은 거라도 있냐고."
백현은 자신의 몸을 닦아내는 경수에게 물었다. 경수는 곰곰히 생각했다.
"...별로 없어."
"뭐라도 있을 거 아냐."
"사실 난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배운 거라곤 서커스 뿐인걸..."
"나가서 생각해보자. 거기선 뭐든 더 배울 수 있을 거야."
백현은 몸을 뒤돌았다. 경수는 아직 덜 닦았다며 다시 뒤돌으라고 했지만 백현은 그대로 경수를 품에 안았다. 경수는 당황했지만 빠져나오진 않았다.
"내가 책임질게."
"..."
백현의 품은 따뜻했다.
새 지저귀는 소리에 잠에서 깬 경수는 백현을 올려다보았다. 백현은 경수를 품에 안고 잠들었다. 몸이 뜨거웠다. 그냥 원래 열이 많은 것이려니 했는데 백현의 이마를 손으로 짚으니 불덩이였다. 깜짝 놀라 경수는 백현에게서 빠져나왔다.
끙끙 앓는 소리까지 내는 걸 보니 제대로 몸살이라도 걸린 모양이었다. 경수는 백현을 흔들었다. 백현은 힘겹게 눈을 떴다. 옷을 벗고 잤는데도 온 몸에 땀이 가득했다.
"너 지금 몸이 불덩이야. 나가서 옷 물에 적셔올게."
"됐어. 그럴 시간 없어. 날이 밝았으니까 움직여야지."
"지금 이 몸으로 움직인다고? 차라리 여기서 몸을 좀 숨긴 다음에 날이 지나면 움직이자."
"경수야. 잘 들어."
옷을 추스른 백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성치 못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움직여야만 했다. 여기서 잡히면 모든 것이 끝이었다. 백현은 하늘을 원망했다. 어떻게 한 번도 도와주실 수가 없는 건지. 경수는 계속 백현의 다리를 걱정했다. 백현은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경수의 볼을 어루만져주었다.
"가자."
"걸을 만해?"
"참을 수 있어. 좀 더 부지런히 걸어야겠다. 내 기억상으론 근방에 마을이 있어. 하지만 서커스단과 별로 멀지 않으니 조심해야돼."
"알겠어."
경수는 백현이 걱정되는지 계속 백현의 발을 힐끔 쳐다보았다.
"네가 그러니까 더 신경 쓰이잖아."
"어? 어... 안 볼게."
백현의 말대로 조금 더 걸으니 마을이 나왔다. 백현은 숨을 고르고 모자를 푹 눌러썼다. 경수도 백현을 따라 모자를 푹 눌러쓰곤 백현의 뒤에 숨다시피 따라갔다. 이른 아침이라 마을은 한적했다. 애초에 사람이 붐비는 곳도 아니었을 뿐더러. 먼 마을까지 수배지가 퍼졌으니 이 마을은 볼 것도 없었다. 마을에 오래 있어봤자 이로울 것이 없다. 식당에 들려 먹을 것만 좀 사고 서둘러 마을을 벗어나야했다.
"어떻게 할 거야?"
"먹을 것만 사고 다시 걸을 거야. 무작정 걷기만 할 수는 없으니까 지도도 구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마을에 너무 오래 머무르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경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식료품점으로 보이는 곳이 건너편에 있었다. 길목을 건너려던 백현은 흠칫했다. 익숙한 뒷모습이다. 백현은 촉을 세워 익숙한 뒷모습을 가진 남자를 쳐다보았다.
"...민석이야."
경수는 백현의 말에 놀라 백현이 바라보는 곳을 보았다. 정말 민석이었다. 민석이 여기 있다는 것은 최소 다른 단원도 여기에 있다는 것을 뜻했다. 단장은 절대 한 명만을 마을에 보내지 않았다. 갔다가 한 명이라도 도망가면 나간 사람 모두를 벌함으로써 쉽게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백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민석이라면 몰라도 다른 단원에게 들켰다간 큰일이다. 민석은 식료품점 안으로 들어갔다.
"어떡해?"
"일단 몸을 숨기자."
백현은 경수를 데리고 후미진 골목으로 들어갔다. 악취가 났다. 경수는 얼굴을 찡그렸다.
"조금만 참아."
"응..."
백현은 거리와 뒤돌아서 경수를 자신과 마주보게 했다. 경수의 눈이 계속해서 떨렸다.
"미안. 고생시켜서."
"...아냐. 근데 나 발목이 많이 아프지 않은 것 같아."
"그래? 여기선 볼 수 없으니 나중에 좀 벗어나면 보자."
"...응."
백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넌 여기 있어."
"어디 가?"
"여기 계속 있을 순 없잖아. 둘러보고 올게."
"같이 가."
"너는 여기 있어."
백현은 경수를 두고 거리를 빠져나왔다. 조심해서 주위를 살핀 백현은 거리에 사람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서둘러 식료품점으로 갔다. 물건을 사면서도 백현은 계속 두리번거렸다. 값을 지불한 백현은 서둘러 식료품점을 빠져나왔다. 경수에게 가기 위해 백현은 길을 건너던 도중 백현은 뛰어가는 아이와 부딪혀 넘어졌다. 넘어지는 순간 백현의 모자가 벗겨지자, 뛰어오던 아이를 뒤따라오던 아이들이 백현을 보고 소리쳤다.
"어? 불새다!"
백현은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저 멀리서 보이는 것은 분명 민석과 이름 모를 눈에 익은 단원이었다. 민석의 얼굴은 경악에 가득찬 것처럼 보였다. 백현과 민석 모두 벙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멈춰섰다. 몇 시간 같은 몇 초가 지나고, 백현은 본능적으로 뛰기 시작했다. 민석은 계속 자리에 멈춰서 아무 것도 하지 못했으나, 다른 단원은 백현을 쫓기 시작했다.
경수에게 가는 것은 좋지 않았다. 아주 만약에 따돌리지 못한다면 차라리 경수를 놔두고 잡히는 편이 더 좋았다.
경수는 오지 않는 백현에 마음이 초조해졌다. 덜미라도 잡힌 것이 아닐까. 밖으로 나가볼까 했지만 무서워서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백현이 숨겨놓은 쓰레기더미 뒤에서 경수는 코를 붙잡은 체 잠자코 있는 수 밖에 없었다.
무슨 날인진 몰라도 마을에는 백현이 생각했던 것보다 단원들이 많았다. 몸으로 하는 서커스다보니 단원들 모두가 재빠른 편이었다. 그 중에서도 백현은 우수한 편이었으나, 여러 명의 추격을 받으니 힘에 부치는 것은 당연했다. 백현은 다른 단원을 골목에서 따돌리고 어느 집의 마당으로 뛰어들었다. 벽 뒤에 숨은 백현은 밖에서 다른 단원이 뛰어가는 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기다렸다. 어느 정도 잠잠해지자 백현은 다시 담을 넘었다. 경수가 걱정이었다. 혹시라도 나와서 다른 단원들에게 잡힌 건 아닐까.
백현은 몸을 낮춰 경수가 있는 골목 쪽으로 뛰어갔다. 담을 넘으려던 찰나, 백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멈춰섰다.
"변백현!"
익숙한 목소리다. 백현은 담을 넘으려다 뒤돌아보았다. 민석이었다.
"...김민석."
"백현아."
민석은 고민하는 듯 보였다. 어떻게 할지. 백현이 아는 민석은 정이 많은 녀석이었다.
"너라도 도망가. 경수가... 잡혔어."
백현은 심장이 떨어지는 줄만 알았다는 말이 굉장히 과장된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백현은 방금 자신의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알았다. 정말 심장이 땅바닥에 떨어지는 줄로만 알았으니까. 경수가 끌려갔다는 민석의 말을 듣자 백현의 몸이 덜덜 떨렸다. 어떻게 해야될 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민석은 주위를 두리번댔다. 빨리 떠나지 않고 뭐하냐고 백현을 나무랐다. 백현은 담을 넘을 것일지 말지 고민했다.
"뭐하는 거야? 빨리 가지 않고!"
"정말... 정말 경수가 잡혔어?"
백현은 손이 덜덜 떨려 주체를 할 수가 없었다. 두려웠다. 모든 것이 자기 탓이다. 경수는 죽을 것이다. 그렇다면 자신이 경수를 구할 수 있는가? 대답은 뻔했다. 자신에게 그런 능력이 있을리가 없었다. 백현은 망연자실했다.
"...나를 데려가."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김민석. 나를 경수에게 데려가."
백현은 눈을 감았다. 자신을 데려가라는 말에 민석은 미친 짓이라며 백현을 나무랐지만 백현은 확고했다. 경수를 두고 도망갈 수는 없었다. 두려움에 떨고있을 게 뻔한데 손이라도 잡아줘야만 했다. 백현은 민석이 데려가지 않는다면 제 발로 걸어가겠다고 말했다. 민석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민석에 의해 백현은 단원들에게로 끌려가는 연기를 했다. 손을 밧줄로 묶인 백현은 단원들에게 끌려가다시피 서커스까지 걸어갔다. 이동하는 도중에 해가 저물기 시작했다.
경수가 보고싶었다.
"집 나간 개새끼가 드디어 돌아오셨군. 응?"
서커스에 도착하자마자 백현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맞았다. 그리고 익숙한 마굿간에 던져졌다. 단장은 마굿간으로 찾아와 눈조차 뜨지 못하는 백현을 또 때렸다. 분이 풀리지 않는 듯이. 백현은 죽지 않기 위해 몸을 웅크리고 단장의 발길질을 견딜 수 밖에 없었다. 너무 많이 맞아 몸을 움직일 수 없었을 뿐더러, 이제는 고통도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었다. 백현 주위의 건초더미가 백현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나비는 어디 있지?"
"...뭐라고?"
"나비는 어디 있냐는 말이야!"
백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단장은 방금 경수가 어디 있냐고 물은 것이다. 그 사이에 나비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지 않은 것이라면 분명하다. 백현은 상황이 도통 이해가 되지를 않았다.
"...너희가... 데려갔잖아."
"무슨 소리야? 같이 있던 게 아니었어?"
백현은 입술을 깨물었다. 민석이 자신을 속인 것이었다.
민석은, 늘 영리했다.
백현은 다행인지 아닌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경수가 어떻게 되었을지 걱정이 되어 견딜 수 없었다. 무사히 도망쳤을까? 아직도 그곳에서 백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백현은 미칠 지경이었다. 미련하게 잡히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백현은 제발 경수가 무사히 도망쳤길 빌고, 또 빌었다.
백현은 겨우 몸을 움직였다. 팔과 다리는 이미 부러진 모양이다. 목도 거의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때, 삐그덕대며 문이 열렸다. 백현은 돌아볼 수 없었다. 또다시 단장일까 싶어 온 몸에 긴장이 들어갔다. 여기서 더 맞았다간 죽을 것 같았다.
이런 몸 상태로도 필사적으로 도망을 가려는 노력이 부질없다는 것을 깨닫자 백현은 허무해졌다. 낑낑대며 움직여봤자 걸어서 두 걸음 간 것보다 많이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누굽니까?"
낣게 울리는 목소리. 찬열이다. 하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몸을 움직이려는 순간, 속에서 피가 역류하듯 뿜어져나왔다. 백현은 켁켁대며 피를 뱉었다.
"왜 그래요? 괜찮아요?"
"...변백현... 쿨럭... 입니다."
"변백현... 저번에 봤던? 여긴 또 왜 있어요? 또 다친 거에요?"
"하아... 몸을 일으킬 수가 없군요... 좀 도와주세요."
찬열은 백현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다가왔다.
"괜찮아요?"
괜찮을리가 있나. 백현은 억지로 괜찮다고 답했다. 찬열은 백현의 목소리를 듣자 백현의 손을 잡았다. 백현을 끌어 찬열은 바닥 쪽으로 갔다. 바닥에 겨우 기댄 백현은 숨을 골랐다.
"대체 왜 이렇게 다치는 거에요? 저번에도, 이번에도."
"...아무 것도 몰라요?"
"뭘요?"
"나에 대해서 아무 것도 듣지 못했어요?"
"아무 것도."
"...나는 도망쳤었어요."
"도망쳤다고요? 왜요?"
"...끔찍하니까."
찬열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했다.
"...어째서요?"
"어째서 끔찍하냐고요? 당신도 모든 것을 봐왔으면서 어째서 끔찍하냐고 물을 수 있죠?"
"뭘 봐왔다는 거죠?"
찬열은 정말로 모른다는 표정을 했다. 백현은 어이가 없었다.
"어린 아이들이 끌려와 매일 매를 맞고, 잠도 자지 못하고, 미의 기준을 맞추기 위해 밥조차 먹지 못하면서 수 년을 보내고, 수 년이 지나선 단장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야되는 이것이 끔찍하지 않다는 건가요?"
"...뭐라고요?"
찬열은 정말로 아무 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백현은 의아했다. 눈이 있다면 어떻게 그것을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숙소가 없어, 날이 저물고나면 천막 안으로 들어올 수 없어서 그런가?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천막 밖에서 봐도 학대가 눈에 빤히 보일텐데.
"...나는 정말 몰랐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그렇지 않았다면 내가 왜 도망을 쳤겠어요."
"나는... 몰랐어요. 그저 어린 아이들을 먹여주고, 일자리를 주는 줄로만 알았죠. 그리고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어요."
백현은 기가 막혔다. 단장이 서커스의 만들어놓은 이미지는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지경이었다.
"전혀 아니에요. 여긴... 새의 다리를 분질러 도망갈 수 없게 하는 곳이죠."
밤이 어두워지자 경수는 쓰레기더미 속에서 나왔다. 추워서 몸이 덜덜 떨렸다. 백현이 오지 않는다. 경수는 불안해 손톱을 깨물었다. 잡힌 걸까? 경수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 이렇게 약한 자신이 싫었지만, 터져나오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백현이 잡혀갔다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될까. 얼마 전, 백현은 만약에 발각이 되면 자신이 어떻게든 시간을 벌테니 경수에게 도망을 가라고 했다. 그리고 경수에게 금화의 절반을 주었다. 그렇다면 도망을 가야하는 것일까? 하지만 백현은?
우선은 백현이 잡히지 않았을 수도 있으니 기다리기로 했다. 경수는 입고있던 남방을 벗었다. 펜 같은 것이 있을리가 없었다. 경수는 세게 손가락을 깨물었다. 피가 났다.
백현은 눈을 뜨려고 했지만 눈이 쉬이 떠지질 않았다. 어제 맞은 곳들이 욱신댔다.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 세상이 조용했다. 찬열은 역시 새벽 일찍 떠난 모양이었다.
경수는 모자를 푹 눌러썼다. 숲의 수풀 속에서 떨며 잠이 든 경수는 아침에 혹시라도 백현이 자신이 써놓은 것을 읽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쓰레기 더미로 갔다. 남방은 여전히 거기에 있었고, 딱히 누가 건든 흔적은 보이질 않았다. 경수는 실망했다. 백현이 걱정이 돼서 미칠 것 같았다. 모자를 더욱 눌러쓰고 마을을 빠져나오려던 경수는 벽에 붙은 방을 보았다. 흠칫한 경수는 다가가 글을 읽었다.
[새는 새장으로 돌아왔다. 나비도 어서 꽃으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Midnight circus]
경수는 숨을 골랐다. 손이 떨렸다.
백현이 보고싶었다.
백현은 문이 쾅 열리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단원 둘이 다른 남자를 끌고 들어와 백현의 옆으로 내동댕이쳤다. 백현은 망연자실했다. 경수였다. 그리고 뒤따라 단장이 들어왔다.
"왜, 왜 왔어..."
"...너 혼자 죽게 할 수는 없었어..."
"보기 좋은 우애로군. 더러운 것들..."
단장은 킬킬대며 웃었다. 백현은 더러운 얼굴에 침이라도 뱉고 싶었다. 어째서 경수가 돌아온 것일까. 미련한 경수 때문에 눈물이 났다.
"어떻게 할 지는 고민을 해보지. 나비의 얼굴이라도 보게 해주려고 데려왔어. 나비를 다시 데리고 와!"
"뭐? 잠깐, 도경수!"
단원들은 다시 경수의 팔을 잡아 끌었다. 경수는 끌려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경수는 단원에 의해 단장과 함께 끌려갔다. 다리가 부러져 일어날 수가 없었다. 백현은 일어나려고 필사적으로 움직였으나, 반 정도 일어서서 다시 고꾸라지고, 다시 고꾸라졌다. 백현은 손을 뻗었다. 경수가 백현을 부르며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백현은 분노해 주먹을 꽉 쥐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보니 아코디언 소리를 한 번도 못 들은 것 같기는 하군. 본 녀석은 없대?"
"그렇다고 합니다. 몸이 아픈 건지... 근데 원래 친했던 사람이 없어서..."
경수는 침대에 앉아 몸을 벌벌 떨었다. 단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꽤 연주를 잘 하는 놈이었는데. 우선은 기다려봐. 오늘은 정말로 몸이 아팠던 것일 수도 있으니."
"...네. 저, 백현과... 저 아이는 어떻게..."
"조금 더 생각을 해보지... 그렇지, 나비?"
경수의 눈이 공포로 가득찼다.
경수는 단장에게 머리를 잡혀 방 밖으로 끌려나왔다. 단원들은 경수의 양팔을 붙들었다. 어떻게 몇 년을 같이 지낸 경수에게 이렇게 할 수 있는지 경수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간절하게 쳐다봐도 그들은 무표정했다. 이들도 두렵겠지. 경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경수가 끌려간 곳에는 백현 또한 끌려와있었다.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백현은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백현아!"
단장은 못마땅한 듯이 경수의 뺨을 내리쳤다. 연약한 경수는 그대로 땅에 고꾸라졌다. 단장은 그제야 만족한 웃음을 흘렸다. 백현은 이를 빠득 갈았다. 단장은 마치 죄인에게 죄를 내리는 판사라도 된 듯이 놓여진 의자에 앉았다. 백현은 침을 뱉었다. 단장은 발끈하는 백현을 보며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너희를 어떻게 할까?"
"..."
"죽여야지. 둘 다 죽여야지."
"..."
"아니, 아니. 그러기엔 둘 다 너무 아까워. 둘이 없어지니 관객들도 아쉬워하고... 둘만한 서커스 쇼가 없지... 그럼 살려줄까?"
단장은 가히 미친 것처럼 보였다. 분노하는 백현과 겁에 질린 경수를 번갈아보며 단장은 계속해 혼잣말을 했다.
"하지만 살려주면 또 도망을 가려고 할텐데... 그럼 어떻게 할까?"
"..."
"나비. 어떻게 할까?"
단장은 경수를 보았다. 경수는 단장의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벌벌 떨었다. 단장은 떨지 말라며 킬킬댔다. 백현은 당장이라도 뛰어가 입을 뜯어버리고 싶었다. 백현이 으르렁대자 단장은 손짓을 했다. 백현의 뒤에 서있던 단원들이 백현에게 발길질을 날렸다. 경수는 울부짖으며 소리질렀다.
"하, 하지 마세요!"
"나비... 소리 지르는 거야?"
"제발 백현일 살려주세요... 제발..."
"그렇게 나오면 내가 섭섭하지... 지금 내 앞에서 저 녀석 편을 드는 거야?"
단장은 순식간에 목소리를 깔았다. 지금까지의 여유로운 표정은 온데간데 없었다. 경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저 녀석을 죽여버리면 도망가지 않겠지?"
"..."
"벌벌 떨면서 도망갈 수 없겠지..."
단장은 혼잣말을 했다. 경수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칼을 가져와라!"
경수는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단원 둘이 움직여 칼을 가져왔다. 단장은 직접 칼을 쥐었다. 경수와 백현의 눈이 마주쳤다. 백현은 괜찮나는 듯이 웃었다. 이 순간에도. 막아야만 했다. 하지만 어떻게? 경수의 심장이 쿵쾅댔다. 단장은 백현을 데리고 오라고 손짓했다. 두 단원은 백현을 일으켜 단장에게로 데리고 갔다. 경수가 소리를 질렀다.
"제발! 그러지 마세요! 제발... 제발!"
"나비. 쉬이. 착하지. 같이 죽고 싶어?"
"제발 백현일 살려주세요, 제발..."
"빨리 죽여. 모든 걸 다스리는 것처럼 오만한 표정 짓지 말고. 역겨우니까."
백현은 단장을 도발했다. 경수가 허튼 짓을 하기 전에 차라리 죽어버리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단장은 어차피 경수를 죽일 생각이 없어보였다. 그래도 경수가 살 수 있다면... 둘 다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곧 죽을 놈이 말이 많구나."
"제발... 제발 백현일 살려주세요, 제발..."
단장이 장난치듯 백현의 어깨에 칼을 꽂아넣었다. 백현의 몸이 뒤틀렸다. 백현이 고통에 찬 신음을 내뱉자 경수가 울부짖었다.
"아아아아!! 아!! 제발... 제발!! 단장님! 제가 잘못했어요, 저희가 잘못했어요. 제발..."
단장은 그런 경수를 지켜보며 이제는 즐기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백현은 구역질이 났다. 악마와 다를 바가 없었다. 피를 흘리자 순간 머리가 어지러웠다. 단장이 백현의 배에 발을 갖다대더니 힘을 실어 칼을 뽑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게 잘 뽑힐 리가 없었다. 단장은 비웃으며 칼을 뒤틀어서 뺐다. 백현은 엄청난 고통에 소리를 질렀다.
"백현아!"
"나비의 입을 막아라!"
단장은 짜증난다는 듯이 말했다. 그러자 경수를 끌고 온 단원이 옆에 있던 마술에 사용하는 천으로 경수의 입을 막았다. 경수는 엉엉 울었다. 경수의 말소리는 곧 쉽게 뭉개졌다. 단장은 이번에 반대편에 칼을 꽂아넣었다.
경수는 울다가 실신을 한 모양이었다. 백현은 신음을 흘리며 쓰러진 경수를 쳐다보았다. 정신이 혼미했다. 꿇어앉은 백현은 자신의 주위가 온통 피바다라는 것을 알았다. 세상이 붉게 보였다. 억지로 고개를 든 백현은 단장과 눈이 마주쳤다.
"억울하게 생각하지는 마..."
"...닥쳐."
"그러길래 도망은 왜 쳤어. 응?"
백현은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백현은 숨을 헐떡였다. 단장이 움직이더니 바닥에 놓여있던 바가지에 물을 손수 퍼왔다. 단장은 경수에게 물을 퍼부었다. 경수가 화들짝 놀라며 깼다.
"지켜봐야지."
경수는 정신이 없는 듯 했다. 곧 정신을 차린 경수는 백현을 쳐다봤다. 백현의 주위가 온통 빨갰다.
"으어으... 으..으어.. 으어..."
입이 막혀 경수의 말이 뭉개졌다. 백현은 돌아보고 싶었으나 몸이 말을 들어주질 않았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만!"
"다들 꼼짝하지마..."
순식간이었다.
눈이 계속 감겼다. 눈을 깜박일 때마다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백현은 자꾸 눈이 감겼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이 시끄러운데, 한편으로 계속 조용해졌다. 누군가 자신에게로 달려왔다.
"백현아아..."
백현의 귀에는 또렷이 들렸다. 경수였다. 백현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정신 좀...
...현...
안 돼...
제ㅂ...
...현아...
"..."
경수를 보고싶은데 눈이 떠지질 않았다.
경수는 그네에 앉았다. 모든 것은 정리됐다. 찬열의 신고에 의해 올라온 몇몇의 방범대에 의해 현장은 진압되었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가는 백현이 있었으니 모든 것은 순식간에 정리되었다. 그리고 몇몇의 증언에 의해 단장은 처벌되었다. 사람들은 경수에게 많은 것을 물었다. 하지만 경수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 경수의 옆을 찬열이 지켜주었다.
"미안합니다."
"..."
"나는 앞을 보지 못해요. 그래서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
"그래서... 당신들이 그렇게 학대를 받고 있는지 몰랐어요."
"...다 무슨 상관이겠어요."
"당신이 이러는 걸 그도 원하지 않을 겁니다."
"..."
경수는 눈을 감았다. 아무 말도 듣고 싶지 않았다. 경수는 귀도 닫았다. 백현이 자꾸만 떠올랐다. 백현이 마지막으로 한 말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이제 뭐하고 살고 싶어?
"...모르겠어."
그저 네가 보고싶을 뿐이야.
상황이 정리되고 경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백현이 가지고 있던 금화와 자신의 금화를 모두 가지게 되었다. 또한, 단장의 재산 중 일부를 보상으로 받게 되었다. 하지만 경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손에 잡을 수가 없었다. 백현이 죽은 것은 모두 자신 때문이었다. 백현을 따라갈 용기가 없는 자신이 미웠다. 그리고 두려웠다. 죽어서 백현을 따라가도 백현이 자신을 밀어낼 것만 같았다. 왜 따라왔냐고 원망하고 밀어낼까봐. 백현은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경수는 서커스장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의자에 앉아 발을 끌어모았다. 더러워진 붕대를 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발이 전혀 아프지 않았다. 경수는 붕대를 풀었다. 발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경수는 일어섰다. 경수는 서커스장의 중심으로 갔다. 경수는 공중그네에 올라탔다. 경수가 움직이자 그네가 흔들렸다.
발이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
원래는 이것보다 더 길게 잡은 것이었으나, 뭔가 질질 끄는 감이 있어서... 그냥 둘이 쫓기는 장면을 최대한 많이 줄였어요. 사실 원래 이 망상 속에선 찬열의 반전과, 길들여진 새에서 풀어진 새로 바뀌어가는 경수의 모습을 거창하게 그려보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정말로 수동적인 경수와 T_T 불쌍한 백현이로 끝나버렸군요. 사실 써니힐의 Midnight circus 뮤직비디오를 본 이후로 뭔가 영감을 얻어서(??) 거의 2년동안 이런 팬픽을 한 번 써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요새 푹 빠져버린 백도에 대입해 망상을 한 번 써봤습니다... ^오^
나름대로 재밌는 장치가 많이 들어가 있었는데 어떠셨을지 모르겠네용. 바로 경수의 발목의 붕대와 찬열입니다. 중간에 백현이 경수의 붕대를 보고 마치 족쇄 같다고 했잖아요. 경수의 붕대는 억압을 상징하는 거라고 할 수 있슴미다... 그래서 경수가 단장에게 괴롭힘을 당하면 당할수록 경수의 발이 더 많이 아파왔죠... ㅠ_ㅠ 그리고 마지막 쯤에 가서 백현에게 '더 이상 다리가 아프지 않은 것 같다'고 했잖아요. 그건 경수가 거의 자유의 몸이 되었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경수가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되자 더 이상 붕대가 필요가 없게 됐죠. 그리고 원래 찬열이 이것보다 엄청 더 미묘하고 분량이 많은 아이였는데!!! ㅠㅠ 그냥 어쩌다보니 고발자 정도로 쓰이게 됐네용... 원래 찬열이 앞을 보지 못하는 맹인이라는 건 꽤 반전이었거든요!!!
^ㅇ^ 재밌게 읽어주시길 바라며... 그럼 여러분 피쓰! 행복하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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