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화를 안보신 분은 1화부터 보고 오시길 바랍니다.
대본은 없다 03
***
결국엔 와버렸다. 상준아, 기다릴게라고 말한 이가 백현이 아니라 자성이라고 느낀 걸까, 뭐에 홀린듯 네비에 주소를 찍었고, 네비가 안내하는 대로 집 앞까지 와서 당연하게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여는 백현을 보고서야 미쳤었나, 싶었다. 이 밤에 오란다고 와버린 저가 얼마나 한심하게 느껴지는지, 경수는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었다.
"뭐 마실거냐고. 아까부터 말을 해도 못 듣네."
"아무것도."
"코코아 마셔."
참나. 이럴거 왜 물어봤대. 경수는 혼자 속으로 씹은다음 코코아를 타는 백현의 뒷모습을 보았다. 레스토랑 사장, 자성. 그래, 자성이라면 저런 모습이겠지.
"연기 되게 못하더라"
".........시비걸려고 나 불렀니?"
"또 화난 표정이다, 너. 쉽게 발끈하면 안되지, 오늘 너 상준으로 온거니까. 도경수가 아니라"
"뭔 소리야 지금. 배우로써 너한테 연기배우고 싶어 온거야, 자존심 다 집어던지고. 그러니ㄲ"
"연기잘하는 거 별거 없다는 건 너도 잘 알잖아. 그냥 진짜처럼만 보이면 되. 변백현과 강자성 전혀 다른 사람인데 같은 사람처럼만 보이게 하면 되는 거거든"
".........그건 나도 알아"
"그래서, 내 결론은 우리 연애하자고."
"ㅁ..무슨 소리야 지금?"
"계약연애. 변백 앤드 도경수가 아니라 자성과 상준으로."
계약연애라니. 이렇게까지 해야되나. 자성은 무슨. 눈앞에 있는건 웬수같은 똥백새끼뿐인걸.
"내가 도와줄게. 자성을 사랑할 수 있게끔."
결국 경수는 백현의 마지막 말을 뿌리치지 못하고 백현이 쓰는 계약서를 물끄러미 바라보게 되었다. 경수는 한편으론 연기 인정받아서 성공하려면 이정도쯤은 해야지 싶으면서도 상준으로써 자성을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기만 하는건데 진짜 좋아할려고 노력할 필요까진 있을까, 싶었다. 콧노래를 부르는 백현이 쓰고 있는 계약서를 당장이라도 찢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어딘가 한쪽에서 자꾸 억누르고 있었다. 7년 무명 배우의 설움이, 이제는 벗어나고 싶다는 몸부림이 저를 이렇게 가만히 두게 하는 것인가. 경수는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알고 있었다. 백현의 손도장 아래에 저의 손도장이 머지 않아 찍히게 될것이란 것을.
(계약서-영화 짙은의 주연배우 변백현과 도경수는 영화가 끝날때까지 강자성과 권상준으로써 연애를 할 것을 약속함. 단, 영화 촬영이 끝난 후엔 연애와 관련된 어떠한 언급도 없을 것이며, 동기배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것임을 약속함. 변백현.도경수)
*
백현이 주문한 초코라떼 두잔이 나오자 잽싸게 입에 가져다 대는 경수다. 코코아 잔을 만지고 빨개진 귀를 만지는 것을 반복하는 경수를 보면서 백현은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커피보단 코코아가 더 어울린단 말이지. 백현은 코코아를 살짝 마셨다.
"너무 진하네"
온도는 적당한데. 백현은 질색하며 잔을 내려놓았다. 코코아향보단 우유느낌이 더 강한 코코아를 원한 거였다. 초코보단 우유를 더.
"별로 안진한데?"
"우유가 안 느껴지잖아"
"그럼 우유 먹지 왜 코코아를 먹어?"
밋밋하잖아. 백현은 속으로 덧붙혔다. 순수한데 밋밋한 우유라기보다 살짝 녹는 맛이 감도는 초코라떼가 더 어울린다고.
"스키 아까보니까 아예 못타던데"
"어차피 쓰러져있는 역할이라서 괜찮대."
"연기하다 진짜 다치는 수가 있어. 가르쳐줄까?"
"됐어. 스키에 흥미없어"
흐음. 백현은 코코아를 마저 마시는 경수를 억지로 카페밖으로 끌고나왔다.
"으 추워. 안 배운다니까?"
백현은 대꾸도 안하고 들고 있던 스키를 스키신발을 신고 있던 경수의 발에 끼워넣었다.
"상준아, 나처럼 발 에이자로 해봐"
"뭐야, 안 탄다니까. 어차피 내가 스키타는 장면 안나오잖아. 그냥 쓰러져있기만 하면 되는 건데"
"계약서에 항목 추가해야겠네. 상준은 자성의 말에 무조건 복종한다로. 넌 상준이니까 해야되"
"싫다고 했어. 안 타. 이거 벗겨줘"
완강한 경수의 태도에 잠시 고민하던 백현은 경수의 말을 무시한 채 주변을 둘러보고는 대뜸 카페쪽으로 다시 걸어갔다. 경수가 한참을 기다리고 나서야 백현이 카페밖으로 나왔다.
"감독님께 말씀드렸어, 너 스키 불안불안하게 타다가 넘어지는 걸로 하자고. 감독님은 오케이 하셨고. 에이자 해봐, 상준아"
하아. 경수는 짧게 한숨을 쉬고 백현을 따라 에이자를 해보았다. 그래, 상준이니까.
샷 들어간다는 매니저의 전화에 잡아주는 백현을 떨치고 경수는 급하게 리프트에 올랐다. 스키타는 건 의외로 재밌었다. 문제는 저가 자꾸 넘어지는 바람에 백현이 저를 계속해서 안아올려야 했다는 점이다. 절대 부끄러워서가 아니고, 남자 둘이 안고있는 모습을 다른 사람이 이상하게 볼까 걱정되어서 혼자 일어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쉽지 않았다. 어차피 이따 촬영에서 백현이 저를 안아올려야 했기 때문에 리허설 식으로 받아들여도 됐지만 왠지 카메라 없는 곳에서 그러긴 좀...
"많이 춥냐?"
"어?..어..좀"
경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백현이 두손으로 경수의 볼을 감쌌다. 갑작스런 스킨십에 당황한 경수가 뒤로 물러서자 리프트가 크게 경수쪽으로 쏠렸다. 백현은 위험하다며 경수를 자기 쪽으로 끌어 당긴 후 나지막히 말했다. 상준아.
경수는 온몸이 굳은 것처럼 움질일 수 없었다. 백현의 얼굴이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데도 눈만 스르르 감길 뿐 저항할 수 없었다. 상준이 돼버린 걸까. 그래서 자성에게 덤덤히 따라주고 있는 것인지. 앞에 있는 사람은 백현인지, 자성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백현의 입술이 경수의 볼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키스하고 싶은데"
"............."
"자성이, 상준이보다 빨리 나가면 안 될것 같아서."
NG가 많이 나서 눈에 뒹구는 횟수가 많아지는 건 아닌지 걱정했지만 두번만에 끝나 다행이었다. 실제로 못 탔기 때문에 어설프게 타는 연기도 괜찮았다고 들었고, 백현이 저를 업었을 때 미묘한 표정변화도 잘 표현해냈다는 칭찬을 들었다. 간만의 칭찬이었다. 제일 걱정했던 연기도 무사히 잘 끝냈는데, 더군다나 칭찬까지 들었는데도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냥 조금 뒤숭숭한 기분이었다. 리프트에서도, 백현의 등에 업히는 연기를 하면서도 분명 저가 아니라 상준이었는데 왠지 상준이 저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달까. 자성의 얼굴을 못 본 상준이 자성이 고글을 벗기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실제로 빨리 고글을 벗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단지 기분탓이었는지. 헷갈리는게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가 상준이 된건지 상준이 저가 돼버린 건지 확실히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이 걸릴지도 모르던 촬영이 당일치기로 끝나 찬열은 피곤한데도 벤을 몰아야 했다. 한 것도 없는데 어째서 이렇게 피곤한건지. 운전이 점점 거칠어지는 것 같아 휴게소에 잠시 들렀다. 백현은 뒷자석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아까 리프트에서 경수와 함께 있던 백현이 떠올렸다. 아래 광장에서 둘이 있길래 이제 올라가야 한다고 하려고 다가가고 있었는데 갑자기 리프트를 타는 둘 때문에 저도 뒤따라 타게 되었다. 백현이 그러는 것을 한 두번 본게 아니지만, 그런 장면은 오히려 약과였지만 왠지 불안감이 들었다. 사실, 매번 드는 불안감이었다. 저와 백현 사이의 관계가 조금은 이상하지만, 말그대로 그냥 친구사이기 때문에 이런 감정은 느껴서는 안되었다. 가끔 몸으로 대화하기도 하는 친구사이. 그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찬열은 백현과 자신의 관계가 이 이상 진행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백현의 대본에 지금껏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이 이상의 배역을 따는 건 불가능함을 저 스스로도 너무나 잘 알고있었다. 그래서일까. 백현이 좋은 사람을 만나서 이런 생활을 그만두기를 바래왔다. 근데 매번 저게 진심이기를 바라면서 한편으론 거짓이기를 빌었다. 뽀뽀하는 백현의 모습이 거짓이기를.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냥. 백현에게 있어 좋은 사람으로만 남을 수 있기를, 백현의 대본에서 악역만 아니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이 또한 실은 거짓임을 매번 이렇게 증명해주고 있는 백현이 밉기도 했다. 백현을 향한 마음이 언제 이렇게 커버린 건지 야속했다. 저의 대본에서의 변백현은 생각지도 못한 사이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저보다도 더.
대본을 통째로 흔드는 주인공. 그 주인공은 본인이 누군가의 대본에서 주역인 줄도 모르고 저렇게 잠만 자고 있었다.
*************)정말 짧네요ㅠㅠㅠ죄송합니다...안 올리면 더 늦어질 것 같아서 일단 올렸어요ㅠ점점 똥망글이 되어가고 있는 기분ㅠ처음에 생각했던 거랑 조금 다른 방향으로 적고 있어서..ㅠ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이 별로 안계셔서 암호닉을 많이 고민했는데, 그냥 읽으시는 분들끼리 소소히 즐기자는 생각으로 암호닉 받으려고요! 부족한 글에 댓글 달아주시는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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