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은 부쩍 잠이 늘었다. 약의 부작용 중 하나라고 아빠는 내게 설명했다. 졸음, 시도 때도 없는 감정 기복, 만성 피로. 김태형의 천성이 순해서 망정이지 나였으면 그냥 미쳐버렸을 지도 모를 부작용이었다. 학교에 등교 후 점심시간까지 내리 자는 김태형을 보며 박지민은 죽은 것 아니냐며 코 밑에 손을 대어보기도 하고 김태형의 목에 손을 올려 심장이 뛰는지 수십번도 더 확인했다. 김태형의 수면시간이 길어질수록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나를 배려한 박지민의 호들갑인 것을 모르지 않았다. 밥 먹고 나서 약 먹어야 하는 거 아냐? 점심시간 종이 울린 지 15분이 지났을 무렵, 제 자리에 앉아있던 박지민이 김태형과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려 물었다. 다른 친구들이랑 먼저 가서 먹으라는 내 말을 한사코 거절하며 붙어있던 박지민이었다.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김태형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었다.
"김태형, 태형아."
"……."
"일어나 봐. 밥을 먹어야 약을 먹지."
오늘따라 유난히 몸을 일으키는 걸 힘들어 하던 김태형은 박지민까지 가세해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우자 겨우 눈을 떴다. 많이 힘들어? 내 물음에 김태형은 푸스스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자친구 앞이라고 저러네. 솔로 서럽게. 괜히 투덜거린 박지민이 두어발짝 앞서 걸었다. 급식실에 사람이 몰리는 시간보다 늦게 내려온 터라 급식실은 한산했다. 짜고 매운 음식은 피해야 했던 김태형은 오늘도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밥과 시금치 나물, 계란국이 전부였다. 먹을 수 있는 것만 담아온 탓에 휑한 김태형의 식판을 보며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평생 풀만 먹고 자랐으면서 키가 이렇게까지 클 수가 있냐며 김태형은 기적이라는 박지민의 말에 김태형이 웃음을 터뜨렸다. 안 클 사람은 뭘 해도 안 커. 박지민이 김태형의 옆구리를 아프지 않게 찔렀다.
"많이 먹어. 먹어야 약을 먹지."
"겨우 이거 담아와놓고 많이 먹으라니. 잔인하게."
"그럼 이거 먹던지."
김태형의 투정에 나는 내 식판 위에 올려져 있던 불고기를 김태형의 밥 위로 얹었다. 평소 제게 이런 것들을 일절 허락해주지 않던 내가 손수 밥 위로 얹어주니 놀란 듯 싶었다. 먹으랄 때 먹지. 내 턱짓에 김태형은 급히 고기를 집어 넣었다. 한 번 쯤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김태형은 밥을 곧잘 먹었다. 원래 먹는 속도가 느린 탓에 김태형이 수저를 놓을 즈음에 박지민과 나는 식사를 이미 마친 후였다. 오늘도 김태형이 수저를 놓자마자 우리는 식판을 정리하고 교실로 올라갔다. 김태형이 가방에서 먹어야 할 약들을 쭉 늘어놓았다. 끝도 없이 나오는 약봉지에 박지민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게 다 들어가냐. 김태형은 의연하게 약을 하나하나 삼켜냈다. 나는 옆에서 말 없이 사탕을 내밀었다. 딱 거기까지가 내 역할이었다.
다음 시간은 체육시간이었다. 체육시간은 늘 피구나 축구로 떼웠던 터라 나와 김태형은 어김 없이 나무 밑 벤치로 향했다. 날이 부쩍 더워져 아이들은 공을 들고 뛰기보다는 삼삼오오 모여 나무그늘 밑으로 숨기 바빴다. 그 와중에도 박지민은 축구를 하겠다며 모여있는 무리에 껴 있었다. 쟤는 진짜 대단해. 나른한 김태형의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운동을 저렇게 열심히 하는데 왜 키가 안 클까. 졸음이 묻어나는 김태형의 목소리에 작게 웃었다. 박지민한테 너무 그러지 마. 쟤 상처 받아.
"근데, 김태형."
"…어?"
"졸려?"
김태형이 고개를 느리게 끄덕였다. 오전에 그렇게 자 놓고 아직 잠이 오냐. 걱정 어린 내 말에도 김태형은 대답 없이 내 어깨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나는 김태형이 머리를 얹기 좋게 어깨를 살짝 내렸다.
"김태형."
"……."
"태형아. 자?"
"…아니."
"있지, 나 언제부터 좋아했어?"
"내가 기억하는 그 순간부터."
김태형은 가끔 남들이 들으면 부끄러울 법한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아 그런가보다, 하고 넘기려다 다시 곱씹으니 민망해져 기대고 있던 머리를 쭉 밀어 일으켰다. 난데 없이 몸이 일으켜진 김태형이 미간을 작게 찌푸리며 나를 내려다 보았다. 아, 왜.
"자세하게 다시 말 해 봐."
"그러는 너는."
"어?"
"그러는 너는 나 언제부터 좋아했냐고."
되 돌아온 김태형의 역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내가 언제부터 김태형을 좋아했더라. 그냥 어느 순간 부터 은연중에 김태형을 생각하고 있었을 뿐인데. 우물쭈물 대답을 미루는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김태형이 아예 내 쪽으로 몸을 틀며 무릎을 세워 앉아 다리를 끌어안았다. 본격적으로 얘기를 들을 테니 너는 빨리 입을 열라는 무언의 협박이었다.
"기억 안 나는데."
"기억 해."
"기억이 안 나는 걸 어떻게 기억,"
"나는 너 넘어진 거 일으켜 줬을 때 부터."
"……."
"나랑 마주치는 네 눈이 너무 예뻐서. 그 때 부터 좋아했어."
"……."
"자, 이제 네 차례."
"…중학교 2학년 때."
김태형의 얼굴이 눈에 띄게 시무룩해졌다. 머리 위로 귀가 있었다면 귀도 축 늘어졌을 법한 얼굴이었다. 나 혼자만 엄청 좋아했네. 한 풀 꺾인 목소리에 웃으며 김태형의 머리를 헝클였다. 지금 너 좋아하고 있으면 되지, 뭘.
사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김태형을 좋아했다기 보다는 긴가민가 했던 마음이 굳어진 게 중학교 2학년 때라 생각했다. 계기는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낙엽이 마악 지던 어느 가을, 운동장에서 뜀틀 수행평가를 보던 날이었다. 대체 어느 학교가 뜀틀 수행평가를 운동장에서 보느냐 하겠지만 우리 학교는 그랬다. 난데없는 체육선생의 소녀감성 탓에 우리는 꼼짝없이 무거운 뜀틀을 운동장까지 옮겨가며 수행평가를 준비했다. 지난 체육수업 내내 온갖 핑계를 대 가며 수업을 빠지고 김태형 옆에 붙어있던 나도 오늘은 반드시 수업에 참여해야 하는 날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 때도 김태형이랑 같은 반이었네. 아무튼 김태형과 노닥거리느라 정작 뜀틀은 한 번도 뛰어보지 못해 울상인 채로 애 먼 제게 신경질을 내는 내게 김태형은 혀를 쏙 내밀었다. 누가 나랑 같이 놀아달랬나. 넘어지지나 마.
김태형은 당시에 한창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때라 그의 인생에 있어 최저몸무게를 기록하고 있었다. 키는 나보다 한 뼘은 더 컸으면서 몸무게는 나보다 훨씬 덜 나갔다. 한 마디로 그냥 종잇장 같이 훅 하고 불면 쓸어질 것 같았었다. 가끔 가위바위보를 해 진 사람이 이긴 사람을 업고 집에 가기, 따위의 게임을 할 때 나는 여자로서의 핸디캡 조차 받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김태형은 웬만해선 나를 업고 가려고 했었지만 양심상 내가 이겼을 경우에는 그냥 손을 잡고 걸었고 내가 졌을 때는 김태형을 내가 업었다. 그런데 정말 한 치의 거짓말도 보태지 않고 김태형은 가벼웠다.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벼워서 놀란 게 한 두번이 아니었다. 살 좀 쪄. 타박하는 내 말에 김태형은 늘 그저 웃으며 넘어갔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면 뜀틀을 넘을 차례를 기다리며 수심이 가득한 내 얼굴을 김태형은 그저 즐겁게 감상했다. 공주야, 그렇게 인상 쓰면 별로 안 예쁘다. 빙글빙글 웃는 너를 무섭게 노려보아도 너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줄은 빠르게 줄어들었고 이내 내 차례가 되었다. 넘어지지만 말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그대로 달려가 뜀틀을 짚었다.
「야!」
뜀틀을 짚을 때 까지는 좋았다. 분명 좋았는데 짚자마자 앞으로 고꾸라진 것은 내 의지가 아니었다. 뜀틀 앞에 매트를 두껍게 쌓아올렸지만 짚기를 잘못 짚은 탓에 약간 옆으로 틀어져 머리는 매트에 박았지만 무릎은 그대로 모래바닥에 쓸렸다. 아침저녁으로 쌀쌀한 바람이 불었지만 뛰면 덥다고 반바지를 가져 왔던 아침의 나를 뜯어 말리고 싶었다. 세상이 빙글 돌았다. 아픈 줄도 모를 정도로 정신을 못 차리던 차에 몸이 번쩍 들렸다. 그냥 같은 반 친구겠거니 싶어 떨어지지 않으려 목에 팔을 감았다. 그제야 모래바닥에 쓸려 피와 모래가 엉겨붙은 무릎이 쓰라리기 시작했다. 김태형이랑 수다 떨 시간에 한 번이라도 뛰어볼 걸. 한 번 쓰라리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이 따가운 무릎에 눈물이 찔끔 맺혔다.
「넘어지지 말랬지.」
「어, 어?」
「속상하게, 진짜. 이거 흉 지겠다.」
「김태형?」
무릎을 조심스레 살피고 있는 내 위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치켜들었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얼굴을 한 네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나를 안아들고 있는게 김태형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자마자 나는 그 자리에서 몸을 바르작대었다. 나도 양심이 있지. 나보다 몸무게도 덜 나가는 남자한테 안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몸부림을 쳐 대는 나를 김태형은 두 팔로 가볍게 저지한 채 묵묵히 보건실로 향했다. 내 무릎의 상처를 본 보건선생은 경악하며 나를 보았다.
「너 어떻게 하면 상처가 이렇게 크게 나?」
「넘어졌어요. 뜀틀 넘다가.」
「태형이가 여기까지 데려온거야?」
「네.」
「태형이한테 잘 해라, 너.」
툭 하면 수업을 빼먹고 보건실로 피신하던 김태형은 보건선생과 친했다. 김태형은 보건실 문 옆에 위치한 소파에 드러눕듯이 걸터 앉아 내 무릎만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쳐다보았다. 대충 응급처치를 마친 보건선생은 태형이랑 여기서 쉬다가 종 치면 올라가라며 나를 김태형이 앉아있는 소파로 떠밀었다. 성큼성큼 제 곁으로 다가서는 내 손목을 잡아 당겨 제 옆에 앉힌 김태형이 내 얼굴과 무릎을 번갈아 살피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내가,」
「잔소리 할 거면 나중에.」
「…….」
「너 그렇게 무리하다가 잘못 되면 어쩌려고 그랬어?」
「뭐가.」
「너 나한테도 덥썩덥썩 업히는 주제에 무슨 힘이 있어서 날 그렇게 업어.」
「…….」
「옆에 다른 애들 많았잖아. 왜 네가 안고 오냐고. 하루종일 앉아만 있어도 발작 와서 입원 하는 애가.」
「다른 애들이 너 안는 꼴을 어떻게 봐.」
「뭐?」
「야, 내가 너 하나 못 업을까 봐?」
「…….」
「내가 아무 소리 안 하고 그냥 업혀서 그렇지 너 하나는 가뿐해.
그 날 밤, 김태형은 또 심장발작을 일으켜 병원에 입원했다. 자고 있던 아빠가 호출을 받고 새벽에 허둥지둥 집을 나선 탓에 어렴풋이 너에게 또 안 좋은 일이 생겼구나 짐작했다. 안 그래도 요새가 고비라던데 이러다가 정말 큰 일 나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과 동시에 반 쯤 체념하고 있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겹쳤다. 그러자 문득 아득해져 새벽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올 때 까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멍한 정신으로 씻고 홀로 아침을 차려 먹은 후 교복을 단정하게 갖춰입은 채 곧장 병원으로 향했다. 김태형의 얼굴을 보고 가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한 번 발작을 일으키면 이틀은 의식이 없는 터라 그저 잠 들어있는 얼굴만 보고 오려고 했다. 정말로 그러려고 했는데.
「…너 학교는?」
멀쩡하게 일어나 앉아있는 김태형의 모습에 나는 병실 문 앞에서 그대로 얼어붙었다.
「…이모는?」
「선생님 봬러.」
「너 괜찮아?」
「안 괜찮을 건 또 뭐야.」
왈칵 울음이 터졌다. 어느정도 철이 든 이후로 김태형 앞에서 울어본 건 이 때가 처음이었다. 한껏 당황한 얼굴로 어쩔 줄 모르던 김태형이 누워있던 몸을 일으켜 내게 다가오려 하기에 김태형이 침대에서 내려오기 전에 김태형의 앞으로 향했다. 눈에 그렁그렁 눈물을 매단 채 너와 마주했다.
「괜찮다며.」
「괜찮아, 나.」
「입술은 허옇게 다 터가지고서 잘도 괜찮겠다.」
김태형은 또박또박 말을 받아치는 나를 옅은 미소를 띤 채 바라보다 내게 손을 뻗어 눈가에 글썽한 눈물을 닦아내었다. 예쁜 얼굴 다 부어. 끝까지 내 걱정뿐인 너를 나는 나도 모르게 와락 끌어안았다. 아프지 마. 죽지 마, 김태형. 얼결에 내게 안긴 너는 내 어깨에 턱을 얹은 채 푸스스 웃었다. 알았어. 그러니까 울지 좀 마. 내가 널 두고 어딜 가. 나 없으면 아무것도 못 하는 게.
나날이 야위어가는 너를 곁에서 지키는 내 가슴은 새카맣게 타들어갔다. 숯덩이처럼 까맣게 그을린 가슴을 숨길 새도 없이 너는 그 위로 조용히 입 맞췄다. 무엇보다도 숭고한 의식을 치르는 것 마냥. 그것이 내가 너를 놓을 수 없는 이유의 전부였다.
그 때 부터였다. 내 세상이 전부 너 하나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
*
안녕하세요, 썸머비 입니다.
이번 편은 정말 저도 정신 못 차리고 쓴 편이에요... 뭐라고 썼는지도 모를 일;ㅅ;
멘붕에 멘붕을 겪으며 겨우겨우 마무리를 짓긴 지었는데 어떻게 좀 잘 읽히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별 내용도 없고 그렇다고 감동도 뭣도 없는 지루한 글 읽어주시느라 고생 하셨어요.
애초에 총 분량을 열편 내외로 잡고 쓴 글이라 금방 끝내려고 했는데 읽어주시는 분들이 늘어날 수록 저도 욕심이 생기더라구요.
태형이와 여주를 조금 더 오래 보고싶은 그런... 예...
욕심이 과해서 화를 불렀나봐요.
다음 편은 조금 더 가독성을 높힐 수 있게 다듬어서 오겠습니다.
읽어주신 모든 분들 정말 감사해요!
(독방에서 제 글 언급을 보고 와 주시는 분들이 많더라구요...감사합니다 정말정말ㅠㅠ)
♥암호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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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난태태 비비빅 짜근 두글 ♥사랑둥이♥ 이프 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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