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한테선 향기가 나, 짜증날 정도로 달콤한 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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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순영은 사람 신경쓰이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수업시간에 시계를 보려고 뒤를 돌아보면 항상 노란 뒷통수가 책상에 붙어있었는데. 오늘은 왠일로 고개를 들고 칠판을 쳐다보고 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사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수업이 지루해 뒤를 돌아본게 화근이었다. 여느때처럼 남은 시간을 확인하려고 시계를 찾아 눈을 돌리는데 뭔가 내 시선을 잡아끄는게 있었다. 눈에 걸리는 노란색을 따라 획 고개를 돌렸더니 엄마야. 권순영이 앉아 있었다. 그것도 나를 보면서.
턱을 괴고 살짝은 삐딱한 자세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던 권순영은 뭐가 그리 재밌는지 씩 웃는다. 수업시간에 저게 뭐하는 짓이야. 난 괜히 권순영을 쏘아보고는 칠판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 뒤로 계속 뒤통수가 간지럽다. 혹시나 해서 슬쩍 뒤를 돌아보니 여전히 그자세다. 권순영은 또 한번 생긋 웃는다. 쟤는 왜 자꾸 저래. 나도 똑같이 웃어줄 줄 아나.
얄미운 얼굴을 다시 찌릿 째려봐준 후 칠판을 쳐다보고 있는데, 뭔가 이상하단 걸 깨닫는다. 잠시만. 나 방금 권순영이랑 눈 마주쳤잖아. 그것도 두번이나. 왜 나 멀쩡하지? 평소같으면 이럴리가 없는데. 이젠 마주쳐도 괜찮은건가?
아 몰라. 쟤 왜 이렇게 신경쓰이는거지. 이번 시간 수업은 글러먹었다.
쉬는시간을 알리는 종이 치자마지 친구가 옆자리로 찾아 온다.
"김여주!야 대박이야 진심!"
내 친구는 다 좋은데, 하나 아쉬운 점이 있다면 너무 호들갑을 떤다. 권순영이랑 눈 한번 마주친걸로도 하루종일 떠들어대더니 나한테 말을 걸었을때부터는 아주 비명을 지르며 난리를 친다. 중학교때부터 친했던 친구라 정말 아끼고 사랑하지만. 요즘따라 좀 많이 거슬린다.
"수업시간 내내 권순영이 너만 보고 있었다니까?그것도 안 자고!"
친구는 자리 배치 때 맨 뒷줄에 걸려 권순영을 쉽게 지켜볼 수 있는 자리에 있었다. 하지만 그건 나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
무미건조 하게 대답하자.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 치고 들어온다.
"야 진짜 권순영이 너 좋아한다니까."
또 이런다. 얘는 사소한걸 확대 해석 하는데 도가 텄다. 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권순영은 내가 아니라 내 향기를 좋아하는거다.
"소리 좀 낮춰."
친구는 아랑곳하지 않고 혼자 흥분한다. 교실이 다 울리도록 큰 소리로 말한다. 애들의 신경이 알게 모르게 이쪽으로 쏠린다.
"애들도 다 니네 사귀냐고 물어봐. 김여주 걔가 도대체 누구냐고."
슬슬 짜증이 났다.
"그래서 내가 또 내 친구 자랑 좀 했지. 이쁘고 몸매좋고 착하고..."
얘는 내 이름이 애들 입에 오르내리는걸 싫어한단 걸 뻔히 알면서 왜. 친구가 이상한 소문의 가담자 중 한명이었단 사실에 갑자기 울컥 한다.
"니네 걍 사귀면 되겠...."
"야, 작작해 진짜. 나 권순영 싫어하니까 더이상 쟤 이름 내 앞에서 꺼내지 마."
얼굴로 뜨거운 피가 쏠린다. 친구의 얼굴이 놀란 듯 굳는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뒷문쪽으로 나간다. 나가는 길이 왜 하필 권순영 앞자리를 지나는 밖에 없는지. 발을 세게 디디며 재빨리 지나가는데 권순영의 뜨거운 시선이 느껴진다. 쟤한테 미안할 이유는 없다. 내 상황을 이렇게 만든건 권순영이다.
그 앞을 거의 지나쳤을 때 쯤 내 손목을 잡아오는 누군가의 손. 안 봐도 누군지 알았다. 손목을 가볍게 쳐내고 말했다.
"앞으로 아는척하지 마."
나는 뒤도 안돌아보고 교실 밖으로 나간다.
*
교실 밖에서 숨을 고르고 있자 수많은 학생들이 눈에 들어 온다. 또 다시 들려오는 소리들. 어 쟤다. 아, 권순영 걔? 처음 보는데. 쟤한테 좋은 냄새 난대.
머리가 지끈거렸다. 대충 계단쪽으로 몸을 옮겨 벽에 몸을 기댄다. 여전히 나를 훑는 눈길들. 별론데?왜 저정도면 괜찮잖아. 내 취향은 아닌데.
역겹다. 내가 도대체 왜 알지도 못하는 애들한테 이런말을 들어야 하는지. 뒤섞이는 소리에 눈살이 찌푸려지고, 어지러운 머리는 자꾸만 몸을 휘청이게 하고, 겹쳐지는 애들의 시선은 정신을 마구 흐트려 놓는다.
근데 쟤 몸매는 괜찮은것 같...마지막 의식 한 줄기를 놓칠때 쯤. 누군가 나를 덥석 붙잡는다. 한쪽 손으로 날 감싸고, 자신에 기댈 수 있도록 끌어당긴다. 포근한 냄새. 언젠가 맡아본적 있는 듯한 느낌.
"시발, 너 방금 뭐라 그랬어."
흐릿하게 들려오는 목소리. 내가 알던 목소리 같은데 어딘가 낮설게 느껴졌다. 나한테 내는 목소리는 이렇게 차갑지 않았는데. 그리고 이 포근한...
*
정신이 들었을땐 권순영의 옆자리였다.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피자 빈 교실이 눈에 들어오고, 다음으로 익숙한 노란 머리가 눈에 들어오고, 그 다음은 눈, 코, 권순영.
"좀 괜찮냐."
아침과는 달리 약간 날카로운 눈매.
"지금 무슨..."
"지금 점심시간이야."
아까 복도에서 머리가 아프고. 비틀거리다가 누군가 붙잡아주고...그게 권순영?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권순영을 바라보자 고개를 느릿하게 돌리더니 손을 쭉 뻗고 엎드린다.
"나 이제 잔다. 몸 좀 괜찮아졌으면 니 자리 가서 쉬어."
내 책상 위에는 초코롤빵과 우유가 놓여져 있다. 의아한 표정으로 권순영을 돌아 봐도 아무 말이 없다.
조용히 권순영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자니 큰 손이 눈에 들어온다. 손등에 작게 난 상처.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 같았다.
"야...너 손등이 왜 이래?"
손을 잡아 가까이 들여다 보았다. 상처 주위로 빨갛게 부어오른 흔적이 보였다. 생각보다 심해 보였다. 얘는 뭐하다가 이런 상처가. 일단 급한대로 가방에서 밴드를 찾는데, 반대쪽의 내 손을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넌 진짜,"
들려오는 목소리에 밴드를 찾던 손이 멈춘다.
"내가 참고 있는데."
손가락 하나하나가 스치며 깍지가 끼워진다. 손이 당겨지더니 숨을 마시는 소리가 들려 온다. 고개를 돌리자 권순영과 눈이 마주친다.
무언가 말하려던 순간 멈춰버린 입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살짝 찡그린 권순영의 눈썹 아래로 두 눈이 향한다. 권순영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진다.
"너한테선 향기가 나, 짜증날 정도로 달콤한 향이."
멍하니 권순영을 바라본다. 나지막히 뱉은 말은 머리속을 맴돈다.
오늘은 하루종일 눈 마주쳐도 멀쩡했는데. 아까까지만 해도 말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또 왜 이럴까. 권순영은 빨갛게 부은 손으로 내 손을 포개고는 입술 위에 기댄다.
"니가 아는척 하지말라고 했는데."
눈을 느릿하게 깜빡인다.
"아까는 그렇게 못하겠더라, 미안."
"..."
"이왕 미안한거 하나만 더. 여기 밴드 좀 붙여 줘."
내 손을 포갠 채로 손등을 눈 앞에 내민다. 권순영의 눈이 장난스럽게 휘어진다. 다시 나를 스치는 포근한 느낌. 그래 이 느낌은, 권순영이었다.
아까 한 말은 잠시 취소. 나 권순영이 그렇게 싫지는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