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참이나 말을 아끼는 종대에, 민석은 가만히 종대를 바라보았다.
무거운 침묵이 깨지고 이내 귓가에 들려오는 낮은 목소리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적어도 연인 관계가 친구 사이보단 더 각별한 법이지."
커피를 입가로 가져다대던 민석의 손이 우뚝 멈췄다.
세인트폴리아 (Saintpaulia.)
3
나도 그녀석 못본지 오래됐어. 아마 니가 갑자기 없어지고 나서 얼마 후에, 맞아. 그맘때쯤부터 못본것같애. 난 너네둘이 사랑의 도피라도 떠난 줄 알았다니까? 근데 그녀석이 묻던걸. 니가 어디에 있는지 아냐고. 넌 어떻게 그녀석한테도 아무 말 없이 갔냐? 진짜 매정하네. 아무튼 학교에서 몇번 마주치긴 했는데, 진짜 몇번 본게 다였어. 그후로 지금까지 한번도 못봤거든. 그리 좋은 표정은 아니더라. 난 걔가 그런 표정도 지을 수 있다는걸 처음 알았다니까? 맨날 바보같이 실실 웃기만 했었는데..특히 너랑 있을때는 더욱. 아무튼, 학교도 휴학했는지 어쨌는지 통 안나오더라.
들리는 소문은 많아. 조직폭력배에 들어갔다더라, 이상한 도박에 빠졌다더라, 불치병에 걸려 멀리 요양갔다더라. 좋은 소문은 아니지? 어디까지나 소문이니까. 근데 루한이 그럴일은 없어. 절대 그럴녀석이 아니거든. 내가 종종 집에 찾아가기도 했었는데, 갈때마다 항상 인기척이 없었어. 아, 그녀석이랑 나도 꽤 친했어. 니덕분에. 아무튼 요 몇달동안은 나도 찾아가본적이 없었는데, 얼마전에 크리스가 근처에서 루한을 봤다더라. 그래서 마침 찾아가보려고 했는데, 니가 한번 가보는게 어때?
민석이 초인종에 가져다댄 손가락을 몇번이나 다시 거두었다. 손바닥에 작게 적힌 주소가 잔뜩 번져있었다. 니가 기억못한다고 해도, 어쨌든 넌 그녀석이랑 사귀던 사이였잖아. 종대의 목소리가 귓가에 웅웅 울렸다. 땀이 베어나오는 손을 몇번이나 쥐었다 폈다. 민석이 다시한번 초인종에 손가락을 갖다대었다. 누르는거야 김민석. 겁먹지말고 눌러. 꼭 찾으려고 했잖아. 꼭 만나려고 했었잖아. 어서 눌러.
띵동. 단조로운 초인종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길게 울렸다. 민석이 눈을 질끈 감았다.
"..."
숨막히는 정적에 민석이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미동도 없이 굳게 닫힌 문에, 민석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가운 문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주저앉은 민석이 무릎을 가슴팍으로 끌어모아 안았다. 위태롭게 깜빡이던 주황빛 센서가 이내 탁 꺼지고, 복도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내가 이렇게 찾아와도 되는걸까? 그애를 만나면, 내 기억이 돌아올 수 있을까? 내가 없던 그 긴 시간 동안 어떻게 지내고 있었을까. 아니 그 전에, 나를 만나고 싶어하긴 할까? 혹시 내가 너무 욕심부리는건 아닌가.
끊임없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에, 민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구야."
주황빛 센서가 다시 탁, 하고 켜졌다. 제 발 앞으로 보이는 커다란 발에, 민석이 숨을 흡 들이켰다. 머리위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사람처럼 몹시 탁했다. 민석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
분명했다.
밝은 금발의 머리는 아니지만, 짙은 흑발을 하고 있는 이 사람은 제가 그토록 찾던 사람인게 분명했다. 매일 봤던 사진속 얼굴처럼 환하게 웃는 얼굴은 아니지만,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표정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사람은, 제가 그토록 만나고싶어했던 그 사람인게 분명했다. 민석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마주쳐오는 다갈색의 눈은, 사진속에서 봐왔던 다정한 눈빛과는 확실히 다른 것이었다.
"비켜."
민석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저기."
잘 지냈어? 나없는 4년동안 뭐하고 지냈어? 내생각 많이 났어? 종대한테 들었는데 학교도 잘 안나왔다며. 왜그랬어. 사실말이야, 내가 너랑 함께했던 시간들이 잘 기억이 안나. 미안해. 나도 기억해보려고 노력했는데, 그게 잘 안되네. 그래서 말인데, 내가 널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을래? 나 매일매일 니 사진도 봤다? 세훈이가 질리지도 않냐고 맨날 구박했었는데, 그래도 나 매일매일 니 사진만 봤어. 사진속에 너만 보면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졌거든. 나도모르게 웃음도 나고. 그런데 말이야, 하나 물어보고 싶은게 있는데,
우리 많이 사랑했었어?
"..."
몇번이나 연습했던 말들은 쉽사리 입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자꾸만 목안으로 삼켜지는 말들에, 민석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이 사람이 정말 사진속의 그 아이가 맞나 싶었다. 쌍커풀진 큰 눈과 높은 코. 적당히 도톰한 입술까지. 분명 그아이가 맞았다. 하지만,
"남의 집 앞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꺼져."
내뱉어지는 말들과 저를 바라보는 눈빛은, 상상했던 것과는 확실히 달랐다. 사진속에서 환하게 웃고있던 그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민석이 한걸음 물러났다. 그 자리에 가만히 굳어있는 민석을 아무렇지않게 지나치려는 루한을 민석이 급히 붙잡았다.
"..날 잊었어?"
제 손목을 붙잡아오는 작은 손에, 루한이 입술을 짓이겼다.
"니가 누군데."
민석이 가슴 언저리를 매만졌다.
"..저기,그러니까 나는.."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저를 지나치는 모습에, 민석이 입을 꾹 다물었다. 등뒤에서 들려오는 문이 닫히는 소리에, 민석이 급히 몸을 돌렸다. 민석을 마주해오는 것은, 사진속 소년이 아닌, 차가운 문이었다.
왜지? 생각했던 재회는 이런게 아니었는데. 종대의 말이 맞다면, 분명 저 아이가 나를 잊을리가 없는데. 내가 저 아이에게 못되게 굴었었나? 아니면, 내가 저 아이에게 상처를 줬었나?,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기억에, 민석이 주먹을 꽉 쥐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하나만은 확실했다. 다른건 몰라도, 내가 저아이를,
"많이 좋아했었나봐."
세차게 뛰는 가슴이 그렇게 말했다.
온통 밝은 빛 뿐이다. 이게 햇살인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불빛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조금 따뜻한걸 보면 전자에 가까울것이라 생각했다. 눈부신 빛때문에 눈이 잘 떠지지 않았다. 눈물이 고이는 것 같기도 했다. 조금 떨어진 곳에 무언가 있었다. 눈이부셔 잘 보이지 않아 눈가를 비볐다. 환한 빛 아래로 보이는건, 소년이었다.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가 빛을 받아 더욱 반짝거렸다. 민석이 손을 뻗었지만, 손에 와닿는건 선선히 불고있는 바람 뿐이었다. 인형처럼 가만히 서있는 소년에게로 한발자국 다가가자, 소년이 미간을 조금 찌푸렸다. 내가 다가가는게 싫은건가. 민석이 천천히 한발자국 더 다가가려 하자, 소년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여전히 미간을 잔뜩 찌푸린채였다.
...어줘.
응?뭐라고?
...버..줘.
소년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좀 더 다가가자, 소년의 하얀 뺨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소년의 시선은 민석의 뒤를 향해있었다. 민석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소년의 시선이 닿는 곳엔, 밝은 금발의 다른 소년이 서있었다. 역시나 서럽게 우는 모습이었다. ..루한?, 금발의 소년을 바라보던 민석이 다시 앞을 돌아봤다.
갈색머리를 한 자신이 서럽게 울고있었다.
"형. 약 먹었어?"
"나 약 안먹으면 안돼? 이제 하나도 안아픈데. 정말이야."
세훈이 찡찡거리는 민석의 이마를 아프지않게 콩 쥐어박았다.
"또 시작이다 또. 당분간 계속 먹어야된다고 의사선생님이 그랬잖아."
제 손에 약과 물컵을 쥐어주는 세훈을 민석이 살짝 째려봤다. 하여간 한번을 안져요. 민석이 커다란 알약들을 한입에 털어넣었다. 목안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썩 좋지 않았다. 민석에게서 물컵을 받아든 세훈이 민석의 머리를 큰 손으로 쓰다듬었다. 야.내가 형이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제 머리에 닿아있는 손을 쳐내진 않았다. 오늘은 어땠어?통증은 없었고?, 나 이제 안아프다니까., 그래도 아직 걱정된단 말이야. 세훈이 민석의 가슴언저리를 툭툭 쳤다.
"세훈아. 나 찾았다?"
"응?"
"그 아이. 찾았어."
민석이 얼굴 옆으로 손을 들어 브이를 해보였다. 세훈이 잘 됐다는 듯 활짝 웃어보였다.
머리는 사진처럼 금발은 아니더라. 완전 검은 흑발이였어. 그리고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잘생겼어. 눈도 진짜크고 코도 진짜 높아. 그리고 나랑 눈이 딱 마주치는데, 가슴이 막 엄청 빨리 뛰었어. 신기하지? 근데 세훈아,
"..잊혀졌나봐."
눈을 빛내며 열심히 말하던 민석이 갑자기 시무룩해지자, 가만히 듣고있던 세훈이 의아한듯 민석을 바라보았다. 무슨 잘못이라도 한듯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었다.
"날 잊어버렸나봐."
"..."
"내가 너무 늦게와서, 그래서 잊어버렸나봐."
민석이 세훈의 품에 파고들었다. 작은 어깨가 조금씩 떨려왔다. 세훈이 저를 끌어안는 작은 몸을 가만히 토닥였다. 이내 세훈의 가슴팍이 조금씩 젖어들었다.
"..나 이제 어떡하지."
물기를 잔뜩 머금은 목소리가 세훈의 품에서 웅웅 울렸다. 세훈이 민석의 작은 머리에 볼을 가만히 갖다대었다.
"어떻게 하고 싶은데?"
민석이 고개를 들어 세훈을 마주봤다. 역시나 한없이 다정한 눈을 하고 저를 바라본다. 세훈의 눈과는 확연히 다른 하나의 눈이 떠올라, 민석이 입술을 꾹 깨물었다. 세훈아.나는,
" 그 애 곁에 있고싶어."
그리고 되찾고싶어. 그 아이와 함께 했던 시간들을.
민석이 저린 다리를 툭툭 두드렸다. 몇시간이나 지난건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다만, 어둠이 길게 내려앉은걸 보아 꽤나 오래 기다린 것 같기도 했다. 언제부터 비가 내렸는지, 조용한 복도가 빗소리로 가득했다.
저 멀리 조금씩 가까워지는 인영에, 차가운 문에 등을 기대고 쭈그려 앉아있던 민석이 읏차, 하며 몸을 일으켰다. 안녕. 민석이 매일 하루에 한번씩 그에게 건네는 말이었다.
"안녕."
열번째 안녕이 민석의 입에서 내뱉어지고, 언제나와 같이 저를 무심히 지나치는 행동에, 민석이 쓰게 웃었다.
"내일 또 올게."
대답이 없을 걸 아는지, 작은 몸이 미련없이 발걸음을 떼었다. 얼마나 오래 앉아있었는지 검은색 바지가 온통 먼지 투성이였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루한의 손이 허공에 멈췄다.
"야."
실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는 여전히 탁했다. 민석이 천천히 뒤를 돌았다. 비에 잔뜩 젖은 루한의 뒷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왔다. 짙은 검은색 머리가 온통 젖어 축 늘어져있었다. 루한의 손끝에서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빗물을 보던 민석이 한걸음 다가가려다 이내 그만 두었다. 비에 잔뜩 젖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게 안쓰러웠다.
"누군데 자꾸 내 앞에서 얼쩡거려."
"..."
"꺼져. 다신 오지마."
민석이 비에 젖은 손을 두손으로 조심스레 감쌌다. 조금 떨리던 손이 우뚝 멈췄다.
"..나 알잖아."
내가 너를 기억하지 못해도.
"너는 날..기억하잖아."
루한의 손을 잡고있던 민석의 작은 손이 거칠게 쳐내지고, 비내음이 잔뜩 묻어나는 몸이 민석을 향해 돌아섰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입술이 피가나는듯 발갛게 물들어있었다. 제게로 한걸음 다가오는 행동에, 민석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래 알아."
"..."
"내가 널 잊을리가 없지."
민석의 셔츠 깃을 한손에 쥐고 세게 제쪽으로 잡아당기는 행동에, 당황한 민석이 루한의 손목을 붙잡았다. 어찌나 세게 저를 잡아당기는지 숨이 막혀오는 것 같았다.
"넌 진짜 나쁜새끼야. 알아?"
"...아,"
숨이 막혀오는게 꼭 루한의 손길때문은 아닐거라고 민석은 생각했다. 빗물에 축축히 젖은 손목을 꼭 붙잡은 민석의 작은손이 조금씩 떨려왔다.
"마지막으로 한다는 말이. 뭐? 널 잊어달라고? 힘들겠지만 버텨달라고?"
"..."
"좆까고있네."
마주쳐오는 두 눈은, 잔뜩 악에 받쳐 붉게 변해있었다. 민석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난 이 아이에게 그렇게 좋은 사람이 아니였나봐. 역시 내 욕심이었나.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찾아오는게 아니었는데.
"다신 내앞에 나타나지마. 씨발새끼야."
그냥 찾지 말걸. 사진속에서 환하게 웃던 모습은 그냥 가슴속에 묻어둘걸.
"..."
민석을 저한테서 밀쳐낸 루한이 미련없이 돌아섰다. 악에 받쳐 붉게 물든 눈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한."
목에 무언가 걸린 듯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민석이 떨리는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겨우겨우 내뱉은 말은, 목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울음에 잔뜩 뭉개져있었다.
"..루한."
"..."
"나는,..나는 니가.."
나는 니가 기억나질 않아. 그래서 너무 서러워. 내가 너한테 어떤 존재였는지, 넌 나한테 어떤 존재였는지, 하나도 기억나질 않아. 그래서 내가 너무 미안해.
차마 내뱉을 수 없는 말이었다. 민석의 고개가 힘없이 숙여졌다.
차가운 바닥이 조금씩 젖어들었다.
열이 잔뜩 올라 온몸이 불에 데인 듯 뜨거웠다.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맨살에 와닿는 공기가 유난히 차가웠다. 세훈이는 내내 불안해했다. 혹시 어디가 안좋아진거 아니냐며 가슴에 통증은 없냐며 시시때때로 물어왔다. 손톱을 잘근잘근 씹으며 내 상태를 살피는 세훈이를 겨우겨우 진정시켰다. 힘없는 손을 들어올려 버릇처럼 왼쪽 가슴을 툭툭 쳐보이자, 세훈이가 힘없이 웃어보였다.
"죽이라도 먹을래? 오늘 아무것도 안먹었잖아."
"응. 니가 만들어준 죽 먹고싶다."
세훈이 작게 웃으며 민석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자꾸 동생취급 하지 말라며 입술을 삐죽 내미는 민석의 행동에 세훈이 결국 소리내어 웃었다. 아무리 형이라지만,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걱정이 되는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세훈이 방 문을 닫고 나가자, 침대에 누워있던 민석이 이불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가슴 한쪽이 무언가 꽉 막힌듯 답답했다. 목 언저리를 매만지던 민석이 이내 눈썹을 축 늘어뜨렸다. 비내음이 잔뜩 묻어나던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라서 한없이 씁쓸해졌다.
지금이 몇시쯤 됐으려나. 베개 옆에 놓여진 핸드폰을 들어올린 민석이 홀더키를 꾹 눌렀다.
"..."
그리고 보이는 환한 얼굴에, 결국 민석의 눈가가 붉어졌다. 민석이 화면에 가득 찬 얼굴을 조심히 쓸어내렸다.
그 아이를 못본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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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래 제목을 루민,클첸으로 하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클첸이들 분량이 적어질것같아서 제목 루민이들로 변경했어요ㅠ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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