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빈 적응기 02 : 천상천하 유아독존 " 야, 좀 나와봐. " " ... " " 아, 죽었네. " " ... " " 뭐야. 너 누구야? " 전정국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명 내가 전정국을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순식간에 상황이 역전되었다. 전정국이 나를 내려다보고 나는 잔뜩 쫄아서 아무 말도 못하고 전정국을 올려다본다. 내가 바로 너랑 결혼 할 세자빈이다 말을 해야하는데 말이 안 나온다. 내 입으로 말하기도 낯간지럽기도 했고 일단 그것보다는 지금 너무 어이가 없었다. 싸가지라고는 밥 말아 드신 세자 저하 때문에. " 여기 어떻게 들어왔어? " " ... " " 너 말 못해? " 전정국이 조금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말은 안 나와도 고개를 가로저었다. 끝까지 입은 꾹 다물면서 그 와중에 고개를 젓는 모습이 웃겼는지 전정국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전정국도 입을 다물고 주위가 조용해져서 그제서야 좀 진정이 되는 것 같았다. " 전정국! " 는 개뿔. 좀 조용해지나 싶었더니 이젠 아예 분노에 가득 찬 호통이 들렸다. 그리고는 문이 벌컥 열리며 흔하게 본 이 곳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우리에게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입고 있는 검은 옷과 대조되는 하얀 피부의 마른 남자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정국의 배에 주먹을 꽂았다. 전정국은 억- 소리를 내며 배를 움켜 잡았고 나는 놀라 두 눈만 크게 뜨고 그 남자를 쳐다봤다. " 야, 민윤기! 왜 때려! " " 민윤기? 이게 형한테 민윤기? 넌 세자라고 눈에 뵈는게 없냐? " " 아 뭐! 그니까 왜 때리냐고! " " 너 또 게임하고 있었지? " " 어. " " 내가 아까 말했어 안했어. 오늘 세자빈마마 오신다고. " " 했지. 근데 언ㅈ, " 전정국의 고개가 나를 향해 돌아왔다. 그리고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아까와는 다르게 전정국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뭐 여전히 마찬가지고. 두 눈만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는데 ' 설마 네가 세자빈? ' 이라고 묻는거 같아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아까보다 더 크게 헛웃음을 터뜨린다. 뭐가 웃긴지 하나도 모르겠지만. 전정국은 다시 쇼파에 주저앉았다. " 야. " " ...어? " " 하루종일 서있을거야? " " ... " " 이리와서 앉아. " 때마침 다리가 아팠다. 아직 하루의 반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너무 많은 것이 휘몰아쳐서 피곤이 몰려왔다. 그래서, 그래서 앉은거다. 자존심 같은게 없어서가 아니라. 이제 내가 세자빈이면 귀한 몸이니까. 쭈뼛거리며 전정국의 오른쪽에 놓인 다른 쇼파에 앉았다. 그 와중에도 내 경계심의 표시로 전정국과 멀찍이 떨어져 거리를 유지했다. " 죄송합니다. 겪으신 대로 우리 세자저하께서 싸가지가 좀 없으셔서요. " " ...아, 네. 하하... " " 저는 경호팀장 민윤기입니다. 원래는 전정국 담당인데 필요하신 일 있으시면 부르셔도 됩니다. 무슨 일이 있으면 말씀 하셔도 되고요. " " 아, 네. " " 다정하다, 다정해. 아주 민다정이야. " " 닥쳐. " 처음에는 하얗고 삐쩍 말라서 경호팀장이나 한다는게 믿기지가 않았는데 이해는 이해가 간다. 매서운 눈빛이나 느껴지는 분위기나 말하는게 포스가 있다. 싸가지 전정국을 단번에 제압하는 카리스마도 있고. 그 덕분에 옆에서 조잘거리던 전정국은 입을 꾹 다문다. " 얘는 또 왜 안 와. " 민윤기가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며 말했다. 또 누가 오나. 혼자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며 민윤기를 힐끔거리고 있는데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자켓 안에서 뭔가를 꺼낸다. ' 너 빨리 안 쳐오냐. ' 치익 거리는 소리를 내는걸보니 무전기다. 진짜 경호는 경호인가봐. " 나 게임할거야. " " 게임중독자 새끼. " " 맞아. 나 게임 못해서 금단현상 올 거 같으니까 좀 나가라고. " 전정국이 손에 다시 게임기를 집어들며 말했다. 알았다 알았어. 민윤기는 뭐라 더 덧붙이려다가 한숨을 내쉬며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딱 보니까 전정국은 땡깡부리는 미운 7살이다. 민윤기는 그걸 일일이 상대하기 귀찮아서 못 이기는 척 져주는 아빠고. 하루이틀 일은 아닌듯 싶었다. " 너도 나가. " " ...어? " " 형, 얘도 데리고 나가. " 민윤기로도 모자라 나까지 내쫓는다. 전정국이 말하는걸 듣고있으면 민윤기와 내가 무슨 1+1이 된 것 같다. 얌전히 문 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민윤기가 다시 빡친건지 단번에 매서운 주먹을 들고 전정국에게 걸어왔고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선 내가 전정국이 맞기 전에 민윤기를 막아섰다. " 그, 그냥 나갈게요. " " ... " " 그러는게 좋겠어요. 일단 짐정리도 해야하고. " 민윤기를 말리다시피 급하게 내뱉은 내 말에 그제야 민윤기가 주먹을 내렸다. 그리고는 전정국을 한번 흘겨보고 다시 몸을 돌려 걸음을 떼었다. 나도 전정국을 슬쩍 한번 쳐다보고는 문을 향했다. 아까처럼 다시 눈 앞에 대형 티비에 시선을 고정한 전정국이 문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입만 열었다. " 앞으로 게임할 때는 찾아오지마. " " ... " " 집중 안 돼. " 저거 아까 그냥 민윤기한테 한 대 더 맞게 막지말걸 그랬다. 문을 열고 나가자 문 앞에 바로 민윤기가 서있었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하얗다. 키는 그렇게 크지 않지만 어느정도 체격은 있었고 말랐지만 어디선가 듬직함이 느껴졌다. 민윤기는 내 앞으로 와서 살짝 고개를 꾸벅이고는 말했다. " 지내실 곳으로 모셔다 드릴게요. " " 아, 네. " " 소개는 나중에 해야할 것 같습니다. 원래 나타나야할 놈이 안 나타나서. " " 네? 누구... " " 형! " 민윤기의 말에 의아함을 품어갈 때쯤, 저 멀리서 잔뜩 신이 난 아이마냥 연신 형을 외치며 달려오는 검은 사내가 있었다. 입고 있는 옷 뿐만 아니라 보이는 얼굴까지도 꽤나 까만 사람. 단숨에 우리 쪽으로 달려온 남자는 금새 헤헤 웃으며 민윤기에게 달라붙는다. 그리고 민윤기는 익숙하다는 듯 그 남자를 밀어내고. 사람한테 이런 말 하면 안될 것 같지만 두 사람을 보며 우리 집 둥이들이 생각났다. 내 사랑둥이들. 우리 집 막내 흰둥이와 깜둥이. 길거리에 털이 온통 하얀 애와 까만 애가 같이 놀고 있길래 데려왔다. 둘이 아주 티격태격 싸우며 잘 놀았는데 꼭 내 앞에 두 사람 같았다. 물론 흰둥이가 민윤기고 깜둥이가 이 남자다. 우리 둥둥이들아, 누나가 많이 보고싶어 하는거 알고있니. " 누구셔? " " 진짜 돌대가리야. 내가 말했잖아. 너 오늘부터 세자빈마마 모신다고. " " 헐, 그거 오늘부터야? 그럼 나 오늘부터 전정국 탈출이야? " 전정국 탈출이 뭐라고 그렇게 신이 날까.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어깨까지 들썩인다. 대충 얘기를 들어보니 이 사람이 내 담당 경호원인 것 같은데. 잠깐만 겪어도 파악이 될 것 같았다. 좋게 말하면 활발하고, 나쁘게 말하면 시끄럽다. 이 남자도 마르긴 말랐는데 덩치도 없진 않고 민윤기보다 키도 크다. 그리고 일단 무엇보다 잘생겨서 민윤기도 그렇고 여기 경호는 얼굴 보고 뽑나, 잠깐 진지하게 고민했다. " 안녕. 내 이름은 김태형이고 앞으로 너 담당 경호야. " " ...안녕하세요. " " 위급하거나 필요한 일 있으면 제일 먼저 불러. 항시 대기중이니까. " " 아, 네. " " 넌 전정국이랑 동갑이라 그랬고 내가 전정국보다 한 살 많으니까 오빠라고 해. 정 불편하면 김태형님이라고 부르ㄷ, 아! " 한참을 신나 혼자 떠들던 김태형이 민윤기에게 시원하게 뒷통수를 맞았다. 가격당한 뒷통수를 움켜잡은 김태형은 곧바로 울상이 되었고 민윤기에게 두 눈을 부릅 뜨고 왜 때리냐고 물었다. 이거 뭔가 익숙한 상황이다. 그리고 앞으로 자주 보게될 상황인 것 같기도 하고. " 친구냐? 어디서 반말 찍찍이야! " " 왜! 내가 오빠잖아! " " 그래봤자 고작 이틀, 아니 이틀도 아니지. 하루하고 몇 시간 빨리 태어났으면서 꼭 나이 부심을 부리더라. " " 뭐! " " 전정국한테 그러다가 결국 말 까게 된 걸로는 마음에 안 차? " 참으려고 했는데 결국 웃음이 터졌다. 고작 하루 가지고 오빠인척 하는게 꼭 동네 꼬마들이 생일 빠르다고 형인척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 전정국한테 말까임 당했다는 사실까지 내 웃음이 터지는 것을 더욱 부추겼다. 미처 막지 못하고 새어나간 웃음에 김태형이 상처입었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 웃기구나. 고작 이틀, 아니 하루 빠른 걸로는 오빠하는게 웃기구나... " " ...아니, 그게. " " 됐어. 그냥 너도 반말 해. 전정국처럼 야 김태형, 태형아 그렇게 해. " 왠지 말리는 기분이다. 강아지마냥 축 쳐져서 말하는 모습이 모성애를 자극하는 것 같기도 하고... 민윤기는 옆에서 기도 안 찬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내뱉었지만 나는 김태형의 시무룩해진 얼굴을 보고있자니 마음이 편하지가 않았다. 그래서 얼른 다급하게 손까지 내저으며 김태형에게 말했다. " 아니, 아니요. 말 안 놔요. " " ...진짜? " " 네, 반말 안 할게요. " " 그럼 불러봐. " " 네? " " 오빠라고 불러봐. " 당당하게 하는 요구가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김태형은 기대에 찬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고 이 상황이 정말 곤란했던 나는 도움의 손길이라도 기대하며 민윤기를 쳐다봤지만 민윤기는 살짝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행동이 ' 김태형한테 제대로 당하셨네요. 이건 방법이 없어요. ' 라고 말하는 것 같아서 곧바로 좌절감이 몰려왔다. " 빨리. " " ...태형오, 오... " " ... " " ...태형... 오빠! " " 우와. " " 불렀죠? 불렀으니까 됐죠? " 내 입으로 몇 번 불러본 적이 없는 오빠라는 말은 꺼내기가 참 힘들었다. 쥐어짜내듯이 내뱉은 단어에 나 자신도, 김태형도 놀란듯 했다. 진짜 할 줄은 몰랐던건가? 하긴, 나도 내 입에서 말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냥 체념한 상태라서 그랬나. 뻔뻔하게도 잘 내뱉어 놓고는 얼굴이 달아올랐다. 얼이 빠져 나를 바라보는 김태형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급하게 빨리 가자고 내 방이 어디냐고 민윤기를 독촉했다. 민윤기는 그런 내 심정을 눈치챈건지 살짝 웃으며 나를 안내했다. ' 같이 가! ' 먼저 걸어가기 시작한 나와 민윤기를 향한 김태형의 외침이 연리지 안에 가득 울렸다. 이 곳에서 살기 시작하면서 진심으로 다행이라 생각했던 것들 중 하나가 한복을 입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 죄다 같은 한복을 입고 있었기에 나도 꼼짝없이 그렇게 입어야하는 줄 알았다. 안 어울리는 것은 둘째치고 일단 한복을 입는다는 것 자체가 굉장히 불편했기에 혼자서 슬픔을 삼키고 있었다. 그런데 내 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내가 챙겨온 것이 무색할 만큼 많은 옷들이 있었다. 그 중에 한복은 하나도 없었고.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옷들을 구경했는데 전부 다 비싸보이고 고급스러운 옷들 뿐이었다. 싱글벙글하며 갈아입을 옷을 찾던 나는 결국 그냥 옷장 문을 닫아버렸다. 딱 봐도 불편해보이는게 저 옷들을 입고 지내는 거랑 한복을 입고 지내는 거랑 다를 바가 없어서. 결국 방 구석에 얌전히 놓여있는 캐리어를 열어 집에서 챙겨온 츄리닝 바지로 갈아입었다. 무릎이 살짝 나올랑말랑 하는게 누가봐도 후줄근해보였지만 어찌하랴. 일단 내 몸이 편하고 봐야지. 한결 가벼워진 몸을 침대로 단번에 던졌다. 꽤나 큰 소리가 날 것 같았던 내 예상과는 다르게 침대에서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 헐, 대박. " 이게 침대야, 구름이야? 내 온 몸을 감싸는 푹신한 느낌에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역시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더니 그 말이 진짜였네. 이 크고 푹신한 침대가 다 내거라니. 혼자 감격에 감탄을 더하며 몸을 비비적거리고 난리를 피우고 있는데 문을 넘어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세자빈마마,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 " 네? 아, ㄴ, 네! " 세자빈마마라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있던게 다행이었다. 물을 마시고 있었다면 뿜었을 것이고 밥을 먹고 있었다면 목에 걸렸을 것이 안 봐도 뻔했다. 앞으로 매일매일, 하루에 열두번도 더 들어야할 단어였지만 아직은 낯설기만 했다. 온 몸에 오도도 돋아버린 소름을 쓱쓱거리며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문이 열렸다. 문도 그냥 일반 문이 아니라 옆으로 밀어서 열리는 문이었는데 어찌나 큰지 문을 전부 여는데도 한참이 걸렸다. 한 칸만 열어도 충분할 것 같은데 굳이 문이 다 열고 역시나 곱게 한복을 입으신 여자분이 들어왔다. " 오늘부터 세자빈마마를 모시게 될 윤상궁이라고 합니다. " " 아... 안녕하세요. " " 지내시는데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면 언제나 말씀해주세요.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 그게 일단 존댓말부터 안 쓰시면 안될까요? 아까 본 민윤기씨도 그렇고 제가 굉장히 불편하거든요... 말은 못 했다. 내 앞에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줌ㅁ, 아니 윤상궁님에게 굉장히 단호할 것만 같은 분위기가 느껴져서. 그냥 괜찮다고, 알겠다고 머쩍은 미소와 함께 답할 뿐이었다. " 앞으로 마마께서는 예절수업과 신부수업을 받으시게 될 것입니다. " " ...아. " " 오늘은 첫 날이니까 신부수업은 없고 이따가 예절수업만 있으십니다. 제가 모시러 올 테니 그 때까지 편하게 쉬ㄱ, " " ㅁ, 뭐라고요? " " ...네? " " 신부... 신부수업이요? " 솔직히 내가 밖에서 들어온 사람이라 왕실의 법도, 이 나라의 규범 뭐 이런걸 모르기는 했다. 아무 것도 모르니까 그런 것은 배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예절수업은 그렇구나, 역시나하고 넘겼다. 근데 신부수업이라니? 티비에서 보던 드라마의 재벌가의 유치하고 지들끼리만 절절한 사랑 얘기에나 나오는 신부수업을 받는다고? " 네. 하루에 한번, 신부수업이 있으십니다. " " ...그런데, " " 지내시는 동안에는 편하고 자유롭게 지내셔도 됩니다. 하지만 앞으로 진행되는 수업들에는 성실하게 임해주셔야 합니다. " 신부수업은 안하면 안 될까요? 턱 끝까지 차올랐던 말을 꾹 삼켰다. 윤상궁님이 너무 단호해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아까 존댓말하지 말아달라는 부탁도 안 하기를 잘했다. 좀 더 친해지고 하던가 해야지 지금은 가당치도 않았다. 사람들의 포스가 남다른게 괜히 왕실은 아니구나. 아직 왕실의 포스의 발 끝도 따라가지 못한 나는 기에 눌려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좋게 생각하자. 다 자유로운데 저것만 하면 된다잖아. 예절수업은 원래 필요하니까 열심히 하면 되고, 신부수업은... 뭐 어떻든 도움은 되겠지. 열심히 하다보면 그동안 만나보지 못했던 내 여성스러움을 찾을 수도 있는거니까.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가. 빨래는 세탁기가, 요리는 배달 음식이, 바느질은 세탁소에서.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전문적인 일만 잘 하면 되는 세상이다. 내가 내 일을 하면 다른 사람이 다른 일을 하고. 내 일이 아니면 나몰라라하는게 이기적이긴 하지만 또 어떤 면에선 굉장히 편하다. 이 곳에 들어오고 3일이 지난 오늘까지 내가 보기엔 이 연리지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다. 요리를 하는 분들과 청소를 하는 분들, 빨래를 하는 분들 혹은 경호를 하는 분들. 모두 바쁘게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간다. 그 사람들과는 다르게 세자저하께서는 맨날 게임만 하는 것 같지만. 아무튼 그렇게 착실하게 짜여진 이 곳에서 내가 할 일은 딱히 없어보였다. 요리도, 청소도, 바느질도, 빨래도... 내 일은 아닌것 같았다. 근데 왜. 내가 왜. 대체 왜. 여기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있어야 하는지. 예절수업이 끝나고 이제 좀 쉬나했더니 한복도 갈아입지 못한 채로 내 앞에 실과 털뭉치가 주어졌다. 설마 바느질이나 뜨개질을 하라는건가 싶어 불안한 시선으로 윤상궁을 바라보니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신부수업은 늘 이런 식이었다. 요리를 배우고 바느질을 배우고 뜨개질을 배우고 심지어는 넥타이를 매는 방법까지 배웠다. 정말 하나같이 내 취향이 아니었다. 그저 이 시간이 빨리 끝나기만을 기다렸지만 수업시간은 또 어찌나 긴지 하루가 꼬박 지나고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수업이 끝이 났다. 그러면 방으로 가서 그대로 곯아떨어지는게 최근의 일과였다. 정말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오늘도 열심히, 나름대로 열심히 바느질을 하려고 했다. 불편한 한복을 입고도 얌전히 잘 앉아있었다. 근데, 이게 웬 떡인지. 윤상궁이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조는게 아닌가. 얼굴 앞에서 손을 휘이휘이 저어봐도, 조심스럽게 불러봐도 도통 깰 생각을 안 한다. 그래서 도망치기로 했다. 3일동안 잘 했으니까 오늘만큼만. 딱 하루만. 슬그머니 일어서서 문 쪽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미친듯이 떨려서 문으로 가다가 심장마비, 혹은 심장박동과다 뭐 그런 걸로 죽는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래도 멈추지는 않았다. 이제 문만 열면 되니까. 고지가 눈 앞이었다. 끼이익- 원래부터 문 열리는 소리가 이렇게 컸나? 문을 열자마자 들리는 이상한 괴음에 절로 긴장이 되었다. 그리고 제발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슬쩍 고개를 돌려 윤상궁을 바라보았다. 아. 그 전까지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고요하던 윤상궁의 몸이 움찔했다. 그리고 곧바로 고개를 돌리기에 보기좋게 눈이 마주쳐버렸다. 제대로 망했다. " 마마! " 절규하듯이 나를 부르기에 냅다 달렸다. 아직 어디에 뭐가 있는지 파악도 못 했고 어딜 가야 숨을 수 있는지 하나도 몰랐지만 그냥 무조건 달렸다. 설마 이 큰 연리지에 작은 내 몸 하나 숨길 곳이 없을까 해서. 계속 달리다 보면 안 쓰는 방이라도, 하다 못해 작은 다락방이라도 나올거라 생각했다. 근데 보이는 거라고는 죄다 한복을 입고 달리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는 다른 상궁들 뿐이었다. 가끔 가다가는 경호원들도 왜 저러지 하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이러다가 민윤기라도 만나면 큰일인데. 수업 잘 받으라고 신신당부 하던데 도망치다 걸리면 꼼짝없이 다시 끌려갈 것이 뻔했다. 절망과 두려움에 가득 차 달리다가 계단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구석지고 구석진 곳에 숨겨진 계단을 따라 고개를 올려다보니 문이 열려있는 공간이 있었다. 뭐지? 다락방인가? 처음 보는 공간에 선뜻 걸음이 떼지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다. 뒤에서 윤상궁의 절규 섞인 부름이 들려왔으니까. 도망치듯 계단을 뛰쳐 올라갔다. 그리고 살짝 열려있던 문을 벌컥 열어 재빨리 안으로 몸을 숨기고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고 주위가 조용해지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마음이 놓이자 몸에 잔뜩 들어있던 긴장이 풀려 손잡이를 잡은 그 상태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도망쳐야했나. 그냥 지루했다, 솔직히 말하고 잔소리 몇 번 들었으면 끝날 일이었는데 괜히 도망쳐서 일을 크게 만든건 아닌지. 연리지를 한바탕 내달리고 나서야 후회가 밀려왔다. 어차피 시간도 늦었고 곧 있으면 수업이 끝나는 시간이었다. 조금만 있다가 내려가서 도망쳐서 미안하다고 해야겠다. 이왕 들어온거니까 구경이나 좀 하다 내려가야지. " 엄마야! " 문고리를 도움삼아서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뒤를 돌았는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 무색해질만큼 빠르게,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왜냐? 내 뒤에 바로 딱 붙어 서있는 전정국 때문에. 나는 그대로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으며 주저앉았고 그런 나를 내려다보던 전정국은 나를 따라 자리에 앉아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 여, 여기서 뭐, 뭐해요? " " 그건 내가 묻고싶은 말인데. " " ... " " 너는 여기서 뭐하는데? " 전정국이 한번 시선을 쭉 내려 나를 훑어보았다. ' 이렇게 한복까지 차려입고? ' 아. 그제야 내가 한복을 입고있다는걸 자각했다. 뭐가 이렇게 불편한가했더니 이거였구나. 혼자 치마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전정국이 오리걸음을 하며 슬금슬금 내 쪽으로 걸어왔다. 간격이 점점 가까워졌고 그게 부담스러워진 나는 전정국과 반대 방향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등에 문이 닿았다. 더는 도망칠 곳이 없었다. " 지금 뭐하고 있었냐고. " 전정국이 똑바로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전정국과는 다르게 시선을 제대로 마주할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난 날 이후 이렇게 제대로 눈을 마주치는게 처음이라 어색하고 낯설었다. 그래서 시선을 돌리며 대답했다. " ...그냥! " " ... " "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어요! 어디에 뭐가 있나 궁금해서! " 뭐라도 말해야 전정국이 좀 떨어질 것 같았다. 정말 내 예상대로 대답을 하자 전정국이 금새 흥미가 떨어진듯 내게서 멀어져 몸을 일으켰다. 뭐, 명백히 따지자면 사실은 아니었지만 또 거짓말은 아니었다. 여기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으니까. 그렇지만 여기 전정국이 있는줄 알았다면 아무리 궁금했어도 안 왔을거다. 지금처럼 어색한 이런 상황은 죽어도 싫으니까. " ...그럼 이제 전 가볼게요! " 물론 나도 전정국이 왜 여기 있는지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순순히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고 일단은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바보처럼 허리까지 꾸벅 숙여 인사를 하고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힘차게 손잡이를 돌렸는데 아무 것도 달라진게 없었다. 내 눈 앞에는 여전히 문이 있었고 나는 여전히 그 다락방 안이었으며 내 뒤에는 전정국이 있었다. 몇 번을 더 손잡이를 돌려봐도 무의미했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 잠겼어, 그거. " " ... " " 원래 안에서 안 열려. " 그건 결혼 소식 이후로 들었던 말들 중 가장 절망스러운 말이었다. 일단 처음에는 잘못 들었나 싶었고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그 다음에는 믿기지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믿고싶지가 않다. 심장박동이 증가하고 손에 땀이 났다. 귀에 정확히 박힌 절망스러운 전정국의 말에 천천히 몸을 돌렸다. 전정국은 한쪽 벽에 위치하고 있는 매트리스에 몸을 눕히고 고개만 돌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미치겠다. 내가 지금 여기서 뭐하는거지? 설마 갇힌거야? 그것도 전정국과 단 둘이? 믿기지 않고 믿을 수가 없고 믿고 싶지도 않았지만 내가 처한 상황은 가혹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는데 더 이상은 그럴 수가 없었다. " 갇혔네. " 우리 세자 저하께서 친히 확인사살을 해주셔서.
태꿍의 일기 |
처음 글잡에 9년째 연애중을 쓰기 시작했을 때, 달린 댓글이 10개정도였다. 그 댓글들이 너무 고맙고 신기해서 읽고 또 읽었었다. 그리고 지난 글에 400개가 넘는 댓글이 달렸다. 기분이 이상했다. 감격스럽기도 하고 오랜만에 왔으면서 이렇게 많은 응원과 칭찬을 받아도 되나 싶기도 하고... 일일이 다 답글을 달지는 못 했지만 하나하나 다 읽었다. 정말 감사했다. 얼굴도 모르는 게으르고 이상한 작가에게 달아준 댓글들이 큰 힘이 되었다. 앞으로 더 열심히 해야겠다. 글을 다 쓰고보니 정국이 분량이 증발했다. 다음에는 좀 설레는 장면도 넣고 그래야겠다. 요새 외로운지 설레는게 막 땡긴다. 그리고 아마 서브남주가 나올 것 같다. 삼각관계는 늘 찌통이지만 글의 재미를 위해서? 아니면 사각관계도 나쁘지 않고. 다음화에는 이야기를 좀 쭉쭉 진행해야겠다. 곧 있으면 설날이네요. 사랑하는 독자여러분들 맛있는 음식 많이많이 드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사랑하는 암호닉 분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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