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SMOPOLITAN
1.범세계인
2.칵테일의 한 종류
*
앵무새에게 '너를 용서한다'는 말을 가르쳐야 한다
앵무새가 울타리 밖으로 날아가 언젠간 너를 만나 '너를 용서한다'라고 말하면
너는 그 자리에 앉아 나를 생각할까
성동혁 〈망루> 중,
*
영하 십도를 웃도는 2월의 도시는 냉랭하다. 발토시를 두 겹씩 신고 다녀도 모자랄 판에, 나는 모직 소재의 미니스커트에 스텔레토 힐을 신고 하염없이 밤거리를 걷고 있다.
끓어넘치는 분노는 퉁퉁 부은 발을 옥죄이는 킬힐의 아픔조차 무디게 만든다. 차갑게 얼어붙은 손에서 지잉-, 하고 핸드폰이 길게 울린다.
민윤기. 화면에 박힌 세 글자를 노려보며 종료를 알리는 빨간 동그라미를 탭한다. 이 씨발놈은 양심이라는 게 없나.
오랜만에 잡힌 데이트에 신이 나서 차려입은 내가 병신이지. 밀려오는 짜증에 핸드폰의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검게 종료된 화면을 확인하고 핸드백 안으로 폰을 던지다시피 쑤셔넣었다. 울분을 이길 길이 없어 술을 퍼부어 마시러 그와 자주 함께 가던 바(bar)로 발걸음을 옮긴다.
“어서오세요, 뭐 주문하시겠어요?”
“…아무거나 독한 걸로 주세요.”
“그럼 우선 가볍게 드시게 진토닉으로 드릴까요?”
“그냥 보드카 한병 주세요. 원샷하고 뒤져버리게.”
“…진토닉으로 드릴게요. 오늘 무슨 안 좋은 일 있으셨나봐요?”
“별 건 아니고. 미친 개를 한마리 키우거든요.”
뭐 이렇게 조잘조잘 말이 많담. 괜스레 치밀어오르는 짜증에 건성건성 대답을 하고 짜증스럽게 고개를 들었는데, 어라, 이 바텐더 잘 생겼잖아.
잘생긴 주제에 순둥순둥하게 웃는 게 귀염성도 있고, 턱선도 살아 있고.
쉐이커에 토닉 워터를 붓느라 시선이 다른 곳에 가 있는 동안 재빨리 그의 명찰을 확인한다.
김태형. 이름도 귀엽네.
“아 개 키우세요? 와, 진짜 반갑다. 저는 포메라리안 키우는데 진짜 귀여워 죽어요. 손님은 어떤 강아지 키우세요?”
“뭐, 하얗고. 눈 처지고. 성격도 더러운데다가 항상 발정이 나 있어서 그냥 고자로 만들어버리려고요.”
“네…? 아, 저기…여기 주문하신 거 나왔어요.”
경악스러운 표정을 숨기지 못한 바텐더가 잔을 슥 내밀고 마주친 눈을 피했다.
이상한 사람이라느니 어떻느니 작게 투덜대는 게 아직도 내가 키운다는 개가 진짜 개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다.
피식, 헛웃음만 나와 잔을 움켜쥐고 단숨에 원샷했다.
“크으, 쓰다. 한잔 더 줘요.”
“버, 벌써요?”
“아 뭐해요. 빨리 만들어 봐요.”
울상을 지은 바텐더, 김태형 씨가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쉐이커를 집어드는 동안 카톡 프로필 사진을 바꾸기로 했다.
전원을 켠 핸드폰의 배경화면이 뜨자마자 부재중 전화 알림이 뜬다. 발신인 민윤기, 두 건. 그리고 동일한 발신인에게서 온 문자 한 통.
[전화 좀 받아.]
엿이나 먹으라지. 빙그레 웃으며 카카오톡을 누르다, 문득 민윤기를 열 받게 할 만한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재빨리 폰을 바 스툴에 내려놓고, 진을 꺼내는 바텐더를 쳐다봤다.
“저기요, 김태형씨. 팁 드릴 테니까 부탁 하나만 할게요.”
“무슨 부탁을…”
“그, 유니폼 조끼 벗고 저랑 사진 한장만 찍어요.”
“사진이요?”
“네. 왠만하면 좀 다정하게, 애인인 것처럼요. 여기, 제 옆으로 잠깐 나오시구요.”
“애, 애인이요? 저…손님, 그건 좀 곤란-,”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같이 찍어주세요, 진짜 부탁드려요.”
당황스러운 얼굴로 멍하게 잔을 들고 서 있는 김태형씨를 끌어내다시피 내 옆으로 불러냈다. 잔뜩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엉겁결에 내 옆에 앉은 김태형 씨에게, 한껏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이만원을 쥐어주자, 재빠르게 주머니에 지폐를 밀어넣은 그도 덩달아 활짝 웃는다.
“볼에 뽀뽀도 해 드릴까요?”
“그건 됐구요. 최대한 사랑스럽다는 표정 하시고 어깨동무 좀 해주세요. 자, 찍어요. 하나, 둘, 셋.”
찰칵, 사진을 찍고 갤러리에서 확인을 해보니, 꽤나 자연스러운 커플 사진이 한 장이 남아 있다. 꿀이 떨어질 것 같은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는 바텐더에게 엄지를 척 올려주자 멋쩍게 헤헤, 웃으며 다시 조끼를 걸쳐 입는다. 자, 이제 프로필 관리로 들어가서 이렇게 사진을 바꾸면 되겠지. 상태 메시지는 간결하게 하트 이모티콘으로 설정하기로 한다. 피식 웃으며 핸드폰을 테이블에 대충 놓고 두번째 잔을 비우기 시작했다. 이걸 민윤기가 보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지.
너도 한번 엿 먹어봐라, 이 개새끼야.
*
민윤기와의 길고도 복잡한 연애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대개 그렇듯 상당히 평범했다. 우리는 코흘리개 시절부터 같이 자라온 소꿉친구였다.
수능이 끝난 날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뜬금없이 고백을 통보했다.
김화양, 나랑 연애하자.
지금 돌이켜보면 택도 없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민윤기가 멋있어 보이던지. 그 당찬 투에 넘어간 게 죄라면 죄였달까.
육년 간의 연애 기간만 따져보더라도 민윤기가 내 속을 썩이지 않은 날들을 전부 합쳐봤자 일년이나 될까.
미대에 진학한 녀석은 특유의 막힘없는 언변과 고급스러운 지식, 예술적 재능을 주로 여자들을 꼬시는데만 유감없이 발휘했다.
바람 피우는 것을 들켜도 민윤기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뻔뻔스럽게 어깨를 으쓱하며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넘어가기 일쑤였다.
너도 알다시피 자기는 코스모폴리탄이라 한 사람에게만 넘쳐나는 사랑을 줄 수가 없다고.
원래 천성이 박애주의자라 어쩔 수가 없다고.
하지만 너를 제일 사랑한다고.
항상 네가 우선이라고.
이렇게 개좆같은 남자와 육년 간 연애를 이어온 까닭이 뭐냐고 누군가가 따져 묻는다면, 글쎄, 그와 사랑을 한 육년 중에서 평온했던 시간이 일년도 채 되지 않을지라도, 민윤기와 함께 보낸 작은 순간 순간들이 행복했기 때문이라는 대답밖에 나는 할 수 없다.
화려한 포장지를 벗기면 상처와 슬픔밖에 남아있지 않은 너를 알아서.
수많은 애인들 중에서 나를 가장 최우선으로 한다는 네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아서.
내가 너를 떠난다면, 너에게 남는 것이라곤 네 멍든 과거과 산산조각이 난 마음뿐이라는 걸 알아서.
그래서,
나는 너를 떠날 수가 없다.
*
위스키 세 잔을 추가로 마시자 두통과 함께 시야가 왜곡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프로필 사진을 바꾼 뒤로 민윤기에게 다섯 통의 부재중 전화와 행방을 묻는 문자 세 통이 더 왔지만 모두 무시했다.
이 기회에 버릇을 단단히 고쳐줘야지, 근래 들어 더 밖으로 나도는 그 때문에 속이 편할 날이 없던 것만 생각하면 아주-.
언제라도 떠날 수 있을 것처럼 제멋대로 구는 주제에, 민윤기는 나와 세시간만 연락이 되지 않아도 불안증세를 보인다.
지금쯤이면 손톱을 물어뜯으며 핸드폰만 쳐다보고 있겠지.
“손님, 계속 전화 오는데요?”
“무-시해도 돼여. 버…버번이나 한잔 쥬세요.”
“많이 드셨는데 조금 쉬시는 게-”
“아 버번 빨랑 달라거!!”
혀가 꼬인 상태로 짜증을 부렸더니 눈썹을 팔자로 눕힌 김태형 씨가 한숨을 쉬며 재빨리 위스키 병을 꺼낸다. 알코올이 들어가니 웃긴 것 하나 없이도 허파에 바람이 찬 것처럼 헛웃음만 나왔다. 자꾸 감기는 눈을 애써 크게 뜨고 잔에 얼음을 넣는 김태형씨의 얼굴을 다시 쳐다본다. 에-이. 지금 보니까 우리 윤기보다 별로다.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 화들짝 놀라 양손으로 뺨을 찰싹 때렸다.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그 나쁜 놈이 대체 뭐가 좋다고.
“하. 나 완-전 헛살았어.…”
버번을 홀짝이다 문득 서러워져 눈에 뜨거운 것이 스몄다.
“손님…,우세요?”
“아뇨! 그냥, 렌즈를 오래 꼈더니 눈이 뻑뻑한가…”
민윤기는 사람의 온기를 참 좋아한다. 어디에든, 누구에게든 버릇처럼 자잘한 스킨십을 달고 다니는 편이라 곤혹을 치를 때도 종종 있었다. 잿밥에 관심이 더 많다고, 섹스를 할 때도 전희에 공을 더 많이 들이는 편이었지. 고등학교를 다닐 때였나. 내 어깨 위에 습관적으로 턱을 얹는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이렇게 스킨십을 좋아하냐고. 눈을 접어 웃던 그가 무심하게 답했다.
따뜻하잖아.
따뜻함을 갈구하는 것만큼 민윤기는 추운 것을 무척이나 싫어했다. 겨울엔 이불 밖으로 벗어나는 것조차 꺼려할 정도였으니.
오늘도 그는 약속장소였던 카페 앞에서 두터운 파카를 입고 내가 선물해준 노란색 목도리를 두르고 있었다. 아직 나를 발견하지 못했는지 핸드폰만 내려다보다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거리는 그를 한참이나 바라봤다. 길 건너편에 서 있는데도 특유의 뚱한 표정이 보이는 것 같아서 푸스스 웃으며 신호등의 색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모든 게 완벽했다.
‘윤기 오빠!’
민윤기가 말갛게 웃으며 제 앞으로 뛰어온 여자와 익숙하게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는.
*
“어서오세요 손님, 뭐 주문하시겠어요?”
딸랑, 가게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바 안으로 들어왔다.
버번까지 마시고 테이블 위로 엎어진 나는 내 옆자리에 앉는 새로운 손님을 쳐다볼 여유도 없이 점점 더 심해지는 두통에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이고 두야, 끙끙대고 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왼쪽 어깨 너머로 들려온다.
“김화양, 너 돌았냐?”
“…민윤기?”
“씨발, 지금 뭐하자는 건데. 전화는 왜 안 받아!”
“아까 그 여자랑 놀지, 여기는 뭐하러 왔어.”
“그건…!”
변명조차 하지 못하고 당혹스러워하는 목소리에 한숨을 쉬며 상반신을 일으켰다. 흐린 시야 새로 추위에 빨개진 그의 코와 볼이 보인다. 뺨을 한대 후려갈겨야겠다는 생각보다, 추운 걸 그렇게 싫어하는 녀석이 여기까지 걸어오는데 얼마나 힘들었을까-라는 생각부터 드는 걸 보니 조금 더 비참해지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내가 그를 이해하고 있다곤 하지만 이건 정상적인 사랑이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지쳐가고 있었나. 턱을 괴고 민윤기를 한참이나 쳐다본다. 이젠 안녕을 말해야 하는 걸까.
“윤기야.”
“응.”
그의 표정이 급격하게 어두워진다. 순수한 불안이 묻어 있다. 내가 작별을 고할까봐. 안녕이라고 말할까봐. 너는 순수하게 두려워하고 있다. 무너져내리는 네 표정을 보며 나는 점점 슬퍼졌다.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이제 나 말고 다른 여자 만나지 마…”
“…응.”
때문에 통상적으로 하던 말을 그대로 내뱉었다. 지켜지지 못할 약속이라는 것 쯤은 안다. 너는 외로운 사람이니까. 내가 줄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많은 사랑을 필요로 하니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바텐더를 불러 음료를 한잔 더 시킨다. 네가 즐겨 마시는 코스모폴리탄이다. 올리브를 좋아하는 너를 위해 올리브를 세개 넣어달라고 부탁한다.
“화양아.”
“왜.”
“내가, 만일 지금보다 더 미치더라도, 그래서 네가 날 감당할 수 없는 날이 오더라도, 그래도,”
그는 올리브가 띄워진 코스모폴리탄을 한모금 마시는 것으로 차마 잇지 못한 뒷말을 대신한다. 유독 하얀 피부 탓에 벌개진 눈가가 더욱 도드라진다.
나는 손을 뻗어 얼음장 같이 차가운 그의 왼손을 깍지 껴서 잡는다. 멍든 마음 위로 서글픈 온기를 전한다.
그가 묻고 싶었으나 내뱉을 수 없었던 말에 조용히 응답한다.
“너를 떠나지 않을게.”
+)
안녕하세요, 독자 여러분, 봄혹은겨울입니다 :)
이번 에피소드인 코스모폴리탄은 상처가 많은 윤기와 그의 사랑 방식 때문에 힘들어하는 화양이의 이야기였어요!
원래 장편소설로 구상을 해두었던 거라, 단편으로 쓰니 약간 붕 뜨는 감이 있네요ㅠㅠ
어후, 이것도 나중에 장편으로 써야 하는데, 글솜씨가 부족하니 차마 엄두가 나질 않아요ㅠㅠ
참, 전 편이었던 BREAKDOWN에서 윤기가 과연 '나쁜 남자'였는지를 두고 독자분들이 의견이 나뉘시더라구요.
여주인공의 마음을 알면서도 희망고문을 하는 윤기는 나쁜 남자가 맞다! 라는 입장과, 아련하고 상황이 나빴을 뿐 윤기가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의 입장이 있는데,
저는 여자주인공의 마음을 알면서도 '꼬맹이의 마음' 정도로 치부해버리고 눈을 감은 윤기를 어느정도 '나쁜 남자'로 그려내고 싶었어요.
단편들에서 제가 묘사하고 싶은 '나쁜 남자'의 기준은 사실 굉장히 광범위해요.
첫화처럼 '감정이 없을' 수도 있는 것이고
두번째 화처럼 '감정을 진지하게 여기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고
이번 화처럼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죠.
음...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하지 &_&
독자님들 전부 워더에요(수줍) 격하게 사랑하구요,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아프지 말고! 설 잘 보내세용~~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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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방탄 찐팬이 올린 위버스 글인데 읽어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