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불청객
w. JUN2
"너희 집 따뜻한 물 안 나오냐?"
"기다리면 나온다고! 씻게 해준 것만으로도 감사 해하지는 못할망정 바라는 것도 많다..."
문이 열린 작은 틈에 머리를 내밀고 있던 민윤기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문을 쾅 닫고 모습을 숨긴다. 아오 씨, 저게 진짜. 10분 전의 상황을 생각하면 아직도 어이가 없다. 밤 11시에 난데없이 우리 집의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길래 열어줬더니 그대로 나를 밀치고 집 안으로 들어오질 않나, 샤워 좀 하게 온수기를 틀어달라고 하질 않나.
누가 보면 나랑 아주 친한 사이라도 되는 줄 알 거다. 하지만 나와 민윤기는 절대로 그런 사이가 아니다. 그저, 운이 더럽게 좋은건지 나쁜건지 7년 연속 같은 학교, 같은 반에 다니고 있는 인연이다. 7년이면 불알친구라고 해도 되지 않겠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는 같은 공간에 존재했을 뿐 각자의 인생을 바쁘게 살아갔다.
민윤기는 집이 부유한 만큼 여유롭게 인생을 즐기고 있는 반면에, 나는 가문의 희망이라고 혈혈단신 상경한 그저 그런 집안의 첫째 딸이다. 중학생 때까지만 해도 이모 집에 얹혀살았지만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부터는 배정받은 학교 근처의 투룸을 얻어서 생활 중이다.
"김탄소!"
"왜!"
"변기 물 안 내려가."
"...아오!!"
민윤기는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화장실에서 나온다. 습기 가득한 화장실에 들어가 보니 변기의 뚜껑은 굳게 닫혀 있다. 똥 쌌으니까 열어보진 말고. 내 등에 대고 저런 발칙한 소리나 하는 불청객을 걷어차고 싶었지만 일단 변기부터 손을 봐야 한다.
"똥쟁이씨. 할 말이 많을 텐데 어디 한번 설명이나 좀 해보시죠?"
겨우 물을 내린 나는 이마에 맺힌 땀을 대충 닦으면서 거실에 퍼질러져 있는 민윤기에게 물었다. 오밤중에 남의 집에 쳐들어올 만한 이유가 아니기만 해봐, 바로 쫓아낼 거야. 발로 민윤기의 등을 툭툭 건드리자 민윤기는 신경질적인 눈빛으로 날 올려다본다.
"좀."
"좀 뭐."
"차지 마."
"아 그럼 말을 하던가!"
"쫓겨났어."
배때기를 긁적이면서 인상을 쓰는 게 딱 보니까 사고 하나 거하게 치고 집에서 쫓겨난 꼴이다. 나름 재벌인 민윤기가 치는 사고의 스케일은 얼마나 클까 감도 안잡힌다. 하지만 중요한 건, 민윤기가 어떤 상황인지 따위는 내 알 바가 아니다.
"너 오피스텔 있잖아. 거긴 뒀다가 뭐하려고 여길 오냐."
"...팔았데. 내가 하도 거기로 도망치니까."
"그, 그럼 친구들은! 어? 게네들 집에는 왜 안가는데!"
"그냥 가까워서 여기 왔다. 됐냐?"
저 뻔뻔한 표정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다. 허, 허허. 자기 집인 양 누워 있는 모습 보소. 창문 밖으로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든다.
"너랑 나랑 친해? 안 친하잖아! 게다가 난 여자야. 여자 집에 이 시간에 오는 거 상당히 무례한 짓이야, 알어?"
"겁나 땍땍거리네."
"내가 지금 안 이러게 생겼어??"
"에이. 편한 사이면서 왜 그래."
살살 웃으면서 말하는 저놈의 입을 꿔매버리기 전에 내가 화병으로 죽을 것 같다. 일단 화를 삭이기 위해 나는 찬물을 한 잔 들이켰다. 그래, 편한 사이는 맞지. 근데 친하지는 않잖아. 7년 동안 부대끼며 살았는데 어떻게 안 편할 수가 있겠어. 민윤기의 말이 옳다. 옳은데, 이건 아니잖아...!
"얼마."
"뭘 얼마?"
"씻겨준 거, 그리고 재워주면. 얼마 줄 거냐고."
"허, 참. 우리 사이에,"
"우리가 무슨 특별한 사이야? 진짜 뻔뻔한 것도 정도가 있지!!"
말할수록 화가 나서 목소리도 커졌다. 그런데 정작 민윤기는 눈 하나 끔뻑하지 않고 입맛을 다시며 내가 화내는 꼴을 지켜본다. 뭐, 내 얼굴이 재밌어? 뭘 쳐다보는 거야.
"...탄소야 나 배고파."
"...냉장고에 있는거 네 맘대로 처먹어. 대신, 전부 다 하나에 5000원이니까 돈 내."
"나 지금 3000원밖에 없는데."
"그럼 굶던지."
헐, 너무해. 그다지 놀란 것 같지도 않은 표정으로 나에게 너무하다는 민윤기를 슥 째려보고 나는 방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된 이상 저놈을 쫓아내는 건 무리다. 우리 집에서 사용한 물값, 숙박비 등 모든 사용료를 내일 뜯어내야겠다고 다짐했다.
"김탄소. 김탄소. 김탄소."
문제집을 펴고 이제 좀 고쓰리답게 공부를 해볼까 하던 것도 잠시, 나는 어느새 민윤기의 부름에 거실로 나와 있다. 나오지 않으면 해 뜰 때까지 내 이름을 부를 것 같은 미친놈 때문에 눈이 저절로 부라려진다. 나 원래 이렇게 히스테릭하고 사나운 사람 아닌데. 다 저놈, 아니. 저 새끼 때문이다. 저 민윤기라는 희대의 싸가지 없는 새끼 때문이야.
"나 이불 줘."
"이불 한 장밖에 없어. 내가 쓸 거야."
"그럼 덮을 수 있는 물건 아무거나."
"후..."
학교에서 나의 원만한 쩍벌라이프를 위해 구매한 헬로키티 담요를 민윤기를 향해 던졌다. 뭉치는 민윤기의 얼굴을 정확히 명중했다. 어머, 딱히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미안해라! 가식적인 웃음과 멘트를 함께 날려주자 민윤기는 뭐 저런 애가 다 있냐는 표정으로 응대해준다. 응, 미안. 근데 나는 민윤기 네가 더 이상한 것 같다.
"김탄소!"
"그만 좀 불러!!"
"...불 꺼줘."
친오빠한테도 당한 적이 없던 '(나는 손발이 모두 온전하게 달렸지만 귀찮으니까 네가) 불 꺼줘'를 들으니 기분이 아주 시궁창 같다. 민윤기와 말을 더 섞다가는 수명이 단축될 것 같아서 나는 불을 꺼주고 나의 방으로 발을 굴렀다.
다행히도 민윤기는 잠이 드니 얌전해졌다. 나는 문제집을 펴 오늘 풀기로 한 문제를 모두 풀고 복습까지 야무지게 했다. 이제 공부를 마쳤으니, 내 안의 덕후를 깨울 시간인가. 신나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면서 인스티즈에 접속했다. 안녕, 나의 또 다른 자아 인티즌? 하루 사이에 빵빵해진 쪽지창을 정리하고 오빠들의 사진을 관음 및 저장하다 보니 어느새 새벽 1시가 됐다. 내일도 학교에 가야 하기 때문에 나는 이불을 펴고 몸을 눕혔다.
"진짜 다시 생각해도, 어우..."
거실에 편하게 누워서 쳐 자고 있을 원수 같은 놈을 생각하니 술 취한 아버지의 한숨st한 것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내가 쟤 때문에 늙는다, 늙어... 아이고 팔자야. 생각해보니 민윤기는 언제나 저랬다. 나와 알고 지낸 7년 동안 언제나 뻔뻔했고 제 멋대로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함을 느껴서 나는 몸을 뒤척이고 다시 잠을 청했다.
그런데 화만 내느라 정신없던 나의 머릿속을 잊고 있던 생각이 스치고 갔다. 민윤기는 내가 여기 사는지 어떻게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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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 엠버들 진짜 개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