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도소년 이석민 X 태권소녀 김여주 01
이석민이 또 기권을 했다.
모니터에 비친 멋쩍은 모습을 보니 마음이 여간 안 좋은 게 아니었다.
“아 저 미친새끼! 왜 또 저래!”
“봐봐 내말 맞지? 석민이 만날 조르기에서 기권한다니까. 내말 맞지?”
문학시간이었던 3교시에 시작되었던 전국체전은 문학을 담당하고 있는 담임선생님의 재량으로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오늘은 제발 패하더라도 기권패는 하지 말자고 이석민과 나누었던 대화를 생각하며 두 손을 마주잡고 기도했지만, 오늘도 역시 틀렸다.
이석민의 기권으로 탄식만을 내뱉고 있는 2학년 13반의 정적을 깬 것은 김민규와 부승관이었다. 담임선생님도 있는데 당당하게 욕을 뱉은 김민규는 자기가 경기에 나간 것도 아니면서 이새끼 저새끼 거리면서 아직도 이석민을 욕하는 중이다. 저 양아치 새끼. 그리고 부승관은 비워져있던 내 옆자리에 앉아 잔뜩 아는 척을 해대고 있는데, 이석민이 조르기에서 기권하는 거 너 빼고 이미 다 알고 있어...
“김여주 맞지? 봐바 내가 뭐랬어! 아씨 이석민 그러니까 조르기 더 연습하라니까!”
얼굴을 가까이 대고 당당히 하는 척을 하는 부담스런 부승관의 얼굴을 옆으로 밀어내고 내 시선이 도착한 곳은 햇빛 하나 비추지 않는 맨 뒷자리였다. 경기가 시작할 때만 해도 관심 없다는 듯이 엎드려 있던 전원우는 김민규와 부승관, 둘을 시작으로 이어진 이석민의 기권에 대한 반 아이들의 시끄러운 토론에 어느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표정이 좋지 않은 것 같다고 느꼈을 때에 원우는 몸을 확 일으켜 교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원우는 화가 날 때 저런 행동을 한다. 가끔 저렇게 애 같을 때가 있다. 저렇게 나가서 뭘 하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그냥 단지 다시 돌아오면 기분이 좀 더 나아져있다는 것 뿐. 항상 석민이가 기권패를 하는 날이면 원우의 기분은 저기압이 되어있었다. 둘이 별로 친하지도 않으면서.
아, 이석민과 전원우가 어색한 것뿐이지 우리는 서로 가장 많이 알고, 서로가 가장 친한 친구이다. 그 중에 나는 이석민을 가장 먼저 만났는데, 중학교3학년 때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오면서, 그리고 우리가 짝꿍이 되면서, 옆집 이웃이 되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친해졌다. 고등학교까지 같은 반 짝꿍이 될지는 몰랐지만 말이다.
그 다음에 만나 게 부승관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이사 온 지역으로 도장을 옮기고, 새로운 코치님께 인사도 드리기 위해 갔던 체육관에서 처음으로 만난 사람이었다. 태권도복을 입고 잔뜩 낮게 깔린 목소리로 다짜고짜 태권도를 얼마나 잘하는지 봐야겠다며 으름장을 놓기에 난 정말 승관이가 코치님인 줄 알았다. 물론, 얼마 안가 진짜 코치님이 오셔서 몇 대 맞고는 금방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그 때부터 약간 제정신이 아니긴 했던 것 같다. 내가 체육관에 합류하고부터 부승관은 우리가 체급을 키울 때도 같이 키우고, 줄일 때도 같이 키운다며 우리를 소울 메이트라고 불렀다.
전원우와 김민규는 고등학교 때 친해진 친구들이다. 1학년 때 정신나간 담임선생님을 만나게 되어 이미지 게임으로 반장과 부반장을 정했는데, 원우가 반장이 되고 내가 부반장이 되었다. 반장과 부반장은 아무래도 같이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아 얼굴을 자주 봐야하는 일이 많았고, 자연스럽게 친해졌던 것 같다. 말수가 없어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무튼 많이 발전했다.
그리고 김민규는 첫인상부터 양아치였다. 노랗게 물들인 머리와 잔뜩 뚫은 피어싱으로 세상 만사 불만이 많다는 표정까지 플러스되어 아이들이 기피하는 대상 1호였다. 그렇다고 반 아이들에게 딱히 피해주는 건 없었다. 수업시간에 자고, 쉬는 시간에 자고, 종례시간에 자고 하는 것이 뭐 우리에게 피해가 가는 건 아니니까. 아, 나한테는 피해라면 피해였다. 내가 김민규와 친해진 계기는 종례시간에 김민규를 깨우는 것이 내 몫이 되고 나서 부터였다. 담임은 나에게 김민규를 부탁한다며 반장인 원우를 데리고 가버리고, 이석민은 유도부에서 훈련중이고, 부승관은 종례 끝나자마자 1빠로 교실을 빠져나가서 어쩔 수 없이 혼자 남은 나는 매일 매일 김민규를 깨워줬는데 사람은 적응의 동물인지 이게 계속 되다 보니 친해지긴 하더라.
그리고 부승관이 나와 같이 체육관을 가야되는 날에 김민규 깨우기 프로젝트에 합류하면서 김민규와 부승관이 친해졌고, 거기에 전원우와 이석민이 자연스럽게 붙으면서 우리는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다만 2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 아직도 원우와 석민이는 서로를 약간 불편해 하는 것 같다. 우리가 친해지기 프로젝트고 뭐고 다 해봤지만 아무래도 그 둘은 우리 능력 밖인 것 같아서 지금은 포기했다. 무튼 여기까지가 우리가 친해진 계기이다.
원우는 곧 교실로 돌아올 거고, 민규는 유도가 끝나자마자 다시 잠에 들었다. 승관이는 아직도 반 아이들과의 토론이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할 일을 석민이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 밖에는 없었다.
[수고해따 이석민!!]
나라도 위로 해줘야지 뭐.
***
도장에서 나와 꼴에 남자라며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는 승관이를 한사코 거부하고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너랑 나랑 겨루면 내가 이기잖아 승관아...))
“짠! 김여주 안녕~”
“아씨 깜짝놀랬잖아!!!”
“아!!아파!!! 여자애가 힘은 왜 이렇게 쌔!! 아프다고!!!!”
골목 귀퉁이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큰 등치에 놀라서보니 다름 아닌 이석민이었다. 감히 나를 놀래킨 것이 괘씸해서 주먹을 쥐고 눈 앞에 보이는 곳을 때리고 있으니 아주 아프다고 난리다. 유도선수가 이런 것쯤은 참을 수 있어야지. 하며 몇 대 더 때리고 나서야 주먹을 멈췄다.
“잘못 태어났어.. 남자로 태어났어야해...”
“더 맞을래?”
“아뇨..”
“코치님한테 잔뜩 깨졌지?”
“웅.. 석미니 마니 무서워또.”
“진짜 때린다?”
“아 알았어, 알았어! 안하면 되잖아.”
코치님 얘기를 꺼내기 잔뜩 내려앉은 눈썹이 불쌍했다. 말하지 않아도 많이 혼났을 거다. 유도부 코치님이 얼마나 무서운지 내가 알고, 부승관이 알고, 우리학교 사람들이 다 아는데.. 저렇게 괜찮은 척 하면서 속으로는 자기가 제일 속상할텐데 자기가 제일 괜찮은 척 한다. 바보 멍청이.
“야 너 코피!”
“에이. 뭘 이정도 가지고.”
“어휴 진짜.”
마주보는 시선을 방해하는 빨간 액체는 다름 아닌 이석민의 코에서 흘러내리는 코피였다. 전국체전 앞두고 몇날 몇일을 수업에도 안 들어오고 훈련만하면서 개고생을 하더라니. 그럴 줄 알았다. 당황하는 나를 보며 큰 손으로 쓱- 대충 코피를 닦아버리는 이석민의 등을 몇 대 때려주고 피가 묻어있는 손을 잡아 아래로 내렸다.
“야, 좀 숙여봐.”
“오 김여주 여자인 척 쩌는데.”
“뒤지고 싶어?”
자기애가 강한 나는 혹시라도 내 몸이 다칠까봐 간단한 약이나 밴드, 붕대, 손수건등을 가방 안에 가지고 다니는 편이라 가방을 뒤져 손수건을 꺼내 재빠르게 이석민의 코를 막았다. 내 취향에 맞는 심플하고 간단한 손수건은 정말이지 아무런 무늬와 색도 없는 새하얀 손수건이었다. 그렇게 새하얀 손수건이 이석민의 피로 물들어가는 모습을 보는 것은 꽤나 마음이 아팠다. 무식하게 훈련하더니 지 몸은 지가 챙겨야지. 나이가 몇인데..
“잠깐만 이러고 있어.”
“웅”
나는 최대한 팔을 뻗어 하얀 손수건으로 이석민의 코를 막아주고 있는 중이었고, 내 키에 맞추려 잔뜩 허리를 구부린 이석민은 내 걱정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지 내 도복 위에 졸라맨 허리띠를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내 허리춤에서 그걸 풀어서 리본체조를 보여주겠다며 까불다가 몇 대 맞고서야 몸을 가만히 나뒀다. 피가 좀 멎은 것 같아 빨갛게 물든 손수건을 이석민의 코에서 내렸을 때 이석민은 빤히 내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할 말이 있는 줄 알았는데, 눈이 마주치고도 꽤 오래 정적이 이어지자 괜히 어색해서 아무런 말이나 내뱉었다.
“이제 됐다. 하여간 지 몸 상하는 것도 모르고 너 그러다 일찍 죽어 멍청아.”
“아니야. 난 오래 살 거야.”
“뭐래. 오래 살고 싶은 사람이 어? 무식하게 밥도 안 먹고 하루 종일 훈련이나 하고 어?”
“그래도 난 빨리 안 죽을거야.”
“그래. 100살까지 벽에 똥칠하면서 살아라.”
“그래! 김여주랑 100살까지 벽에 똥칠하면서 살아야지!”
“미친. 난 100살까지 절대 안살거야!! 일찍 죽을 거야 나는! 아무튼 100살까지는 절대 안살아!”
“넌 몇 살 까지 살건데?”
“몰라. 내 남편 죽을 때까지 살 거야.”
“그럼 나 너랑 똑같이 살라면 너 남편 해야겠네.”
저새끼 또 시작이야. 이석민은 저렇게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가끔가다 할 때가 있는데 그런 거로 내가 설렐 줄 알았다면.. 정답이야. 처음만난 중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된 이석민의 버릇이라면 버릇이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사람 헷갈리게 하는 것. 하지만 그 당시엔 이석민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기 때문에 웃고 넘길 수 있었던 소리들이었다. 나와 이석민이 고등학생이 되고, 2차 성징으로 급격한 호르몬변화를 겪으면서 서로 비밀하나 없던 나는 처음으로 이석민에게 비밀이 생겼다.
우리가 만나게 된지 3년째, 나는 18살의 이석민의 짝사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