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 그리고 우리 03
w. 솦이
창섭이네 집에서 술을 마신 게 어느덧 일주일 전이였다.
엄청난 용기를 내서 우리 사이에 금기시 여기는 이야기를 했건만, 창섭이는 '싫어해야 하니까'라는 짧은 말로 날 침묵시켰고,
어느새 난 잠이 들어버렸다. 창섭이가 따로 업어서 우리 집에 대려다 준 것인지 난 집이었고, 오랜만에 늦잠을 잘 수 있었다.
그 일 뒤로 일훈이 와도 창섭이 와도 연락이 서서히 멀어졌다.
창섭이는 그렇다고 쳐도, 일훈이는 매일 연락하고 얼굴 보는 녀석인데.. 의아했다.
어디 가서 사고나 치치 않으면 좋으련만..
-지이이잉 지이이잉 덜컥-
[여보세요?]
[설아, 나 별님이! 부탁하나만 들어주라 응?]
[으음.. 들어보고?]
[안 돼!! 들어준다 해!! 해줘!!]
[.. 으유 알았어야. 내가 할 수 있는 건 해줄게.]
[오늘 여섯시! 광장 롯 몰 일층 커피숍!]
[엥? 무슨 말이야?]
[나 소개팅 차학연한테 걸렸어.. 대신 나가줘야.. 진짜 밥 한번 제대로 쏠게 웅??
이김에 너도 남자친구 좀 만들어! 난 끊을게 친구야 사랑한다!!]
뚝-
하.. 이럴 줄 알았어.. 워낙 엉뚱하고 막무가내인 별님을 설에도 잘 알고 있었기에 부탁 들어달라 했을 때도
쉽게 긍정의 말이 나오지 않았었다. 이럴까 봐 망설인 건데..
한 번도 소개팅 경험이 없던 설은 가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입어야 할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 거렸다.
하지만 한편에선 진짜 남자친구를 사귀어볼까라는 마음도 생기는 건 사실이다.
일훈과 창섭 덕에 남자는 구경도 못했으니,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지잉
핸드폰이 울리고 별님의 문자가 도착했다. 정말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그의 명함을 찍은 사진을.
이름을 보니 이민혁? 어디서 들어 더라, 익숙한 이름인데..
한참을 생각하다 시계를 보니 3시, 이제 준비를 해야 했다.
옷장을 뒤져보니 작년에 사놓고 한 번도 입지 못한 원피스가 보였다.
하얀색 원피스인데 치마가 좀 짧긴 하지만 이럴 때아니면 언제입어보나 하는 생각에 망설임 없이 입기로 했다.
#롯몰 일층
익숙지 않은 짧은 치마에 설이는 한 손으로 치마를 잡았다. 살색 스타킹을 신은 예쁜 다리에 어울리는 뾰족한 구두가
지나가던 남자들의 시선을 붙잡고 놓질 않았다.
여섯시가 되기 10분 전, 설이는 시간 맞춰왔다는 생각에 안도의 웃음을 지으며 커피숍 안으로 들어섰다.
들어서자 보이는 건 짝을 지어 음료를 마시는 커플들과 격식을 차린듯 단정한 옷차림의 한 남자의 뒷모습이 보이는 테이블이었다.
어딘가 익숙한 모습, 무의식적으로 그곳인 것 같다는 느낌에 무작정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기- 혹시 이민혁 씨?"
".. 아, 안녕하세.."
설이 짧게 목례를 하고 눈을 맞추자, 인사를 하다가 설이를 보고 말을 멈춘다.
뭐야, 이창섭 네가 여기 왜 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창섭을 쳐다보자 창섭은 인상을 찌푸리며 자리에 털썩- 앉는다.
설이 당황하며 눈만 굴리자, 창섭이 설이의 손목을 잡고 앞자리에 앉힌다.
"이창섭, 너 여기 왜 있어?"
"그러는 넌?"
"난 소개팅하러 왔지."
"네가 윤별님?"
"아, 친구. 그럼 넌 이민혁이야?"
"우리 형 이름도 기억 못하냐?"
맞다. 창섭은 형이 한 명 있었다. 이민혁. 창섭과 다르게 굉장히 자상하고 젠틀하며 공부도 잘하는,
너무 오래전에 봐 잠시 잊었었나 보다. 설이는 '아 맞다. 바보-'라며 자신의 머리를 살짝 치며 싱긋 웃어 보였다.
창섭은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듯했다. 그의 특유의 습관인 머리를 쓸어올리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치우치곤 설이를 바라보았다.
"네가 이 자릴 왜 나와"
"친구가 부탁했어.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하- 아주 그냥 벗고 다녀라?"
기분 나쁘다는 듯이 낮게 웃으며 자신의 외투를 벗어 훤이 드러난 설이의 하얀 허벅지에 툭-하고 던진다.
설이는 밀려오는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고 말을 더듬었다.
"뭐.. 이.. 이 정돈 짧은 것도 아니지 뭐!"
"죽는다 진짜."
"몰라! 나도 남자친구 좀 사귀려고 했더니, 이게 뭐야.."
".. 남자친구?"
더욱 구겨진 창섭의 미간에 설이는 눈치를 보며 '너.. 넌 여자친구 그렇게 많이 사귀면서!'라며 허둥지둥 창섭의 말에 불만을 표시했다.
일주일 만에 연락도 없이 만난 것인데도 전혀 어색함은 없었다. 이럴 때는 정말 친하구나 싶었다.
창섭은 말이 없었다. 화를 가라앉힐 때마다 나타나는 창섭의 습관 중 하나였다.
정말 화난 건가? 아니 이게 화낼 일인가? 나 잘못한 거 없는 것 같은데? 설이는 밀려오는 억울함에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다.
화내야 할 사람은 난데! 연락도 안 하고 전화도 안 받고! 이렇게 화내려고 하는 창섭을 보니 잠시 잊었던 일훈도 생각나 더욱 화가 났다.
"내 연락도 안 받고.. 전화도 안 받고.. 소개팅이나 하러 다니느라 그랬던 거야?"
삐쭉 내민 설이의 입에서 귀여운 투정 어린 말이 나왔다. 창섭은 그 말에 찌푸리던 미간을 펴고 설이를 바라보았다.
"바빴어."
"그래도 연락 한통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일훈이도 그렇고!"
"걘 아마 더 바쁘겠지."
".. 씨.. 또 나만 몰라?"
진짜 억울하다 못해 화가 난다. 이 녀석들은 대체 무슨 비밀이 이렇게나 많아!
나도 같은 친군데 왜 맨날 나만 모르는 거지? 미워 죽겠어..
그때 핸드폰이 울리고 문자 메시지가 떴다. 일훈이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딱 그 꼴이었다.
[설아, 연락 못해서 미안. 할말이 있어. 오늘 시간 돼? pm 6:32 -일훈]
일훈 답지 않은 진지함에 의아했던것도 잠시, 창섭이 설이의 폰을 뺏어 들고는 전원버튼을 꾹- 눌렀다.
그리곤 핸드폰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었다.
"일주일 동안 생각 해봤어. 어떻게 시작 해야되는지."
"무슨소리야? 핸드폰이나 줘!"
"둘다 지키고 싶은데, 그럴 수는 없을것같네."
"...무슨 말이야 정말.."
"내가 왜 노래 안하는지 물어봤었지"
"...응"
"알려줄게.가자"
많은 것을 담은 표정으로 내 손목을 잡고 카페를 나갔다.
얼핏 본 창섭의 심오한 표정에 나도 따라 걱정이 되었다. 이렇게 심각하고 아픈표정을 보려고 물어본건 아니였는데..
괜시리 후회가되기 시작했다.
#
그렇게 서로에게 침묵을 유지한체 온 곳은 창섭의 집.
많은 추억이 담겨있는 곳이였다. 이곳은 왜 온것일까.방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 가득 창섭의 향에 기분이 묘했다.
여전히 굳어있는 창섭의 얼굴의 설이는 눈치를 보며 창섭에게 괜히 웃어보였다.
"창섭아, 나 몰라도 돼. 그러니까 그런 무서운 표정 짓지마 응??"
"알아야돼, 아니 알아줘 이젠."
창섭이 책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참을 보더니 느릿한 동작으로 책장을 눈으로 훑기 시작했다.
그중 파일 하나, 앨범 하나를 꺼내어 설이에게 건네고는 열어보라는 듯 눈짓을 했다.
설은 먼저 파일의 첫 장을 보았다. 이 파일은 악보를 넣어두는 곳인 것 같았다.
낡은 악보부터 구겨진 악보까지 꽤 오래된 것 같았다. 악보 이곳저곳에 연필로 그린 듯 흐릿한 음표가 줄을 섰고,
작곡,이라는 옆에 칸에 이창섭이라는 세 글자가 적혀 있었다.
다음 잔, 그 다음 잔을 펴도 창섭의 이름과 흐릿해진 음표들뿐이었다.
설이는 고개를 갸웃- 하며 옆에 있는 앨범을 열어 보았다.
첫 장에는 굉장히 멋진 풍경들의 사진이었다. 예전에 창섭이 처음 사진을 시작했을 때 설이 이곳이 꼭 가보고 싶었다며,
사진을 찍으면 꼭 보여달라고 한 곳이었다. 다녀왔구나, 뭐야 나한테는 안 갔다면서! 어이구 - 귀엽긴
한 장, 두 장 넘기자 설이의 사진도 드문 보이기 시작했다. 언제 이런 걸 찍은 거야? 웃을 때, 울 때, 장난칠 때, 먹을 때 정말
많은 설이의 사진이 있었다. 한 장을 더 넘기자 그곳엔 풍경의 이미지도, 길거리의 이미지도 없었다. 그저 설이의 사진만이 가득했다.
그 다음 장도, 그 다다음 장도 설이의 사진뿐이었다.
설은 놀란 눈으로 창섭을 바라보았지만, 창섭은 동요하지 않고 그저 설이가 넘긴 페이지의 사진을 빤히 보며 생각에 잠긴듯했다.
탁-
사진첩을 덮고, 창섭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솔직히 난 네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요점을 모르겠어.
내 사진은 또 언제 이렇게나 찍은 거야?
"나 노래가 좋아."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예쁜 입술이 열렸다. 반짝거리며 일렁이는 눈동자가 날 떨리게 했다.
네가 노래를 좋아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잘 아는 사실이였다. 노래를 할때면 행복해 보였으니까.그리고 정반대인 일훈과
부딪히지 않고 오랫동안 친구사이를 유지할수 있었던건 음악이라는 공통점 때문일테니까.
"내가 노래를 부를 땐, 네가 나만 바라봤거든."
그 모습이 미치게 예쁘니까,- 물 흐르듯이 흘러가는 말에 설이는 그의 말에 부정을 하지 못하고 넘겨 버렸다.
"널 보며 곡을 썼어. 저게 다 네 거야. "
나에게 준 파일부터, 책장에 꽂혀있는 수많은 파일들을 고개로 쓱- 가리키며 평소의 표정을 유지하며 말했다.
"사진은.. 노래 좀 잊으려고 어떻게든 매달려보려고 한 건데,"
".... 결국 제자리네."
창섭은 앨범에 수많은 설이의 사진을 보며 자신의 머리를 손으로 쓸었다. 사르륵- 흩어지는 좋은 머릿결에 순간 만지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였다.
설이는 쉽게 말을 꺼내지 못 했다. 아직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의문도 넘쳐 났다.
"... 노래를 왜 잊어야 된다는 거야?"
"네가 내 노래야. 김 설."
네가 없으면 노래를 할 수가 없으니까-, 보기드문 예쁜 미소를 짓고, 동문서답하는 창섭의 말에 문득, 창섭에 집에서 술을 마시던 그날과 오버랩 되었다.
'싫어해야 하니까'
싫어해야 하니까? 내가 노래면, 날 싫어해야 한다는 건가? 왜? 도대체..
이유를 알면 몇 년 동안의 체증이 펑 하고 뚫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꽉 막힌 기분이었다.
창섭은 내 복잡한 표정에 큰 손으로 나의 머리를 비볐다.
"나 노래 다시 시작할 거야"
"... 어?"
"마음 단단히 먹으라고, 너 내가 채갈거니까."
지금은 그것만 알아 둬. 어차피 이해 못할 테니까- 방문을 빠져나가는 창섭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설이
파일 맨 첫 장에 있던 가장 낡은 악보를 꺼내었다. 아까는 보이지 않던 제목이 자신 좀 보라는 듯이 선명하게 보였다.
'dear, my everything - 2010.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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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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