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열의 첫 촬영이었다. 잔뜩 긴장해 심호흡만 연신 쉬는 찬열의 어깨를 백현이 토닥였다. "늘 하던 것 처럼만 해." 백현의 말에 찬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하지 말자, 하던 것처럼만 하자, 이렇게 마음 먹어도 떨리고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었다. 계속해서 손바닥에 땀이 났다. 찬열의 축축한 손에 백현의 손이 맞닿았다. 백현은 찬열의 손을 꼭 쥐어주었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어도, 서로는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백현의 눈빛과 찬열의 눈빛이 마주쳤다. 찬열을 마주잡은 손을 풀고 백현을 품 안에 끌어 안았다.
촬영장에 가는 길에 백현의 작업실에 잠깐 들린 것이었던 찬열은 백현의 응원과, 생각지도 못했던 수정의 응원까지 얻고 백현의 회사 건물에서 빠져나왔다. 날이 가면 갈수록 확실히 차가워지는 기온에 찬열은 패딩을 꼭 여미고 벤에 올라탔다. 평소 같았으면 멀미가 난다고 창 밖만 봤을 테지만, 연기를 시작하면서 찬열은 벤에 올라타자마자 대본을 읽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대본을 읽고, 또 읽고 실제로 그 인물이 되어 상상해보고. 찬열은 완벽하게 '민기'가 되려 노력했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를 확인하러 가는 길이었다. 찬열이 눈을 감고 다시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찬 공기가 들어와 나가면서 제 긴장감과 불안감을 다 몰아나가길 바랬다.
운전대를 잡은 준면은 운전을 하면서도 찬열을 힐끔거렸다. 얼굴에 긴장감이 역력했다. 안 그래도 여태껏 했던 대본 리딩에서 좋은 말을 듣지 못한 터라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있는 게 분명했다. 찬열에게 뭐라고 말해 응원해주고 싶었지만 준면도 긴장한 건 마찬가지였다. 도대체 어떤 말을 해줘야 찬열이 그 긴장감을 떨쳐낼 수 있을지, 준면은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어줍짢은 말을 했다가 찬열을 더 힘들게 할까봐 겁이 났다. 준면은 그저 찬열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실제 거리 상으로는 얼마 안되지만 마음으로는 너무나도 멀었던 촬영장에 도착했다. 준면과 찬열의 눈이 마주쳤다.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둘은 서로의 마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잘하자, 긴장하지 말고. 준면에게 고개를 끄덕인 찬열이 힘차게 벤의 문을 열고 촬영장 흙바닥에 첫 발을 내딛었다. 잘하자. 늘 하던 것 처럼만. 찬열은 아까 전 마주 잡았던 백현의 손을 떠올렸다. 품 안에 안았던 백현의 몸도, 마주 잡았던 백현의 손도 아직까지 제 몸에, 손에 생생하게 남아있었다. 찬열은 그 온기가 도망가지 못하도록 두 주먹을 꼭 쥐었다.
"안녕하세요!"
찬열과 준면은 활기차게 스튜디오로 들어섰다. 몇몇 스텝들이 고개를 숙여보였다. 저 멀리 주연 배우들이 히터 앞에 옹기종기 모여 대본을 읽고 있었다. 감독에게까지 인사를 마친 찬열이 얼굴에 다시 웃음을 매달고 배우들에게로 다가섰다. 감독과 스텝들이라는 산을 넘었으니, 이제는 배우들이란 산을 넘을 차례였다. 준면이 용기를 불어넣어주듯 찬열의 어깨를 토닥였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듣기좋은 찬열의 굵직한 목소리가 스튜디오를 울렸다. 배우들이 찬열에게 아무 말 없이 손을 들어보였다. 다들 대본을 보느라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찬열에 대한 배우들의 자세는 1차 대본 리딩때와 다를 바 없었다. 여전히 거만했고, 차가웠다. 찬열도 그 옆에 우두커니 서서는 대본을 펼쳤다. 배우들은 각기 하나씩 의자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찬열의 몫은 없었다. 머쓱하게 서있던 찬열은 준면이 의자를 구해왔을 때에야 앉을 수 있었다. 생각보다 시린 스튜디오의 공기에 찬열은 발을 동동거리며 대본을 읽었다. 히터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찬열에게 히터의 열기가 전해질 리 없었다. 보다 못한 준면이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제 핫팩을 꺼내 찬열에게 건넸다. 찬열은 거절하려다 준면이 무서운 표정을 짓자 그제야 핫팩을 받아들었다. 꽁꽁 얼었던 손이 조금 녹았다.
"첫 씬 들어가겠습니다!"
스텝의 우렁찬 목소리가 스튜디오를 흔들었다. 히터 앞 옹기종기 모여있던 배우들은 패딩을 그들의 코디, 매니저에게 벗어 건네고 각자의 위치로 일사분란하게 흩어졌다. 아직 자신이 나오려면 한참이 남은 찬열만이 히터 앞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영광스런 첫 테이프가 돌아갔다. 찬열의 연기 인생의 첫 페이지가 넘어가는 순간이었다. 히터 앞에서 멀뚱히 있던 찬열은 일어나 촬영 중인 세트장 구석에 슬그머니 섰다. 배우들이 어떻게 연기를 하는지, 보고 싶어서였다. 찬열은 두 손을 꼭 마주잡고 기도라도 하는 양 배우들이 연기하는 모습들을 지켜보았다. NG가 나도, 애교를 부리고 웃으며 당황하지 않고 대처하는 그들의 모습에 찬열은 감탄했다. 분명 저가 NG를 냈다면 죄송합니다, 하고 연신 허리를 굽혀 사과했을 터였다. 언젠가 경험이 어느정도 쌓이고 나면 저런 융통성도 생기겠지. 찬열은 속으로 생각했다.
"찬열 씨."
두 손을 꼭 마주잡고 선배들의 연기를 지켜보는 찬열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콕, 콕, 작게 건드리는 손길이 있었다. 찬열이 뒤를 돌아보자 그 주인공이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환하게 웃으며 찬열에게 인사하는 사람은 찬열의 상대배우였다. 찬열과 마찬가지인 신인이었다. 그 여배우는 한 마디로 여름의 상쾌한 바람같은 사람이었다. 하얀 피부에 긴 생머리를 가진 '청순한' 여배우였다. 찬열은 싸가지 없고 냉정하기 그지 없는 '민기'를 맡았고 여배우는 한 없이 착한 '은수'를 맡았다. 여배우는 벌써부터 극 중의 의상으로 갈아입은 후였다. 여성스러운 원피스였다. 까만 스타킹 끝엔 앙증맞은 단화까지 자리잡고 있었다.
"아, 안녕하세요. 혜지 씨.
찬열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혜지는 사뿐사뿐 걸어 찬열의 옆에 섰다. 원피스 위에 걸친 커다란 패딩이 우스꽝스러웠지만 나름 귀여웠다. 두 손엔 긴장한 듯 대본을 꼭 쥐고 아까 전의 찬열처럼 배우들의 연기를 쳐다보고 있었다. 찬열은 혜지를 흘끔 쳐다보고 저도 시선을 옮겼다. 작은 세트장 안에서 배우 둘이 대사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혜지는 꽤 키가 컸다. 디자이너님이랑 비슷하네. 찬열이 흘끔 내려보면 백현의 속눈썹이 보이곤 했다. 긴장하면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과 동그란 콧망울, 당장이라도 입 맞추고 싶은 입술까지 찬열의 머리 속에서 금방 백현의 모습이 그려졌다. 아, 보고 싶다. 오늘 아침에도 보고 왔는데 또 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일을 하다가도 백현과 접점이 있는 무언갈 보면 금세 백현이 머리 속에 가득 차곤 했다. 찬열은 눈을 감고 제 머리를 통, 통, 쳤다. 이제 그만 나가시죠, 일 해야되니까. 찬열이 어루어도 백현은 늘 그랬듯이 나갈 생각을 않는다.
"머리 아프세요?"
옆에 선 혜지가 머리를 통, 통, 치는 찬열이 걱정스러웠는지 찬열에게 물어왔다. 눈을 위로 치켜뜨고 저를 걱정스레 쳐다보는 모습이 꽤 사랑스럽다. 본인이 그런 모습을 노린 것일진 모르겠지만. 찬열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저었다. 머리가 아픈 게 아니고 내 머리 속에 살고 있는 한 사람 때문에 조금 산만해요. 찬열은 차마 하지 못한 말을 목구멍으로 꼴깍 삼켰다.
"우리 잘해봐요, 서로 처음이니까."
"아, 네."
혜지는 씩씩하게 제 오른 손을 내밀었다. 혜지의 적극적인 모습에 찬열은 약간 당황했지만, 곧 혜지가 내민 오른 손을 잡았다. 혜지가 마주잡은 손을 흔들며 활짝 웃었다. 손을 뗀 찬열을 보며 혜지가 다시 씩씩하게 말했다. "드라마 찍는 동안엔 절 많이 사랑해주세요. 사랑하는 사이니까." 혜지의 당돌한 말에 찬열은 헛웃음을 지었다. 찬열은 얼버무리듯 대답하고 다시 백현을 떠올렸다. 비교하는 것 조차 웃기지만 혜지와 백현은 너무나도 달랐다. 사랑하는 사이라면 사랑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먼저 주려고 노력하려는 게 당연한 것이 아닐까? 백현은 그랬다. 찬열의 취향을 모른다고 울기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자신의 마음을 기꺼이 나눠주고 제 감정과 찬열의 감정을 서로 나누던 사람이었다. 찬열은 혜지를 내려다보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백현이 보고 싶어졌다.
백현은 인터넷 서핑을 하다 말고 책상 위 한 구석에 덩그러니 세워둔 탁상 시계를 흘끔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점심 시간이네, 벌써. 길다란 시침이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백현의 머리 속에 찬열이 떠올랐다. 점심은 먹고 촬영을 하고 있을런지, 한낮이어도 추운 날씨에 촬영은 잘 하고 있을런지, 또 감독이나 작가에게 혼이 나고는 있지 않을런지. 찬열에 대한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 백현의 머리 속을 가득가득 채워나갔다. 백현은 당장이라도 일을 그만 두고 찬열의 촬영장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그러나 백현의 책상엔 방금 전까지 보고 있던 디자인 도안, 장소 건의안들이 이리저리 엉켜 널부러져 있었다. 걱정되고 보고는 싶은데 일은 해야되지, 딜레마에 빠진 백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그와 동시에 백현의 입술 사이로 큰 한숨이 새어나왔다. 백현은 연필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백현의 머리 속에 커다랗게 달력이 그려졌다. 이미 1차 피팅이랑 수정은 끝이 났고, 일주일 뒤에 2차 피팅, 수정하고, 그 다음엔 장소 계약하고…. 백현의 머리 속 달력에 촘촘히 그려져나가던 스케쥴은 이내 곧 지우개로 슥싹슥싹 지워져나갔다. 백현은 결심한 듯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책상 옆 옷걸이에서 코트를 챙겨입고, 목도리까지 두른 백현이 작업실을 나섰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저를 쳐다보는 수정에게 손까지 흔들어보이고, 백현은 준면의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었다. "촬영장 어디에요?" 처음 준면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처럼, 다소 무례하게 시작된 통화는 준면에게서 촬영장 주소를 듣는 것으로 끝이 났다.
백현은 촬영장 주소를 중얼거리며 건물을 빠져나왔다. 갑작스럽게 촬영장을 찾아가면 찬열이 당황할 것이 뻔했다. 그러니 백현은 그냥 멀리서 구경만 하고 오기로 마음 먹었다. 예전 찬열이 저를 보러 몰래 작업실을 찾아왔던 것 처럼, 자신도 멀찍이 떨어져 찬열을 지켜보다 올 생각이었다. 밥은 먹고 하는지, 혼이 나고 있는지, 온갖 걱정들이 뒤섞인 채로 발만 동동거리느니 직접 찾아가 눈으로 확인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멀찍이 떨어져 지켜보는 백현을 찬열이 볼 수 있을리가 없었지만, 백현은 상관 없었다. 찬열이 보든지, 말든지, 그냥 그 곳에서 찬열에게 마음 속으로 응원을 해주고 올 생각이었다. 백현은 곧장 찬열의 촬영장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탔다.
찬열은 바짝바짝 마르는 입술에 계속 침을 발랐다. 1, 2회 대본 끄트머리에 있는 키스신을 오늘 찍는다는 감독님의 말에 찬열은 밥을 먹다말고 숟가락을 바닥에 떨어뜨렸더랬다. 혜지와는 저번 대본 리딩때 보고 오늘 처음 보는 사이였다. 거의 초면이나 다름없었다. 토크쇼에 나와 초면인 배우와 키스신을 했다, 베드신을 했다고 웃으며 밝히는 배우들을 봐왔지만 그게 바로 자신의 일이 될 줄이야. 2회 끄트머리에 있는 키스신을 지금 찍는 건 그 장면을 예고편에 꼭 써야한다는 감독님의 의견 때문이었다. 그래야 사람들의 흥미를 끌 수 있다고. 감독님의 독단적인 선택은 찬열에게도, 준면에게도, 혜지에게도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둘 다 새파란 신인이었다. 준면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찬열과 혜지를 번갈아보며 발을 동동거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저 찬열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긴장을 풀어주는 일 밖에 없었다. 찬열은 밥을 다 먹고 양치를 하고, 가글을 하는 순간에도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냥 키스신도 아니고 찬열이 기습적으로 하는 키스였다. 처음 하는 술을 마신 연기─연기 자체가 처음이긴 했다.─에다 기습 키스신이라니. 산 넘어 산이었다. 찬열의 등줄기를 타고 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수전증 환자처럼 떨리는 찬열의 손을 준면이 꼭 잡아주었다.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여전히 우렁찬 스텝의 목소리가 촬영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찬열이 패딩을 벗어 준면에게 건넸다. 준면은 찬열의 패딩을 받아들며 찬열의 어깨를 토닥였다. 긴장하지 말고. 준면의 말에 찬열이 애써 웃어보였다. 볼 근육이 파르르 떨리는 거 같은 건 기분 탓이겠지. 준면도 찬열을 따라 웃어보였다.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한 가수의 노래가 떠올랐다. 입꼬리는 당겨 웃지만 눈을 잔뜩 굳어있었다. 한 컷에 끝내버려. 세트장으로 들어선 찬열에게 준면이 마음 속으로 소리쳤다.
"하이, 큐!"
감독님의 사인과 동시에 찬열의 첫 연기가 시작됐다. 아까 전부터 감정을 잡고 있던 '민기'가 '은수'에게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 둘의 연기를 지켜보는 내내 준면은 아까 전 찬열이 그랬던 것 처럼 두 손을 꼭 마주잡고 있었다. '민기'가 '은수'를 벽으로 밀쳐냈다. 단번에 '민기'의 입술과 '은수'의 입술이 맞닿았다. 준면이 크게 숨을 들이켰다. 촬영장은 찬 물이라도 끼얹은 것 마냥 조용했다. 다른 배우들도 신인 배우들의 첫 키스신을 보러 옹기종기 모여들고 있었다. 키스는 점점 질척해져가고 있었다. 버둥거리는 '은수'를 '민기'는 단번에 제압했다.
"컷! 밀치는 장면에서 한 번 더 하자. 진하게."
감독은 잔인했다. 입술을 떼고 우두커니 서있는 신인 배우들에게 더 진한 키스를 할 것을 요구했다. 당황해하는 찬열과 혜지의 모습에 다른 배우들이 깔깔 웃었다. 전부 다 그들이 겪었던 일들이었다. 배우들은 자신들의 신인 시절이 떠올라 키득키득 웃었다. 귀엽네, 귀여워. 배우들이 서로의 귓가에 속삭였다. 개 중에서 당황한 건 찬열과 혜지, 준면 이 셋 뿐이었다. 아, 또 해야한다니. 찬열이 절망하며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냈다. 백현이 아닌 다른 누군가와 입술을 맞춘다는 건 아무리 일이라고 해도 꽤 불쾌한 일이었다. 자꾸만 키스를 하는 동안 백현이 생각이 나서, 제대로 집중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감독이 다시 하자고 한 것일지도 모른다. 찬열은 혜지를 흘끔 쳐다봤다. 혜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빨개진 혜지의 얼굴을 보니 괜히 머쓱해졌다. 찬열은 이내 고개를 돌려버렸다.
촬영장에 도착한 백현은 스튜디오 건물로 들어가는 스텝들 무리 끄트머리에 섞여 슬그머니 스튜디오에 잠입했다. 의외로 경비가 허술했다. 입구에 사람이 없었다. 혹시나 해서 오는 길에 스텝증을 조악하게나마 만들었던 게 무안해지는 순간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스튜디오의 모든 사람들은 한 곳에 죄다 몰려있었다. 스텝들은 물론이고, 배우들까지 죄다 우글우글 모여있었다. 무슨 일이래. 백현이 슬그머니 그 쪽으로 다가갔다. 우글우글 모여있는 사람들 뒤에 서서 고개를 쭉 내밀고 까치발을 들길 여러 번, 백현의 시야에 두 남녀가 포착됐다. 진한 키스를 하고 있는 찬열과 혜지였다. 백현은 뭔가 묵직한 것이 뒷머릴 치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백현은 뒤꿈치를 들었던 발을 내렸다. 괜히 목 안이 뻑뻑했다. 백현은 조용히 사람들 무리에서 빠져나왔다. 목에 걸었던 우스꽝스러운 스텝증을 벗고, 스튜디오 건물에서 나와 사람이 없는 주차장 구석에 쪼그려앉았다. 연기를 한다길래 어느 정도 예상은 하던 러브신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갑작스레, 것도 제 눈으로 직접 지켜본 러브신에 괜히 마음이 이상해졌다. 추운 겨울 바람이 부는 바깥에 쪼그려앉아 손에는 자기가 직접 만든 스텝증을 쥐고 있는 제 자신이, 한심해졌다. 괜히 코가 찡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졌다. 이름표 안 빳빳한 종이에 나름 또박또박하게 쓴 'STAFF 변백현' 이라는 제 글씨에 백현은 결국 눈물을 떨구었다. 걱정이 되서, 보고싶어서 이렇게 스텝증까지 만들어 왔건만 정작 본 것은 다른 여배우와 진하게 키스하고 있는 모습이라니. 이렇게 나와 추운데서 쪼그려 앉은 건 또 뭔데. 백현은 끅끅거리며 제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백현은 손에 쥔 이름표를 구겨 내던졌다. 구겨진 이름표는 데굴데굴 굴러 차 밑에서 멈추어섰다. 길다란 선 때문에 구겨진 이름표는 멀리 가지 못했다. 지금 백현도 그랬다. 스튜디오 안 찬열에게까지 닿을 보이지 않는 백현의 길다란 선이 자꾸만 백현의 발목을 붙잡았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그 둘은 잘 어울렸다. 하긴 찬열의 옆에는 남자인 저보다 그 여배우같은 여자가 더 잘 어울릴 터였다. 찬열의 옆에 그 여배우가 서있으니 찬열에게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제 옆에 있는 찬열에게서는 빛이 날까? 백현은 스스로의 물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자인 제가 찬열의 옆에 서있다면 찬열이의 빛이 사그라들 것이었다. 내가 찬열이의 빛을 가로막고 있는 걸까. 괜한 생각이 들었다. 누가 봐도 예쁜 여배우의 모습과, 질투날 정도로 잘 어울리는 찬열과 여배우를 보니 백현은 점점 자신이 작아지는 걸 느꼈다. 제 마음 속에서 자괴감과 열등감, 질투가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여태껏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었다. 또 다시 백현은 혼란스러워졌다. 백현은 건물을 한참 바라보다 억지로 걸음을 떼었다. 집으로 가는 버스에 올라타는 백현의 마지막 한숨만 그 자리에 남았다.
키스신을 우여곡절 끝에 마친 찬열이 입술을 손등으로 닦으며 세트장에서 나왔다. 준면에게서 패딩을 받아들고 촬영장 구석에 쪼그려앉았다. 피곤했다. 동물원 우리 안 동물마냥 저를 쳐다보는 다른 배우들도, 스텝들도 불쾌했고 자꾸 공과사를 구분 못하는 상대방도 짜증났다. 한 번만에 성공하려 했던 찬열과는 달리 상대방은 자꾸만 일부러 실수하는 느낌이었다. 입을 몇 번이고 맞추고 허리를, 목을 몇 번이나 껴안고. 성공했다 싶으면 피식, 웃어버리고 성공했다 싶으면 다시 하자고 감독님께 말하고. 겨우겨우 그 수십 번의 키스신이 끝나고 혜지는 얼굴을 발그레 붉히고 찬열에게 웃어보였다. 찬열은 애써 웃어보였지만 이미 잔뜩 굳은 표정을 감출 수는 없었다. 찬열은 보란 듯이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고 구석으로 멀찌감치 물러났다. 세트장에서 나온 혜지는 멀찍히 사라져버린 찬열을 찾아 두리번거리다 촬영장 구석에 앉은 찬열을 발견했다. 혜지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찬열 씨!"
찬열은 제 이름을 부르며 곧장 제 옆으로 오는 혜지를 보고는 벌떡 일어서 도망치듯 화장실로 가버렸다. 변기 칸으로 가 문을 걸어 잠그고 변기에 앉아 패딩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침부터 백현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바쁜가. 찬열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잘해, 화이팅! 하는 문자 하나만 봐도 금방 이 피곤하고 짜증나는 게 풀릴 것 같은데. 결국 찬열이 백현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 '뭐해요?' 한참 동안 채팅창을 보고있어도 사라지지 않는 숫자 '1'에 찬열의 어깨가 축, 처졌다.
오늘의 촬영은 한 밤중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사실 제 몫은 저녁 쯤에 끝이 났지만 찬열은 신인이었다. 찬열은 오늘 몫이 끝날 때까지 꿋꿋하게 촬영장을 지켰다. 선배들에게 따뜻한 음료수도 가져다 주고, 선배들이 연기하는 모습도 보면서 연기 공부도 하고. 피곤한 얼굴로 스튜디오를 나서는 배우들에게 일일이 꾸벅, 꾸벅 인사를 한 찬열이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단단하게 뭉친 어깨를 통, 통, 두드려 근육을 풀며 차 옆에 섰다. 문이 열리고, 밴에 올라타려는 찬열의 신발에 뭔가가 엉켜 올라왔다. 이름표에 달린 길다란 끈이었다. 고개를 갸웃하며 잔뜩 구겨진 이름표를 펼친 찬열의 눈이 놀라 동그래졌다. 악필임에도 펜을 꾹꾹 눌러 또박또박 쓴 백현의 이름 석자였다. 악필이지만 언제 봐도 귀여운 백현의 글씨체였다. 여기 오려고 이름표까지 만들었구나. 피곤이 덕지덕지 붙어있던 찬열의 얼굴에 그제야 웃음꽃이 피었다. 찬열은 얼른 패딩 주머니 안 제 핸드폰을 꺼내 백현과의 채팅방에 들어갔다. 그러나 오후에 보낸 제 메시지 옆에는 '1'이 그대로 붙어 있었다. 메세지를 보낸 게 언젠데…. 찬열의 표정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바빠서 그런가 싶어 바쁘냐고 메세지를 하나 더 보내려던 찬열은 시계를 보고는 이내 홀드 버튼을 눌렀다. 벌써 자정이 훌쩍 넘어있었다. 피곤할텐데, 깨우지 말아야지.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넣고, 찬열은 시트에 몸을 기댔다. 졸음이 물 밀듯이 쏟아졌다.
백현은 집에 돌아와 곧장 침대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갔다. 여태껏 경험하지 못했던 자괴감과 열등감에 사로잡혀 괴로워하던 백현은 저녁 즘에서야 제 마음의 이유를 알았다. 찬열이 예쁜 여배우와 키스신 따위를 찍어서 질투했던 건 잠시였다. 백현은 생각이 많아졌다. 내가 찬열이 옆에 있어도 괜찮을까, 내가 찬열이의 앞길을 막는 것은 아닐까. 여배우 옆에서 한없이 반짝반짝 빛나던 찬열이를 내가 어둡게 하는 것은 아닐까. 생일 날 파티도, 그 흔한 데이트도 작업실에서 하던 그들이었다. 찬열이 나이라면 연인과 극장도 가고 싶고, 놀이공원도 가고 싶고, 대담하게 길거리에서 스킨쉽도 하고 싶을 나이였다. 그 모든 것은 남자인 저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조그만 작업실에서 해야했다. 백현의 베갯잎이 젖어들어갔다. 찬열이 보고 싶어졌다. 지금 이 상황에서도 찬열을 보고싶어하는 제 자신이 한심했다. 사람이란 게 참 간사하지. 찬열에게 미안해 하면서도 그리워하는 제 자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백현은 자꾸만 흘러나오는 눈물에 이제는 닦을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어디선가 찬 바람이 들어오는 듯 했다. 온 집안에 창문이란 창문은 다 닫혀 있는데, 이불 속에 있음에도 자꾸만 추운 느낌에 백현이 몸을 잔뜩 웅크렸다.
밤은 깊어만 갔다. 백현은 쉽사리 잠에 들지 못했다.
-
안녕하세요! 레녹입니다.
제가 무작정 공지 하나 띄우고 도망간 뒤로 2주 정도 흘렀나요?
무책임한 제 공지에 댓글 달아주신 분들 정말 감사합니다.
한때 그만 쓸까, 하는 못된 마음도 들었었는데 댓글들 보니까 왜 그런 생각을 했나, 후회도 되더라구요.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 드릴게요.
그나저나...
패션패션이 150키로바이트를 넘었습니다...;ㅅ;
![[EXO/찬백] Fashion, Passion 20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f/a/d/fad8e9bbdb794b5004ef8fd8b4e61efe.gif)
나 이렇게 길게 쓴 거 처음이야...
장편 많이 쓰신 분들께는 아무 것도 아닐 150kb... 저에게는 엄청난 일입니다...
앞으로 200, 300, 400, 어디까지 나아갈지 모르는 패션, 패션.
저 조차도 어떻게 될 지 모릅니다. 그냥 엔딩만 정해놓고, 달리고 있어요.
어쨌든.
제 비루한 글을 읽어주시고 댓글까지 달아주시는 천사같은 독자분들께 감사하다는 인사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합니다. 공지에 달린 댓글보고 저 진짜 울 뻔 했어요.
![[EXO/찬백] Fashion, Passion 20 | 인스티즈](http://file.instiz.net/data/cached_img/upload/6/c/d/6cd8af7010fdd2a5d7ae3afdfd5b06c9.gif)
앞으로 열심히 쓸게요ㅠㅠ 감동먹었어요 진짜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윤아 앞머리 + 똥머리 처음봐 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