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야, 가서 출연진들 스탠바이 시켜라"
"네, 선배!"
오늘은 예전부터 큰 화제들을 낳았던 새 예능프로그램의 첫 촬영날이다. 하는 프로마다 대박이 난다는 MC, 예능돌로 유명한 아이돌, 호감형에 재미까지 보장하는 개그맨, 요즘 떠오르는 핫한 배우 등 최고의 출연진들과 여태껏 제작한 예능들을 모두 주말 대표 예능으로 만들었다는 전설의 조합 최승철PD와 윤정한작가까지. 이런 프로그램의 스탭으로 경력을 쌓는다는 것은 매우 들뜨고 신나는 일이다.
최피디님의 말에 출연진들의 벤들을 찾아가 장소로 모여달라는 얘기를 전했다. 다른 출연진들에게 모두 말을 전한 뒤 마지막으로 가장 삐까뻔쩍한 벤 앞에 섰다. 와, 나는 언제 이런 차 한 번 타보나.. 차 문을 두어번 두드리고 차 문을 열자 목베개를 한 상태로 얼굴은 A4용지로 가린 채 숙면을 취하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어떻게 깨워야 되나 잠시 고민하다가 조심스럽게 어깨를 흔들었다. 손으로는 A4용지를 옆좌석으로 치워버리고 눈으로는 손목시계를 쳐다보았다.
"정각에 촬영 시작합니다. 지금 스탠바이 해주셔야"
시계에서 출연진의 얼굴로 시선을 옮겼고, 나는 잠에서 깬 그와 눈이 마주쳤다. 미친. 이 말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이다. 난감하고 당황스러워 미칠것만 같은 느낌에 스탠바이 해주세요. 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을 전한 뒤 도망치듯 차에서 빠져 나왔다. 분명 그가 확실했다.
"피디님!"
"왜?"
"김민규 섭외 실패했다면서요, 다른 배우 섭외했다면서요!"
"김민규 측에서 다시 한다고 연락 왔는데 그럼 그 좋은 기회를 까냐? 근데 그건 왜?"
"아... 선배. 김민규..."
"왜, 뭐가 문젠데"
"걔 진짜 재미 없어요. 지금이라도 딴 애 하는게 나을걸요? 시청률 팍팍 떨어져요!"
"너 김민규랑 친하냐?"
최피디님의 허를 찌르는 질문에 순간 당황한 나머지 입이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친하면 진작에 말하지, 섭외 할 때 인맥이 얼마나 좋은건데. 라는 말을 끝으로 피디님은 가버리셨다. '친하냐' 라.. 피디님의 질문이 머릿속에 자꾸만 맴돌았다. 친했지. 친함을 넘어섰던 각별한 사이였지. 암, 얼마나 알콩달콩하며 지내던 전남친인데. 각별하고 말고.
"김여주! 그만 멍 때리고 빨리 와!"
"네... 갑니다.."
앞에 일자로 쭉 서있는 출연진들 중에 전남친이 있다는 것은 경험해보지 않고서야 어떤 기분일지 전혀 모를 것이다. 그래, 내가 메인피디였어도 김민규는 좀 탐났을 것이다. 세 작품 연속 대박을 터뜨린 젊고 잘생긴 배우. 이 얼마나 시청률을 올리기에 좋은 캐릭터인가. 게다가 예능이라면 토크쇼도 출연하지 않던 김민규다. 충분히 탐낼만은 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김민규가 저렇게나 대성할 줄은 꿈에도 몰랐지. 출연진들끼리 웃고 떠드는 사이 어느새 오프닝 촬영이 끝나버렸고 바로 다음 장소로 이동 하자는 피디님의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제작진 차가 지금 장비들 때문에 다 못 탈 것 같은데.. 출연진들 남는 차에 타야겠다, 미안해 여주야"
아니에요, 김민규 차만 아니면 돼요.
그러면 되는데...
"내가 앞에 탈게, 석민아."
"찍으려면 제가 앞에 타야죠 누나"
"나 뒤에 타면 멀미해. 제발. 내가 앞에 탈게"
"내가 누나 뒤에 타는거 몇 번을 봤는데요! 아이 억지 부리지 좀 마요"
"....매니저님, 제가 운전할까요?"
"피디님이 운전을 왜 하세요. 제가 해야죠."
하하, 이거 정말 눈물나는 배려심이구만. 드라마도 아니고 하필 김민규네 차 빼고 다 출발해버릴게 뭐람. 투철한 직업정신을 가진 매니저님과 김민규 담당 VJ인 이석민을 앞자리에 태우고 나는 뒷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김민규의 옆자리.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전남친 김민규의 옆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빌어먹게도 김민규가 자꾸만 나를 쳐다보는게 느껴졌다. 젠장, 완벽할줄만 알았던 내 근무환경에 어마무시한 장애물이 나타났다.
* * *
역시. 회식광이라고 소문난 최피디님이 이 역사적인 첫 촬영 날 회식을 거를리가 없었다. 출연진이고 제작진이고 할 것 없이 전화번호를 교환하기 바빴다. 이 난리통에 변호를 얻고 다니느니 차라리 좀 잠잠해질 때 돌아다니는게 나을 것 같아 조용히 앉아 고기만 굽고 있었다. 그러다가 옆에서 내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고 있는 이석민이 눈에 들어왔다. 이 어린 놈이 있는데 내가 왜 힘들게 굽고 있는거지..
"야, 어린 놈. 니가 좀 구워라"
"아이고 누나! 왜 누나가 굽고 계세요~ 주세요!"
"말이나 못하면..."
석민이에게서 내 핸드폰을 뺏어 친구의 카톡에 답장을 하던 중 석민이를 부르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익숙한 음성. 혹시나 하고 힐끗 쳐다보니 역시나, 김민규의 얼굴이 보였다. 고기를 굽던 이석민에게 전화번호를 묻는다.
"와, 내가 톱스타한테 번호를 다 따이네. 여기요"
"에이.. 톱스타는요. 무슨"
동갑이니까 말 놓으세요. 그럴까? 그러자, 그럼. 담당VJ니까 볼 일도 많을텐데, 하하!
꼴깝들을 떤다. 그래, 둘이 나이도 같고 성격도 비슷하니. 서로 담당 출연자, 담당 VJ 맡을 때부터 잘 맞겠다 싶었다. 너희들은 열심히 친목질을 해라. 나는 먹을터이니. 옆에 김민규가 있다는 것이 약간 불편했지만 나름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며 쌈을 크게 한 입 싸먹었다. 역시 고기는 너무 맛있는 음,
"피디님"
설마 날 부르는건 아니겠지!
"김피디님"
제작진 중에 나 말고 김씨가 또 있었나? 하하하! 쌈 다 먹고 한 번 찾아봐야겠군!
"김여주피디님"
"......"
"피디님도 번호 주셔야죠"
♥제가 사랑하는 전남친 컨셉 헤헿♥
그나저나 여주의 근무환경 넘나 부러운 것....8ㅅ8
마운틴듀우 새롭게 인사드려염 꺄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