傾國之色
한솔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쥐며 기방을 나왔다. 어제도 깔깔거리는 높은 웃음소리와 허연 분내, 비누냄새가 옅게 남아있는 치마폭에 휩싸여 놀다가 잠이 든 것이었다. 나으리, 아침드시고 가셔요. 붙잡는 목소리에 손을 내젓고 저잣거리에 나와 술이나 깰 겸 좀 걸었다. 아직도 붉은 등이 제 머리위에 떠있는 느낌에 그는 제 미간을 지분거렸다. 그나저나 어젯밤은 명월이가 제게 손한번을 내어주지 않았다. 저번에는 내가 오기만을 목빠지게 기다렸다고 하고서는.
알 수가 없구나.
한솔은 작게 중얼거렸다. 펄럭이는 도포를 갈무리 하고서는 근처 노점상에서 발걸음을 멈추었다. 유리장식이 달린 노리개가 햇빛에 비추어 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보는 눈이 있으십니다, 나으리."
"..."
"그것은 서역에서 들여온 공예품입죠."
"호오."
한솔은 손에 들린 부채를 탁, 소리가 나게 피며 입에 가져다댔다. 노리개를 집어들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자 유리장식이 쨍하고 울리는 것 같았다. 이걸 사면 명월이가 기분이라도 풀리려나, 생각하면서. 요리조리 둘러보며 살펴보던 때에 연홍빛댕기가 눈에 들어찼다. 잠깐 스쳐지나가면서도 달큰한 향이 지독하게 풍겼던. 길게 늘어진 땋은 머리 뒤의 하얀 목덜미에 그는 노리개를 급하게 내려놓았다.
"내 후에 다시 오마."
덥수룩한 상인에게 급하게 말한 그는 그녀의 뒤를 쫓았다. 하필 오늘따라 왜이리 사람이 많은 것인지 달랑거리는 그 연홍빛 댕기는 보일듯 말듯 어깨너머로 흔들렸다. 그는 놓치지 않으려고 눈으로 계속 그 댕기를 좇으며 걸음을 서둘렀다.
"아, 거 뭐요!"
급한 마음에 그 인파를 어깨로 마저 휘저으며 걸었더니 어디선가 불평의 소리도 들려왔다. 까짓, 알게 무어냐. 한솔은 단지 그녀를 쫓는데만 열중이었다. 어찌 여인이 저리 발걸음이 빠른가, 허면 내가 느린건가. 조바심에 속도를 더 낼때쯤, 분내가 코끝에 닿았다. 항상 기방에서 맡던 그 독한 분내가 아니었다. 아가냄새. 아가 분내. 그 아득한 기분에 한솔은 그녀의 허리를 한아름 안아들었다. 꽃이 안겨들었다.
"이 무슨..!"
잔뜩 당황해서는 눈을 크게 뜨는 모습에서도 단내가 훅 끼친다. 진득하고 또 달짝지근한 향. 내가 여인을 이리 쫓았던 적이 있었던가. 한솔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 그는 오른손에 들린 부채 끝으로 그녀의 턱을 콕 찔렀다.
"너."
"..."
"어느 방의 기생이냐."
"예?"
내 너를 한번도 본적이 없거늘.
경 국 지 색
꽃이 화를 냈다. 제가 기녀로 보이십니까? 하면서 잔뜩 몸부림쳐 제품에서 빠져나왔다. 갑자기 허해진 느낌과 옅어진 그 단내에 한솔은 허전함을 느꼈다. 그녀는 상종할 가치도 없다는 듯 매정하게 돌아섰다.
"잠시만!"
외치는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인지 들려도 모른체 하는 것인지. 그녀는 무시하고 바삐 걸었다. 그녀를 붙잡으려고 그녀의 뒤를 쫓자 힐긋 뒤돌아본 그녀는 치마를 살짝 쥐어올리고는 종종걸음으로 걸었다.
"나으리, 좀 지나갑시다."
왜 하필 이때인지 말과 함께 큰 수레가 지나간다. 푸우푸우, 소리를 내는 말이 원망스러워 눈을 흘겼다. 한솔은 급하게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으나 어디로 샌것인지 도통 보이지 않았다. 내 꽃, 어디로 숨었나.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았나. 만난지 하루도 안된 여인이 이리 갈증이 나니 한솔 또한 답답해 미칠지경이었다. 그녀가 갔을 법한 길을 따라걸으며 발자취를 찾았다. 그녀를 잡아서 무얼 하려구? 제게 던진 물음에 한솔은 대답도 않고 한숨만 푸욱 내쉬었다.
그야, 나도 모르지.
손을 잡아볼까, 예쁜 옷을 사입히며 나들이 가련? 꼬드겨 볼까. 말라가는 제 입술을 혀로 한번 축였다. 이만 돌아갈까 고민하는 그의 눈에 또 아슬하게 연홍빛댕기가 눈에 띄었다. 대문앞에서 쫄랑거리는 그 댕기. 어렴풋하지만 분명 그녀의 것이렸다. 한솔의 입꼬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올라갔다.
좋은 것은 한솔뿐이었는지 여주의 입꼬리는 올라가지도 아니했다. 숨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양손으로 꾸욱 제 입을 막았다. 다짜고짜 제 허리를 보듬은 호색한이 저를 쫓아왔으니 피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이젠 저잣거리도 마음대로 나오지 못하겠구나. 생각하면서.
아까 마차가 지나갈때 떨어진줄로만 알았더니 도포를 휘날리며 제 뒤를 밟기에 그녀는 두려워서 아무곳이나 들어가 몸을 숨겼다. 에고, 가련하여라. 거기가 어딘줄 알고. 화를 피하려다 더큰 화를 불러들인다고 하필이면 들어온 곳이 기방이었다. 가채를 쓴 기녀들이 저를 이상한 눈빛으로 보는 것도 모르고 여주는 발만 동동구르며 어서 가라 속으로 기도만 하고 있었다.
정작 제 댕기가 대문틈으로 삐죽 나온 것은 알지도 못하고.
"거 누구 없소."
너스레를 떨며 들어오는 한솔이 그녀는 못마땅하다. 대문앞에서 저와 눈이 똑 마주쳤음에도 거 누구 없소. 모르는체 하며 사람을 부르는 모양새가 얄밉다.
"나으리, 오랜만이십니다!"
한두번이 아닌 듯 그를 반기는 모습에 그녀는 혀를 끌끌 찼다. 길에서 만난 여인네의 허리도 덥썩덥썩 안아버리는 이였으니 기녀들이 반기는 것도 이상할 것 없었다. 얼마나 여색을 밝히면. 흥, 그럼 그렇지. 그에 대한 반감이 더 커졌다.
"오늘도 술만 드시고 가시렵니까."
콧소리를 내며 그에게 아는 체를 하는 기녀를 보며 그녀는 이때를 틈타 빠져나가는 것이 옳겠구나, 그리 생각하는 듯 했다.
"으응, 아니."
한솔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더니 손에 들린 부채로 턱, 그녀를 가리키더라.
"오늘은 저아이와 밤을 지새울 것이다."
여주는 살금살금 까치발을 든 상태에서 멈추었다. 기녀들의 시선이 한곳에 머물렀다. 질투어린 눈이라기보단 호기심 어린 눈빛이었다.
"..."
그녀는 화가 나서인지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입만 앙, 다물었다. 내가 기녀가 아니라고 말했는데! 속에서 더운물을 끓이는지 코에서 김이 씩씩 뿜어져나오는 기분이었다. 애초에 자신은 치마도 오른쪽으로 여미지도 않았고 분칠도 하지 않았다. 헌데 이리 기방에저 저를 붙잡고 늘어지니 화도 화지만 당혹감부터 스쳤다.
"그치만 나으리. 아무리봐도.."
맨 앞의 기생이 말을 하다가 끝을 뭉툭하게 얼버무렸다. 아무리봐도 기녀가 아니다. 그리 말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한솔을 부채를 만지작거렸다.
"맞는데. 내 꽃."
한솔은 눈을 내리깔며 살풋 웃었다. 그 모습을 보던 여주는 아무래도 엮이면 안되겠다, 그냥 빠져나와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얼마전 내가 화초도 올려주었는걸."
*화초: 기생의 첫경험
"..."
저를 지긋이 바라보는 그 얼굴을 보면서 여주는 단단히 말렸다고 생각했다. 웬 호색한에게 잘못 걸려 곤혹을 치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헌데 내 꽃은 내가 싫은가, 자꾸 나를 피하기만 하니."
"..."
"나 원. 속이타서 꼭 죽겠다."
기녀들에게 한풀이를 하듯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리고 말끝에는, 준비해주어라. 난 저기서 기다리고 있으마. 기녀들에게 무엇인지 모를 부탁의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기생오라비가 나와 굽실거리며 방안내를 하자 그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여주는 눈만 굴리며 고민했다. 그럼 이제 내가 나가면 상황이 끝인가. 해서 그녀는 대문앞에서 미적미적 발걸음을 옮겼다.
"야, 어디가."
필시 저를 부르는 모양이었다. 야라니. 왠지 속에서 울컥 무언가 치밀어올랐다.
"준비해."
"무엇을요."
다짜고짜 준비하라니. 기녀는 기가 차다는 듯 코웃음을 흘렸다.
"화초도 올렸으면서 모른 체 하는 꼴 우습다."
샐쭉거리며 말하는 모습이 미워 여주가 눈을 흘겼다. 애초에 안올렸으니 모르지! 무시하고 대문을 나서려하자 손목이 붙잡혔다.
"오랜만에 오신 귀중한 손님이시다. 네가 어느방의 기녀인지는 모르나 준비하라 하시니 준비해드려야지."
에그, 망측하여라. 저잣거리에 나왔다가 하루아침에 기생꼴이 된 여주는 막막함에 입술만 물었다. 그니까 기녀가 아니래도!
짧은 저고리가 불편해 여주는 팔을 끼적였다. 손을 올리면 금방이라도 속살이 보일까 싶어 안절부절 노심초사. 아까 그렇게 끌려가서는 웬 이상한 꽃물에 몸을 씻고 색감 고운 천을 몸에 둘렀다. 허연 분을 제 얼굴에 칠해주던 기녀가 제게 물었다.
"너, 어느 방의 기녀냐?"
"아닙니다."
"뭐가."
"기녀가 아니에요."
그녀또한 어이없어 했다. 그래, 그럼. 네가 시인일까. 시를 지으니 기녀가 아니라 시인이겠다. 저를 비꼬는 말에 심기가 불편했지만 여주는 그저 잠자코 있었다. 내 그 양반을 다시 만나면 그때 다시 따져야겠다. 이 기녀의 잘못이 아니다. 그렇게 되내이는 것 같았다. 그래도 저도 여자라고 곱게 빗은 머리에 윤기가 흐른다. 뽀얀 피부에 입술을 칠하니 어여쁘다. 평소에 입지도 않았던 쨍한 색의 치마와 옅은 저고리가 썩 어울린다. 누가보면 처음부터 기생이었다는 듯이.
"너 예쁘구나."
저를 꾸미던 기녀가 말했다. 여주는 얼떨떨해 눈만 꿈뻑였다.
"옷이 날개다, 이말이다."
"..."
"꼬질꼬질한 옷을 입었을땐 너도 꼬질꼬질 하더니. 우리 기방 옷이 곱다는 뜻이지."
저게 진짜.. 얄밉지만 그래도 자기 옷을 입혀주고 칠해주던 손길이 차갑지만은 않아서 여주는 입을 다물었다.
"화초도 올렸다면서 웬 댕기머리냐. 쯧쯔."
그래도 곱게는 보이지않는다.
분칠할때도 계속 입고 있기는 했지만 아직 익숙해지지는 않았다. 거울속에 한껏 멋을낸 제 모습이 자기도 낯설다. 한평생 이런 꼴을 한적이 없었는데. 아버지가 아시면 경을 치시겠다. 그녀는 한숨을 푸욱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따라오라는 그 말에 여주는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겼다. 혹여 발목이라도 보일까 살금살금 걸었다. 안내해준 방문 앞에서 들어가기를 망설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망설이는 체 했다. 주변에 사람이 사라질때쯤 되면 몰래 도망가려는 속셈이었다.
"뭐하니. 어서 들어가지 않고."
미심쩍은 눈으로 문을 열고 등을 떠미는 손길에 얼떨떨하게 방에 들어왔다. 그의 옆에 앉아있는 모습까지 본후에야 나가는 바람에 그녀는 꼼짝없이 그의 옆에 자리잡았다. 입을 앙물고 그를 노려보자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일뿐이었다. 한숨만 쉬며 손을 만지작 거리다가 입을 뗐다. 그는 아무말없이 술을 들이키며 여주만 보고 있었다.
"돌려보내주셔요."
그는 술잔을 입에 댄채로 낮게 웃었다.
"돌아가고 싶으냐."
"..."
그녀는 조용히 고개만 끄덕였다.
"네가 그리하고 싶다면 그리 해주어야지."
"..."
그녀는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려 눈을 맞췄다. 미심쩍은 마음을 눈을 봐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헌데 지금 헤어지긴 싫으니 어찌할까."
그 장난스러운 미소에 여주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그렇지. 호색한이 어디간다고.
"왜 그런 거짓말을 치신겁니까."
"거짓말이라니?"
한솔은 술잔을 홀짝이며 되물었다.
"왜 저더러 기녀라 하셨느냐, 그말입니다."
"호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피식 웃었다. '내가 기녀라 했단 말이지.' 하며 중얼거리는 말도 함께였다.
"허면 아니십니까."
"한 기억이 없는데."
"..."
"꽃이라 하였지 기녀라 한적은 없다."
생각해보니 처음말고는 저를 기녀라고 칭한적은 없었다. 자꾸 내 꽃이라했다. 언제 보았다고 그의 꽃이 된 모양인지.
"해어화."
그가 뜬금없이 던진 말이었다.
해어화라고 하면 틀림없이 기녀를 일컫는 말이었다. 시도 쓰고 말도 하고. 말이 통하는 꽃이라 해서 기녀를 그렇게 부르곤 했다.
"내 꽃은 말도하니 해어화가 맞지."
"..."
내 꽃.
"꽃내음이 난다. 너에게서."
나직하게 말한 그는 그녀의 옷고름을 잡아 끌었다. 몸이 한껏 가까워졌다. 그에게서 나는 옅은 술냄새가 그녀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왠지 모를 아득한 느낌에 그녀는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가 이름 붙여줄까."
"..."
"화향(花香)아."
화향아, 내 춘향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