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은 비 (Inst.) - 스윗소로우
비가 무섭도록 많이 오는 날이었다. 여름 방학식을 끝내고 주번이었던 탓에 마지막까지 남아 교실문을 잠그고 가장 늦게 나왔다. 물웅덩이를 피해 가며 운동화 젖을 새라 우산을 꼭 쥐며 운동장을 가로질러가고 있었다. 오랜만에 오는 비에 이리저리 시선을 굴리다 내 눈에 들어찬 건 우산이 없는지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는지 운동장 끝에 있는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에서 무릎을 끌어안고 웅크려 앉아있는 우리 반 남자아이였다. 괜한 정의감이었는지 동정심이었는지 그 남자아이에게 다가가 내 우산을 씌워줬다. 머리 위로 떨어지던 물방울 대신 그림자가 떨어지자 남자아이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고 남자아이와 나는 눈이 마주쳤다. 왼쪽 가슴께에 떨어질 듯 아슬하게 달려있는 명찰을 봤다. '정호석' 같은 반이라는 건 흐릿하게 기억이 났지만 이름은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나는 정호석에게 손을 내밀었고 정호석은 손을 물끄러미 보더니 내 손을 잡고 일어났다. 집에 데려다줘야 하는 건가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즈음 정호석은 뒤돌아 빗속으로 사라졌다.
빗물이 여기저기 스며들어 원래의 색보다 한 겹 더 진해진 풍경 속에서 정호석을 처음 만났다.
고3이라는 신분에 맞게 여름방학을 보충수업으로 불태우고 있었지만 방학 내내 정호석은 볼 수 없었다. 혹시나 전학 간 건가 출석부를 몰래 열어보기도 하고 친구들에게 물어보기도 했지만 모른다는 대답뿐이었다. 그 때 맞은 비 때문에 심한 감기에 걸린 걸까. 축축한 풍경 속으로 등을 보이며 뛰어갔던 정호석이 왠지 모르게 신경 쓰였다.
장마가 한번, 태풍이 한번 풍경을 쓸어간 후에 개학을 했고, 그제야 정호석은 얼굴을 보였다. 나는 내가 일찍 등교하는 편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정호석은 개학 첫날도, 다음날도, 그렇게 며칠을 나보다 먼저 교실에 와 구석 자리에서 창밖을 보고 있었다. 학기 초부터 항상 일찍 오는 남자아이의 형체가 어렴풋이 기억 날것도 같았다. 그 애가 정호석인가. 어느 날은 정호석과 나만 이른 등교를 했는지 둘만 있었던 적도 있었다. 자꾸 신경이 쓰여서 말을 걸어볼까 했지만 그럴 용기까진 내지 못했고, 꽤 먼 정호석과 내 자리 사이에 있는 책상들만 노려보다 힐끔힐끔 눈동자만 들어 정호석을 훔쳐봤다.
정호석과는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시간은 흘렀고 입는 옷은 한 겹 두 겹 많아져갔다. 계절은 흘러서 겨울의 문을 두드렸고, 시끄러웠던 수능의 열기는 찬바람에 식어갔다.
학교는 수능이 끝남에 따라 할 일이 없어진 고3들을 일찍 집으로 돌려보냈고 겨울임에도 그리 춥지 않은 탓인지 눈대신 보슬보슬 비가 왔다. 우산을 잡은 손등을 툭툭 때리는 빗물에 학교를 빠져나오기 전 운동장을 한번 훑어봤다. 왠지 은행나무 밑에 여름 교복을 입은 정호석과 내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아른거리는 여름의 모습은 이내 지워졌고겨울의 정호석이 나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이것도 내가 그려낸 그림인가 눈을 꼭 감았다 뜨니 더 가까이 서있는 정호석이다.
"저.. 탄소야"
내 이름을 부르는 정호석에 놀란 눈을 했지만 그때 내 명찰을 봤던 거겠지 싶어 표정을 풀고 정호석과 눈을 맞췄다.
"우산... 같이 쓰면 안 돼?"
"어...교실에 남는 우산 있던데 그거 찾아줄까?"
나는 그저 교실을 나오면서 굴러다니던 우산이 생각이 나서 한 말이었는데 눈에 띄게 시무룩해지는 정호석의 얼굴을 보자 아, 뭔가 실수를 했구나 싶었다.
"아 아니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러니까..."
당황해서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어떤 말로 해명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너랑 같이 쓰고 싶다고"
라고 말하며 예쁘게 웃는 정호석을 보곤 머릿속이 하얘지는게 정호석으로 꽉차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나 버스타고 집가는데.."
"괜찮아 그럼 너가 타는 버스정류장까지만 같이 가 줘"
그렇게 별로 멀지 않은 정류장까지 정호석과 함께 걸어갔다. 정류장에 도착했는데도 가지 않고 내가 버스를 타기까지 기다려준다는 말에 그냥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평소에 잘 타고 가던 버스 두 대를 보냈다. 많은 말을 주고받진 않았지만 그냥 같은 우산을 쓰고 서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졌다. 조금 뒤 버스가 왔고 이거마저 보내면 너무 늦겠다 싶어서 버스 왔다고 정호석에게 말했더니 주머니를 뒤적거리며 휴대폰을 나에게 내밀었다.
"우리 같은 반인데 아직 번호도 모른다?"
참 태연하게 말하는 모습에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정호석의 휴대폰에 내 번호를 저장해서 나에게로 문자를 보냈고 다시 돌려주며 잘 가라는 인사를 했다. 그러게, 7월의 빗속에 마주친 우리는 왜 12월의 끝자락이 되도록 말 한번 해보지 못하고 이제야 서로의 이름을 전화번호부에 남기게 됐을까. 출발하는 버스 창밖으로 정호석을 쳐다봤고 정호석도 비를 맞으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떠나는 버스 안의 나를 쳐다봤다.
그 뒤로 우리는 교실에서도 가끔 말을 섞었고 버스정류장까지 말없이 같이 걸어 나왔고 서로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겨울방학을 맞이하고 정호석은 연락이 없었다. 먼저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할 자신은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기다렸고 작은 진동에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던 일을 멈추고 확인해보기도 했다. 비 오는 날이면 정호석이 생각나 주변을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비가 눈이 되어 풍경이 하얗게 덮일 때에도 내 앞에 나타나서 우산 속으로 걸어들어오진 않을까 은행나무 밑에 웅크려 있진 않을까 정호석을 닮은 사람만 봐도 움찔거렸다.
개학을 하고도 정호석은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걸까 지금 네가 있는 곳은 비가 오고 있을까, 우산은 잘 쓰고 있을까. 이젠 비가 오지 않는 날도 정호석이 생각났다. 이럴 줄 알았으면 말이라도 더 해볼걸. 언제 다시 얼굴을 보여줄까 정호석을 기다리는 날이 많아졌다. 시간은 나를 놀리는 듯이 더 빨리 흘렀고 졸업식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우산을 들고나가면 정호석이 올 것만 같아서, 졸업식엔 꼭 정호석을 보고 싶어서 맑은 날임에도 불구하고 연두색 우산을 들고 나왔다. 교실 문을 열기 전에 손까지 모으고 기도를 했다. 문을 열면 항상 나보다 일찍 오던 정호석이 나에게 손을 흔들어 주길, 나를 보고 웃어주길. 문을 열려고 손을 댄 순간 저절로 문이 열렸고 내 눈앞에 나타난 건 깔끔한 교복을 단정히도 입고 있는 정호석이었다. 우산이 부적이라도 됐던 건지 갑자기 사라졌다가 갑자기 나타난 정호석을 보자 눈물부터 차올랐다. 눈앞이 점점 흐릿해졌고 눈물을 보이는 나를 보고 당황한 건지 정호석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무슨 용기였는지 나는 그 자리에서 정호석을 끌어안았고 펑펑 울었다. 비가 아닌 눈물로 정호석의 어깨가 젖어들어갔다.
"왜 이제 왔어, 왜"
엉엉 울며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나를 어깨에서 떼어내며 눈을 맞췄다
"나중에, 나중에 말해줄게 졸업식 끝나면"
참 다정하게 들리는 말에 그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졸업식이 끝나길 기다렸고 아까 눈물을 쏙 빼서 그런지 선생님의 말씀도, 재학생의 연설에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담임 선생님과 마지막 인사를 나누면서도 멀리 앉아있는 정호석을 쳐다봤다.
졸업식이 끝나고 같이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왔다. 정호석은 내 버스를 기다려주었고, 나는 또 다시 버스를 두 대째 보내고있었다.
"끝나면.....말해준다며"
정호석은 무언가 말하기를 조심스러워했고 나는 그런 정호석을 기다려줬다.
"나... 멀리 이사가"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 놀란 표정조차 지을 수 없었다.
"어짜피 졸업이라 다시 볼 순 없겠지만 우연히 마주치는 것도 못할 수도 있겠다"
"......"
"그리고 처음 나한테 우산씌워준 그 날"
얼핏 본 정호석의 눈에는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부끄러워서 뛰어 간 거였어"
천천히 차오르던 눈물은 떨어졌고, 떨어진 눈물이 나에게 옮겨붙은 건지 내 눈에도 눈물이 달려있었다.
"좋아했어, 탄소야"
눈이 크게 떠졌고, 달려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굴러 떨어졌다.
"졸업 축하해 김탄소"
"......"
"버스온다. 잘 지내 김탄소"
이제는 못 부를 이름을 말 끝마다 붙여주며 볼에 눈물 자국을 그은 채로 내게 웃어줬다. 정호석이 웃으니까 나도 웃었다. 그 애가 나를 좋아했었다는 그 말이 너무 예뻐서 나도 그랬던 것 같다고, 생각해보니 나도 널 좋아했었던 것 같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호석아"
그대로 버스를 올라타려다 그 세번째 버스를 그대로 보냈다.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서서 내 손에 들려있던 연두색 우산을 정호석에게 건넸다.
"정호석"
"......"
"비 맞고 다니지마"
나도 정호석도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너도 졸업 축하해"
"....고마워"
나도 정호석도 눈가에 눈물을 걸었다.
네 번째 버스는 도착했고, 나는 올라탔다. 우리는 그렇게 점점 멀어졌다. 창문을 열어 고개를 내밀고 정호석을 바라봤다
"호석아 고마웠어"
정호석은 그 말을 들은건지 내게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하늘에서는 빗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마주쳤던 그 날도 처음 말을 했던 그 날도 헤어지는 날도 빗물은 네 머리를 적셨다. 너는 끝내 내가 준 우산을 펼치지 못했고 우리의 첫사랑은 물이 스며든 그림이 되었다.
나는 너의 시선에 들어찬 짙어져가는 풍경 속으로 사라졌다.
***********
호석이 첫사랑 글은 BGM을 먼저 설정하고 쓰기 시작했어요
시작할 때와 끝날 때의 빗소리를 듣고 아 이거다 싶어서 쓴 글..
'서울은 비 - 스윗소로우' Inst버전이 아닌 원곡도 너무너무 좋으니까 꼭 들어봐요 그리고 가사도 호석이 글에 잘맞고.. ㅠㅠ
그리고 읽으면서 찾으셨나용
첫 만남에 떨어질듯 아슬하게 달려있던 이름표 → 헤어질 때 깔끔하고 단정한 교복
첫 만남에 풍경속으로 사라진건 호석이 → 헤어질 때 풍경속으로 사라진건 여주
여주의 감정변화는
처음 버스 정류장에서 헤어질 땐 2대를 보냈지만 마지막엔 3대를 보내고
우산을 씌우주는 것 이상으로 아예 우산을 선물하는 것으로 세심하게 표현하려고 애썼어요
그 외에도 비와 우산으로 유난히 디테일하게 쓰려고 했던 세번째 글이었어요
사담이 너무 길었ㄴ... 그럼 전 이만..
| 너무 고마운 암호닉♥ |
복숭아망개 / 뿌링클 / 만두 |
모든 시리즈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최신 글
위/아래글
공지사항

인스티즈앱 ![[방탄소년단/정호석] 첫사랑의 기억 : 우산 | 인스티즈](http://file2.instiz.net/data/cached_img/upload/2016/02/17/22/2bcec73691cbde97a0b0d44843865aa1.gif)
현재 sns에서 난리난 눈쌓인 포르쉐 낙서 박제..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