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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오전3시41분
소년은 어렸을 때부터 작았다. 키도, 손도, 발도 그리고 속도. 아, 속은 좁다고 해야 옳은 표현이겠다.
소년은 속이 좁았다.
또래보다 작은 덩치가 걱정되었던 부모님이 그를 부둥부둥 키웠던 탓인지, 혹은 그들이 사고로 떠난 그 날부터 할머니의 손에서 더 부둥부둥 자랐던 탓인지 소년은 속이 좁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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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어렸을 때부터 작았다. 키도, 손도, 발도. 그러나 그녀는 속이 좁진 않았다. 다만 좀 영악할 뿐.
소녀는 영악했다.
태어나자마자 부모에게 버림받고 저를 좋아하지 않는 할머니 아래에서 자란 탓인지, 혹은 어느 날부터 저의 집에서 고작 아들이란 이유로 그 할머니의 예쁨을 독차지하는 소년 탓인지 소녀는 영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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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의 영악함을 아는 건 소년 뿐 이었다.
오히려 주변 사람들은 소녀에게 그렇게 착하게 살면, 그렇게 양보만 하면, 그렇게 세상 물정 모르고 헤헤 웃기만 하면 너만 바보가 될 뿐이라며 충고했다.
소녀는 그 앞에서 또 헤헤,거렸고 소년은 그 옆에서 그저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바보는 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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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소녀의 영악함을 눈치 챈 건 열두 살 과학실에서였다.
소녀는 소년에게 조를 바꿔주길 요청했다. 어차피 제비뽑기였고 과학 선생은 실험 준비로 정신이 없었기에, 게다가 소녀의 조에 그날 점심시간에 같이 축구를 했던 친구가 있었기에 소년은 자신에게 아무 해가 되지 않음을 확인하고 요청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 날 소년은, 선생이 유독 주의를 주던 용액 한 방울을 자신의 손등에 떨어뜨리는 소녀를 보았다. 그리고 자지러지게 울어 젖히던 것도, 놀란 선생이 달려와 물로 씻기고는 옆에 있던 같은 실험조의 한 남학생에게 소녀와 보건실에 가는 걸 부탁하던 것도,
그 순간 소녀의 입 꼬리가 미세하게 움찔대던 것도 소년은 보았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 남학생과 소녀가 집 앞에서 입술을 맞대고 있던 것도.
아, 참고로 남학생은 그 당시 소녀의 가장 친한 친구가 소녀의 팔짱을 끼고 과학실에 가면서 자신이 요즘 짝사랑하고 있다고 밝힌, 귀에 속삭이던 대화의 주인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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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는 단 둘이 있을 때 소년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소년이 저의 집에 온 날, 유일하게 소녀가 마음을 놓고 있을 수 있던 그녀의 방을 빼앗겼던 그 날 이후 소녀는 소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아, 딱 한 번. 소녀와 장을 보고 오겠다며 나갔던 할머니가 차에 치이고 더 이상 돌아오지 못함을 알게 됐던 날 소녀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지민아 같이 자자."
".......왜."
"자꾸 할머니 눈빛이 생각나. 자꾸 살려 달래."
"네가 할머니 죽였어?"
"죽인 건 내가 아니라 운전자지. 근데 살지 못하게 한 건 내가 맞아."
"......."
"내가 팔 뻗어서 조금만 당겼어도 살았겠지. 그리고 돌아와서 그랬겠지. 하마터면 우리 하나뿐인 지민이 두고 갈 뻔했다며. 그래서 그냥 가만히 있었어."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가 뭔데."
"너는 절대로 나 신고 못 하거든. 넌 혼자 못 살아. 속이 좁아서 너 하나만 끔찍이 여기니까, 너 자신이 외로운 건 죽어도 싫거든."
그렇게 열여섯에서 열일곱으로 넘어가던 겨울. 성에 대해 이미 빠삭하게 알았던 그 때부터 둘은 한 침대를 썼다. 어떤 날은 손을 잡고, 어떤 날은 눈이 맞아 입술을 부비적거리다 잠들고, 어떤 날은 본능에 충실해 밤을 꼴딱 새기도 하면서. 하지만 단 한 번도 소년은 소녀를 안아주지 않았다. 단 한 번도 그의 눈에 소녀를 따뜻하게 담은 적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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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아홉 어느 날 겨울, 소녀는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소녀가 걱정되기 보단 집에 홀로 있기 싫었던 소년은 한참이나 동네를 헤매며 소녀를 찾았지만 그 날 소녀는 보이지 않았다. 그 다음날, 그 다음 다음 날에도. 소년은 잠을 잘 수 없었다. 소년은 무서웠다. 생각해보니 열아홉씩이나 먹고서 혼자 빈 집에서 자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소년은 소녀를 기다렸지만 소녀는 오지 않았다. 소년은 생각했다.
영악한 년, 일부러 그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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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혼자 자는 것에 익숙해질 즈음, 소녀가 돌아왔다. 웬 키 큰 남자와 함께.
"네가 지민이구나. 반가워 나는 김석진이야. 오늘부터 같이 살기로 했어. 잘 부탁해."
"성이름. 누구 맘대로."
"석진 오빠 제 방은 이쪽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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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심기가 불편했다. 사람 좋게 웃어 보이는 남자가 몹시 거슬렸다. 자신을 무시하는 소녀가 짜증났다.
그 중에서도 가장 신경질 났던 건, 소녀가 자신 말고 그 남자와 잔다는 것. 그리고 거의 매일 듣기 싫은 마찰음이 제 방까지 들린다는 것.
그래서 소년은, 남자를 죽였다. 알몸의 남자의 등에 칼을 꽂자 알몸의 소녀의 배에 피가 튀었다. 영악한 소녀는 그제 서야 소년을 바라보았다.
"속 좁은 건 여전하네. 제 것 뺏기니 바로 저지르는 꼴 좀 봐. 그래도 성공했다. 제 것이라 생각하는 것 보니."
소년은 소녀에게 옷을 입히고 밖으로 나왔다. 소년은 머리가 복잡했다. 방금 자신은 사람을 죽였고, 그 옆에 있던 소녀는 성공했다,라며 살풋 웃기까지 했다.
한참을 걷고 걷다가 깜깜한 공원에 도착하자 그제 서야 소년은 발걸음을 멈추고 소녀를 보았다. 소년의 걷는 속도가 빨랐는지 얼굴이 살짝 빨개진 채 숨을 내뱉던 소녀는 입 꼬리를 올려 보였다.
"지민아 나 보고 싶었지."
"넌 대체...... 나한테 원하는 게 뭐야."
"네가 망가질 대로 망가졌으면 좋겠어."
소녀는 제 손등을 내밀었다. 열두 살 때 생긴 흉터가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왜 그 고통 참으며 이런 짓까지 했을까?
내가 왜 그 죄책감 느껴가며 할머니를 보고만 있었을까?
내가 왜 역겨운 웃음 지어가며 더러운 새끼들 꼬리치고 다녔을까?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본적 있어?
난 이렇게나 봐달라고 난리를 치는데, 넌 뭐에 정신이 팔린 건지 어떤 년이랑 히히덕대는 건지 난 신경도 안 쓰잖아.
네 눈에는 내가 없잖아.
그니까, 난 네가 망가져서 아무도 널 보려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래도 난 너만 볼 거야. 그러니까,
사랑해 줘."
manipulate : (교묘하고 부정직하게 사람・사물을) 조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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