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BGM.비익련리
권력을 쥐고 있는 자와,
권력이 필요한 자.
아버지는 권력이 필요했다.
"못난 제 여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대감."
"이리 먼저 짝을 맺어주자고 말씀해주시니, 저야말로 감사 할 따름입니다."
그래서 권력을 쥐기위해선 뭐든 했다.
"안녕?"
"....."
"뭐하고 있어?"
"....."
"..어, 저기 혹시 말 못해?"
대여섯밖에 안된 딸에게 정혼자를 붙이는 일도,
"더 이상 그 아이를 만나지 말거라."
"예? 아버지, 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백현이와 저는 혼례를 올리기로 한,"
"그 일은,"
"....."
"없던일이다."
"..아버지."
"이제 곧 몰락할 집안과 혼인을 맺어서 뭐한단말이냐?"
"그게 무슨...."
이젠 별볼일 없어진 정혼자의 집안을 제 손으로 제거하는 일도,
"세자빈 간택에서, 네가 되도록 할 것이다."
"....."
"그리고 꼭 중전이 되어야한다. 그래서 네가 이 아비에게."
"....."
"힘을 다오."
아버지는 권력을 쥐기위해선 모든 일이든 했다.
"백현아."
"....응."
"..값이 될만한 것들은 모두 챙겨왔어, 이거면 너도 배 타고 어디든지 떠날수있고, 집도 구할 수 있을거야. 어 또.. 그리고.."
"...내가 정말 떠나길바래?"
"....."
"내가 정말로 떠나길,"
"..응. 떠나길 바래. 어차피 넌 이곳에서 살 수도 없어, 우리 아버지가 가만두지않을거야. 그러니까, 그러니까 백현아.."
"....."
"..최대한 멀리 떠나."
"....."
"날 용서하지말고 살아."
그리고 나는, 어쩔 수 없는 그런 아버지의 딸이였다.
달의 연인
01
"주상전하, 이 야밤에 어딜 또 가십니까!"
"....."
등불을 들고 경수의 뒷꽁무니를 졸졸 따라가는 걸음이 바빴다. 어디가냐는 말에도 그저 입을 꾹 다물고 걷는 듯 뛰고있던 경수가 천천히 걸음을 멈춘 건 그때였다. 아직 환하게 불이 켜져있는 중궁전을 바라보며 하얀 입김과 함께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전하, 이 야밤에 중궁전엔 어찌.."
"중전을, 보러왔다."
숨이 약간 차는 듯, 입김과 함께 뱉어진 말에 중궁전 궁녀들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중전마마께 고해드리겠습,"
"아니다. 중전에게 고하지말거라."
"..예?"
몰래 들어가서 놀래켜주어야지.
경수는 그렇게 생각하며 중궁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 경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신하들은 정말 못말리겠다는 듯 혀를 내둘렀다.
저리 중전마마께서 좋으실까...
지극히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던 그 아이는, 밤낮으로 울던 어린 세자빈에게 울지말라며 곶감을 쥐여주는 소년이 되었고, 선왕이 돌아가시고 그가 왕이 되었을때 중전이 된 세자빈의 손가락에 옥가락지를 끼워주는 그는 어른이 되어있었다.
"중전!"
물론, 중전의 앞에선 영락없는 소년에 불과하지만.
"전하. 어찌 또 오셨습니까."
"어둠을 헤치고 왔는데, 그리 야박한 말만 하실겁니까?"
"그야 밤길이 위험하니까.."
"위험해도 내 어찌 안올 수 있겠습니까."
턱을 괴고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에 고개를 돌리려고하자, 별안간 한쪽손에 깍지를 껴오는 경수 덕분에 다시 눈이 마주쳤다. '중전을 보려면 와야지.'하고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피식 웃음을 짓자, 경수가 앞에 있던 상을 밀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오늘도 중전은 별일없었지?"
"네, 없었습니다."
"밥도 잘 챙겨먹었고?"
"밥도 잘 챙겨먹었구요."
"어디 아픈데는?"
"없습니다."
"나는."
"..에?"
"..나는, 안보고 싶었어?"
경수가 모른체하며 물어왔다. 그러면서도 쑥쓰러운지 눈은 못 마주치고 내 손만 조물조물거리며 만지작거리는 모습에 웃음이 세어나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보고싶다는 말이 뭐 그리 어려운가. 해달라면 해줄수도 있겠지만, 두 귀를 빨갛게 물들이고 쑥스러워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조금 더 골려볼까, 하고 경수가 만지고 있던 손을 빼서 등 뒤로 숨겼다.
"안보고싶었습니다."
"...어?"
"안보고싶었습니다."
"....."
눈썹끝을 아래로 뚝 떨어뜨린 경수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정말이더냐?"
"예, 정말로요."
"마지막으로 묻는 것이다. 정말로.. 안보고 싶었느냐?"
"..예. 안보고싶,"
그것은 순간이였다.
별안간 내 허리를 휘어잡고 바닥에 눕힌 경수가 위에서 나를 빤히 내려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깜짝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 천천히 다가온다. 천천히. 결국, 눈을 어디다둬야할지를 몰라서 무작정 두 눈을 질끈 감고 이불을 쥐여잡았다. '마지막으로 묻는 것이라고 했지,'라며 귀에서 낮게 울린다. 그리고 다시 한번 더,
"또 한번 그런 거짓말로 나를 놀리려고 해보거라,"
"....."
"그땐 혼쭐을 내줄터이니."
경수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리고 이마에 콩,하고 부딪히는 느낌에 두 눈을 떠보면 경수가 내 등에 손을 받치고 나를 일으켜주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나저나 내가 무얼할 줄 알고 눈을 감았어, 중전?"
"...아,아니 그.."
"응? 내가 무얼할 줄 알고?"
"..지금 놀리시는겁니까?"
"너도 나 놀렸잖아."
아니 그건...
아무말도 못하고 입을 꾹 다물고 있자, 나를 아기처럼 자신의 품안에 넣고 끌어안고 있던 경수가 또 푸흐흐,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미간을 좁히며 왜 웃냐는 듯이 고개를 들고 쳐다보자 별안간 이마에 쪽,하고 입을 맞추는 덕분에 얼굴에 화끈화끈 열이 올랐다.
"어서 합방날짜가 잡혔으면 좋겠다.."
"....."
경수가 내 어깨에 턱을 얹고 두 눈을 지그시 감고있다가, 밖에서 누가 오는 듯한 발자국 소리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나를 잡고있던 손을 조금 더 힘주어잡았다.
"또 가야 할 시간이 왔나보구나."
"..밤이 많이 깊었습니다, 돌아가셔야죠."
"..넌 내 마음을 몰라도 한참을 몰라."
어쩜 그래? 라고 밉다고 말은 하면서도, 그래도 좋다고,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눈빛은 속일 수가 없었다.
"..전하, 이제 침소로 돌아가셔야 할 시간이옵니다."
"알았다. 잠시 기다리거라."
잔뜩 아쉽다는 표정을 한 경수가 귀 옆으로 살짝 삐져나온 머리를 넘겨주며, 나를 저의 품에 꼭 끌어안았다. '가기싫어..'라고 중얼거리면서.
"내일은 제가 가겠습니다."
"뭐? 안된다, 밤길이 얼마나 위험한데."
"전하도 매일 오시지않습니까."
"안돼. 내일도 내가 올것이야."
그러니 넌 그때까지 아프지말고, 밥도 잘 챙겨먹고, 별 탈 없이만 있거라.하고 내 볼을 살짝 꼬집은 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발걸음이 떨어지지않는지, 한참을 머뭇거리던 경수가 밖에서 한번 더 들려오는 목소리에 한숨을 푹 내쉬며 뒤돌아섰다. 피식 웃으며 그의 뒤를 쫓아나가니, 그런 나를 힐끗 돌아본 경수가 일부러 걸음을 늦추며 나와 걸음을 나란히했다.
손이 스친다.
"....."
"....."
허공에 서로의 손이 스친다.
잡을까, 말까. 서로의 눈치만 보며 주먹을 쥐었다폈다를 반복하다보니 벌써 중궁전밖까지 나와버렸다. '..조심해서 가세요.'하고 고개를 살짝 숙인 내 모습에, 저도 고개를 살짝 숙인 경수가 돌아서서 걸어간다. 그리고 몇발자국 못가, 다시 뒤돌아본다.
'안.녕.'
입모양으로 한 말을 용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픽 웃자, 그제서야 경수도 활짝 웃어보이며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나도,
안녕.
-
언제나 그렇듯, 궐에서의 하루는 훨씬 더 느리게간다.
오랜만에 서랍을 열어, 세자빈시절 경수가 심심할 때 보라며 직접 엮어준 책을 꺼내들었다. 며칠 안꺼내봤다고 벌써 뽀얗게 먼지가 낀 책을 손으로 쓸며 툭툭 털었다.
그 시절, 나는 참 많이도 울었다.
밥을 먹다가도, 옷을 입다가도, 잠이 들다가도. 픽하면 눈물이 나서 엉엉 울었다. 그게 아직도 날 무겁게 짓누르던 아버지 때문인지, 집 떠나 온 궐이 낯설어서인지, 아니면.
"....."
백현이때문이였는지, 나는 아직도 모른다.
찌르르해져오는 가슴께를 문지르며 인상을 찌푸렸다가, 별안간 문을 열고 들어오는 궁녀로 인해 얼른 손을 내렸다. '중전마마, 영의정대감께서 드십니다.' 그 말에 책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인 뒤, 아버지와 나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차를 내온 궁녀가 국화를 띄운 잔에 천천히 물을 채웠다.
"중전마마. 궐에서의 생활은 할만하십니까."
"....."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자, 그런 나를 보곤 픽 한번 웃어버린 아버지가 찻잔을 손목으로 빙글 돌렸다.
"표정을 보니, 아닌가봅니다. 중전마마."
"....."
"헌데, 마음에 들지않아도 별 수 없지요."
"....."
"애초에 마마의 마음에 들라고 올린 자리도 아니였고,"
"....."
"제 마음에 들려고 올린자리니."
"....."
"제 성에 차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나와 눈이 마주친 아버지의 눈빛은,
"....."
"안색이 좋지않으십니다, 중전마마."
아직도 피에 목이 마른 하이에나처럼 서늘하다.
-
일찍 저녁식사를 하고, 궁녀들의 도움을 받아 목욕을 한 뒤, 새옷으로 갈아입고 자리에 앉았다. 분칠을 해주는 손에 지그시 눈을 감고 있으면, '정말 오늘은 마마님이 강녕전에 드실 생각이시옵니까?'하고 물어오는 궁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늘 전하께서 찾아오시는게 미안해서.."
"하오나 전하께서 마마님이 밤늦게 돌아다니지않게 하라고 저희에게도 얼마나 신신당부를 하시는데요, 그리고 오늘은 정말 다른 날보다 더 어둡기도 하고.. 스산한게,"
"괜찮다, 혹여 무서워서 그런것이라면 나혼자라도,"
"마마님! 정말 큰일날 소리 하십니다!"
나비모양의 머리장식을 달아 준 궁녀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펄쩍 뛰었다.
그 모습에 푸흐흐, 웃음을 터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몇몇의 궁녀들을 데리고 나갈채비를 하는데, 괜히 그 말을 들어서인지 오늘따라 서늘한 밤공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중전마마, 가시지요."
"..아,"
고개를 다시 내리고는 등불을 들고 있는 궁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내가 가면 경수도 깜짝놀라겠지, 가뜩이나 큰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날 쳐다보며 못말리겠다는 표정을 짓는 경수를 상상하니 걸음이 좀 더 빨라졌다. 그런데 별안간 푸드득, 하고 날갯짓을 하며 날아가는 새 덕분에 옆에서 등불을 들고있던 궁녀 하나가 깜짝놀라 그만 초를 떨어뜨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중전마마.."
"어차피 거의 다 왔는걸요. 그리고 등불이 하나 더 남았으니까 괜찮습니다."
두개였던 등불이 하나로 줄어드니, 확실히 시야가 더 어두워지긴 했다.
하지만 별 티는 내지않고 조금 더 빠른 걸음으로 움직이니 금새 강녕전 앞에 도착했고, 강녕전 앞에 서 있던 내관들이 '중전마마'하고 고개를 숙였다.
"중전마마, 이 야밤엔 어찌.."
"아, 주상전하를 뵈러왔습니다. 안에 계시지요?"
"예, 중전마마. 지금 주상전하께 고해드리겠,"
"아니요! 전하껜 고하지말아주세요."
깜짝 놀래드릴 겁니다.
내 말에 상선이 푸스스, 웃음을 지으며 예.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데 그때였다.
쉬잇, 하고 내 옆으로 날카롭게 스쳐가는 바람소리에 움찔하는데, 별안간 내관들과 궁녀들이 '중전마마!!'하고 소리치는 바람에 깜짝놀라 뒤를 돌아봤다.
"...예?"
"어서 중전마마를 보필하여라!!"
"....."
갑자기 칼을 꺼내들고 내 주위를 빙그르르 둘러싼 무사들로 인해 주위가 어수선해졌다. 소리를 듣고 뛰어나온 듯한 경수도 날 보고 두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어느새 내 옆에 있는 무언가를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그제서야 나도 경수의 시선을 따라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얼마못가 숨을 크게 들이키며 멈췄다.
"....."
하얀쪽지에 꽂혀있던 화살을 뽑아든 경수가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곤 부들부들 떨며 화살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리곤 중전의 팔목을 잡아 거칠게 이끌며 내관들에게 소리쳤다.
"오늘밤 중전은 나와 함께 있을것이다."
"..하오나 전하, 그것은 합방일이 잡혀있을때에만 가능,"
"어명이다!"
"......"
"감히 어길셈이더냐?"
"..아니옵니다, 전하."
내 팔목을 잡은 경수의 손에 힘이 조금 더 실어졌다.
아프다. 그 말은 하지못하고 입술을 꾹 깨물고 경수를 쳐다봤지만, 평소 같았으면 다정하게 미안하다,하고 웃어줄 경수가 오히려 더 비틀어잡으며 거칠게 나를 끌고 안으로 들어왔다.
"....."
"왜 내 말을 안들어?"
"...전하,"
"왜 내 말을 안듣냐고!!"
너 이러다가 다치면 어떡할 뻔 했어? 어?
정말 화가 난 듯, 내 양 어깨를 잡고 평소 목소리보다 열배는 더 크게 소리치는 경수 덕분에 몸을 잘게 떨었다. 울듯말듯 자꾸만 움찔거리는 입꼬리에 그제서야 목소리를 조금 더 낮춘 경수가 하아, 하고 숨을 내뱉으며 한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내가 밤길이 위험하다고 오지말라고 했잖아."
"...늘 네가 날 찾아왔으니까, 나도 찾아가주고 싶어서.."
"....."
"..그래서,"
그런건데..
한쪽뺨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리는 눈물방울에 입술을 꾹 깨물자, 경수가 입가에 손가락을 갖다대며 '..미안.'하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감정이 더 북받쳐서 엉엉 울어버리자, 그제서야 나를 저의 품에 따뜻하게 안은 경수가 '뚝, 뚝.'이라며 잘게 등을 토닥거렸다.
"..미안해."
"....."
"..네 말도 안들어주고, 무작정 화만내서."
"....."
"..그치만,"
걱정되서 그랬어.
네가 다칠까봐 무서워서 그랬어.
하나밖에 없는 네가,
"..나도 미안해,"
"....."
"..경수야.."
내 곁을 떠날까봐 무서워서 그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