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얼넘버. 01
자?
묻는 음성에 졸렸던 기운도 싹 달아났다.나는 그의 푹 가라앉은 목소리에 한 번,두 번 쉼호흡했다.
"깼어."
-잠깐 나올 수 있어?
"아니,지금 시간..몇 신줄이나 아니?"
-..그래.
씁쓸한 공기가 이불 안으로 스며들어왔다.그는 별 말않고 미련없이 전화를 끊었다.나는 눈을 두어번 깜빡였다.처음이 아니었다.눈이 퀭해지고,다크써클이 턱까지
내려왔다.이렇게 불쑥 전화가 올때면 나는 심란하다-라는 말밖엔 더 할 말이 없었다.그의 목소리가 머리속을 빙빙 돌았다.자?깼어.나올수있어?아니.나는 꼭 데이
트하기를 튕기는 여자가 된 기분이었다.문득 휴대폰을 들고는 갤러리를 뒤졌다.거의,1년이 다 되어갔다.차마 추억이란 이름 아래 지울 수 없었던 그 사진들을,오
랫동안 지긋이도 바라보았다.
오늘에서야 나는 사진들을 다 지워버리겠다고 다짐했다.힘주어 사진 한 장,한 장을 꾹꾹 눌러댔다.그의 웃음기 가득한 얼굴을 보면서,나를 뒤에서 부드럽게 안아
줬던 그를 보면서,사진속으로 오래도록 보면서도 나는 웃음 한 점 흘릴 수 없었다.그것마저 불가능한 것이라는 생각이 당연하게 들만큼,우리는 너무 많이 멀어
져있었고 다른 길을 걷고 있었다.
"....."
손이 멈췄다.넘기고 넘기던 사진들 속 살색 물체에 일순간 굳었다.눌러 들어가본 사진에 살색 물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였다.당황함을 금치 못하고 사진날짜를
확인해보았더니,그래….우리가 헤어지기 얼마 전 사진이었다.손끝이 떨려왔지만 주먹을 꽉 쥐었다.소름이,점점 온 몸을 뒤덮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잠자는 숲속의 백현이.
사진의 제목이었다.
*
"요즘 어때?"
"음...그럭저럭."
"종인이는 아닐텐데."
"또 왜 그래?"
날이 서 종대를 노려보았다.장난끼 가득한 웃음에 한숨이 푹 나왔다.빙수 안 딸기를 조각조각냈다.아무리 친구라지만,단순한 이성간의 만남도 아니고 동성간의
연애를,그것도 자신의 친구와 사귀는 나에게 묻는 그 질문들이란 종대는 아닌 것 같았지만 난 참 불편했다.
"오늘 뭐해?나 존나 심심한데."
"약속 있어."
"종인이랑?"
"응."
"몇시?"
"열한시."
"너넨 왜 항상 밤에 만나?'
"나야 항상 같지,종인이가 밤에 만나는 게 좋은가봐."
"시간도 없는 애,밤에서라도 만나겠다고 약속 잡는거 보면 참 대단해.그치?"
"..."
그럴거면 왜 밤에 만나냐고 물어보니.입가가 근질거렸지만 말을 줄였다.김종대는 종인의 친구임과 더불어 찬열의 친구이기도 했다.나와 김준면과 김종대는 고등
학교 단짝친구였는데,그들의 중학교단짝은 박찬열이었고 의도치않게 그만 다른 고등학교로 떨어진 후 나와 종대,준면 이렇게 셋이서 친해진 것이다.어찌저찌해
서 그를 소개받고 처음 눈을 마주쳤을 때,그때를 난 아직도 기억한다.뚫어져라 날 보는 그의 눈과 내 눈이 시선으로 맞닿았을 때 나는 그 순간 심장이 덜컥했다
는 것을.그랬다,억울하게도 난 박찬열이 첫사랑이었다.
"잘해줘,너밖에 모르는 새끼잖아."
박찬열과 김종인.그 중심엔 김종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실로 민망하지 않을래야 않을수가 없는 상황이었다.종대의 단짝인 찬열과 사귀고,또 들킨 것
도 모자라 그와 헤어진 후 난 몰랐지만 날 좋아했던 김종인과 그런 사이가 되었다니,불편하지 않은 게 더 이상한 것이 아닌가.내가 종대라면 아마 기가 차고 어
이가 없어서 제대로 말도 못했을 것이다.쭈뼛대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어보였다.
김종인은 나를 정말 좋아했다.친구라고 말하긴 뭐하지만 언제부턴가 항상 쉬는 시간,점심시간마다 종대를 따라 얼굴을 매일 비추던 그의 눈동자속에 혹시,설마
내가 담겨져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이리저리 뒤엉킨 머릿속에 구세주처럼 떠오르는 얼굴,그것은 바로 김종인이었다.오직 나를 맹목적으로 사랑해준 그
에게 기댈 수 밖에 없었고 어느 연인 못지않게 행복하게 지냈다.그의 얼굴이 둥둥 떠다녔다.보고 싶다.약속시간이 기다려졌다.
"박찬열은 요즘 어떻게 지내는 줄 알아?"
"..왜 물어?"
"그냥."
"몰라.알고 싶지도 않고."
"아,왜 그래.표정 풀어라 좀."
"나 너한테 이런 이야기하는 거,되게 불편하거든?"
"괜찮아.박찬열이 나쁜 새끼지,니가 왜 애써 불편해해?"
"그냥,불편한 걸 어떻게 해."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종인은 몰랐다,내가 전에 사귀었던 사람도 남자였다는 것을.게다가 종대의 단짝친구라는 것을.종대와 종인은 절친이었고 종대는 찬열과도
절친이었지만 종인과 찬열이 절친이라기엔 얼굴만 자주 본 사이고 무엇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친구도 아니었다.종인과 사귀게 되었을 때,나는 몰랐지만 그는
평소 종대에게 자주 내 이야기를 꺼냈고 눈치 빠른 종대는 그런 종인의 마음을 알아차렸다.그래서 나와 사귄 후 바로 종대에게 그 사실이 전해지는 바람에 난
당황에 당황을 금치 못했다.종인과 종대,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 모였을 때 나는 그렇게도 김종대의 눈치가 보였다.그렇지만 종대는 눈감아주었다.그래서 종인에
게 말 못할 죄책감이,오히려 더 커진 기분에 셋이 모여있을 때면 난 어딘가 모르게 답답한 마음이었다.찬열과 헤어진 뒤,종인과 사귄 것은 채 3개월이 지나지 않
았었다.
괜한 말을 꺼낸 종대때문에,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내 옆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이 채워져있고 찬열과는 멀어졌지만 길었던 그와의 연애에 난 아직도 가끔 추
억을 회상하며 늪에 빠진 것처럼 허덕였다.나는 자주 그랬다.돌아가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기억속 추억이 풍겨오는 그 특유의 분위기와 느낌에 잔뜩 도취되어 추
억속을 헤맸다.어느 것이든…마찬가지였다.추억은 어느샌가 기억속에 묻히고 묻혀 덧칠할대로 덧칠되어 미화된 채 날 괴롭혔다.
나는 휴대폰을 들어 자판을 두드렸다.
'보고 싶어,종인아.'
전송.
그러고도 불안함과 답답함을 어찌할 수 없었다.눈을 깜빡깜빡,입술은 잘근잘근 뜯는다.기어코 들어간 전화기록부에 찬열의 이름을 찾았다.누를까 말까.누를까.말
까?결국 난 찬열의 이름을 눌렀다.시간을 지체할 수록 더 힘든 것은 나였다.안다,알고 있었지만 애써 무시했다.하지만 더 이상은 안될 것 같았다.과감하게 삭제
버튼을 누르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한숨이 나왔다.바보같은 변백현.바보병신새끼.머릿속을 옭아매는 찬열에 대한 생각에 정말 진저리가 났다.사랑도 뭣도 아닌
추억이 날 붙잡는게 너무나 한심했다.정말 진심으로 생각했다.그 사진들처럼,전화기록부속 네 번호처럼.. 너에 대한 기억과 추억마저도 모조리 지워졌으면 좋겠
다고.
-
1화다보니까 되게 답답하게 끝나버렸네용ㅋㅋㅋㅋㅋㅋ찬열이는 몇마디하지도 않고;
과연 무슨 일이 잇엇던 걸까요~.~열심히 썼더니 지침..에구
아직 시리즈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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