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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일기

W.타페

 

: 영하의 혹한 속에서 젊음의 행복을 누리다.

 

 

 

허나 짜증이 나면 뭘 하는가. 그나 나나 힘없는 1학년인데. 마침 전정국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건지 표정을 풀면서 깊은 한숨을 내쉰다. 마냥 멀쩡한 줄 알았는데 무리가 가긴 했나보다. 컵에 찬물을 잔뜩 따라놓고 한 번에 삼켜버리는 모습이 안쓰럽기까지 했다. 아, 취했다. 저 얼음장 같은 전정국에게 동정을 하다니, 취해도 엄청 취했다. 쉼 없이 재잘대던 지민선배가 사라지니 우리 둘만 남은 테이블은 정적으로 가득 찼다. 바로 옆으로 붙어있는 다른 테이블들은 아직 한창이다. 테이블마다 놓인 술병들이 각각 3병도 넘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하다. 지민선배 자리의 방석 옆으로 가지런히 세워진 빈 술병들을 보자 어쩐지 슬퍼졌다.


“…집에 가고 싶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전정국은 내 움직임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걸 보아하니 내게 집중하고 있었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 작은 중얼거림조차 놓치지 않았다. ‘갈래?’ 아무렇지도 않게 말을 받는 것에 오히려 내가 당황했다. 선배들 중 아무도 자리를 뜨지 않았는데 먼저 일어나라고? 그럴 수는 없었다. 나는 내 4년간의 캠퍼스라이프에 시작부터 금을 긋기는 싫었으니깐 말이다. 그렇게 말하는 전정국의 눈은 한 치의 거짓도 담고 있지 않다. 도대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궁금할 지경이다. 얼마나 그렇게 멍하니 눈을 맞추고 있었을까, 시끄러운 가게 안으로 석진선배의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그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동하자, 얘들아! 요 앞 풍류로 가면 돼.”


2차다. 도저히… 더는 못 마시겠는데. 선배고 동기고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는데도 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앉아있는 상태에서도 땅이 빙글빙글 돈다. 내 몸이 좌우로 약간씩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술기운은 서서히 올라와 어느새 날 잠식해버렸다. 전정국은 내가 일어나지도 못하고 흔들거리니 자기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린다. 뭔가 고민하는 것 같다. 이내 제 입술을 잘근 깨물고서 내 양 어깨를 짚었다. 빙글, 강한 힘에 의해서 난 방석에 앉은 상태 그대로 옆으로 돌아가 전정국을 마주보게 되었다. 덕분에 흐릿한 초점임에도 전정국의 얼굴 하나는 똑바로 보인다. 안 그래도 무뚝뚝한 얼굴이 굳어 있다. 톡 건들면 쩌적 금이 갈 것만 같다. 실없는 생각을 하며 실실 웃자 그의 표정이 더 심난해졌다. 전정국은 여전히 내 어깨를 잡은 채였다.


“눈 똑바로 뜨고, 나 봐봐.”
“우응…….”
“진짜 괜찮겠어?”


이렇게 챙겨 주는 것은 기대도 안 했는데. 전정국, 생각보다 다정한 놈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지만 전정국의 굳은 표정은 풀릴 줄을 몰랐다. 어느덧 거의 모든 인원이 밖으로 빠지고 가게 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조용해졌다. 총무국장이 실습 관계로 불참했기 때문에 계산은 정책국장인 석진선배의 몫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뒤에서 영수증을 달라고 하는 선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정국은 재차 ‘괜찮냐’고 묻는 걸 반복하다가 내가 고집을 부리는 것에 지친 듯 내 어깨를 놓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를 따라 시선을 옮기는데 그가 석진선배에게로 향한다. 아직 신발을 신지 않고 장판 위에서 ‘저, 선배님.’하고 공손하게 부르니 선배가 뒤를 돌았다. 전정국에게 가려서 선배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정국이. 뭐 문제 있어?”
“네. 쟤 완전 갔는데요.”


전정국이 몸을 약간 옆으로 피하며 엄지손가락으로 뒤를 가리켰고, 그제야 선배의 얼굴이 보였다. 선배도 나를 보고 있었다. 앞뒤양옆으로 정신없이 흔들거리는 모습에 선배가 쯧 혀를 찼다.


“하여튼 박지민… 근데 넌 멀쩡하다?”


그 말에 전정국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기 턱을 쓰다듬으면서 잠시 생각하던 선배는 ‘탄소가 자취였던가?’하고 전정국에게 물었다. 그걸 걔한테 물으셔도 걘 모를 건데요, 선배님. 말을 하고 싶었지만 취기가 턱 끝까지 올라와 말 할 정신도 없다. ‘네.’ 전정국의 대답이 떨어졌다. 네? 네라고 했니, 지금? 자기와 관련 있는 일이 아니면 단 1도 관심이 없던 전정국의 입에서 내 거주지가 확정나자 혼이 쏙 빠졌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따져 묻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내 몸은 이미 나의 것이 아니다. 전정국과 선배가 그 뒤로도 몇 마디를 주고받았는데 이미 혼란에 빠진 내가 그것까지 듣는 건 무리였다.

점차 생각이란 게 사라진다. 금방이라도 눈이 감길 것 같아서 얼굴을 손으로 한 번 쓸었다. 2차… 가야 되는데. 잔뜩 늘어진 내 몸을 누군가가 일으킨다. 내 팔 한 쪽을 자기 어깨에 걸쳐 잡은 뒤 허리도 붙잡아 억지로 걸음을 옮기게 만든다. 감기는 눈을 힘겹게 뜨고 바라본 그 사람은, 전정국이다. ‘어디 가는,’ 나는 다급하게 말하려다 혀가 꼬부라지듯 나오는 말투에 당황해 잠깐 말을 멈췄다. 무심히 쳐다보는 전정국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또박또박 한 글자씩 말을 뱉었다.


“어디 가는 거야?”
“…네 자취방.”


무뚝뚝하게 대답하고 제 갈 길을 계속 간다. 지금, 내 방이 어딘지는 알고 가는 거야? 전정국은 내 발걸음에 맞추지도 않았다. 무작정 질질 끌듯이 걸어가는 탓에 나는 더 묻지도 못하고 그저 넘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어깨와 허리를 끌어당기는 힘이 생각보다 훨씬 세서 이젠 아플 지경이다. 금세 가게는 멀어지고 듬성듬성 가로등만 길을 비추는 어두운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야…좀…천천히…’ 세상이 빙글 돌아가는데 걸음까지 빠르니 금방이라도 위액이 역류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다. 우욱, 하고 무슨 입덧하는 새댁마냥 전정국에게 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자 그제야 그는 속도를 늦췄다. 헛구역질로 그친 게 그나마 다행이다. 3월 말인데도 날씨는 아직 꽤 쌀쌀했다. 좀 살만 해지자 드러난 피부에 찬바람이 닿는 게 고스란히 느껴진다. 잘게 몸을 떠니 전정국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1년간 쉴 한숨을 오늘 다 쉰다, 쟤는.

내 자취방은 원룸촌에 있었다. 그것까지 어떻게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전정국은 자연스럽게 원룸촌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끌려오던 중 전정국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여기서, 어디로.’ 이번에도 어투는 몹시 무뚝뚝했다. ‘오른쪽…아미빌.’ 가만히 대답해주니 대답도 않고 저 멀리 보이는 아미빌 간판이 달린 건물로 걸어간다. 1차에서 빠지는 거라 시간은 채 10시도 되지 않았다. 간혹 사람들이 보이는 걸 보니 1차에서 빠진 게 실감이 났다. 이렇게 빨리 죽을 줄은 예상도 못 했는데…. 젠장, 박지민 그 선배 때문에 다른 선배들한테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다. 소문이 어떻게 돌지 벌써부터 걱정이 됐다. 찬바람을 맞아서 그런가 정신은 어느새 조금 말짱해졌다. 아미빌 건물로 들어섰고, 복도에 불이 켜졌다. 방금 전부터는 다리에 힘이 빠져버려서, 매달리다시피 전정국에게 의지해있음에도 전정국은 힘든 기색 하나 없다.


“몇 호.”
“106호.”


역시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 방은 복도 맨 안쪽이었기 때문에 또 한동안 그에게 매달려야 했다. 전정국이 방 호수를 확인하고서 어깨에 올린 내 팔을 풀어주었다. 허리를 잡고 있던 손도 놓고 내 뒤로 가서 넘어지지 않도록 양 어깨를 잡아준다. 내가 비밀번호를 칠 생각도 않고 멍하니 서있자 전정국이 한 손을 뻗어 도어락을 위로 올렸다. 나는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다. 홀린 듯 고개를 뒤로 젖혀 전정국의 가슴에 기대어 선 채 그를 올려다봤다. 가벼운 한숨과 함께 큰 손이 다시 올라와 내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비밀번호, 치라고.’ 복도를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왠지 약간 떨렸다. ‘9,5,0…’ 총 여섯 자리인 비밀번호를 입으로 말하면서 누르는데, 전정국이 급하게 내 입을 틀어막았다.


“너, 존나… 후, 미쳤냐?”


그걸 말하면서 누르면 어떡해, 꾸짖듯 말하고 내가 도어락을 내려 문을 연 뒤에야 입에서 손을 떼었다. 신발장의 센서등이 켜졌다. 뒤에서 내가 넘어지지 않게끔 단단히 붙잡았던 손이 조심스럽게 나를 밀었다. 나를 지탱하던 손이 사라진 탓에 휘청거리면서 집 안으로 들어가 신발장에 털썩 주저앉았다. 혹시 넘어질까 싶어서 내 허리쯤에 손을 내밀어놓았던 전정국이 그제야 손을 거둔다. 문을 닫고 자기도 집 안으로 들어서는데, 내가 앉은 채로 숨만 고르고 있으니 위에서 그런 날 내려다보다가 내 앞에 쪼그려 앉는다. 질질 끌려오느라 더러워진 내 흰색 스니커즈를 전정국이 벗겨주었다.


“고마워, 정국아.”
“…고맙긴.”
“좀 쉬었다 갈래? 일찍 가봤자 술만 더 먹잖아.”
“…빨리 오랬어.”


대답하는 속도가 한 타임씩 늦다. 쪼그려 앉은 상태 그대로 전정국은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둘 다 움직이지 않아서 센서등이 꺼졌다. 어두워진 게 싫어 신경질적으로 손을 휘둘렀다. 다시 센서등이 켜졌을 때 전정국은 고개를 들고 있었다. ……전정국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듯이 붉다. 귀까지 발갛게 달아오른 모습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술기운이 지금 올라온 건가? 가능성이 없지만은 않은 가정을 하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멀쩡한 자기 신발끈을 괜히 만지작대던 전정국이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난다.


“나 간다.”
“응, 내일 봐.”


반사적으로 인사를 한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전정국이 웃었다. 그 전정국이 웃은 것이다. 감히 말하지만, 전정국이 웃는 걸 본 사람은 내가 우리 학과 320명 중 처음일 거다. 무성의하게 손을 흔들어 보인 그가 이내 웃음을 거두고 문을 열고 나갔다. 패닉에 빠진 나는 한동안 신발장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그 날 이후, 전정국과 나는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물론 천하의 전정국이니만큼 사근사근한 건 아니었지만 처음보다 훨씬 부드러워진 태도로 나를 대했다. 회의 때 내가 던진 농담에 피식 웃는 모습까지 보였으니 말 다 한 거다. 몇 번의 뒷풀이를 더 거친 후에는 드디어 카톡까지 주고받을 정도로 친해졌다. 그게 우리의 현재까지의 역사다.

 

#

 

“…씨발, 너 진짜, 전화는 왜 안 받어.”
“아, 네 전화였구나.”
“‘아, 네 전화였구나’? 장난해?”


잠시 예전 기억을 떠올리는데, 내 말을 똑같이 따라하면서 인상을 구긴 전정국이 편의점 계단을 성큼성큼 내려왔다. 조금씩 흩날리던 눈발은 말 그대로 ‘펑펑’내리기 시작했다. 11월 중순인데도 무슨 한겨울 같다. 정국이는 귀에 대고 있던 핸드폰을 자기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내 앞에 섰다. 그러더니 한 손에 든 핫팩을 몇 번 흔들어서 내 손에 쥐어준다. 낯선 온기가 살갗에 닿았다. 아으, 따뜻해. 놈의 시선이 대충 목에 감은 내 목도리를 향했다. 급하게 매느라 꼬이고 뒤집혀서 엉망인 게 눈에 들어 왔나보다.


“목도리는 왜 그 꼴이냐. 제대로 안 매지?”
“아 네가 매줄 것도 아니면 좀 닥쳐. 근데 너 왜 여기 있-”
“태형선배도 이쪽 사시잖아. 같이 회의했다, 왜.”


내 말을 싹둑 잘라먹고 들어온다. 당황한 기색이 녀석의 낯빛에 잠깐 비쳤다가 금세 사라졌다. 태형선배? 그러고 보니 전정국은 총무국 예비부국장인데, 총무보다 정책과 더 자주 어울려 다녔다. 총무국 내에서 그것에 대해 은근히 불만이 나오는 것 같아서 좀 걱정스럽긴 하다. 각 국이 경쟁이 붙은 것도 아니고 이런 일 저런 일 핑계를 대가면서 정국이를 차지하려고 애쓴다. 중간고사가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제대로 놀지도 못하고 이리저리 불려 다니는 꼴이란…. 나야 거의 정국이에게 얹혀 가는 모양새라 정기회의만 꼬박꼬박 나가기만 하면 되는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전화는 왜 했어?”
“이쪽 온 김에 보려고. 요새 회의도 없잖아.”
“…너랑 내가 왜 봐?”


순간 정적이 흘렀다. ‘내…가 보자면 보는 거지 말 존나 많네.’ 한참의 침묵 끝에 나온 대답이었다. 그래, 넌 그런 새끼였지. 내가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젓자 울컥했는지 또 뭐라 따지려 드는 걸, 놈의 손목을 잡아 이끄는 것으로 막았다. 길거리에 마냥 서있기엔 날씨가 너무 추웠다. 펑펑 쏟아지는 눈을 고이 맞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전정국도 춥기는 했는지 반항하지 않고 순순히 딸려왔다. 가방에 전공책이 두 권이나 들어 있어서 어깨가 아파온다. 정국이의 손목을 놓아주고서 가방을 고쳐 메는데, 갑자기 내 어깨와 가방끈 사이에 자기 손을 집어넣는다. 놀라서 올려다보니 예의 그 무심한 눈으로 아무렇지 않게 쳐다본다.


“가방.”
“어?”
“달라고, 나.”
“이제 삥도 뜯네. 갈 데까지 갔구나, 너.”
“뒤지기 직전까지 맞고 한 대 더 맞을래?”


…지금 저거, 죽이겠다는 거지?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눈만 끔뻑이고 있자 전정국의 눈썹이 약간 까딱했다. 그동안 지켜본 바, 저건 짜증이 났다는 반증이다. 얼른 가방을 벗어서 던지듯 건넸는데 무거워서 끙차, 하는 추임새도 곁들였다. 그걸 건네받은 전정국은 무겁지도 않은지 한 손으로 자기 어깨에 걸쳐 메었다. 내 얼굴 보겠다고 기다리던 애한테 그냥 가라고 하기도 뭐한데 라면이라도 하나 끓여줘야겠다. 건물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머리와 옷에 쌓인 눈들을 털어냈다. 정국이도 제 머리에 얹힌 눈을 한 손으로 털어낸다. 얼른 복도 끝짝까지 달려가서 혹시 보기라도 할까 빠르게 비밀번호를 눌러 문을 열었다. 전정국은 저 멀리서 걸어오면서 입가에 가느다란 비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야, 어차피 앞 번호 다 아는데 뭐하냐.”
“그건! 제정신이 아니었잖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혼자 가벼운 웃음을 터뜨린 정국이는 문을 잡고 있는 내 손을 지나쳐서 먼저 방으로 들어가버린다. 으, 씨발, 진짜 민망해. 방은 깨끗하게 쓰는 편이라 놀림거리가 될 일은 없었다. 먼저 들어간 녀석이 구석에 내 가방을 내려놓았다. 쿵 하고 떨어지는 소리까지 났다. 꽤 무거운 가방을 내려놓았으니 홀가분한 얼굴을 할 법도 한데, 별다른 표정의 변화 없이 제 어깨를 몇 번 주물거리고 내 의자에 철푸덕 앉는다. 나도 황급히 따라 들어와서 보일러를 틀었다. ‘라면 먹을래?’ 목도리를 벗고 코트도 벗어 옷걸이에 걸며 물으니 가만히 고개를 끄덕인다.

전정국은 책상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내 노트들을 보고 있었다. 일기 같은 건 애초에 쓰지도 않았고, 기억을 더듬어 그것들이 전공과목 요약이라는 걸 상기한 나는 그걸 제재하지 않았다. 어차피 나보다 공부도 잘 하는 놈이다. 그렇게 바쁘면서 공부는 또 언제 한 건지 1학기엔 차석을 했다고 들었다. 냄비에 물을 받아서 불 위에 올리는데 전정국이 나를 불렀다. ‘야.’ 단조롭게 부르는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손에 어렵기로 소문이 난 전공책 하나를 들고 있다.


“이거.”
“어?”
“나 정리 잘 된 거 있어. 빌려줄까?”
“너는?”
“다 봤어.”


…재수없다.


“어디서 났는데?”
“2학년 과대 형이 줬어.”
“그…이름이…”
“김남준.”
“아, 맞아.”


눈살을 찌푸리며 이름을 떠올리려 애쓰는데 전정국이 기억 속의 그 이름을 말했다. 김남준, 1학년 내내 수석을 하고 2학년 1학기마저 수석인 선배. 3.5를 넘기도 힘든 우리 과 특성에도 불구하고 4.4라는 경이로운 학점을 딴 것으로 유명했다. 심지어 과대라서 할 일도 많은 와중에 이뤄진 거라 교수들조차 당황했다고 들었다. 집행부의 결정을 과 동기들에게 전해주는 역할이 주라서 부장끼리의 회의에도 자주 참석한다고는 하는데, 나는 얼굴을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뭐, 빌려주면 나야 고맙지.’ 최대한 덤덤하게 말을 건넸다. ‘이번 주 회의 때 줄게.’ 놈의 말 역시 덤덤했다. 냄비의 물이 끓었다. 면을 넣고 스프를 풀었다. 창문 밖으로 언뜻 보이는 눈발이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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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아진짜 좋아요 너무 재밋는거♥️ 암호닉 신청하고 싶은데..만약에 받으시면 [정연아]로 암호닉 신청해도 되나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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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페
재미있다니 다행이에요ㅠ.ㅠ감사합니다! 글잡이 처음이라 암호닉이 뭔지도 몰라용...'-'...!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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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2
제가 이렇게 댓글을 쓰면 독자2라고 나오죠?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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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3
만약 다음편에서 저를 포함한 다른 독자10명이 댓글을 단다고 하면 제가 댓글을 어디에 달았는지 모르잖아요.!(설명잘 못함)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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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4
한마디로 작가와 독자사이에 암호같은 닉네임이라 할수잇죠!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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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5
제가 여기서 [정연아]라고 암호닉을 신청하고 , 3화가 나왔을때 3화 댓글에 '[정연아]에요!' 하고 댓글을 달아 쓰면 작가님도 누가 어떤 댓글을 썻 는지 알수잇는 일종의 암호같은 거에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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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6
이해가...되셧을까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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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페
아하...네 이해했어요 자세한 설명 감사해요ㅎㅎㅎㅎ(민망)
저야 감사하지요! 정연아님 꼭 기억해둘게요! 잘부탁드립니당'-'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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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8
예엥에ㅔㅜㅠㅠㅠ고마워요! 다음편 기대할께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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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7
허어어어어 작가님 사랑해요ㅠㅜㅜㅜㅜㅜ 뭐이리 글이 좋습니까ㅠㅠㅠㅠㅠ 저 죽이시려고 작정하셨나요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흐어어어어어엉 사랑해여ㅠㅠㅠㅠㅠ♥♥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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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페
격한 반응 감사합니다ㅋㅋㅋㅋㅋㅋㅋ저도 사랑해요♡ 앞으로도 지켜봐주세용'-'!!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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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9
억 작가님 왜이렇게 설레죠 이 글??신알신 신청하구가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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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페
감사해요! 저도 쓰면서 간질간질해요ㅎㅎㅎ지켜봐주세요'-'♡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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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0
재미써요 당황하는 전정국 너무 기엽네욬ㅋㅋㅋㅋㅋㅋㅋ
9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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