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일기
W.타페
: 영하의 혹한 속에서 젊음의 행복을 누리다.
강의가 끝난 건 오후 8시가 넘어서였다. 2학기 초에 '나는 금요일 공강을 만들기 위해 야간수업을 듣겠다!'며 패기 넘치게 신청했던 야간은 나를 지치게 만들었다. 오늘따라 날씨는 또 지랄맞게 춥기까지 하다. 젠장, 이러다간 금요일이 오기도 전에 얼어뒤지겠다. 내일은 날이 좀 풀린다던데 나년은 왜 하필 화요일날 야간을 신청했던 걸까? 적어도 수요일 야간이었더라면 이렇게 동사할 것처럼 추워하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선견지명조차 없다는 것에 대해 무의미한 한탄을 해대면서 학교를 벗어났다. 그나마 바람을 막아주던 학교 담벼락이 없어지자 정말 욕이 턱 밑까지 치고 올라왔다. 아 씨발 추워, 존나 추워, 욕을 계속 되뇌면서 열심히 발을 놀려 빠르게 원룸촌으로 들어섰다.
등에 멘 가방에서 진동이 연달아 울린다. 나는 진동의 정체를 파악하다가, 그제야 내가 핸드폰을 가방 안에 넣어뒀다는 것을 알았다. 늦은 밤에는 눈이 온다는 일기예보가 나를 급하게 만들었고, 수업이 끝나자마자 가방에 책들을 쓸어담다가 핸드폰도 덩달아 들어간 모양이다. 진동은 한동안 이어지다가 끊겼다. 누군가가 전화를 걸었나보다고 생각하면서도 핸드폰을 꺼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어차피 자취방이 코앞인데 집에 들어가서 보면 되지, 뭣하러 이 추운 날 길거리에서 가방을 뒤진단 말인가. 그러나 진동은 한참을 울리다 끊기고 다시 한참을 울리다 끊기고를 반복했다. 심난하다. 설상가상으로 일기예보대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콧등에 차가운 눈송이가 내려앉았다. 전화 때문에 안 그래도 빨라진 발걸음을 더욱 재촉하게 만드는 시린 감촉이다. 목도리에 얼굴을 조금 더 묻으며 자취방 앞의 편의점을 지나쳤다. 아니, 정확히는, 지나치려고 했다. 편의점 문 앞을 지나가는데 딸랑-하는 경쾌한 종소리와 함께 편의점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 문이 갑자기 열린 탓에 놀란 토끼눈을 하고 올려다보자, 한 손으로는 핸드폰을 귀에 대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핫팩을 쥐고 있는 낯익은 얼굴이다. 낯익기는 하지만, 이 시간에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 자연스럽게 놀란 어조의 말이 튀어나왔다.
“전정국?”
#
우리 과 집행부 총무국 예비부국장, 전정국. 정국이를 처음 만난 것은 학과 오티 때였다. 학과 1학년 총원이 80명이라 8명씩 나누어 10개의 조로 단체 게임을 진행했는데, 전정국과 나는 같은 조였다. 분명 객관적으로 보면 깔끔하게 잘생긴 얼굴이지만 어쩐지 사나운 인상 탓에 그에게 친근하게 구는 1학년은 없었다. 반나절을 함께 어울린 우리 조원들마저 그랬으니 말 다했다. 그런 그와 내가 가까워진 것은…언제였더라? 아, 집행부 첫 뒷풀이 때로 기억한다. 뭐 친근하게 굴지 않은 건 1학년에 국한된 거였고 선배들(특히 언니들)은 그를 좋아했다. 남자가 부족한 학과 특성 탓도 있는데다 외모도 한 몫 단단히 했을 거다.
선배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전정국은 등 떠밀리듯 집행부에 지원했다. 지원 분야는 나와 같았다. 총무국, 속된 말로 돈 관리를 하는 직책. 1학년이야 어차피 수습이라는 이름을 달고 귀찮은 고학번 뒤치다꺼리를 할 뿐이라서, 암만 등을 떠밀렸대도 그 전정국이 총무국에 지원할 줄은 몰랐다. 집행부에 지원한 동기들은 모두 정책이나 기타 다른 직책에 지원했다고 한다. 그만큼 총무국은 기피 대상이었다. 보통은 각 국 당 3명씩을 뽑는데, 총무국은 지원자가 나랑 전정국 두 명이라 따로 면접도 보지 않았다. 그냥 총무국 소속 선배들과 얼굴 한 번 마주보고 ‘잘 해보자’는 응원을 듣고 끝났다. 물론 그 응원이 향한 곳은 전정국일 가능성이 높지만 말이다.
그가 선배들에게조차 단 한 번도 웃어준 적 없다는 건 우리 과에서 꽤 유명했다. 듣자하니 집행부 선배들은 그를 두고 내기까지 했단다. 술이 들어간다면, 웃을까? 학기 초에는 집행부에서 주관하는 행사가 많았다. 보통 술이 들어가는 뒷풀이를 하는 건 행사 이후였는데, 그동안 회의 때문에 그나마 말을 많이 섞었던 총무국 선배들은 전부 ‘아니오’에 걸었다. 천하의 전정국이 웃을 리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 많은 회의 중 단 한 번도 농담에 반응한 적 없는 엄청난 경력의 남자였다, 그는.
어쨌건 시간은 흘러 모든 행사가 끝났고, 예정된 뒷풀이가 시작되었다. 뒷풀이 겸 신입생 환영회인 자리였다. 일부러 고깃집에 조금 더 일찍 도착한 1학년들은 온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휴지를 깔고 수저와 소주잔을 놓거나 물을 따라놓는 등의 셋팅을 했다. 나와 전정국도 그 1학년에 포함되었다. 회의가 매주 한 번씩은 있었기에 우리도 서로 인사를 나눌 만큼은 친해져있었다. 물론 학교에서부터 고깃집까지 이동하면서는 한 마디도 섞지 않았지만. 나는 수저를 놓고 있었는데, 전정국은 어느새 테이블 끝 쪽까지 물컵 셋팅을 끝내놓고 나를 돕고 있었다. 하여튼 손은 겁나게 빠르다.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건가? 잠시 고민하느라 일시정지 되어 전정국을 보고 있으니, 그가 내 건너편에 수저를 탁 소리 나게 내려놓고서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 길게 자란 앞머리 틈으로 빛나는 짙은 갈색의 눈동자가 매섭다.
“……얼른 하자, 우리.”
“어…, 그래.”
어쩐지 평소보다 까칠한 말투다. …재수없어. 전정국은, 일처리는 끝장나게 빠르지만 동기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뭐랄까, 일은 잘해도 인간관계에는 서툰? 그런 성격이라 욕을 먹기엔 딱이다. 자기 할 거 다 해놓고도 질시로 가득 찬 시선을 받는 게 조금 불쌍하긴 했다. 일 잘하는 그가 욕을 먹는 게 이해가 안 됐는데 이제야 동기들의 맘이 이해가 갔다. 정말 재수 없잖아, 저거. 지 손 빠르다고 자랑하는 거야, 뭐야? 싹 굳은 표정의 전정국에게 대들 용기는 없었기 때문에 투덜거림은 내면의 소리로 그쳤다.
준비가 막 끝났을 때 쯤 2학년 선배들이 들어왔다. 선두에는 김태형 선배와 박지민 선배가 있었다. 두 분 다 정책국이라 자주 보지는 않았지만, 태형선배는 정책국 부국장인데다 전체 회의 때 몇 번 본 인상이 엄청 좋아서 이름까지 벌써 외웠다. 지민선배는… 그런 태형선배에게 붙어 다녀서… 덤이랄까. 지민선배는 가게 안을 쭉 훑어보더니 전정국을 보고 눈을 빛냈다. 내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분명 반짝!하고 눈이 빛났다. 태형선배의 손을 붙잡고 뭐라뭐라 말하더니, 먹잇감을 발견한 사자마냥 기쁘게 웃으면서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전정국을 향해 직행했다. 전정국의 뒤쪽에 내가 서있었기에, 나는 허리를 숙여 인사하려고 했다. 약간 허리를 숙인 찰나 지민선배가 전정국에게 헤드락을 걸며 내게서 뒤돌았다. 덕분에 난 어정쩡한 자세로 멈췄다.
“정국아! 오늘은 이 형한테 좀 웃어주지 않으련?”
“안녕하세요, 선배님.”
“선배님이 뭐니, 선배님이? 형이라고 해봐.”
“아닙니다, 선배님.”
“형 하라고.”
“앉으세요, 선배님.”
호탕하게 웃으며 ‘형’을 강요하지만 천하의 전정국은 꿈쩍도 않는다. 그 묘한 대치를 옆에서 관람하던 태형선배가 소리 죽여 웃었다. 지민선배가 그런 그를 째려보자 ‘미안, 미안’하면서도 웃는 걸 멈추지는 않는다. 에휴, 하고 한숨을 쉰 지민선배는 그제야 뒤쪽의 인기척을 느낀 모양이다. 전정국을 풀어주면서 빙글 뒤로 돌더니, ‘여어-’하고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지민선배가 나를 보자마자 전정국은 빠르게 식당 입구로 가버렸다. 계속 들어오고 있는 선배들한테 인사를 하기 위함인가보다. 그를 대신해 내가 지민선배에게 붙잡혀버렸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정국은 정말 재수가 없다.
“우리 총무국 예쁜이! 잘 있었어?”
“……엊그제도 뵈었는데요?”
“널 못 본 이틀이 너무 길었어, 자기~”
팔뚝에 소름이 돋았다. 원래 저런 성격이라는 건 단 몇 번의 만남으로도 쉽게 파악이 되었지만…, 역시 적응은 무리다. 나에게도 헤드락을 걸기 위해 팔을 들어 올리는 지민선배를 태형선배가 확 잡아끌었다. 장난기가 넘치던 지민선배의 얼굴이 순식간에 억울하단 얼굴로 뒤바뀌었다. 저렇게 표정관리가 되는 것도 능력이다, 고 생각했다. 마땅히 박수갈채를 받아야 할 정도다. 물론 재빠르게 나를 위기에서 구해낸 태형선배의 순발력에도 박수를 보내고 싶었다.
“새내기는 건들지 마라, 새끼야.”
“정국이도 새내긴데?”
“사내새끼 빼고, 임마.”
네가 안 건든 애가 없어, 하여튼.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조그맣게 중얼거린 태형선배가 나를 향해 ‘이따 로테이션 때 보자’며 지민선배를 끌고 테이블로 가 앉았다. 그제야 한숨을 돌린 나도 얼른 입구로 달려가서, 1학년들 끝자락에 서있는 전정국의 옆에 섰다. 옆에서 힐끗 나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금방 사라졌다. 누가 와서 섰는지 궁금하기라도 했나. 2학년 선배들은 내가 지민선배에게 잡혀있는 동안 다 착석하신 뒤였고, 지금 들어오고 있는 건 전부 3학년 선배들이었다. 집행부장인 김석진 선배가 들어오면서 4학년 선배들은 모두 불참한다는 것을 알렸다. 그분을 마지막으로 1학년을 제외한 모두가 다 착석했다.
선배들은 노련하게도 테이블마다 자리 두어 개 씩을 꼭 비워놓았다. 1학년들은 선택의 여지조차 없이 그곳으로 끼어들어가 앉았다. 내 테이블은… 안타깝게도, 지민선배의 테이블이었다. 심지어 옆자리에 같이 앉은 1학년마저 전정국이다. 이건 음모가 틀림없다. 나를 질식해 뒤지게 만들려는 신의 농간이다.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파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태형선배가 내 앞자리라는 것이다. 지민선배가 내 앞이었으면 나는 오늘 네발로 기어서 집에 들어갈 것이다. 아직 학기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지만, 지민선배의 소문만큼은 이미 1학년 사이에 무성했다. 집행부의 술고래, 집행부의 망나니, 집행부의 다이다이남. 술자리에서 지민선배의 앞자리에 앉은 사람은 살아서 돌아간 적이 없다는 전설이 내려온다나 뭐래나.
“와, 우리 정국이랑 예쁜이네?”
지민선배의 입에서 나온 말은 마치 사형선고 같았다. 두 눈을 질끈 감아버리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힘으로 참아내고 애써 활짝 웃었다. 태형선배가 ‘괜찮아, 탄소 넌 살아서 가게 해줄게’라고 나를 달랬다. ‘정국이 너는 모르겠지만.’ 그 뒤에 따라오는 말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전정국은 그 말을 듣고도 아무런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그저 묵묵히 자기 물컵에 있는 물을 마실 뿐이다. 지민선배는 룰루랄라 휘파람까지 불다가 손을 번쩍 들고 중앙에 앉아있는 김석진 선배를 큰 소리로 불렀다.
“석진이 형!”
“어?”
“총무국 신입생 우리가 독차지해도 돼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라. 되겠냐?”
지민선배는 짐짓 진지한 척 자기 가슴에 손을 얹고 몇 초간 고민했다. 이내 능청스럽게 다시 손을 들었고, 석진선배가 말해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되겠는데요?”
“어 그래. 뒤지고 싶다고?”
“아~오늘만요. 제가 책임지고 정국이 보내버리겠습니다!”
“…에휴, 맘대로 해라.”
마침내 최고 권력자의 허락이 떨어졌다. 태형선배가 못 말린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어댔다. 동아리에서 나를 아껴주던 언니 한 분이 말하길, 자고로 신입생은 일정 시간마다 테이블을 로테이션 돌아야 한다고 했다. 두루두루 친해지기 위해 순회하면서 말을 섞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통상 그러든 말든, 지민선배는 집행부장 선배의 허락까지 맡아가면서 나와 전정국을 자신의 테이블에 붙잡아두었다. 이내 고기가 나왔고, 집게는 전정국에게로 돌아갔다. 태형선배가 자연스럽게 집게를 집는 걸 지민선배가 말렸다. ‘2학년이 고기를 구우라고?’ 생글거리며 웃는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상당히 싸늘한 어투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정국이 ‘제가 하겠습니다’하고 태형선배에게서 집게를 넘겨받았다. 아, 그래. 들리는 소문에 의한 지민선배의 성격이 한 구절 더 떠올랐다. 후배 갈구는 맛에 사는 인간.
전정국이 불판에 고기를 올렸고, 맛있는 소리를 내면서 고기가 익어갔다. 멍하니 고기가 익는 걸 지켜보던 지민선배가 테이블에 놓인 소주병 5개 중 하나를 들고 못마땅한 듯 이리저리 돌려본다. 테이블에 놓여있던 건 자몽에이슬. ‘태형아, 어떻게 생각하냐?’ 나지막이 묻는 말에 태형선배가 나에게 잠깐 눈길을 주었다. 지민선배는 그 시선을 의식하고서 표정을 다시 싹 바꾸고 나에게 친절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탄소야, 주량이 어떻게 돼?”
“한 병이요.”
“그래.”
대답을 들은 지민선배가 곧 수저통을 들어 올려가면서 뭔가를 찾는데, 태형선배가 자기 쪽에 있는 콜벨을 누르자 만족스럽게 웃었다. 알바생이 우리 쪽으로 다가오니 자몽에이슬 세 병을 쥐어주면서 ‘참이슬로 9병 주세요’했다. …주량이 한 병이라고 분명 말 했는데, 내 몫으로 두 병이 남았다. 사악하다. 아주 사악해. 게다가 뭐? 9병? 인당 3병이야?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칠 뻔 했다. 그 와중에도 열심히 고기 굽기에 집중하는 전정국의 표정은 평온하기만 하다.
옆 테이블의 동기들이 안쓰럽다는 듯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래… 나도 지금 내가 참 불쌍하게 느껴지고 있단다, 친구들아. 그러니 그렇게 보지 말아주겠니? 안 그래도 심난한데 시선이 집중되니까 더 심난해…. 전정국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한층 낮아진 목소리다.
“이제 드셔도 될 것 같은데요.”
“그래, 그래. 누구 말씀인데 먹어드려야지.”
“…박지민. 적당히.”
여지없이 전정국을 비꼬는 지민선배의 말이 날아온다. 태형선배가 고기를 한 점 집어 올리다가 눈살을 찌푸리고 지적했다. 네네, 하고 그 말을 받은 지민선배는 야무지게 상추쌈을 싸서 입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시작되었다. 알바생이 와서 소주 9병을 힘겹게 내려놓기가 무섭게 한 병을 집어 들더니, 흔들고 돌리고 아주 난리가 났다. 현란한 동작을 선보인 지민선배가 병을 땄다. 거의 반자동으로 태형선배가 자기 잔을 들었다. 지민선배는 그 잔에 가득 차게 술을 따라주었다. 전정국은 어느새 집게를 내려놓고 잔을 들고 있었다. 예의바르게 잔을 지민선배에게 향하자, 망설임 없이 술이 찰랑거릴 정도로 가득 따라준다. 장난스러운 동작으로 소주병을 몇 번 흔들던 지민선배가 자몽에이슬을 땄다.
“자, 우리 예쁜이는 이거로!”
내 잔에도 예외는 없었다. 지민선배는 여자라고 배려해주는 건 과일소주인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도 가득 따라줘서, 손이 조금만 떨려도 넘쳐서 흐를 것만 같다. ‘짠!’ 지민선배의 구호를 시작으로 우리의 조금 특별한 신입생 환영회가 시작되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점차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뭔가 붕 뜬 것 같은 느낌이다. 지민선배의 말들에 리액션을 하는 내가, 마치 내가 아닌 것 같은 그런 오묘한 느낌. 지민선배의 뒤쪽으로 빈 자몽에이슬 두 병과 참이슬 7병이 보였다. 그리고 내 잔은 다시 꽉 차있다. ‘어라, 벌써 자몽에이슬 다 먹었어. 김탄소, 술 잘먹네~ 받아, 받아’ 하면서, 지민선배는 자연스럽게 참이슬을 내게 따라주었다. 태형선배는 아까 담배 좀 태우고 오겠다면서 밖에 나간 뒤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지민선배에게서 나를 보호해줬던 가장 든든한 방패막이 사라진 것과 같았다. 아아, 나를 살아서 돌아가게 해주겠다던 당신은 어디로 사라졌나이까…. 내 옆에 앉아 있는 전정국은 여전히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지민선배는 오기가 생겼는지 끊임없이 전정국에게 술을 먹이고 있었고, 옆자리의 나는 덤이었다. 덕분에 죽어나는 건 나 하나다.
속이 화끈거리는 게 심상치가 않다. 후, 무거운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어넘기자 전정국이 나를 쳐다봤다. ‘괜찮냐?’ 작게 묻는데, 같은 테이블에 앉았음에도 그게 우리의 첫 대화라는 게 뭔가 우스웠다. 내가 웃음을 흘리니 전정국이 한숨을 쉬었다. 왜? 왜 네가 한숨 쉬냐? 지금 내가 한심해? 누구 때문에 이렇게 된 건데?! 화를 내야 할 대상은 지민선배지만, 나는 화살을 전정국에게로 돌려버렸다. 그나저나 정국아, 너도 참 대단하다. 태형선배가 나간 지 꽤 되었는데도 계속 마셨으니, 아마 모르긴 몰라도 지금 3병은 들어갔을 텐데 멀쩡하다니. 2차도 아니고 1차에서 이렇게 마신 건 우리 테이블밖에 없을 거다.
“김태형 얘는 왜 안 들어와?”
지민선배는 전정국이 자기 맘대로 되지 않으니 짜증이 난 건지, 괜히 태형선배를 들먹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민선배가 밖으로 나가고, 전정국은 남아있는 고기 두 점을 한 번에 집어서 먹으려다가 멈칫했다. 잠시 머뭇거리나 싶더니 두 점 중 하나를 내 접시에 올려준다. 그에 내가 의아한 시선으로 쳐다보자 못 본 척 곧바로 고개를 돌리고 자기 고기를 입에 넣는다.
“……고마워.”
“…많이 마신 것 같아서.”
“어…, 좀 띵하네.”
전정국이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괜찮은 거 맞아?’하고 되묻는데, 괜찮아 보이냐고 쏘아 붙이려다가 말았다. 어떻게 보면 저 녀석이 나보다 더 시달렸는데 나까지 그래버리면 안 될 것 같은 미안함 때문이었다. 그냥 가만히 고개를 좌우로 저어보였다. 전정국의 아무 표정 없던 얼굴에 생소한 감정이 떠올랐다. 그는… 상당히, 짜증이 나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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