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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이제 막 학교에 적응하려는 시기였다.
문학 담당이신 담임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우리 반 아이들 이름으로 빙고를 한다는 말에
아이들은 반 아이들 이름도 다 제대로 모르는데 무슨 빙고를 하냐며 불만을 토로했다.
아이들의 말에 담임 선생님은 그래야 빨리 이름을 외우지 않겠냐며 얼른 종이와 펜을 꺼내라고 하자
아이들은 못 이기는 척 종이와 펜을 꺼냈다. 선생님이 랜덤으로 아무 이름이나 부르면 남학생은 여학생, 여학생은 남학생을 불러야 하는 방식이었다.
아는 남자애라곤 김태형 하난데 나 어떡하지.
제발 내 앞에서 김태형의 이름이 안 나오길 빌어야지. 아님 내 이름이 안 불리든가.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김태형의 이름이 불렸다.
그러게 좀 조용히 하고 있지 얼마나 떠들었으면 처음부터 이름이 나와?
김태형의 이름은 이미 나왔으니 내가 바라는 건 내 이름이 안 불리는 것이었다.
빙고판이 반쯤 지워졌을까 입학 첫 날부터 굉장히 예쁘다고 생각한 여자애 하나가 '전정국'이라는 이름을 불렀다.
우리 반에 그런 애도 있었나? 난 왜 처음 듣지.
내가 모르는 애니 당연히 그 애도 나를 모를 거라고 생각해 마음 놓고 있었는데 전정국이라는 남자애가 내 이름을 불렀다.
당황한 나머지 어버버거리며 멍을 때리자 옆에 앉은 짝이 나를 툭툭 쳤다.
대충 보이는 아무 이름이나 부르고 나를 부른 전정국을 찾기 위해 두리번 거렸더니
그리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곳에 앉아있는 전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마주치자마자 급하게 시선을 돌렸다. 아, 창피해.
다시 몰래 뒤돌아 힐끔 힐끔 쳐다보니 꽤 잘생긴 것 같았다.
우리 반에 저렇게 잘생긴 애가 있었나 싶다가 밀려오는 창피함에 다시 고개를 내렸다.
처음엔 누군지도 몰랐다가 내 이름을 불러준 덕에 알게 되었는데 조금은 관심이 생겼다.
아직 좋아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쟤는 누군데 내 이름을 알고 불렀나 싶은 그런 관심?
여자들이 흔히 하는 착각이 있지 않은가. 혹시 쟤가 나를 좋아하나 뭐 그런 거.
그런 생각이 들다가도 저렇게 잘생긴 애가 왜 나를? 그냥 평범하니까 내 이름을 부른 거겠지. 이러고 말았다.
그 사이에 나는 우리 반 여자애들과 꽤 친해졌고, 이제 김태형 없이도 반 아이들과 잘 어울렸다.
여기서 김태형 얘기를 잠깐 하자면 고등학교 배정을 받았는데 같은 학교인 애가 김태형 하나였다.
김태형이라서 절망했고,
또 김태형 하나라서 절망했는데
신은 내가 미웠던 건지 김태형과 같은 반이 되었다.
김태형과 나는 흔히들 말하는 불알 친구다. 태어났을 때부터 같이 태어나 같이 자란 뭐 그런 사이.
남자애들과 말을 잘 섞지 않는 나에게 유일한 남자 사람 친구였다.
김태형은 김스치면인연이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친화력이 뛰어났고,
나도 어디 가서 소심하다 내성적이다 이런 얘기를 듣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김태형에 비하면 난 낯가림을 많이 가리는 거였다. 내 기준에서는 활발한데 김태형은 내가 낯을 많이 가린다나 뭐라나.
그래도 김스치면인연 덕분에 반 아이들과 빨리 친해질 수 있었다.
같은 반 여자애들과 점심을 먹고 올라와서 양치를 하고 왔는데 젤리를 먹고 있는 김태형이 보였다.
쟤는 꼭 치사하게 혼자만 먹더라. 내가 젤리 좋아하는 거 알면서.
"야, 치사하게 혼자만 먹냐? 나 젤리 좋아하는 거 알면서."
"그리고 얘 줄 거면 나도 줘야 되는 거 알지?"
고등학교에 입학해서 처음으로 친해진 수정이가 옆에서 거들었다.
"이거 전정국이 준 건데. 정국이한테 달라고 해."
그제서야 김태형 옆에 있던 전정국이 보였다.
그깟 젤리에 눈이 멀어 김태형 옆에 있던 전정국은 보지도 못 했다.
그 빙고 사건 이후로 2주가 지난 지금, 전정국은 내 머릿속에서 잊혀진지 오래였다.
가끔 전정국 이름이 불리면 쳐다보기는 했지만 처음처럼 관심이 가지 않는 건 사실이었다.
더 이상 무언가 없으니 얘가 나한테 관심이 없다고 생각하기도 했고.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은 사이였지만 그냥 안 먹는다고 가는 것도 웃긴 것 같아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달라고 하기로 마음 먹었다.
내 사랑 젤리니까 창피함을 무릅쓰고 달라고 하는 거야. 창피해하지 말자.
"전정국, 나 젤리 하나만 줘."
"나도 줘."
"아, 하나밖에 없는데 어떡하지."
하나밖에 없다는 전정국의 말에 나는 그래도 나 달라며 손을 내밀었고, 수정이도 얘는 양치했으니까 나 줘라며 손을 내밀었다.
전정국은 곤란하다는 듯이 우리 둘을 보다가 내 손에 젤리를 얹어줬다.
"네가 먼저 달라고 해서 주는 거야."
그 말만을 남기고 전정국은 화장실을 간다며 교실을 나갔다.
수정이는 아, 뭐야! 야 그래도 반반 콜? 나는 또 여자들이 하는 흔한 상상에 빠졌다.
수정이가 나보다 더 예쁜데 왜 수정이가 아닌 나한테 줬을까? 설마?
수정이와 젤리를 나눠 먹고 자리에 앉아 5교시 수업 준비를 했다.
자리에 앉아 주변에 앉아있는 애들과 얘기를 하면서도 전정국이 계속 신경이 쓰여 전정국이 있는 쪽을 보다가 또 한 번 전정국과 눈이 마주쳤다.
전정국도 민망했는지 다시 시선을 돌렸고, 나도 다시 친구들과의 대화에 집중을 했다.
전정국은 왜 알지도 못 하는 나의 이름을 불렀으며, 왜 나에게 젤리를 주고, 왜 자꾸 나와 시선이 마주칠까?
5교시를 알리는 종이 울렸고, 수업은 시작했지만 전정국과 관련된 여러가지 생각들과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집중하지도 못 하고 혼란스러운 5교시를 보냈다.
그렇게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일주일 사이에 전정국과 나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
얘기를 나눌 일이 없었으니 아무 일도 없는 게 당연했지만 내심 전정국이 먼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렸다.
원래 말이 없는 건지 김태형과 둘이 있을 때도 김태형 혼자만 말하고 전정국은 거의 듣는 것만 같았다.
하긴, 김태형이 말이 좀 많아? 완전 많지.
고등학교 공부는 중학교 공부랑 다르다는 말이 뭔지 입학한 지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느꼈다.
혼자 공부를 하려니 도저히 할 수가 없을 것 같아 결국 김태형이 다니는 학원에 새로 다니기로 했다.
첫 수업을 받는 날 갔더니 김태형, 옆 고등학교를 다닌다는 남자애, 그리고 전정국이 있었다.
이걸 인연이라고 해야 하는 건지 우연이라고 해야 되는 건지.
덕분에 한 달 사이에 전정국과의 접점이 하나 더 추가되었다.
그렇다고 해 봐야 겨우 이름 부른 것과 젤리를 준 것, 그리고 같은 학원이라는 것 뿐이지만 착각을 일상처럼 하는 여자란 동물에게는 엄청난 접점이었다.
옆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자애는 자기를 박지민이라고 소개했다.
내가 알기론 김태형도 이 학원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김태형과 박지민, 전정국은 이미 단짝이라도 된 듯 엄청 친해보였다.
나 혼자 여자라 같이 놀고 그러는 건 아니었지만 김태형 못지 않게 엄청난 친화력을 보여주는 박지민 덕분에 쉽게 친해졌다.
학원에 다닌 지 아직 한 달도 지나지 않았지만, 전정국이랑도 꽤 발전이 있었다.
학원 시간이 7시인 탓에 나와 김태형과 전정국은 학교에서 8교시 자습을 하고 석식을 먹고 함께 학원에 갔다.
처음에 나와 전정국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둘이 나눌 얘기도 없고, 김태형이 워낙에 수다스러웠달까.
덕분에 우리 둘은 대화를 나눌 계기가 없었다. 말없이 학원에 같이 다니게 된 지도 일주일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런 우리 둘이 이상했는지 김태형은 더욱 떠들었고, 우리는 점점 멀어지는 것만 같았다.
같이 다니지만 어색하고 말 한 번 섞어보지 않은 느낌이랄까. 누가 봐도 그래 보였다.
그런 전정국의 행동에 전정국은 나한테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에 했던 행동들은 그냥 순수하게 같은 반 아이라서 했던 행동들인 것만 같았다.
이제 와서 그렇게 무관심이면 어떡하냐고.
난 너한테 마음이 생겼는데.
셋이 학원까지 가는 20분이라는 시간동안 나는 전정국을 관찰했다.
전정국은 워낙에 말도 잘 안 하고 남자애들과 있을 때도 별 말을 하지 않아 조용한 줄 알았는데 김태형만큼 수다스럽고 꽤 재미있었다.
그게 내가 아닌 김태형 한정이라는 게 함정이지만. 둘만 떠들고 나는 그냥 들으며 웃는 입장이라 불편하기도 했고 어색했다.
그리고 전정국과 조금 더 친해지고 싶기도 했고, 어색한 것을 못 참는 성격이라
조용히 전정국이 던지는 드립에 웃거나 나도 맞받아치다 보니 어느덧 말을 조금 주고 받는 사이가 되었다.
그렇다고 얘기를 많이 하는 건 아니고 셋이 있을 때 조금 나누는 정도랄까. 이정도면 나 꽤 성공한 거라고 생각했다.
관심 있는 남자애랑 같이 학원 다니면서 말 트기가 어디 이렇게 쉬운가.
학교에서 숙제 풀다가 모르는 거 있으면 서로 물어보기도 하고.
전정국과 나는 친구라는 이름으로 조금씩 친해졌다.
그렇게 3월이 다 지나갔고, 중간고사가 D-30이라는 엄청난 고비만 남겨있었다.
내가 그 고비 중간에 전정국한테 심각하게 빠지게 되었다는 게 더 큰 고비이지만.
안녕하세요! 글잡에 글을 올리는 건 처음이라 많이 떨리네요 ㅠㅠ
여러분과 함께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올리는 거니 재미있고 좋게 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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