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2년 경성의 봄, 벚 01
오늘도 우리집은 이사를 한다. 놈들이 언제 우리냄새를 맡고 쫓아올지 모르기 때문에 잠시 머물렀던 자리에도 흔적을 남길까 조심하게 된다. 평안도 지방에서 줄곧 자라왔던 우리 가족은 어째서인지 경성까지 내려와 버렸다. 이곳에 머무른 지도 어언 3개월... 아주 추운 겨울날 왔었는데 점점 날씨가 풀리고 있다. 아주 어릴적 부터 친하게 지내왔던 태형네와 떨어진 지도 3개월이 흘렀다. 하루라도 얼굴을 안 보면 이상했는데 여기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그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하루하루 버티기 바쁜 판국이니 내 몸뚱아리 챙기기에 더 열을 올릴 수 밖에..
옆집 주막에 다녀오라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다녀오다가 웬 사내녀석을 하나 만났다. 눈에는 아주 독기가 가득해보였고 언뜻 보아도 보통내기는 아닌 듯 싶었다.
“저기 아가씨..”
“네?”
“말투가 이지역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아...좀 그렇드래요?”
“북쪽 지방에서 오신 것 같은데요 제가 도움이 필요해서 찾아왔습니다.”
내 고향 사투리는 모두 고친 줄 알았는데.. 역시 세달 만에 경성사람이 되기엔 좀 무리인가 보다. 나를 잡아 세운 그 사내는 가방을 열더니 종이뭉치 하나를 건네준다.
“이거...잘 숨기세요.”
“...이게 무엇인지...”
“저는 대학생이고 이런일을 해오고 있습니다. 원래 우리 학교 학생들만 가입 할 수 있긴 하나,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요.”
“이게...”
“절대 들키지 마세요! 그리고 이건...제 집주소입니다. 오늘 안으로 편지 한 통 보내주시지요.”
“아...”
“편지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제 이름은...”
“박지민입니다.”
“박지민...”
“네 맞아요. 그럼 저 가볼게요~”
“..저...!”
한글로 빼곡히 적혀있는 신문을 주고는 홀연히 떠난다. 신문 가장 마지막 장에는 방금 써 잉크가 채 마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글씨 하나가 있다. 그의 집주소인 듯 했다. 관악산 근처에 사는 그는 나에게 편지를 보내달라는 말 한마디만을 남긴 채 사라졌다. 어디를 그렇게 급하게 가는지 물어볼 새도 없이 뛰어가더라.
‘편지를 부쳐? 말아?’
그저께 생일선물로 받은 비녀를 만지작 거리면서 집으로 향했다. 대학생이라고 하는 걸 보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다. 신문의 취지도 건전해 보이고.. 그렇다고 선뜻 외간남자에게 편지를 하는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나는 이미 혼인할 사람이 있는 몸이기 때문이다. 비록 아주 멀리 계시긴 하지만...
-
“누나...”
“왜..?”
“잠이 안 와.”
“눈 꼭 감고 있어.”
“우리 다시 집에 갈 수 있지?”
“여기가 우리집 이잖아.”
“우리 내일 또 이사가면...”
“쨍그랑!”
“어머니!!”
“아이고 이게뭐냐...!”
“##여주야 ##여주야...!”
이사하기 전날이어서 그런지 모두들 뒤척이던 밤. 밤늦도록 바느질을 하시던 할머니가 계신 사랑방에서 백열등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대로 우리집 전기는 나가버렸고, 할머니께서는 깨진 유리파편들을 그대로 받아버리셨다. 아침 일찍부터 이사할 예정이었기에 웬만한 짐은 모두 꾸려놓은 상태였고, 그 흔한 양초 하나 찾을 수 없었다. 어두운 것도 여간 어두운 게 아니어서 할머니가 계신 방에 함부로 들어갈 수도 없었다.
“##여주 지금 빨리가서 불알하나만 사오라우....!!!”
“알겠심더. 내래 뛰어갔다 오겠다우.”
신발도 채 신지 못한 나를 붙들고는, 어머니께서 꼬깃꼬깃 접어놓은 돈 몇장을 내 손에 쥐어주신다. 내가 늦으면 늦을수록 고통스러운건 할머니일 것이라 생각했다. 할머니가 다칠 생각을 하니 뜰에있는 반딧불이라도 잡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점점 달려가다가 불이켜져있는 가게는 모조리 들어갔던 것 같다. 빵집, 구두 수선집, 이발소... 당연히 전등을 팔 리가 없지. 그래도 일단 한번 들어가보던 차에 환하게 밝혀진 조명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하아....하...”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분께서 나를 쳐다보셨다. 분명 이상한사람 취급할테지...
숨을 가다듬고 조명가게를 재빨리 훑어보았다. 튼튼하고 커다란 전등이 주로 있었는데 내 눈에 들어오는 가격은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돈이면 택도 없을것이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흥정을 하던지 아니면 양초가게를 찾던지 해야했다.
“...저 혹시 남편분께서....”
“...네?”
“그...고자...아니신지..”
당황스러웠다. 그리고 지금 조명가게에 전등사러 온 사람에게 무례한 말이 아닌가 싶었다. 지금 당장 급한 건 사실이지만 여기에서만큼은 절대 사고싶지 않아 다시 가게를 빠져나왔다.
“하....”
밝은 조명가게를 빠져나와 하늘을 올려다봤다. 밤하늘을 아름답게 수놓은 별들이 하늘하늘거리며 나를 응원해 주는 것 같았다. 찬기운이 가득한 공기들이 내 뺨을 어루만져준다. 나는 최대한 빨리 집에 돌아가야 한다. 다만 밝은 것을 손에 들고...
‘아...!’
어떡할지 고민하던 도중 오늘 심부름 도중에 만난 남자가 생각났다. 관악산 근처에 산다는 것 밖에 모르지만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여기서부터 관악산까지는 걸어서 15분정도니까 뛰어가면 금방 갈 수 있을 것이다.
늦은 밤 너무나도 실례지만, 그만큼 내가 더 잘 도와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정신없이 뛰어갔던 것 같아. 그냥 염치없는 사람 하지 뭐. 어차피 해가 뜨면 난 경성사람이 아닐건데.
“계세요..?”
“계십니까? 안녕하세요. ##김여주라고 합니다! 어제 저녁에 뵀었던...”
“박지민씨...?”
관악구 근처를 돌아다녀보니 다 쓰러져가는 아주작은 집이 하나 나왔다. 우체통에는 희미한 글씨로 ‘박지민’이라고 적혀 있어 오늘 만난 그가 확실하다고 여겼다. 사람 두명이 누우면 꽉 찰 것 같은 그 집은 아무 인기척이 없었다.
“뭐야 집도 작은데 자느라 안들리는건가?”
“아니. 집에 사람이 없어.”
“아!!! 죄송합네다..!”
인기척도 없이 다가온 그는 언제부터였는지 내 뒤를 지키고 있었다. 흐리멍텅하게 초점없는 눈은 정상적인 사람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였다.
“여긴 왜 온거지?”
“아...사실 어제 저녁에 가게에서 도움이... 필요하다고 하셔서..”
“....억양이 이 지역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네.. 북쪽에서 내려왔..습니다.”
“...아~”
한참을 생각하더니 나에게 수첩을 하나 건넨다.
“내일 아침 10시. 학생회관으로 와. 문앞에서 기다릴게.”
“네?”
“도움이 되고싶어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닌가?”
“아...근데 저는 지금 당장...”
“기다릴게. 우리 한글회에 들어와.”
“저...그럼 박지민씨는...”
“걔? 이제 없는애야. 찾지마.”
이상한 말만을 남기고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그를 바라보다 정신이 들었다. 지금 아무것도 못할 가족들을 생각하니 도덕성이고 나발이고 이집을 털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집안을 뒤지기 시작했다. 약, 반창고,수건....그리고 전등까지. 모두 보따리에 꽁꽁 싸맨 후 집을 나섰다. 기분이 이상했다. 도둑질을 했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주인없는 집이었다며 나를 이해시키려고 하고 있다. 경성은 참 이상한 곳이다.
-
다행히 할머니께서는 파편들만 조금 맞았을 뿐 커다란 등은 피하셨다. 훔쳐온 전등으로 갈아 끼웠고, 바늘도 모두 찾았다. 밤늦게까지 소동이 일었지만 그래도 다친 사람이 없으니 다행이었다.
“누나..”
“응..”
“옆집에 그 누나친구 있잖아...”
“순이?”
“응...그누나 왜 우리집 안놀러와?”
“아....돈벌려고 일본유학 갔대.”
“누나도 가? 우리집 돈벌러?”
“나...?”
“누나는 가지마.. 나랑 있자.”
“...그래. 마저 자자.”
“내일 이사가면..좀 오래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쉽게 잠에 들지 못하는 동생을 토닥여주며 여러 가지 생각에 빠졌다. 내일 동이 트면 다시는 경성에 발을 들이지 않은 텐데... 그러기엔 박지민씨에게 너무많은 빚을 지고 가는 느낌이고...
-
길고 긴 밤이 지났다. 가족들은 퀭한 얼굴을 하고 아침밥을 먹는다. 아무도 지난 밤 일을 쉽사리 꺼내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만큼 고생했으니 꺼내고 싶지 않을 만도 하겠지... 밥을 다 먹어가던 차에, 아버지께서 호탕하게 웃으신다.
“자자 이사가는 날에 너무 쳐져있지 말고! 액땜했다고 생각하고 우리 이사가서는 잘 살자!”
“네~!”
동생이 씩씩하게 대답한다. 덕분에 가족들은 다시 웃음을 찾은 듯 했다.
“자 이제 출발이다.”
“새 집에서는 적응 잘 해야될 텐데...”
걱정 반 설렘 반을 안고 가족들은 기차에 올랐다. 서울에서 대구까지 가는 우리는 장장3시간을 기차 위에서 보내야 한다. 기차에 올라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어제 밤에 받은 수첩이 떠올랐다.
[한글회 : 민윤기(대구), 김석진(과천), 전정국(부산), 박지민(부산), 김남준(일산), 정호석(광주), 김태형(대구)]
‘김태형?!’
오랜만이었다. 분명 동명이인이겠지만 둘도없는 친구사이로 20년간 지내왔었는데 아쉽게도 다시는 못 볼 사이가 되었지만 그래도 마음 한 켠에는 다시 만나고 싶다는 생각이 잡혀있었다. 어쩌면 당연한 걸지도..
이제는 없는사람 취급하라던 박지민씨의 이름도 보였다. 지금 시각 9시 40분...10시까지 학생회관으로 오라는 그분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마도 지금쯤 나를 만나러 학생회관으로 가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누나.”
“응”
“저기...”
동생이 손으로 가리킨 곳을 확인하니 일본인 순사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한글로 적힌 수첩과 신문을 대충 접어 가방안에 넣었다. 그리고 동생에 기대어 자는 시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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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땠나요? 첫화라 많이 떨리네요....! 암호닉 신청 받습니다 우리 오래오래봐요 ㅎㅎ 〈o:p>〈/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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