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화가 나면 눈과 입을 꾹 닫고 속으로 식히는 습관이 생겼다. 그 습관은 점점 더 자라났고 말 못 할만큼 힘들 때에도, 어딘가 심하게 아파 올 때에도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자 그것은 나를 더욱 더 끌어 당겼다. 어느 날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앞이 안 보이면 좋겠다. 굳이 눈 감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땐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다. 주방을 두리번대다 눈에 띈 주방용 가위를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날을 내 눈이 있는 쪽으로 향하게 한 뒤 팔을 길게 뻗었다. 이 끔찍한 세상을 보지 않게 된다 생각하니 너무 기뻤다. 숨 멎는 고통이 찾아 올 지라도 웃으며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안돼."
자는 줄 알았던 그가 소리도 없이 다가와 내게 말했다. 그리고는 내 손에 들린 가위를 빼앗아 가며 어린 목소리로 종이접기 해야 돼. 하고 덧붙였다.
잔인한 사람은 내가 아닌 그라고 나는 항상 생각한다.
인큐버스
나의 청춘은 꽃답게 죽는다.
장을 보기 위해 마트에 들렸다. 최소한의 양으로 가장 싼 것만 골라 담았다. 하지만 계산대 모니터에 찍힌 숫자는 네 자리가 훌쩍 넘어있었다.
"죄송합니다. 도로 갖다 놓을 게요."
사람들은 무엇이든 욕심 내지 말고 적당히 하는 게 제일 현명한 거라 말한다. 그럼 나는 웃는다. 어이가 없어서. 내 머리가 좋아 욕심을 내지 않는 게 아니라 내지 못하는 거다. 늘 느끼는 건데 그들은 떼지어 몰려 다니는 꿀벌 같다. 벌집을 잘못 건드려 벌들에게 쫓길 때에는 땅 위에 엎드리는 게 선책이다. 밑을 보지 못하니까. 그들 역시 내가 서있는 밑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는 고집을 부린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겠거니.
장바구니에 담은 물건 중 가장 값이 나가는 건 호두를 한 줌 정도 담은 봉지였다. 1년이라는 묵직한 시간 아래 이젠 기대조차 걸지 않는 편이지만 조금만 더 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은 아직까지도 내 안에 자리잡고 있었다.
딱, 이번이 마지막.
부스럭대는 흰 비닐봉지를 가방에 들어갈 정도로 조그맣게 둘둘 말았다. 의사는 분명 견과류가 도움이 될 거라고 했다. 사실 그의 상태가 좋아졌는지 나빠졌는지 나는 모른다. 작년 여름 이후로 한번도 검사를 받지 않았다. 그러질 못했다. 나는 곧장 엘레베이터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엔 CCTV가 없다. 간만의 도둑질이라 긴장이 된건지 손 끝이 파르르 떨렸다. 양심이라곤 털 끝만큼도 남지 않았을 줄 알았는데.
물건을 훔쳤다. 들키지 않았다. 재빠르게 마트를 나섰다.
"왔어?"
익숙한 목소리. 표정. 몸에 배어있는 향기. 앞머리가 자꾸만 내려 와 눈을 콕콕 찔러 두 손으로 눈 주위를 비비는 모습이 그의 머리를 다듬을 때가 벌써 돌아왔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언제 가르치기라도 했나. 내가 집에 돌아오면 왔어? 하고 반기라고.
"모르는 사람이 문 똑똑 했어."
잠시 마트에 다녀온 그새를 못 참고 또 어지럽혀 놓은 집안을 치우던 내 뒤로 그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두 손을 허리에 감싸 나를 세게 끌어안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하지마. 단호히 잘라내도 그는 듣지 않는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항상 제 멋대로.
"하지 말라고. 가."
"싫어."
요즘 들어 두통이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이명현상도 잦았다. 관자놀이 근처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그가 더욱 더 몸을 밀어붙이고는 얼굴을 부비적거렸다. 허리를 꽉 감싸 안고 있던 그의 두 손도 허릿선을 따라 조금씩 올라가고 있었다. 칭얼대는 말투는 분명 아홉 살, 아님 그보다 더 어릴지도 모르는 어린 아이가 분명한데 본능이라는 육체적 충동은 성인 남자에 걸맞는 신체의 범주 안에 속해있었다. 하지 말라니까! 그의 숨소리가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하고 내 허리 주위를 어루만지던 그의 손에 힘이 미세하게 들어가기 시작했을 때, 나도 모르게 그에게 소리를 삑 질렀다.
하지 말라면 하지마…
그가 곧바로 몸을 떼고는 찬 방바닥 위에 쓰러지듯 주저앉은 내 뒤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내게 불평도, 화도 내지 않았지만 나는 변명하듯이 조용히 덧붙였다. 너무 힘들다…
차라리 강아지를 한 마리 주워다가 키우는 게 낫겠다. 하고 나는 늘 생각한다. 그게 아닌가. 지금 생각해보니 김종인만 아니면 그게 무엇이든 좋을 것 같다. 그가 내 뒤에 앉아 제 윗옷을 가슴팍까지 들어올려 주머니처럼 만들더니 바닥 위에 흩어진 블럭들을 그 안에 담았다. 그리고는 힘들지 마. 내가 할게. 작게 말하며 그 주머니 안에 몇 개를 더 주워 담더니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이 뒤돌아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널 보고 있으면 정말 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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