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뭐야? 뭔데 전화기 붙들고 그렇게 부들거려?"
"알 것 없잖아!"
별것 아닌 남자의 질문에 현아는 신경질적으로 대답해.
남자는 그런 그녀에게 별 관심도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더니 이내 냉장고 문을 열어 맥주 한 캔을 꺼내.
현아는 짜증 난다는 얼굴로 그런 그를 노려보고 남자는 그걸 무시하며 소파에 털썩- 앉아.
"집에 안 가?"
시원하게 맥주 캔을 따서 꿀꺽꿀꺽- 들이마신 남자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으며 물어.
현아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치더니 팔짱을 끼고는 그런 그를 노려봐.
그녀가 붉게 칠한 입술을 비틀며 그에게 추궁하듯 말해.
"그러는 넌? 기껏 시켜놨더니 제대로 하고는 있는 거야?"
"뭘?"
"뭘?? 너 지금 뭘??이라고 했니? 너 내 말 콧구멍으로 들어?"
"아- 그건 모르겠고 귓구멍으로는 안 들어"
"야!"
"자꾸 빽빽 소리 지르지 말고 하고 싶은 말 하고 가라- 나 오늘 굉장히 저기압이다"
문득 천천히 고개를 돌리며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의 눈빛에 현아는 이내 입을 꾹 다물며 눈을 흘겨.
그는 티브이를 켜고 전파를 타고 나오는 예능을 보며 언제 정색했냐는 듯 웃어.
씩- 씩- 새어 나오는 화를 애써 누르며 현아는 그의 은근히 비쳐 나왔던 위압감이 싫어 짜증스럽게 머리칼을 쓸어넘겨.
짜증 나는 남자야. 도무지 손안에 쥐고 흔들 수 없는 사람이라고.
원하는 대로 따라와 주는 것 같다가도 제멋대로 가버리는 게 꼭 놀리는 것만 같아.
절대로 자신의 남자가 되어주지 않을 저 남자를 어떻게 이용해 먹을 수 있을까 현아는 머리를 굴리고 있어.
"머리 굴리는 소리 다 들린다-" 티브이를 보며 보기 좋게 웃던 그가 느리게 얘기하며 소파 등받이에 몸을 파묻어.
"알면 좀 시키는 대로 해" 괜히 뜨끔한 현아가 중얼거려.
"내가 왜?"
"내가 도와달라 부탁했잖아, 너는 하겠다고 했고"
"널 위해서 그런 다는 말은 아니었지- 내가 재밌으니까 하는 거라고"
"넌 무슨 인생을 재미로만 사니?"
"그러는 넌? 너는 돈 좀 있는 남자 후리는 재미로 사는 거 아닌가?" 그가 채널을 돌리며 그녀를 쳐다봐.
"야!" 그의 한 마디에 현아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서는 소리를 질러.
"왜? 이렇게 직설적으로 들으니까 기분 상해?"
".....너"
"맞잖아? 돈 좀 많고 의외로 순진한 남자 잡아서 빼먹을 거 빼먹는 거, 그거 네 취미잖아"
"말을 꼭 그딴 식으로 해야겠어?"
"맞는 말이니까-" 그가 씩- 웃으며 그렇게 이야기해. "이번에 잡은 정택운씨는 잘 안 넘어오지?"
"........"
"아! 아니다- 거의 다 넘어왔는데 의외의 복병이 나타난 건가?"
"내가 그래서 너한테 도와달라 그랬잖아, 그년 좀 꼬셔서 정택운한테서 떼어내라고!"
"뭐야- 너 차은성이 그렇게 무서워? 아니면 정택운이 그렇게 갖고 싶어?"
"..........너 진짜 짜증나"
"좀 솔직해져봐, 네가 돈을 좋아하는 건지 정택운을 좋아하는 건지 그건 확실히 하고 가야 할 것 아니야"
그의 정곡을 빼놓지 않고 찔러대는 말들에 현아는 말문이 막혀.
붉으락푸르락 달아오르는 현아의 얼굴은 아랑곳 않고 남자는 다시 티브이로 시선을 돌려.
차가운 맥주 캔에는 송골송골 투명한 물방울들이 흘러내려.
"그래, 돈이다. 돈! 이제 좀 마음이 놓여? 조금만 더 하면 완전 다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단 말이야! 정택운도 돈도!"
"..........."
"처음이란 말이야 정택운 같은 남자는... 근데 그년이 다 망쳐버렸어! 차은성 걔가!"
"......차은성이 무슨 잘못이야- 걔도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랑 정략결혼 한 건데"
"그랬으면 그냥 그런 쇼윈도 부부로 얼마 살다가 이혼하면 되는 거 아니야? 딱 보면 몰라? 어떻게 꼬신 건지 철벽 정택운이 홀랑 넘어갔잖아!"
"오- 그걸 알면서도 아직도 미련을 못 버려? 네 전화도 안 받잖아, 정택운"
"좀 닥쳐 제발"
"말 하는 거 들으면 은근 정택운 진짜 사랑이라도 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어쩔 건데?"
"뭐, 어찌 됐든 차은성이 꼬셔서 정택운이 넘어간 건 아닐걸? 그 여자는 그런 거 잘 못하거든- 귀엽게"
"야! 너 지금 이 상황에서 차은성 편을 드니?" 자신의 진심이 담긴 고백을 어물쩍 넘겨버리는 남자에 현아는 더욱 화가 나서 말해.
"편들 게 뭐가 있어. 내가 언제 누구 편이긴 했나?"
그의 비아냥에 현아는 참지 못하고 가방을 손에 쥐더니 현관으로 향해.
그녀가 이내 구두를 탁- 탁- 소리 나게 신고는 고개를 휙- 돌려 그를 노려봐.
"너나 조금 더 솔직해지시지그래?" 그녀가 그를 쏘아붙이며 말해.
그가 티브이를 끄며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런 현아를 바라봐.
"꼬시라고 했더니 뭘 하고 돌아다니는지 그딴 싸구려 인형이나 들고 오고. 너야말로 차은성이한테 넘어간 거 아니야?"
"..........." 그는 말없이 지긋이 그녀를 바라봐.
"참 대단한 여자네- 아주 이놈 저놈 다 후리고 다니고"
".....아- 쫑알쫑알 더럽게 시끄럽네. 이제 그만 꺼져라, 옛정 생각해서 받아주는 것도 여기까지야"
"뭐?"
"자꾸 귀찮게 찾아와서 떼쓰지 마. 차은성도 이제 내가 알아서 할 거고 네 구린 속 이야기 그 여자한테 할 생각 없어"
"......."
"이제부터 네가 알아서 해, 정택운을 가져버리든 아님 네가 그냥 다 포기하고 떠나든. 참고로 난 전자 추천"
"하!, 그래 너한테 부탁을 한 네가 병신이다 병신! 걱정하지 마! 나도 다 생각이 있으니까!"
"네 네- 어련하시겠어요. 이제 그만 나가고 언제나 그렇듯 제발 다시 보지 말자. 옛 우정도 여기까지다 진짜"
"재수 없어"
쾅-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이내 현아의 구두 소리도 복도 끝으로 희미해져.
그제야 기분이 좀 풀리는지 남자는 다시 티브이를 키며 제 곁에 앉아있는 고양이 인형을 손에 쥐어.
맥주 캔은 테이블에 올려놓고, 물기에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한 번 쓱- 닦더니 두 손으로 그 인형을 손에 쥐어.
"야- 나비야-" 그가 문득 눈꼬리 휘게 눈웃음을 지으며 이야기해.
"내가 널 먼저 주웠어야 했는데 말이야.."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그가 눈을 꾹- 감았다 떠.
"이번에는 내가 데려가게 해주라- 나 진짜 잘 해줄게- 이따위 짓도 그만두고"
그의 목소리가 텅 빈 집안에 그의 심장소리만큼 크게 울려.
재환은 이내 입술을 쭉- 내밀려 인형을 품에 꼭- 껴안아.
그러고 한참 있다가 이내 일어나서는 입에 남은 맥주를 털어 넣으며 혼자 중얼거려.
"매일 재밌게 해줄 테니까 오늘처럼 막 가버리지 말고"
".........나중에 알게 되면 용서도 좀 해주고"
*
초여름의 공기가 그녀를 괴롭히려 코끝에 맴돌아.
은성이는 비틀비틀 힘겨운 발걸음으로 택운을 데리고 현관문을 열어.
꽤나 피곤했는지 헉- 헉- 가쁜 숨을 내쉬며 은성이는 거의 잠에 취한 건지
아니면 취한 척하는 건지 모르겠는 택운을 짊어지고 방으로 들어가.
그녀가 "으앗-" 짧은 소리를 내며 택운의 침대에 풀썩- 쓰러지자
같이 겹쳐서 대자로 뻗은 택운은 뭐가 그리 좋은지 "큭큭-" 즐겁게도 웃어.
은성이는 그런 그가 얄미웠지만 차마 괴롭힐 힘도 없는지 부스스한 머리로 일어나 침대에 걸터앉아.
어느새 웃음을 멈추고 가만히 오르내리는 그의 가슴팍을 바라보다 은성이 그의 어깨에 슬쩍 손을 올려.
"옷 갈아입고 자야죠-"
"....으응 그렇지-"
"알았으면 빨리 일어나서 갈아입고 자요"
"귀찮아"
"그럼 그냥 이 차림으로 자려고요?"
"아니- 갈아입어야지"
"그럼 일어나시죠?"
"싫어---" 그가 여전히 눈을 감은 채로 미간을 찌푸리며 말해. "그냥 네가 해줘"
"해 주긴 뭘 해줘요" 은성이 당황한 듯 눈을 도르륵- 굴리며 말해.
"으어- 머리 아파"
마침내 택운이 미간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짚더니 천천히 일어나 앉아.
그의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은성이는 얼른 일어나서는 '이제 나갈까, 나가야 불편하지 않겠지?'하고 생각해.
그녀가 일어나자 얕은 진동이 침대를 타고 택운에게 전해져.
택운은 마른 세수를 하더니 이내 고개를 들고는 은성을 빤히- 바라봐.
은성이는 그의 그 눈빛을 가만히 마주하다 이내 슬쩍 눈길을 피해버려.
"나갈게요 나가-" 괜한 조바심에 그녀가 그렇게 이야기해.
"....누가 뭐라 그랬냐?" 택운이 괜히 퉁명스레 그녀에게 툭- 던지듯 말해. "물 한 잔만 가져다주라"
".....알았어요" 의외라는 듯 은성이 어깨를 으쓱- 올리더니 이내 방문 밖으로 나가.
택운은 혼자 방에 덩그러니 남겨져서는 마침내 외투를 벗어던지고는 머리를 긁적여.
그러다가 다시 학연에게 쏟아부었던 부끄러운 고백들에 몸부림을 쳐.
진짜 어쩌다가 그렇게 솔직하고 헷갈리는 감정에 관하여 털어놓게 되어 버린 건지 아주 창피해 죽겠어.
그리고 말이야- 너무 힘들어, 차은성을 이렇게 앞에 두고 쳐다만 보는 게.
술에 취한 척 내뱉어버린 그 아릿하고 현기증 나게 어지러운 감정들의 이름이 단 하나로 정의된다는 것을 택운은 너무 잘 알아.
그래서 더 어렵고, 그래서 더 갑작스럽고, 또 그래서 더 아닌 척 괜히 투정만 부리고 있어.
사실은 계속 옆에 두고 함께 하고 싶었음에도 여태까지 그녀에게 보인 모자라고 차가운 행동들을 한 번에 거둬드리기엔 그는 너무 미숙해.
그러니까 계속 사랑하고 있는 줄 모르는 고등학생처럼 툭- 툭- 그녀를 건드리기만 할 뿐이야.
장난인 척, 아니면 그냥 짜증인 척, 괜히 그녀를 찔러보기만 할 뿐이야.
귓불을 새빨갛게 달아올라서 말이야. 바보처럼.
달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택운은 고개를 들어.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들어오는 은성에 택운의 눈동자가 흔들려.
이내 그녀가 그에게 물컵을 건네고 그는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컵을 받아들어.
수만 가지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유영해.
"왜요? 뭐 묻었어요?"
"아.. 아니, 고맙다고"
그의 한 마디에 그녀가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술기운에 그가 친절해졌다고 생각했는지 은성이는 속으로 웃음을 삼켜.
정작 택운은 이상하게 은성을 마주하면 마주할수록 커지는 심장소리에 안달을 하고 있는데 말이야.
물을 다 마시고 택운이 탁상 위에 빈 컵을 올려놓자 은성은 피곤한 듯 눈을 비벼.
그런 그녀를 보며 택운은 침을 꿀꺽- 삼키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괜히 헛기침을 해.
그걸 알 리 없는 은성이는 밀려오는 피곤함에 졸린지 슬슬 꿈나라로 걸어갈 생각이야.
"그럼 이제 잘 자요-"하고 말하고 돌아서는 은성이의 손목을 택운은 빠르게 낚아채.
은성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그런 그를 바라보지만 택운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다만 끌어당기는 힘에 풀썩- 하고 그의 침대에 주저앉을 뿐이야.
"뭐.... 뭐 해요...?" 은성이 괜히 민망해져서 그에게 물어.
택운은 입을 꾹- 다물고 그녀를 쳐다보다가 이내 마음먹었다는 듯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엎어뜨려.
"으앗!"하는 단말마의 비명이 방에 울려 퍼져.
"피곤한데 그냥 자고 가" 택운이 은성을 꼭- 끌어안으며 그렇게 속삭여.
"정택운씨 미쳤어요?" 가까이 느껴지는 그의 숨결에 은성이의 볼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미쳤냐니 말이 심하네"
그렇게 얘기하면서도 택운은 속으론 미친 게 맞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것도 아주 제대로 미쳤다고.
그리고 이제부터라고.
미칠 거면 확실히 미쳐보자고.
"나 차은성이에요! 차은성! 뭔가 착각하고 있는 거 아녜요?" 은성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소리쳐. "다른 여자 아니라고!"
"알아-, 그러니까 차은성 자고 가라고 발버둥 좀 그만 치고"
"취했어요? 취해서 판단이 흐려졌나? 내 방이 바로 옆인데 왜 여기서 자요?"
"와 은근히 막말 잘 하는 거 알아?" 택운은 인상을 쓰며 그녀를 노려보다가 발버둥을 멈춘 은성이의 눈을 빤히 바라봐.
"왜... 왜요.." 민망해진 은성이 그의 눈을 마주 보며 얼굴을 붉혀.
"자고 가"
"....."
"같이"
"...."
"잠만 잘게"
한참 정적과 시선의 교차가 오고 가.
눈길을 놓치지 않고 서로를 빤히 바라보던 두 눈동자가 서로는 모르게 조금씩 흔들려.
문득 은성이의 눈동자가 그 검은 동공과 맞먹을 정도로 깊게 가라앉아.
우울한 목소리로 은성이 택운에게 물어.
"....외로워요....?"
물먹은 솜처럼 방의 공기가 가라앉아.
진지하게 내려앉은 푸른 분위기에 택운도 덩달아 진지한 얼굴을 하고는 천천히 눈을 깜빡여.
그녀의 질문에는 그의 행동의 주어가 자신이라는 생각이 추호도 없어.
택운은 그게 문득 싫으면서도 후회돼서 마음이 쓰라려.
짜증 나.
"아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택운은 말해. "그냥 너랑 같이 자고 싶어"
"....갑자기 왜요"
"......." 택운은 여전히도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입술을 움직여. "그러면 잠이 잘 올 것 같아"
"...거짓말"
"....진심이야"
"나 싫어하잖아"
"누가 그래"
"당신이 그랬어. 처음부터 계속 온몸으로"
그녀의 단호하면서도 아픈 그 한 마디에 택운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
자신에 상처를 스스로 찌르는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은성이는 계속 말을 이어가.
바보 같은 짓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다만 확실히 하고 싶은 것뿐이야.
계속 이렇게 그에게 휘둘리다 휘둘리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싶지 않으니까.
한순간의 충동이나 욕망으로 같은 공간에서 밤을 지새우는 그런 가벼운 사이가 되어버리고 싶진 않으니까.
절대로. 절대로.
"충동적으로 이러지 마요 택운씨. 분명 후회할 거야"
"........"
"당신은 후회하다 끝날지 모르지만 진심인 나는 더 아플 거예요"
그녀가 나긋나긋한 그 목소리로 이야기해.
"나는 너무 아파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게 되어버릴 거라구..."
"..........."
"당신 생각보다 내 진심은 커요. 여리기도 하고. 우리 나중에 후회할 일하지 말아요."
흐트러진 은성이의 머리카락, 침묵 속에서 요동치는 자신의 심장박동 소리를 들으며 택운은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봐.
곧 젖어서 흘러내릴 것만 같이 흐리게 번지는 그 눈동자를 아주 가만히 아주 오랫동안.
그는 이내 눈을 감고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끌어안아.
"후회 안 해"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무게 없는 물처럼 스며들어.
아주 가볍게 그리고 아주 깊숙하게.
".....나도 진심이야"
"........."
"네가 좋아진 걸 나더러 어쩌란 말이야"
*
특별하다 믿었어
넌 내게 특별함이었어
스스로를 설득할 필요도 없었어
널 많이 좋아했어
[가을방학 / 3X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