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여보세요"하고 전화를 받았을 때 "나 좀 도와줘"라 말하던 문현아의 목소리가 생각나.
재환은 그때 괜히 호기심 발동해서 순순히 "뭐 심심하니까-"하고 가볍게 말해버린 것을 후회해.
그리고 비 오는 그날 은성을 만나고 난 뒤, 그 눈빛에, 그 말투에 엮여 "재밌겠는데-"라고 생각해버린 것마저도.
그렇게 쉽게 시작해버리면 안 되는 일이었어.
마치 늪에 빠진 것만 같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답이 없어.
사랑이라는 거 말이야, 그거 원래 별것 아닌 거 아니었나?
그냥 좀 즐기다가 재미 없어지면 헤어지고, 만나다가 아닌 거 같으면 다른 사람 만나는 그런 게임 아니었나?
근데 왜 그렇게 상처받은 얼굴로 빗속을 걸어가는지...
그 발걸음의 무게는 왜 그리 처연한지.
원한 적도 없는 결혼이었으면서.
너는 왜 그렇게도 진심인지.
진심이 도대체 뭔데.
가르쳐줄 거야?
*
마치 시간이 멈춘 것 같아.
은성이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택운을 바라보고, 택운은 그런 그녀의 눈을 마주 보다 이내 그녀를 꼭- 끌어안아.
검은 택운의 머리카락 사이로 불그스레하게 달아오른 귀가 눈에 띄어.
"....와" 단말마의 탄성이 은성이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와. "와아...."
".....시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마"
그녀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로 택운이 중얼거려.
은성이는 입을 꾹 다물고는 그의 품에 안겨서는 어정쩡한 손을 어쩔 줄 모르고 있어.
그러니까 그것 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어.
입을 열어버리면 심장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단 말이야.
반칙이야,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와버리는 거.
그 얼굴로, 그 목소리로, 그 눈으로 이렇게 얘기해버리는 거.
너무한 거 아니야?
이젠 거짓말이라고 해도 믿고 싶어지잖아.
"이제 말해도 돼요?" 한참을 묵언수행하듯 천장만 바라보던 은성이 나지막히 물어.
"아니"
쿵- 쿵- 요란한 소리가 귓가에 들려.
택운에게는 들리지 않을 자신의 심장소리가 자꾸면 울려서 은성이는 머리가 아플 지경이야.
그렇게 심박수를 애써 낮추려 애를 쓰고 있는 은성이의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택운은 그녀를 슬쩍 놓아주며 가만히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봐.
아까의 그 부끄러운 퉁명스러움은 어디에다 치워버렸는지 어느새 꽤나 자신감 넘치는 택운의 표정에 은성이는 조금 긴장이 돼.
거기다가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 애써 맞춰가고 있던 심박수가 갑자기 치솟았는지 은성이의 얼굴이 달아오르기 시작해.
그녀는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다 이내 불편하게 누워서는 뒤척거려.
"편하게 누워 진짜 잠만 잘 거야" 문득 택운이 부드럽게 이야기해.
"아.... 네..." 아직도 얼이 빠진 얼굴로 은성이 어영부영 대답해.
"...야"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택운이 그녀를 불러.
"네?"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그녀의 입술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 택운이 씩- 웃으며 은성을 바라봐.
은성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놀란 얼굴로 그런 택운을 바라봐.
"정신 좀 차리지?" 택운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말해.
"저..정신을 어떻게 차려요? 택운씨가 이러는데" 은성이 진심으로 당황한 얼굴로 얘기해.
"뭐?" 택운은 웃음이 터졌는지 '프하-!' 소리를 내더니 재밌다는 듯 쿡- 쿡- 웃어. "넌 무슨 그런 얘기를 솔직하게 하냐?"
"아, 아니 그게 아니고..."
"얼굴 빨개진 거 봐. 진짜 웃겨"
"놀리지 마요"
"차은성, 의외네 부끄럼도 많고"
"부끄럽게 만들잖아요 그쪽이"
"그쪽이라니 남편한테"
"........남....ㅍ"
"그리고 우리가 처음 같은 침대에서 자는 것도 아닌데, 너무 이러는 거 이상하지 않아?"
"허! 그때는 택운씨가 술 취해서 착각하고 들어와 잔 거잖아요" 은성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쳐. "그래놓고 나한테 뭐라 그러고..."
"이유야 어찌 됐던 그리 내외할 사이는 아니라는 거지"
"먼저 선 그은 건 택운씨거든요"
"알지- 잘 알지" 의외로 순순히 택운이 대답해. "근데 우린 키스도 했잖아"
"진짜.... 어이없어"
"키스할까?"
"잠만 잔다면서요. 그리고 난 이제 당신이랑 키스 안 해요. 당신이랑 키스하면 다른데 가서 공평하게 만들어와야 하잖아"
"진짜 따박따박 속에 담아둔 말 다 하네. 아주 기회지 기회야-"
은성이는 콧등을 살짝 찌푸리더니 택운 쪽으로 돌아누우며 말해. "그럼 기회죠! 택운씨 술 마셨을 때 얼마나 다른 줄 알아요? 이럴 때라도 얘기해야지"
"지금도 취한 것 같아?"
"아주 거하게 취해서 지금 아니면 화풀이할 기회 다신 못 잡을 것 같아요-"
"나 술 다 깼는데"
"거짓말 하지 마요, 내가 집에 들쳐없고 들어온 것 생각 안 나나 봐요?"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술 취한 척한 건지 아닌지"
"장난치지 말고"
"무거웠어? 난 웃겨 죽는 줄 알았네"
"진짜- 안 취한 척하지 말라니까-"
"내가 좀 한숨 자고 일어나면 술이 깨는 스타일이라, 택시에서 내릴 때는 이미 뭐... 제정신이지 제정신"
".....진짜예요...?"
"그럼 가짜냐"
"....욕.....한...거"
"맞다. 너 욕 잘하더라- 무거우면 그냥 쉬었다 가지, 뭐라 그랬더라..'아 씨! 더럽게 무겁네!'였나??"
"으..으으으!!!!"
"아- 또 뭐랬더라- 나쁜새---읍!"
"그만 그만 제발-" 울상이 된 은성이 택운의 입을 턱- 막으며 말해.
"읍-"
"아얏!"
택운이 그녀의 손가락을 깨물자 은성이는 깜짝 놀라며 손을 떼.
택운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그녀를 얼른 껴안더니 은성이의 귓불을 깨물어.
'읏-'하는 가는 신음이 그녀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와.
"자 이제 자자 피곤하다" 그가 그녀의 등을 토닥거려.
"이...이것 좀..."
"뭐" 택운이 그녀의 어깨에 제 얼굴을 파묻으며 그녀의 목을 살짝- 깨물어.
"그, 그만 깨물어요-"
은성이의 어쩔 줄 모르는 중얼거림에 택운은 낮게 웃어.
은성이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손을 꼭 모으고 있어.
택운은 이내 눈을 감고 나른한 목소리로 은성이의 귓가에 속삭여.
"잇자국 안 내고 잠만 자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
뭐야 진짜....
이 상태로 잠을 어떻게 자.
곧 심장이 터져 죽을 것만 같은데.
진짜.
나빴어.
*
아침이야.
진짜 아침, 햇살은 밝고 사월의 꽃향기가 살짝 열린 창틈 사이로 흘러들어와.
은성이는 멍- 하니 침대 위에 누워서는 어젯밤의 일들을 되새기고 있어.
스쳐 지나가 버린, 꿈결의 장난처럼 간지럽던 그의 말들과 새근새근 곁에서 들려온 그 숨소리를 말이야.
잠든 택운의 얼굴이 너무 궁금했지만 차마 부끄러운 마음에 콩닥콩닥 양만 새던 어젯밤.
잊고 싶지 않은 그의 고백과 가벼운 입맞춤도 다.
은성이는 지난밤을 천천히 곱씹으며 슬슬 올라가는 입꼬리에 아랫입술 꼭 깨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아.
쿵쾅쿵쾅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
쿵쾅쿵쾅 계속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아.
"으읏- 으이이익!!!"
은성이 속으로 소리를 삼키며 잔뜩 상기된 얼굴로 콩콩-거려.
택운의 베개를 꼭- 껴안고는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아.
그런 그녀가 부끄러웠는지 핸드폰이 '까톡!'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울려.
은성이는 깜짝 놀라서 얼른 이불을 정리해버리고는 핸드폰을 손에 쥐어.
그러고는 심호흡을 하며 채팅창을 열어.
'차은성 뭐 해'
'그냥 누워있어'
'칼답보소. 일어났는데 그냥 누워있어? 소 되려고?'
'아침부터 맞을래?'
'ㅋㅋㅋ'
홍빈의 가벼운 농담에 은성이는 콧등을 찡그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에 고민하며 문자를 보내.
'사람이 갑자기 변하는 건 왜 그러는 거야?'
'뭐긴 뭐야 미친 거지. 왜 정택운이 갑자기 변했어?'
'뭐야... 너'
'서론만 봐도 답 나와'
'허 귀신같아'
'축하해줄 일인가? 축하해줄 일이면 축하해줄게, 축하해 차은성'
은성이는 답장을 어떻게 해야 할까 조금 고민해.
그리고 그녀가 차마 그 고민을 마치기도 전에 홍빈이 문자를 보내.
'거짓말이야'
'하나도 안 축하해'
'아 갑자기 짜증 나서 그런지 엄청난 피곤함이 몰려온다. 이거 어떻게 책임질 거야 차은성'
'......어?'
'농담이야'
'무슨 농담을 그렇게 해'
'됐고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미친 거야. 아니면 갑자기 변한 게 아니거나'
'... 그것도 아니면 천천히 미친 거고'
'그게 뭐야'
'야 다 필요 없고 나랑 약속 하나만 하자'
'무슨 약속?'
'나랑은 정택운 욕만 해 칭찬은 재미없어'
'...'
'나는 정택운 싫어 별로야'
'근데 네가 정택운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참는 거야'
'그리고 아직 약속은 유요해, 이혼할 때는 나 찾아와 잘 해줄게'
'알겠으면 나 간다! 누구랑 다르게 좀 바빠서ㅋㅋ'
은성이는 무어라 답장을 보낼까 한참을 고민해.
아무리 우정으로 홍빈을 밀어내려 애써도 택운과 현아의 사이를 알게 된 홍빈은 절대 물러설 것 같지 않아.
하긴 누가 가만히 참을 수 있겠어, 자기는 아까워서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사람인데,
잘났다고 결혼까지 해서는 다른 여자 만나는 현장을 제대로 보여줬으니 말이야.
은성이 홍빈에 관한 고민에 한숨을 푹- 푹- 내쉬고 있자 달칵- 문 여는 소리가 들리더니 택운이 나른하게 방안으로 걸어들어와.
생각에 빠진 은성이는 액정이 꺼진 핸드폰을 들고는 손톱을 물어뜯어.
택운은 그런 그녀에게 다가가서는 그녀의 손목을 잡아.
은성이 놀랐는지 고개를 들고 택운을 바라봐.
"손톱 좀 그만 물어뜯어"
"언제 들어왔어요?"
"너는 무슨 생각을 하길래 들어온 지도 몰라?"
"아... 별것 아니에요"
택운은 그녀의 손에 쥐여진 핸드폰의 검은 화면을 바라보다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을 흘겨.
괜히 전에 잠금을 풀어보려다가 굴욕 아닌 굴욕 당한 걸 생각하면 아직도 분이 안 풀려.
"오늘도 출근 안 해요?"
"안 해"
"그럼 뭐 하게요?"
"글쎄"
은성이의 동글동글 궁금증 가득한 눈동자를 택운은 가만히 바라봐.
그러더니 이내 씩- 웃으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
아- 여간 적응이 되지 않아. 웃는 그의 얼굴이 너무 좋아서 적응이 되지 않아.
아마 평생을 봐도 계속 두근거릴 것만 같아.
"나가자 날씨도 좋은데"
자신의 손을 잡고 일어나는 은성을 보며 택운이 이야기해.
"너 산책 좋아하잖아. 데이트나 하자"
그녀가 웃는다.
엄청 예쁘게.
*
그렇게 쳐다보지 마세요
그러다 당신의 맘속에 자리를 틀겠어요
[연왕모 / 낯익은 그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