챙그랑, 칼이 떨어졌다. 날카로운 금속이 바닥에 부딪히며 저 멀리 날아가 떨어졌다. 차갑게 식어가는 남자의 몸에서 피가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피는 바닥을 삽시간에 붉은 빛으로 물들였다. 역한 쇠 비린내가 피어 오르는 집 안에서 동이 터 오는 것을 멍하니 보며 있던 백현은 제 손목에 채워진 수갑을 한 번, 피가 잔뜩 묻은 손을 한 번, 그리고 남자의 피를 완전히 뒤집어 쓰고 있는 제 몰골을 보고는 허탈함에 픽 웃었다. 이렇게 쉽게 끝나는 일이었던가. 백현은 인터폰을 칭칭 감싸고 있는 테이프를 저만치 떨어진 칼을 집어 잘라 내곤 수화기를 집어 들며 생각했다. 뭐라고 얘기하면 될까. 하다가 이내 작게 고개를 흔들었다. 지금 시간에 경비원이 있을 리가. 하다가도 다시 인터폰으로 시선을 두던 백현이 끝내는 수화기를 집어 들고 발신 버튼을 누른다. 몇 번의 신호가 흘렀다. * * * 상흔 w. Duet * * * 백현은 끝내 받지 않는 수화기를 내려놓고 망연하게 다시 주저앉았다. 철퍽, 하고 끈적한 소리를 내며 남자의 피가 제 나신에 얼룩졌다. 백현은 혐오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보다가 이내 알 수 없는 치기에 남자의 머리를 수갑을 찬 손으로 몇 대 내려쳤다. 남자의 몸이 움찔거리며 경련했다. 백현은 이내 모든 행동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에 앉았다. 피가 묻은 맨 살이 소파 가죽에 미끄럽게 쓸렸다. 백현은 한숨을 쉬었다. 나는 결국 살아 나가는 거구나. 그럴 수 있는 거구나. 생각하니 안도감과 동시에 드는 공허함에 눈물이 터졌다. 백현의 마른 얼굴 위로 눈물이 계속해서 흘러 나왔다. 입 안으로 흘러드는 눈물의 맛이 짰다. 한참을 울던 백현은 날이 완전히 밝아 올 시간이라는 것을 알고는 이내 공포감에 휩싸였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아까는 그저 밀려오는 안도감만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 다시 생각을 해 보니 두려웠다. 백현은 갑작스럽게 세간의 관심을 받고, 세상에 떠밀려 다니게 될 것이었다. 그 것이 두려웠다. 이미 커 질대로 커져버린 사건은 이미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자잘한 입소문을 타고 와전되어 이상하게 변질이 되어 있을 거다. 백현은 솔직히 후자가 더욱 두려웠다. 그의 뒤를 영원히 쫓아다닐 수식어들. 그 수식어가. 백현은 이내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은 수화기를 다시 집어 들었다. 발신 버튼을 누르자 단조로운 신호음이 흘렀다. 백현은 울음을 삼켰다. 최대한 태연해야 한다. 신호가 끊기고 어눌한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하고 묻는 소리에 다시 툭 울음이 터진 백현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끄흑, 흑. 주체하지 못하고 터져 나오는 울음에 상대방이 당황한 듯 왜 이러냐며 물었지만 백현은 계속 울 수밖에 없었다. 백현은 울면서 말을 뱉었다. "…경찰, 끅. 경찰 불러… 우으, 주세요…. 흐으, 윽." - "예에, 경찰이요?" "…여기." 사람이 죽었어요. * * * 삽시간에 좁은 방 안으로 여러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집 문 앞은 손쉽게 열렸고, 문 바깥으로 노란 폴리스 라인이 쳐졌다. 플래시가 사방에서 터져 들었다. 담요를 둘러 주며 제 몸을 숨기기에 급급한 사람들 사이에서 백현은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마이크를 들이대고, 커다란 렌즈를 들이대는 사람들 사이로 언뜻 제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백현은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행동은 제 주위에 선 사람으로 인해 저지당했다. 백현은 고래고래 소리질렀다. 소리는 여러 사람들의 소리가 섞여서 묻히기 일쑤였다. 백현은 제 몸을 감싼 담요를 더욱 여미며 손을 내밀었다. 핏자국이 잔뜩 묻어 있는 손이 기괴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 손은 다시 밀어 넣어졌다. 자꾸만 백현의 행동을 과도하게 저지하는 사람들 덕에 백현이 이골이 나기 시작했다. 저 바깥에서는 어머니가 실신할 듯 울어제끼고 있었다. "우리 백현이, 내 아들 백현이…! 어흐으, 백현아, 백현아…." 하지만 그 소리도 사람들 사이에 묻혀 금방 없어졌다. 집 안을 돌아다니던 사람들 몇명이 다시 제 옆에 떡 버티고 선 사람에게 뭐라 말을 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던 백현이 이내 뭐라고 말을 하려 입을 여는 순간 입이 막혔다. 그는 제 옆에 버티고 서 있던 훤칠한 사내에게 붙들려 밖으로 내보내졌다. 엄청난 인파가 그들을 가로막자 그가 고함쳤다. 공무 집행 방해로 다들 콩밥 먹고 싶습니까, 하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소리치자 주춤주춤 물러서며 길을 터 내는 사람들의 사이로 백현은 사내의 등에 업혀 사람들 사이를 빠져 나갔다. 뒤에서는 아직도 가족들이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우리 백현이 내 놔요, 내 놔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백현은 멍한 눈으로 고개만 뒤로 돌려 오열하는 가족들을 보았다. 그리고는 눈을 감았다. * * * "아, 미치겠네." 남자는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손에 든 파일을 책상 위로 내던졌다. 팡, 소리를 내며 책상 위로 세게 내려앉은 노란 파일 사이에 끼워져 있던 종이가 촤르르 흩어졌다. 남자는 밝은 갈색의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 슥슥 정리하며 제 앞에 앉은 아이를 보고 있었다. 아이는 멍한 눈으로 안을 훑고만 있을 뿐이었다. 아이의 앞에 조심스레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름은. 하자 아이의 빈 눈이 제 쪽을 향했다. 그리고는 한참이나 머뭇거렸다. 그가 재촉하는 듯 눈썹을 위로 치켜 올리자 그제서야 아이는 떠듬떠듬 입을 떼었다. 변…. 변백현이요. 그러자 남자가 종이를 한 장 끌어 당겨 제 앞에 놓고서는 겉옷 주머니에 꽂힌 펜을 하나 들어 슥슥 휘갈겼다. 변백현. "저기…." "엉?" "저, 뭐 부탁 하나만…, 해도 돼요?" "그게 뭔데." 씻고 싶어요. 하고는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아이의 손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그것을 뒤늦게 알아 챈 남자는 심문실 밖으로 나가 물티슈 한 통을 공수해 아이의 앞에 내밀었다. 샤워실을 쓰기는 쪼금 뭐 하니까, 이거라도 써서 먼저 닦고 있어라. 하고는 몇 장을 뽑아 건네주자 아이는 얌전하게 받아 들고서는 제 손가락을 슥슥 문질러 닦았다. 남자는 그런 아이를 살폈다. 아직은 질문을 할 때가 아닐 것이다. 아마 지금 아이는 굉장한 충격에 휩싸였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남자를 가만히 보던 아이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형 잘생겼어요. 하자 남자의 얼굴이 훽하니 들린다. 백현은 또 머쓱하게 웃더니 제 얼굴에 튄 핏방울을 닦아 내며 묻는다. 형은 이름이 뭐예요, 하니 남자가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한다. 박찬열이고, 형이 아니라 형사님이라고 불러라. 하고서는 종이에 연신 펜으로 무언가를 휘갈겨 쓰는 그의 눈치를 살피던 백현이 또 조심스레 입을 연다. "저기, 형사님." "또 왜." "제가 배가 고파서 그러는데…." "……." "먹을 거, 없을까요…." "…이거 먹어라." 하고 찬열이 던진 것은 주머니에 든 ABC초콜릿 몇 알이었다. 백현은 초콜릿을 보더니 몸을 퍼드득 떨며 저만치 밀어냈다. 초콜릿은 싫어요, 싫어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울음이 잔뜩 섞인 목소리로 씹어뱉는 백현에 찬열은 당황한 기색으로 책상 위에 던져졌던 초콜릿을 집어 다시 주머니에 넣는다. 그리고는 부드럽게 물었다. 초콜릿이 왜 싫으니, 하자 아이가 이를 딱딱 부딪히며 말했다. 그 사람이 맨날 먹으라고 던져 준 건, 초콜릿과 물 뿐이었어요…. 아이의 말문이 툭 트이기 시작하자 그 후로는 청산유수처럼 제가 당했던 것들을 낱낱히 고하기 시작했다. * * * 아이의 진술을 모두 들은 찬열은 분노로 치를 떨었다. 심문실 밖을 뛰쳐 나오며 그가 소리쳤다. 이게 사람이가! 흥분할 때 튀어나오는 그의 사투리가 강력1반의 파티션 안에 웅웅 울렸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찬열은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던지며 씹어뱉듯 말했다. 점마가 지금까지 살아있는 게 용하다. 하고서는 주머니에 든 담배를 신경질적으로 무는 찬열에 옆 자리의 사람이 실내에선 금연이라며 농을 던졌지만 찬열은 농을 받을 기분이 아니었다. 어떻게 저런 극악무도한 짓을 당하고도 저렇게 멀쩡할 수 있는 건지 찬열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는 한 편으로 안쓰러워지기 시작했다. 사건이 너무나 커져버린 이 시점에서 아이가 함부로 입을 연다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찬열은 입술을 지근지근 씹으며 고민했다. 일단은 사건과 관련된 모든 것을 비밀에 부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한 그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텔레비전에는 벌써 큼지막한 헤드라인이 뜨고 있었다. 「안산 고등학생 납치ᆞ감금 사건 피해자 생환」 「안산 고등학생 사건 가해자 숨진채로 발견… 원인은 피해자의 저항으로 추정」 찬열은 한숨을 쉬며 핸드폰에 귀를 갖다 대었다. 신호가 몇 번 갔지만 이내 몇 초 뒤에 여자의 목소리만이 찬열의 귀에 와 닿았다. 찬열은 에라이, 하고 신경질을 내며 핸드폰을 바닥에 내던졌다. 뒷 커버가 뜯겨져 나가며 배터리가 분리되었다. 자리에 앉은 찬열이 신경질적으로 다시 머리를 헝클었다. 갈색빛의 부드러운 머리가 사정없이 뻗쳤다. * * * 백현아, 백현아! 커다란 고함이 그의 머릿 속을 파고들며 웅웅 맴돌았다. 백현은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뜨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는 제 앞에 버티고 선 제 형의 모습에 눈을 완전히 뜨고는 다시 주위를 휙 훑었다. 가족들이 제 앞에 서 있었다. 잔뜩 그늘진 얼굴을 하고 백현을 안쓰럽게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백현이 말했다. 엄마. 라고 내뱉자 그의 어머니가 그를 터질듯이 끌어안으며 거센 울음을 터뜨렸다. 아이고, 아이고…. 내 아가…. 백현을 품에 안고 목놓아 우는 제 어머니를 백현은 외려 제가 위로했다. 괜찮아 엄마, 나 여기 살아 있잖아. 하며 제 어머니의 등을 쓸어 내리는 백현에 제 형이 울음을 참으며 고개를 돌렸다. 무릎을 꿇은 아버지가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며 연신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정작 울어야 할 백현은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고, 내 새끼…. 내 강아지, 끄윽, 으으…." "……." "엄마가 미안해…." "……." "그런 험한 짓 당하게 해서, 우흑, 엄마가…, 엄마가…." 백현의 어머니는 끝내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엉엉 목을 놓아 우시는 것이었다. 백현은 그런 엄마의 품에서 한참을 안겨 있었다. 실로 오랫만에 느껴 보게 된 따뜻한 사람의 온기였다. 백현은 제가 처한 상황도 까맣게 잊고 바스스 부서지는 웃음을 지었다. 백현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런 백현의 비뚜름한 미소를 보지 못했다. * * * "형사님." "…와 부르나." "이거…, 정당방위 맞죠? 그런 거죠?" 제 눈을 똑바로 보며 말하는 아이의 눈에 찬열은 은근슬쩍 시선을 회피하며 말했다. 뭐, 특별한 경우가 없으면 그럴 끼다. 하고는 반쯤 떡진 머리를 긁적이며 덧붙였다. 일단은 그 미친놈 부검 결과 나와 보믄 알깃제. 계속해서 사투리를 뱉어 내며 진술서를 물끄러미 보던 찬열이 백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안쓰런 놈. 백현은 눈동자만 굴려 그의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그의 팔에 의해 가려진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잔뜩 처진 얼굴을 하고 저를 보고 있을 것이라 대충 판단한 백현이 욱신거리는 한 켠을 애써 누르며 눈을 감았다. 찬열은 씻지 못해 잔뜩 기름이 낀 그의 머리를 손으로 쓸어 주며 말했다. 일단은, 가족한테 돌려 보내 줄 테니까…. 마음 추스리고 다시 우리가 부르면 와 줘야 해. 찬열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백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 듀엣입니다. 여기까지가 미리 준비해 둔 분량입니다. 하루 안에 세 편이나 올라와서 많이 놀라셨죠. 이 픽션은 찬백이 아닙니다. 오백입니다. 다만 경수가 아직 등장하지 않았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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