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똥. 개새끼. 키 얘기만 나오면 존나 지랄이야."
민석이 중얼거렸다. 키 얘기에 유난히 민감한 백현이었기에 백현이 저를 놀릴 때 마다 자주 써먹던 방법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쫓겨나긴 했지만, 난 내 할말 다 했고 변백현도 놀렸고. 아주 후련하구만. 민석이 한껏 가벼운 발걸음으로 반에 들어서자마자 돌아나왔다. 옴메야. 깜짝이야. 루한 저자식 왜 또 반에 붙어있는데. 맨날 싸돌아 댕기다가. 민석이 문을 쾅 닫고 나와서 문에 기대 섰다. 찌질이같고 병신같지만 난 씹쌔야가 무섭다. 저 노란 머리 무섭다고. 안그래도 방금 내놔의 후유증이 가시지 않았는데 옆에 앉았다가 뭔 꼴을 당하려고. 안돼. 안돼. 매점이나 잠깐 들렸다 와야겠어. 수업종 치면 또 자겠지, 뭐.
민석이 발을 돌려 매점을 향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발걸음이, 누군가에 의해 저지되었다. 우악스럽게 잡아챈 어깨가 힘없이 딸려왔다. 민석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굳었다.
"안녕. 만두."
상또라이, 박찬열이 직접 행차하셨다.
찬열이 아이같이 웃었다.
*
"뭐 먹을래, 만두야."
"어.. 저기.. 나는.."
"오감자? 우리 오감자 먹을까?"
"..아니.. 그게.."
"아, 치토스 먹을래? 그거 짱 맛있는데."
"아니.."
"사양말고 먹어. 오감자랑 치토스. 왜냐면 내가 제일 좋아하니까."
씨발아, 포카칩 먹고싶다고. 막무가내로 던져줄꺼면 물어보지도 말던가. 아니를 몇번이나 말했는지 모르겠다. 역시 박찬열. 주위에 그 누구의 말도 듣질 않는구나. 민석이 조용히 오감자와 치토스를 뜯었다.
찬열은 매점 의자에 앉아서 민석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만두스럽게 생겼네. 왜 변백현이 만두, 만두 하는지 알겠다. 찬열이 다시 웃었다.
"안뜯어줘도 되는데."
민석이 정색했다. 씨폴. 왜 다 뜯고 난 다음에 말하고 지랄이야.
"그 표정 마치 왜 다 뜯고 난 다음에 말하고 지랄이야, 라고 말하는 표정같은데 내 착각이겠지?"
미, 미친. 존나 독심술쟁이네. 장난기 가득한 찬열의 말에 민석이 화들짝 놀라서 눈을 또륵또륵 굴리다가 눈치를 보며 아양을 떨었다.
"무슨 그런 말도 안되는 소리를 하고 그래.."
민석 또한 강자에게 약했다.
*
"니가 우리 루한이 짝지라며."
"뭐, 어쩌다보니.."
민석이 조심스럽게 치토스를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이 압박감. 이 부담스러운 시선들. 아까부터 몰려드는 눈초리들에게 두손 두발 다 들었다. 신기하겠지. 박찬열과 김민석이라. 이 무슨 부조화람. 그리고 내 앞에서 싱글벙글인 박찬열도 의심스러워 죽겠다. 상또라이님께서 내게 무슨 볼일이 있어서 이리 과자를 사주시는가. 나 뭐 잘못했나? 민석이 괜히 눈치가 보여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그게 왜?
"너 아까부터 왜 자꾸 불안한 똥개새끼마냥 그러고 있어?"
얼굴은 순진무구 그 자체였지만 말은 아주 그냥 꽈배기 비꼬듯이 억세게도 비꽜다. 민석은 이 말이 자신을 비꼬는건지 아니면 정말 순수한 물음 그 자체인지 헷갈렸다. 이거 뭐 어떡해아해. 민석이 삼초간 빠르게 고민하다 솔직하게 말했다.
"주, 주위 시선이 좀 많네. 부담스러워서."
"아, 그래?"
찬열이 아까 사온 오감자를 봉지째 털어넣었다. 그리고 구겼다. 뭘? 오감자 봉지를. 왜? 다음과 같은 행동을 보여주기 위해서.
찬열이 똘똘 싸맨 오감자 봉지를 원숭이 우리마냥 둘러싸고 있던 인파들에게 던졌다. 꺅!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저거.. 여자애한테 맞았는데. 그것도 우리 학교 자칭타칭 여신 3학년 선배한테. 괜찮으려나.
민석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어떡하냐. 하필이면 저 앙칼진, 존나 성격 드러운 선배한테. 민석이 소곤거렸다.
"야야. 선배한테 맞았어."
"알아."
"..괜찮다고?"
"어. 괜찮아. 내 여친이거든."
스물 한번째. 찬열이 씩 웃어보였다. 민석이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일부다처제라도 된단 말이냐. 민석의 어이없는 웃음과는 달리 3학녀 선배는 곱게 오감자 봉지를 주워들어 교실로 향했다. 하. 찬열이의 따뜻한 손길이 닿은 쓰레기 봉지라니. 오늘은 운이 좋다. 여선배가 쓰레기를 주워들고 총총 걸어가는 것을 보며 수많은 인파들은 조용해졌다. 왠지 찬열의 기분이 슬금슬금 아래로 가는 것 같다. 그리고 찬열의 마지막 한마디는 매점에 개미새끼 한마리도 돌아다니지 않을 정도로 만드는데 겨우 십초 안팍밖에 걸리지 않는 신기록을 세우며 허공에서 흩어졌다.
"쌥새들아. 우리 만두가 시끄럽대잖아."
그리고 민석은 절규했다. 이런, 씨팔. 학교 조용히 다니기는 글렀구나.
*
우리 만두, 오빠한테 전화해! 알았지? 휭하니 이 말만 싸제껴놓고 총총 사라지는 찬열을 멍청하게 보던 민석이 제 휴대폰을 들고 서있었다. 이런. 휴대폰 번호까지 줘버렸네? 아이, 신나라. 시발. 졸지에 핸드폰 번호까지 팔린 민석이 휘청거리며 교실로 들어섰다. 이게, 이게 뭐야. 나 지금 박찬열이랑 친구 먹은거임? 이제 나 일진임? 검은 머리칼을 세게 헤집으며 자리에 앉은 민석이 엎드렸다. 이게 뭐냐고. 내 목표는 그 누구에게도 밉보이지 않고 미움 주지도 않으며 조용하게 학교 생활을 마무리 하는 거였는데! 이놈의 전학생이 나의 고등학교 라이프를 다 망쳐버렸다. 민석이 작게 중얼거렸다.
"이게 다 루한, 저자식 때문이야."
애초에 내가 루한이랑 같은 자리에 앉지 않았더라면! 상또라이가 나한테 접근할 이유도 없었을테고! 나도 그냥 변백현이나 다른 평범한 애들이랑 도란도란 얘기하고! 평범한 고딩생활을 유지할 수 있었을텐데! 민석이 엎드린 몸을 더욱 웅크렸다. 흐아. 한숨이 터졌다. 막막하다. 민석이 고개를 들어 루한을 째려보았다. 여전히 휴대폰만 띵가띵가 두드리며 고개를 숙인 루한이 그렇게 짜증날 수가 없다. 그런데도,
저저, 기지배같은 속눈썹하며, 굵지만 예쁘게 진 쌍꺼풀에 민석의 시선이 머물렀다. 예쁘다. 그저 이 한마디로 족할만큼 더이상의 수식어가 필요하지 않은 오목조목한 얼굴이 곧게 떨어졌다. 민석의 가슴께에서 콩,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때, 루한이 고개를 들었다.
민석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눈을 피해야 하는데 눈동자가 돌아가질 않는다. 왜이래. 이거 미쳤나봐. 루한의 눈도 민석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신비롭고 몽환적 이기까지 한 두 사이의 기류가 팽팽헤졌다. 톡, 하고 건들면 와장창 하고 깨질 것 만 같아 민석은 숨소리도 엷게 뱉었다. 그리고 고무줄처럼 쫙 당겨진 공기를 놔버린건 루한의 말이었다.
"뭘 봐."
민석은 생각했다. 좆같은놈. 내가 미쳤지.
또라ㅇ ㅣ 조아여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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