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마음을 시큰거리게 만드는 벚꽃이 피는 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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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공부를 손에서 놓고 있었던 17살. '감정'이라는 것의 정의가 너무도 쉬웠던 나이.
쉽게 말해서 오는 사람은 안 막고 가는 사람은 안 잡았던 그런 시기가 있었다. 인기가 많아 부럽다는 친구들의 시선을 즐겼다거나, 괜히 어깨가 으쓱해져 내가 뭐라도 된 것같은 그런 기분을 만끽했던 건 전혀 아니었다. 난 그저 남들보다 좀 많이 무신경한 성격이었고 누굴 잘 챙겨주는 습관이 없었기 때문에 의도치않은 이미지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정말 단순하게 살았다. 내가 좋다며 고백하는 아이를 거절하지 않았고, 힘들다며 떠나는 아이를 붙잡이 않았던 건,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결론은 난 그런 학생었다.
우리 학교는 봄이 다가오면 벚꽃이 만개하기로 소문난 명소였다. 여러가지의 색을 띈 얇은 꽃잎들이 바람에 흩날려 운동장을 장식할 때에는 지나가던 사람들도 한 번씩 카메라에 그 모습을 담을 만큼 예뻤다. 아마 그날도 운동장은 떨어진 벚꽃잎이 수북하게 쌓여 학교 경비 아저씨가 고래고래 욕을 하셨던 것 같다. 나는 전날에 밤을 지새며 소설책에 빠지느라 눈이 뻑뻑해진 상태였고, 결국 피곤함을 이길 수 없어 선생님 몰래 수업을 빠져나와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그 어린 나이에 무슨 책을 그리도 재미있게 읽었느냐 묻는다면, 아마 기억하기로는 그 책의 제목이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였던 것 같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방송에 나와 추천하기에 아무런 생각없이 사서 읽었던 소설. 첫 시작부터 쓸데없이 음란했던 그 소설은 어째서인지 내 시선을 끌어당겼고, 결국 난 두껍지도 않았던 그 소설에 잠을 빼앗겨 평소에는 쓰지도 않던 인공눈물을 챙기게 만들었다. 특별한 재미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다만 좀 심하게 빠졌을 뿐.
밖은 꽤나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저 멀리서는 누가 고백에 성공이라도 했는지 창문에 매달린 학생들의 환호성이 크게 들렸다. 미간을 구기며 대충 벤치에 엉덩이를 걸치니 따뜻한 꽃내음이 코를 찔렀다. 시끄럽네. 이깟 꽃잎이 뭐라고 예쁘다며 난리통이지. 그때 학교에서는 벌점이 쌓인 학생들에게 운동장 청소를 자주 시켰는데, 벚꽃으로 명소가 된 우리 학교에서는 굉장히 큰 고문이었다. 저 많은 꽃잎들을 쓸어서 봉투에 담는 과정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모른다. 그래서 난 벚꽃을 제일 싫어했고, 그 중에서도 우리 학교 운동장의 벚꽃나무를 가장 싫어했다. 특히 학교를 올라오는 오르막길에 세워진 가장 큰 벚꽃나무는 아마 우리 학교 문제아들에게 공통적인 적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리에서 일어나 가장 큰 벚꽃나무 아래로 걸어갔다. 그 밑에 침을 뱉고 신발로 벅벅 긁었다. 에이 더러워, 괜한 투정을 부리면서도 나무 아래를 떠날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사실 지금도 그때의 내가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분풀이를 했다. 그리고 바람이 한 번 더 불었다.
옅은 복숭아 향에 고개를 돌리자 처음보는 남자가 서있었다. 흩날리는 벚꽃잎에 얼굴을 가려 제대로 볼 수 없었지만 대충 내 또래의 남학생이었다. 내가 한 행동을 봤을까, 어린 마음에 덜컥 겁부터 났더란다. 그리고 뒤늦게 몰려온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져 고개를 숙이자 바람이 그쳤다. 나와 그의 사이를 갈라놓던 벚꽃잎이 그 순간만큼은 그립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내 얼굴은 어떤 모양새일까, 굉장히 우습지는 않을까. 주위에 무신경하다는 내가 처음으로 남의 시선에 얼굴을 붉혔고, 고개를 숙였고, 그토록 싫어하던 벚꽃잎을 그리워했다. 나는 낯설게 몰아치는 그날의 감정들을 아직도 표현할 수가 없다.
바람이 한 번 더 불고, 문득 남자아이의 얼굴이 궁금해져 고개를 살짝 들었을 때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잠시 헛것을 보았을까, 하지만 바람을 타고 스며든 옅은 복숭아의 향기는 헛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어쩐지 많이 달콤하고 애틋한 그런 향기였다.
*
그렇게 하루가 지났다. 교복에 묻은 벚꽃의 향기를 없애기 위해 아침부터 부지런히 뛰었지만 모두 헛수고였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닦으며 자리에 앉으니 친구들은 또 다시 재미도 없는 얘기들로 내 주위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어제 학교 뒷문 근처에서 누가 고백했다더라. 아, 그럼 어제 그 시끄럽던 환호성이 그 때문에 난 소리겠구나. 그리고 어제 다른 벚꽃나무 아래서 누가 차였다더라. 아, 그 사람은 많이 힘들었겠구나. 대충 고개를 끄덕이다 책상에 엎드렸다. 더이상 너희와 대화를 할 생각이 없으니 이만 돌아가달라는 무언의 부탁이었다. 하지만 그 멍청한 것들은 애초에 난 안중에도 없었던 모양인지, 어제는 누가 그랬고 그제는 누가 그랬다고 남 얘기로 침을 튀기기에 급급했다. 날이 더워 열어둔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은 잔뜩 뜨거워진 온기를 머금고 있었다.
- 다들 자리에 앉아라. 전학생이다.
엎드려 보이지 않는 칠판쪽에서 들리는 담임의 굵은 목소리가 유독 짜증이 났더란다. 괜히 엄한 곳에다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아 엎드린 자세를 더 웅크렸다. 전정국입니다, 간단하게 자기 인사를 끝낸 전학생은 발걸음을 옮겨 제 자리로 찾아가는듯 하였고, 담임은 날도 더운데 괜히 전학생 괴롭히지 말라는 말과 함께 교실을 나갔다. 내 주위를 맴돌던 시끄러운 녀석들은 순식간에 전학생의 자리로 몰렸는지 조용해졌고, 나와는 반대편에 위치한 자리가 시끄럽게 울리기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이게 더 낫지. 웅크린 몸을 더 깊게 말아 팔로 얼굴을 감싸며 생각했다. 오늘 내 기분은 모두 날씨 탓이라고.
그러다 깜박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귀를 파고들자 나는 언제 잠에 들었냐는 것처럼 개운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에 있던 녀석들은 한 일주일 굶었는지 종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식당으로 달려갔고, 나는 평소처럼 가방에서 작은 크림빵을 꺼내 포장지를 뜯고 있었다.
- 안녕.
당황스러웠다. 이 시간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교실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먼저 놀랐고,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코를 찌르는 익숙한 향기에 다시 놀랐다. 분명 어디서 많이 맡아본 향이었는데. 뜯다만 포장지를 책상에 내려놓으며 고개를 돌리자 처음보는 남학생이 내게 인사를 하고 있었다.
- 오늘 전학왔어. 전정국이야.
전학생. 그래, 아침에 왔던 그 전학생이 틀림이 없었다. 그런데 왜 얘가 지금 나한테 인사를 하고 있지?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정국이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런 내 표정이 웃겼는지 작은 실소를 내뱉은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악수를 청해왔다. 지금 저 손을 잡으면 내가 좀 이상한 애가 될 것 같고, 그렇다고 안 잡자니 전학생이 많이 무안할 것 같고, 결국 빵봉지를 내려놓고 손을 잡았다. 열린 창문으로 뜨거운 바람이 한 번 더 들어왔다. 눅눅해진 빵봉지의 부스럭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던 것 같다. 뚫어져라 눈을 마주치던 남학생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묘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손을 흔들었다. 그게 우리의 첫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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