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경수가 일어났을 땐 이미 오후였다. 한기가 서린 바닥이었지만 몸에는 푹신한 담요가 둘러져있었다. 이런 배려가 익숙했는데 이제는 그렇지 않았다. 백현은 경수에게 정말 다정한 사람이었던 적이 있다, 한때는. 백현을 처음 만난 것은 1월 어느 눈이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졸업 후부터 천천히 써왔던 중편 소설이 완성되고 그것을 투고하러 가던 날이었다. 미팅시간은 2시였지만, 폭설 때문에 경수는 30분이나 늦어버렸다. 체념하고 돌아서려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백현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검정색 긴 코트와 장우산을 들고 건물 앞에 서있는 그는 시계를 흘끔흘끔 거렸다. 설마 싶은 경수가 전화를 걸었더니 검정색 남자가 건너편에 있는 경수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밝게 웃으며 경수가 건너편에서 올 때까지 기다렸다.『추운데 몸 좀 녹히고 가세요.』아니에요. 경수는 거절했지만 재차 묻는 백현 때문에 회사에 발을 얹혔다. 백현이 안내한 곳은 손님맞이 방도 사람들이 많은 사무실도 아니었다. 그곳은 백현만을 위한 개인 사무실. 자신보다 한두 살 어린 이 남자의 개인 사무실 안에서 경수는 자신이 작아짐을 느꼈다.백현은 경수에게 겉옷을 벗을 것을 요구했고 그 위에 담요를 덮어주었다. 어정쩡한 자세로 서 있던 경수를 자리에 앉히고 그 앞에 따뜻한 차를 내밀었다. 백현은 그 앞에 마주앉아 팔을 괴고 경수를 보며 미소 지었다.『이 회사, 저희 아버지 거예요.』『네...』『그래서 저만 개인 사무실이 있어요. 그리고 경수씨. 뜨게 할 능력도 충분하구요.』 자신의 원고를 읽지 않았으면서 바로 계약서를 내미는 백현을 보고 사기를 의심했었다. 그러나 출판업계 최정상에 머물러 있는 회사인 만큼 경수는 바로 사인을 했다. 그렇게 맺어진 출판업자와 작가와의 관계. 그 이후로 백현은 경수의 편집자로 일하면서 작가로서의 입지를 넓혀주었다. 어느 정도 인기가 많아진 경수를 핑계로 백현은 같이 살 것을 요구했다. 그러고 나서 경수는, 백현과 자신의 관계가 단지 편집자와 작가의 관계만은 아니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경수는 그런 관계를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백현에게 기댄 시간만큼 벗어나기도 어려웠음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일어났어요? ㅡ 백현] 경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알람이 울리는 곳으로 향했다. 잘 사용하지 않는 폴더 폰을 열자 백현에게 메시지가 왔었다. 부재중 전화 8통과 함께 미확인 메시지 16건. 그때 다시 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이로써 9번째 전화가 되는 것이다. 경수는, 백현이 출근하면서부터 걸어온 전화 수만큼 꿈을 꾸었다. 8번의 기다림 속에서 백현이 보였다. 백현과 연결된 꿈과 부재중 전화의 다리 속에서, 유일하게 끊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미소일 것이다. 백현아, 넌 지금 웃고 있지 않아. 경수가 배터리를 분리하고 집을 나섰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종인의 하교시간과 일치했다. 백현과 경수를 연결해주는 다리 가운데에 어느새 종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종인이 자신에게 인사를 하고 다가오고 있었다. 종인이 다가올수록 백현의 모습이 점점 가려져가더니 보이지 않는다. 경수도 종인에게 다가가고 있었다.『와! 아저씨 저 기다린 거예요? 끝나는 시간 맞춰서? 그런 거예요?』『이게 뭐야?』 종인의 반가운 인사는 매일 들어도 낯간지러웠다. 일부러 시선을 바꿔 화제를 전환했다. 종인은 언제나 자신의 인사를 받아주지 않는 자신을 원망하거나 싫어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경수가 귀엽단 듯이 종인은 웃으며 받아주었다. 아저씨 우리 놀이터 의자에 앉을래요? 이거 보여줄게요. 경수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나, 그네 타고 싶어.. 끝이 기어드는 목소리에 종인이 웃으며 경수의 손목을 잡았다. 저녁 놀이터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들의 짓궂은 장난으로 말려있는 그네를 종인이 다시 잡아 내렸다. 여기 앉아요. 경수가 이번엔 고개를 끄덕이며 그네에 앉았다.『이거 알아요? 크라프트라는 종이에요.』종인은 경수 앞에 스프링 제본이 된 연갈색 크라프트지를 내밀었다. 보여줄까요? 또 한 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종인이 첫 장을 넘겼다. 첫 장에는 종인의 학교와 학년, 반 번호, 이름이 적혀있었다. 글자는 여느 남자아이들처럼 삐뚤지도 난잡하지도 않게 선이 곧았다. 그 다음 장에는 연필로 스케치돼 있었다. 그 뒤에도 유명한 명작들을 스케치한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는 오늘 연습하고 왔다는 퓨전 그림 스케치가 있었다.『그 그림 알죠? 샤갈의 ‘도시 위에서’ 그 배경을 애드워드 호퍼의 ‘빈 방의 햇빛’으로 바꿨어요. 뭔가 참신하지 않아요?』 칭찬을 갈구하는 어린 강아지 같은 모습에 경수가 종인은 모르게 살짝 웃음을 지어줬다. 종인은 계속해서 그림 설명을 했다. 샤갈의 작품에 나오는 두 사람은,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보고 반해 하늘로 데려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호퍼의 작품을 설명하는데 종인의 그림이 조금 이상했다. 배경이 그려져 있지 않았음에도 종인은 ‘빈 방의 햇빛’이라는 배경 얘기를 했다. 그런 경수를 눈치 챘는지 종인이 자신의 미술 습성을 설명했다.『저는 사물을 그리고 마지막에 배경을 칠해요.』『그러다 잘못 칠하면 사라지잖아, 그림이.』『부러 그러는 거예요. 때론 사라지는 게 예술일 때가 있어요.』 그리고 종인은 가방에서 연필을 꺼내 마지막 장 스케치를 해나갔다. 한쪽이 납치되고 있는 상황이었지만 종인의 그림 속 인물의 표정은 둘 다 어두웠다. 원작도 이랬었나? 연필로 그려 뭉개진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인물 위에 종인이 배경을 칠해갔다. 빈 공중 속에 햇빛이 들어갔다. 강렬한 햇빛이 두 사람을 감쌌다. 연필로 그리는 빛은 모순적이게도 검었다. 마치 5살 어린아이가 인물 위에 칠하는 크레파스처럼 색이 섞여 더 검어졌다. 종인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경수의 시선을 느끼고 신나서 더 열심히 칠하기 시작했다.『아저씨. 나 어때요, 그림 잘 그리죠?』 자신이 소설을 쓸 때 만들어내지 못했던 배경을 종인은 너무나 쉽게 만들어내고 있었다. 배경이 없어도 인물은 살아갈 수 있는데, 왜 굳이 배경으로 없애는 거야? 배경이 없어도 괜찮다는 백현의 위로와 종인의 예술이 겹쳐졌다. 잊고 있었던 백현이 떠오르자 경수는 불안해졌다. 탁자위에 분리 된 핸드폰과 배터리. 그렇게 쉽게 분리되지 못하는 백현과 자신의 관계가 미칠 듯이 그려지자 더 초조해졌다. 스케치북에 닿는 흑심의 마찰음만큼 심장이 뛰었다.『근데 아저씨 울었어요?』『...아니, 아니야.』 뜬금없는 종인의 질문에 경수는 더 깊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눈 앞에 백현이 있었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는데 언제 온 것일까. 경수의 눈이 그네처럼 삐걱였다. 종인은 알고 있었다는 듯 태연하게 배경을 칠하고 있었다. 백현과 종인은 서로 눈을 마주하지 않았지만 그 분위기가 밤공기보다 싸했다. 사각사각 거리는 소리가 더 커졌다.『빨개요, 아저씨 발목.』 종인의 말이 끝나자마자 백현이 경수의 손목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일어나. 경수는 힘없이 백현의 손에 이끌였다. 종인은 둘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그림에 열중했다. 둘은 종인에게서 멀어져갔다.‘때론 사라지는 게 예술일 때가 있어요.’종인이 그림 속에 납치하는 남자를 배경으로 지우고 있었다.그림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고 배경은 계속해서 칠해지고 있었다. clumsy memory홈으로 오시면 더 많은 글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회원가입란에 인스티즈에서 왔다고 하시면 격하게 환영합니다 :) 바런왈츠 l 작가의 전체글 신작 알림 설정알림 관리 후원하기 모든 시리즈아직 시리즈가 없어요최신 글최신글 [EXO/카디] 경수 생일기념 노예 종인이 3211년 전위/아래글[EXO/카디] 경수 생일기념 노예 종인이 3211년 전현재글 [EXO/카디/백도] 아저씨(부제:소설가 경수X학생 종인) 下-完- 512년 전[EXO/카디/백도] 아저씨(부제:소설가 경수X학생 종인) 中 312년 전[EXO/카디] 아저씨(부제:소설가 경수X학생 종인) 上 412년 전공지사항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