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그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연신 손등으로 훔쳤다. 오늘이야 말로 새로운 사랑을 하겠노라고 나도 이제 연애를 하겠노라고 다짐한 남자는 멀리서 걸어오는 여자를 바라보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에 맴도는 말은 눈앞에 앉아있는 그녀는 X가 아니라는 생각 뿐이었다. X의 생각을 떨쳐 내려 했지만 그는 이미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 심지어는 관리를 받은 듯 매끈한 그녀의 손톱을 보면서도 머릿속으론 X와 그녀를 연신 비교해대고 있었다. 소개팅 내내 그는 X의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그의 앞에 앉아있던 그녀는 눈 앞에 앉아있는 멀끔한 사내에게 자신이 오늘 몇시간을 투자하고 나왔는지 내가 너에게 처음 만나는 사내에게 얼마나 잘 보이기 위해 이렇게 치장하고 왔노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눈 앞의 사내는 멍한 눈으로 테이블의 커피 잔만 연신 만지작 거릴 뿐이었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그에게 안중에 없음을 알았는지 선약이 잡혀있단 핑계로 예상된 시간보다 일찍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정말로 선약이 있었는지 아니면 그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가 하는 문제는 이미 그에겐 중요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1년전에 헤어진 X에 관한 생각뿐이었고 불과 10분전의 그녀는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뒤였다. 카페를 나와 정처없이 발걸음을 옮기던 그는 문득 바삭 하는 소리를 내며 발 아래에서 부서지는 감각에 문득 X에 관한 기억이 부서지는 댐 처럼 밀려들어왔다. 점퍼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바람이 심장에 에인다. X가 없어서 그럴까. 올해 가을은 유난히 춥구나 라고 생각하며 그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
그는 소주잔에 연신 소주를 채워나가고 비워댔다. 그의 친구들은 소개팅이 잘 안되서 그러냐고 사내가 되서 고작 그런 일로 풀이 죽어있냐고 호탕하게 웃으며 그를 놀리기도 위로하기도 했다. 그의 옆에 둘러 앉아 연신 음담패설을 뱉어내고 소란스럽게 술을 마셔대는 그의 친구들은 X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다. 설사 그의 친구들이 X의 존재를 알았다 하더라도 그는 그의 친구들에게 내가 차였노라고, 내가 만났던, 내가 지난날 나를 낳아준 사람보다 정성을 쏟았던 X라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었다고 결국 날 버린 사람이였노라고 말할 생각은 추어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1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그는 친구들에게 X를 소개하지 않았음에 대해 후회했다. 아껴주고 싶었고 나만 보고 싶었던 것 뿐인데 이제는 X의 존재 자체도 희미해져가고 있다. 그는 연신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내가 아니면 누가 X와 내가 사랑했음을 기억할까, 설마 그건 신기루였을까, 한여름 밤의 꿈같은 거였을까 아니면 나 혼자의 망상이었을 뿐일까... 그를 제외한 모두가 존재조차 알지 못하는 기억의 편린들. 문득 그는 X의 소식이 궁금해졌지만 X의 소식을 접할 수 있는 어떠한 방법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깨닫곤 쓰게 웃음을 지으며 다시 소주잔에 소주를 채워넣었다. 차라리 소주잔에 채워지는 것이 소주가 아니라 X와의 기억이었더라면 그를 좀 더 기억할 수 있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남자는 소주잔을 입에 털었다.
+
오랜만에 그의 꿈에 X가 나타났다. 그는 X와 우연히 마주치면 X에게 할 말들을 늘상 생각했다. 찌질해 보이지 않도록 멋있어 보이도록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나는 잘 지냈노라고 너는 어떻게 지냈냐고, 나에겐 새로운 사람이 생겼노라고. 그는 꿈에서 깨고 싶었다. 이렇게 만나고 싶지 않았었는데 그렇게 부르고 불러도 나타나지 않던 X는 문득 그렇게 꿈에 찾아왔다. 그와 X는 꿈에서 격렬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그는 꿈에서 깨고 싶으면서도 깨고 싶지 않았다. 프로이트가 그렇게 말했던가 꿈은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의 산실이라고... 그에게 있어 X는 그저 욕정의 대상일 뿐이었던가. 아니다. 그런게 아니었다. 내가 한 때 아끼고 사랑했던 사람을 그저 욕정의 대상으로 생각했던가. 내가 그를 가지고 싶고 만나고 싶고 사랑했던게 그저 내 욕정의 하나 였단 말인가. 그는 파정을 맞으며 꿈에서 깨고 그렇게 몽정을 했다. 스물아홉이라는 나이가 무색하도록. 그렇게 꿈에서 깬 그는 사타구니에 묻어있는 끈적한 정액을 X와의 기억을 씻어내듯 살이 벌개지도록 벅벅 씻어냈다. 속옷을 갈아입고 세탁기에 속옷을 넣으려다 문득 어제 속옷 빨래는 다 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손 빨래를 하러 화장실로 향했다. 거울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했다. 그렇게 보고싶던 연인과 꿈에서 섹스를 했다. X는 그저 그에게 욕정의 대상이었던 뿐인가. 그는 거울안의 사내가 한심하고 한심하고 한심해 보였다. 그리고 그는 울었다. 마치 X와의 징표라도 되는 냥 파정의 흔적을 여실히 보여주는 속옷을 두 손에 꼭 쥐고는 겨울밤 길에서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처럼 그렇게 서럽게 울었다.
+
그렇게 울었던 그는 울음을 그치곤 문득 고파오는 배를 느끼고는 라면을 끓이기 위해 주방으로 향했다. 헛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이 떠나가도록 서럽게 울다 언제 그랬냐는 듯 허기진 배를 쥐곤 라면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사는 것도 그랬다. X가 없이는 숨을 쉴 수도 밥을 먹을 수도 잘 수도 없을 것 같았던 자신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그는 그렇게 주방에 우두커니 선채로 X를 회상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온 다음 날이면 그가 이렇게 서 있는 주방에서 X가 적당히 마시라며 타박하곤 언제나 해장국을 내어오곤 했다. 문득 그 맛이 그리워진 그는 대충 외투를 걸치고 차키를 들고서 집 근처의 24시간 해장국집으로 향했다. 의외로 해장국집에는 많은 사람이있었다. 그러나 그는 혼자였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 틈에 있으면서도 그는 혼자였다. 곧 해장국에 나왔고 그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밥 숟갈을 놀렸다. 그러다 문득 생각이 난 듯 그는 손을 멈췄다. 아니다. 아니다. X는 자신에게 해장국 같은 사람이었다. 욕정의 대상 따위가 아니다. 언제나 자신에게 위안이 되고 안식이 되고 배를 채워주고 따뜻하게 해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먹을 줄 밖에 몰랐고 축낼 줄 만 알았지 그에게 따뜻한 해장국 같은 존재가 되지 못했다. 문득 밀려오는 감각과 그제서야 스미는 X에 대한 미안함에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하얀 해장국 위로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며 문득 아파오는 심장을 부여잡았다. 아무도 모르는 사랑이라 혼자 감내하고 혼자 참았다 X와의 기억을 담고 있던 심장은 마치 고인 물 처럼 썩어가고 있었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웃어대고 눈물을 감추던 얼굴 뒤로는 썩다 못해 진물이 흐르고 있었고 오직 니가 날 버려서 그렇다고 다 너 때문이라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아프다고 말하던 입에서는 억눌린 신음만 나올 뿐이었다. 스물아홉의 사내는 1년이 지나고서야 그렇게 X와의 이별을 맞이하고 있었다.
+
꽃이 진다고 하여 그대를 잊겠는가 그대는 나의 사랑이었던 것을
+
윤종신이 작사작곡 하고 규현이 부른 늦가을 들으면서 생각해봤음ㅋ
그냥 찌질한 남자에 대해서 써보고 싶었음ㅋㅋㅋㅋ
실화가 아니라서 미아네요... 실화도 이제 쓸꼬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