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뒤숭숭한 꿈에는 항상 녀석이 나와 속을 뒤흔들었다. 이번엔 궁전에서나 입을 법한 드레스를 입고, 손에는 금잔을 홀짝이는 녀석이 나에게 구석 먼지를 보여 주며 성을 냈다. 녀석의 말에 토 하나 달지 않고 바닥을 쓸고 있는 내가 보였다. 집은 더럽게 넓네. 걸레에 가득히 쌓인 먼지가 그를 증명하듯 보였다. 근데 나 왜 어딘지도 모르는 바닥을 쓸고 있지? 저번에는 마녀로 나왔는데.
꿈이란 걸 간파하는 순간 시야가 껌껌해지며 잠에서 깼다. 기분은 나빴지만 몸은 상쾌했다. 되게 푹 잔 것 같은데, 몇 시지? 손을 뻗어 탁상 위에 있던 핸드폰 시계를 봤다. 10시. 10시구나, 10시…… 10시? 누워 있던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미쳤구나, 내가 미쳤어. 철야 작업 좀 했다고 몸이 벌써 뻗었구나. 연신 잠에 절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솔로 몸을 쓸었다. 머리를 말릴 틈도 없이 방으로 향해 옷장을 여는데, 주방에서 걸어온 녀석이 뒤에서 대뜸 허리를 끌어안았다.
"놔라."
"왜…… 뭐 해, 지금."
"나 늦었어."
나의 말에 한참 키득이던 녀석이 바싹 붙였던 몸을 떼더니, 정장을 몸에 욱여넣는 날 동물원 호랑이 구경하듯이 쳐다본다. 평소 같았으면 토를 달았겠으나 내 사정이 사정인지라 오늘은 그냥 넘어간다. 급한 마음에 엇갈리는 손으로 와이셔츠 단추를 끼우고 있으니, 침대에 앉아 있던 녀석이 일어나 겨우 목까지 채운 단추를 다시 푼다. 얘 진짜 뭐 하는 거지. 얼빠진 표정으로 녀석이 하는 행동을 보고만 있으니, 한참을 웃기만 하던 애가 머리를 감싸고 있던 타올을 빼 주며 말한다.
"오늘 토요일이잖아."
아, 맞다 주말.
나의 작은 영웅
베이 씀
권순영은 남다른 집착의 소유자다.
그래도 고등학생 시절에는 귀여운 수준이었다. 어떻게 그 발톱을 숨기고 산 건지, 졸업하고 스무 살이 되자마자 녀석은 급변했다. 때는 스무 살이 되고 한창 날아다녔을 시절이었는데, 친구들에 비해서 쥐 죽은 듯이 살던 내가 나름 일탈이랍시고 지금부터 모든 핸드폰 전원은 off로 돌리라는 분위기 메이커를 담당한 친구의 말에 난 단합심에 취해서 냅다 전원을 꺼 놓고 성격에 맞지도 않는 술집에서 테이블에 나열된 딱 봐도 비싸 보이는 술만 홀짝홀짝거렸는데, 어느새 주위를 둘러보니 몇몇은 테이블에 뻗어 있거나, 입을 틀어막고 냅다 화장실로 돌진하거나, 혹은 자리에 있었던 것도 모르게 바람처럼 사라진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사태가 심각하단 걸 깨달았던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친구의 친구, 가족에게 전화를 하거나, 영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애를 붙잡고 냉수를 손에 쥐여 주거나, 집이 가까운 친구 몇몇을 묶어 택시를 잡고 있었는데, 이때 나를 도와 친구들을 집에 데려다준 유일하게 정신이 멀쩡했던 구세주가 바로, 얼굴만 알고 있던 아이였다. 그날 이후로 감사 인사도 전하지 못하고 그냥 내 머릿속에서는 멋진 애라고 기억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친구를 데리러 온 친구의 친구에 의해 나는 고요해진 술집에 혼자 남았었는데, 얼른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보다 진이 빠져 그대로 테이블에 늘어져 핸드폰 전원을 켜고 있었다. 뉴스 뭐 뜬 거 있나…… 태평히 지문 인식을 누르는데, 정말 과장 하나 안 보태고 나는 그때 내 핸드폰에 전쟁이 난 줄 알았다. 쉴 틈 없이 울려대는 문자 진동 소리에 안마가 따로 필요 없을 정도로, 얼마였더라? 대략 80통이 넘었던 걸로 기억한다. 전화는 말할 것도 없다. 난생 처음 받아보는 갯수에 입만 떡 벌리고 구경하고 있는데, 귀신같이 권순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태평하다? 여보세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이때까지 권순영이 내게 굴러들어 온 백마 탄 왕자님이라고 믿었던 나는, 녀석의 새까만 속내도 모르고 날이 선 목소리에 얼른 자리에서 지갑을 챙겨 일어섰다. 왜?
"너 어디야."
"나 지금 나왔……"
"미쳤냐? 지금 몇 시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 줄 알아? 전원은 왜 꺼? 이 시간까지 뭐 했는데?"
몰아치는 질문 세례에 나는 무엇을 먼저 대답해 줘야 하나, 하고 손에 쥔 전화기만 고쳐쥐고 택시를 잡으려 손만 휘적대고 있는데, 그새를 못 참고 권순영이 데시벨을 올려댔다. 진짜 달팽이관 찢어지는 줄 알았다.
"가고 있어."
"내가 그거 물어봤어? 어디냐고."
"여기 택시 잡고 있……"
"아, 그러니까 어디냐고!"
"진짜 시끄럽게! 데리러 올 것도 아니면서 자꾸 찍찍댈래? 집에 가면 사진 보낼 테니까 끊어."
아오, 정말.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욱여넣고 택시를 탔다. 머리끝까지 차오르는 화를 신발코만 툭툭 치며 억누르다 보니 어느새 집이었다. 꽤 오래 시간이 흐르다 보니 점차 화가 삭여져 우리 집 침대 사진을 권순영에게 보내고 씻으러 들어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메신저로 다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대부분 자기가 성을 내고 미안하다며 아양을 떠는 게 다였다. 귀여운 녀석. 나는 또 그거에 넘어가서 잘 자, 하고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로 잤다. 일단 이 사건은 일단락이긴 한데, 나이가 든 지금도 조금만 연락이 없다 싶어도 하루도 빼놓지 않고 그렇게 매달린다. 나는 그럼 이제 그냥 체념해서 내가 너무 좋아서 그런가 보다, 한다. 권순영은 날 너무 좋아하나 보다.
권순영은 유치원 교사다.
믿기지 않겠지만 진짜다. 전문대를 졸업하고, 동네 유치원 교사에서 부담임을 맡다가 이제는 어엿이 담임으로 아이들도 이끌고 있다. 가끔 있는 동창회에서 권순영과 연락을 끊고 살았던 아이들은 녀석이 유치원 교사가 되었다고 하면 거품을 물고 자빠진다. 그것도 그럴 것이, 항상 운동장에서 공 차는 걸 좋아하는 애였으니까. 태반이 권순영은 막 살 줄 알았다는 애들이다. 권순영은 이런 소릴 들으면 버럭 화를 내곤 하는데, 그거 다 민망해서 그런 거다. 순식간에 귀가 딸기처럼 달아올라서 빽빽대는 걸 보고 있으면 얼마나 웃긴지 모른다. 일찍 근무를 마친 내가 유치원에 녀석을 데리러 간 적이 있었는데, 난 그때 천사를 봤다. 병아리 앞치마를 허리에 두르고, 올망졸망한 아이들 몇몇 손을 잡아 버스에 태우는 모습이 얼마나 맑은지 나는 권순영의 인격이 여러 개라고 생각했다. 그 이후로 나는 녀석이 유치원 교사라는 점을 가끔 악용하기도 하는데, 이는 다 권순영의 성질을 죽이기 위함이다. 진짜다. 예를 들자면,
"순영아."
"왜."
"나 오늘 술 마신다."
"미ㅊ…… 혼난다."
이럴 때,
"순영아앙."
"왜, 또."
"나 네 티셔츠에 커피 쏟았어."
"뒤진…… 그렇구나."
혹은 이럴 때,
"자기."
"응?"
"네가 오늘 양치하고 간 칫솔, 그거 변기 닦은 건데."
"이런 개…… 그래?"
이럴 때라거나.
내가 이런 폭탄 발언을 늘어놓을 때마다 녀석은 입안에서 욕만 굴리며 씩씩대는데, 놀리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라 그만둘 수 없다는 게 함정이다. 옆에서 맑디맑은 아이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보는데 어떻게 앞에 대고 욕을 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이런 점을 가끔 빌려 내가 잘못했는데 도저히 권순영이 날 봐줄 기미가 보이지 않을 때, 전화에 대고 빌기도 한다. 그럼 권순영은 차마 욕은 하지 못하고 알겠다며 전화를 끊는다. 어린아이에게 잘하는 남자가 최고의 사윗감이라는데, 나는 작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을 돌보는 권순영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미래를 상상한 적이 있다. 사실 녀석이랑 결혼까지 할 거라는 생각은 나도, 권순영도 해 본 적 없는 일인데 나도 모르게 그 고사리 같은 손을 잡고 장난감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 내 아이를 안고 있는 녀석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리고 이런 상상을 깨는 건 권순영의 성질 머리다.
권순영은 다혈질이다.
대학을 다니며, 조별 과제를 일삼듯 하며, 직장을 다니며, 일자리를 구하러 다니며 나는 정말 수십 가지의 사람들을 봤지만 녀석만큼의 다혈질은 처음이다. 헤어질 뻔한 적은 두 번이지만, 우린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싸우는데 항상 이는 나의 자존심과 권순영의 다혈질이 대립한다. 녀석은 인내심도 바닥인데, 성질까지 안 좋다. 나는 녀석과 싸울 때면 항상 말을 아끼는데, 녀석은 꼭 말로 해 줘야 직성이 풀리는 스타일이라 앙다문 내 입을 보고 항상 성을 낸다. 다수가 그렇듯이 우리의 싸움도 마찬가지로 작은 불씨로 시작해서 불길이 되어간다. 밥을 남긴다고 싸운 적도 있고, 이에 고춧가루가 묻은 걸 안 알려 줬다고 싸운 적도 있다. 너무 허다해서 잘 기억은 나지 않지만, 한 번은 복숭아 때문에 아주 크게 싸웠다. 나는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데, 권순영이 그것도 모르고 퇴근길에 좋다고 복숭아 한 박스를 사 온 것이다.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지. 내가 고등학교 급식 시간에도 그렇게 복숭아는 질색을 했는데. 현관문에서 신발도 벗지 않은 채로 품에 복숭아 한 박스를 안고 히죽대는 녀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에서 화가 욱, 하고 올라왔다.
"야."
"응?"
"너, 이거 왜 사 왔어?"
"그거야, 자기 먹으라고 사 왔……"
"나 복숭아 알레르기 있거든?"
아. 뭐랄까? 그때 녀석의 얼굴은 마치, 긴급 경보가 수없이 머리 위로 울려대는 것 같았달까. 아무튼 가관이었다.
"아…… 맞다."
"아, 맞다? 넌 애인이 복숭아 알레르기 있는지도 몰라?"
"아니, 그럴 수도 있지."
"뭐?"
"내가 네 생각 해서 사 온 건데, 말을 꼭 그렇게밖에 못 하겠냐?"
품에 안고 있던 복숭아 박스는 어느새 거실 바닥에 버려진 지 오래였다. 실없이 웃고 있던 녀석의 얼굴도 함께 굳어졌다. 나는 도리어 성을 내는 녀석의 모습이 기가 차서 말문이 막혔다. 그렇게 나는 얼빠진 얼굴로, 녀석은 불퉁한 얼굴로 한참 눈만 바라보며 대립하다 참다못한 녀석이 괜히 신발장을 발로 치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참 나. 나는 그대로 권순영이 있는 나와 녀석의 방으로 들어가서 지갑과 외투, 핸드폰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때는 겨울이었는데, 진짜 말도 못 하게 추웠다. 콧물 질질 흘리며 갈 곳 없는 내가 찾은 곳은 찜질방이었는데, 양머리까지 둘러싸고 목침을 베고 뜨거운 불가마에 있다 보니 문득 내가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순영이는 내 생각 해서 복숭아 사 온 건데…… 심했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아래에서 내 자존심이 치고 들어왔다. 그래도 너무해. 전원이 다 되어가는 핸드폰을 두고 모바일 게임을 하다 질린 나는 점차 찜질방 생활에 익숙해져갔다. 구운 달걀을 까먹으며 티브이 앞에 앉아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는데, 어떻게 행방을 안 건지 찜질복 차림도 아닌 일상복 차림의 녀석이 내 손목을 잡아끌었다.
"놔."
"……."
"야!"
여탕에서 길이 막힌 녀석이 한숨을 쉬더니 여태 대꾸도 않던 그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내가 몰랐어, 너 복숭아 알레르기 있는 거."
"……."
"잘못했어."
"……."
"집에 가자, 응?"
흔한 변명 하나 없는 말에 위태하던 마음이 홀랑 넘어가 여탕으로 휙 들어갔다. 난 금방 나오겠다는 뜻으로 아무 말도 않고 들어간 건데, 후에 들어보니 권순영은 내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은 줄 알고 안절부절했단다. 멀쩡해진 차림으로 돌아온 내가 찜질방 자판기 앞에서 콜라를 뽑던 권순영 옆에 섰다. 피자 사 줄까? 늘 그렇듯 화해는 나보다 자존심이 덜 센 권순영의 몫이다.
권순영은 질투쟁이다.
누가 애인의 질투를 싫어하겠는가, 근데 녀석은 심해도 너무 심하다. 이건 고등학생 때도 그랬다. 담임과 상담 문제로 잠시 얘기를 하고만 있어도 대체 뭘 넘보는 거냐며 날 감싸고 돌았고, 졸업식 때 눈물범벅이 된 내 얼굴을 닦아 준 녀석의 친구를 데리고 운동장을 돌았고, 내가 직장 상사와 일 문제로 붙어만 있어도 금세 삐쳐서 휙 돌아가고, 길을 묻는 타인에게 길을 알려 주기만 해도 입이 툭 튀어나온다. 처음엔 마냥 귀여운 질투가 좋아서 일부러 녀석의 심기도 건드리고, 속으로 좋아했는데 이게 끝을 모르고 이어지니까 이제는 녀석을 달래는 법을 터득했다.
"순영아."
"……."
"너 오늘따라 되게 잘생겼다."
"……."
"뭔가, 막, 얼굴에서 빛이…… 아까 본 남자랑은 비교가 안 돼."
"……."
내가 그러면 녀석은 이제 이질이 난다는 듯이 시야를 손으로 가리고 있는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본다. 반은 넘어왔다. 돌리고 있던 어깨를 잡아 뾰족한 턱에 짧게 입을 맞추면 감정을 감추지 못하는 입꼬리가 금세 씰룩거린다. 이제 입 집어넣어, 알겠지? 아이 같은 녀석을 달래는 건 나의 몫이다.
권순영은 나와 같이 산다.
사실 동거를 선택한 것도 내 딴에선 정말 큰 선택이었는데, 이것 역시 나를 위한 일이었다. 스무 살이 되자마자 대학 진학을 위해 자취를 선택한 나는, 녀석이 군대를 가기 전일 때부터 껌껌한 새벽에 깨 앞뒤 생각 하지 못하고 외롭다며 울고불고 전화를 걸곤 했는데, 녀석이 군대를 다녀오고 완벽한 직장을 이뤘을 때 짐을 꾸리고 들어왔다. 확실히 집에 누군가 있다는 생각이 드니까 집으로 가는 퇴근길이 가볍고, 편히 잠에 들긴 하는데, 처음엔 집에 나 말고 다른 사람이 있다는 게 적응이 되지 않아서 문제였다. 그렇게 오래 연애했는데, 아직도 신경 쓰이고, 의식한다는 일이 우리에게는 없을 줄 알았는데 나는 씻고 나올 때도, 밥을 먹을 때도, 식탁에 수저가 한 개가 아니라 두 개가 있다는 사실에 불쑥 놀라고는 했다. 이런 날 달래 주는 것도 녀석의 몫이었다. 가끔 우리가 사이가 좋은 날엔 (내가 녀석의 말을 잘 듣거나, 녀석이 나의 말을 잘 듣거나, 배가 부를 때) 침대에 누워서 옛날 얘기, 사람들 얘기, 세상 얘기, 정말 많은 얘기를 하곤 한다. 고등학생 때 같은 학교일 뿐인데도, 그냥 지나칠 수 있었는데도, 우리가 만나서 아직까지 사랑을 하고 있는 게 신기하다고. 이렇게 넓은 세상에서 녀석이 나의 삶에 들어와 지친 뙤약볕에 물을 주고, 보잘것없는 내게 사랑을 주는 게 신기하다고.
그래서 녀석은 나의 영웅이다.
흑백필름을 바꿔 준 나의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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