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자꾸 프론트하는건데_00
"그림은, 잘 하고 있지? 야자 빼먹는 만큼 열심히 해라?"
"네, 당연하죠, 쌤, 저 학원 늦어서 지금 가야해요! 안녕히 계세요!"
"오냐"
아아, 미술학원간다고 야자 빼먹으면 더 좋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구나. 입시가 뭐라고, 대학이 뭐라고 주구장창 그림만 그리다가 죽게 생겼소.
어릴때부터 미술에 흥미가 있었다. 초등학교, 중학교에서 미술수업을 할때면 항상 내 작품이 남들의 본보기가 되곤 했고 그런 자신감에 정말 내가 뭐라도 되는 줄 알았다.
미술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남들에게 받는 칭찬이 좋아 무작정 미술을 하겠다고 한건데.
이건 뭐, 그림하나 완성하려고 몇주, 아니 몇 달간 그림을 그리고, 수정하고, 채색하는 과정만 반복하는 것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막상 진로를 이쪽으로 잡으니 세상에 날고 기는애가 천지네. 나는 땅 위에서 기는 일개미 아니 땅 속에 파묻힌 매미만도 못한 것 같은 기분. 근데 이제와서 뭐 어쩌겠냐. 내가 하겠다고 한건데
그 날도 속으로 온갖 투정을 다 부리면서 도착한 미술학원. 끼고 있던 이어폰을 빼내고 반갑게 반겨주시는 선생님께 고갯짓으로 살짝 인사를 하고는 내가 항상 앉던 자리로 갔다.
작은 창이 하나 있는 구석자리인데, 곰팡이 슨 냄새도 나고 공책만한 창문 하나가 있는 것 빼곤 사방이 꽉 막혀 답답한 자리지만 앉은 눈높이에 있는 창 밖으로 색이 변하는 나뭇잎, 떨어지는 꽃,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그림을 그리면 그때만은 남에게 칭찬 받고싶어서가 아니라 '진짜 그림'을 그리게 되는 순간이 된다.
근데 이게 무슨...? 항상 나만 앉던 자리라 다른 사람이 앉아있는 모습에 당황했다. 우리학교 교복으로 보이는 옷을 입고 캔버스 위에 뭔가를 그리고 있는 잘생긴 남학생 덕분에 꽤나 놀랐다. 근데, 내가 전세 낸 자리도 아니고 정해진 자리도 아닐 뿐더러 저 남자애한테 말 걸 용기는 더더욱 없었음으로 짜증스래 옆자리에 가방을 벗어던지곤 앉았다.
자리에 앉아 팔짱을 낀채로 그 남학생이 하고 있는걸 보고있자니 더 기가 찼다. 비싼 물감과 붓으로 캔버스와 창 밖을 번갈아가며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데 저게 그림인지 낙서인지도 구분이 안갈 정도로 형편없는 실력이였다.
뭘 그리고 있는지도 잘 가늠이 가진 않았지만 창 밖에 있는 나무를 진지하게 보고 있는 모습을 보니 얼추 나무 그림을 그리는 것 같기는 했다.
자리에 앉아 짐도 풀지 않고 언짢은 표정을 얼굴에 띄운 채 몇분동안 그 남자애를 보고 있는데 옆자리로 선생님이 와서 앉으셨다(밝은 갈색의 긴 생머리 머리와 눈동자를 가진 젊은 선생님은 미국명문대학 출신의 화가셨고 지금은 한국에 와서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시는데, 선생님이 내게 말을 걸 때마다 선생님이 너무 예뻐서 넋을 놓고 쳐다보고는 했다. 같은 여자인 나도 반할만큼 예쁜 미모를 가지고 계신 선생님은 매일 봐도 매일 놀랍다).
"뭐해요 칠봉?"
"에? 아, 그냥요...쌤, 근데요,"
"Huh?"
"저 남자애는 누구예요? 처음보는 얼굴인데."
하고 묻자 그림 그리고 있는 남자아이를 한번 스윽 보더니 눈썹을 잔뜩 올렸다 내리곤 내게 말하는 선생님이였다
"아, 그는 내 아들이예요. He does 그림그리는 걸 좋아해요. 아, 칠봉과 같은 학교인데, 칠봉도 17살이죠? 그도 seventeen 이예요"
"아 정말요? 아, 아니, 쌤 아들?? 쌤 아들있었어요?? 아니, 그것도 나만한? 쌤 대체 몇살인데요?"
"오, 몰랐군요? I've married. 나 thirthy-nine 인데."
와, 이건 대국민 사기급. 저 남자애가 우리학교, 우리 학년이라는 것 보다 몇 년간 알고지낸 선생님이 기혼에다가 나만한 아들이 있다니, 많아봤자 30대 초반일 줄 알았던 선생님이 서른 아홉이라는 사실에 더 놀랐다.
"하여튼, 칠봉, 오늘은 scatch를 할게요. 전에 그리다 만 소묘화, 가지고 왔죠?"
"아, 아, 네"
허겁지겁, 메고온 화통에서 어제 그리던 그림을 꺼내들었다. 아무리 지우고 다시그리고 해봐도 어딘가 어색한 그림은 완성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책상위에 종이를 펼쳐두고 어디를 어떻게 더 수정해야하나 심각한 표정으로 보고 있는데, 하얗던 종이 위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운다. 고개를 들어보니 보이는건 물을 마시려고 일어난건지 컵을 들고 내 그림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애.
당황스러운 상황에 눈만 껌뻑거리면서 남자애를 올려다본다. 와, 예상치 못했지만 진짜 잘생겼다. 엄마가 미국사람이라 그런가 진짜 예뻐. 진짜, 정말, 현실에 없을 것 같은 비주얼. 그림으로 그리고 싶은 얼굴이였다. 한참 그 애 얼굴을 구석구석 뜯어보다가 정신이 돌아와 그 애 눈을 빤히 쳐다봤다. 그 애도 그런 나를 발견했는지 내 눈을 무심하게 한번 스윽 쳐다보고는 그림 속 한부분을 가리킨다.
"반사광. 안그렸잖아"
무슨 말인지 몰라 가만히 올려다 본 채로 고개를 갸우뚱 했더니 내 앞자리에 앉아 이야기 하는 아이다.
"봐, 여기. 반사광을 안그리니까 어색해보이지. 보아하니 그림 하루이틀 그리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이런 기본적인걸 실수하냐"
남자애의 말에 그 애가 가리키고 있던 부분을 보니 아차, 싶었다. 정말로 기초적인 부분인데 실수를 하다니, 얘 말대로 그림 하루이틀 그린 것도 아니고
"아..."
왜 그렇게 그림이 어색했던건지 알고나서 짧은 탄식을 내뱉자, 남자애는 어깨를 으쓱하며 종이컵을 입에 물고 주머니에 손을 넣은채로 그림을 그리던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였다. 그 애가 하는 냥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날 쳐다보는 남자애의 시선에 다시 고개를 돌려 그림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완성됬다. 오, 좀 멋있는데?
완성한 그림에 나름 만족하고 선생님께 그림을 가져다 냈다. 제출된 그림을 보고 선생님도 만족스러운 듯이 고개를 끄덕이셨고 합격의 의미임을 알아챈 나는 곧바로 서랍에 올려뒀던 캔버스를 꺼내 아젤에 올려두고 그림 그릴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물감을 꺼내고 물을 떠오는데 문득 든 생각에 아차싶어서 행동을 멈췄다. 저 창 밖에 있는 거리를 그리던건데, 다른사람이 앉아 있으니 그걸 보고 그림을 그릴 수가 없으니, 떠 놓은 물도 꺼낸 물감도 필요가 없잖아. 할 수 없이 캔버스를 바닥에 내리고 멍하니 바닥을 보고 있다가 빈 아젤 위에 도화지 한장을 올려 그 위에 붓질을 하기 시작했다.
꼭 목적 없이 붓을 잡으면 그리게 되는건 분홍색 예쁜 하늘이였다. 하교할 때 가끔 보이는 분홍색 하늘이 뇌리에 깊게 박혔는지, 아니면 분홍색을 좋아하는 내가 머릿 속의 하늘마저도 분홍색으로 만들어버린건지 이유는 모르지만 이 날도 석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윗쪽은 부드러운 보라색, 그 아래는 진한 분홍색, 그 아래는 연한 분홍색, 또 그 아래는 하얀 구름. 하나하나 색을 쌓아갈 때마다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갔다. 기분이 좋아지는 그림. 진짜 그림.
만족스럽게 그린 하늘을 보고있다가 붓을 바꾸려고 몸을 기울여 바닥에 있는 물통에 붓을 헹구는데 익숙치 않은 신발 두짝이 물통 앞에 떡하니 다가와 선다. 회색 교복바지, 삐쭉 튀어나온 와이셔츠, 대충 걸친듯 한 마이를 거슬러 올라가 보이는 얼굴은 내가 그리던 그림을 유심히 들여다 보는 아까 그, 남자애였다.
나도 내 그림을 들여다 보는 남자애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내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는 아이다.
"아,...흐...깜짝이야..."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곤 뭘 쳐다보냐는 듯이 그 애를 쳐다 봤다. 그러자 그 애는, 사르르 웃으며 말하는 것이였다.
"와, 예쁘다"
이게 내가 걜 좋아하게 된 이유, 순간. 그러니까 내 첫사랑, 아니 짝사랑이 시작된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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