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
- 영화 '건축 학개론' 中
'양
아
치
의
순
정'
07
하루의 끝엔
"너 진짜 너무한거 아니냐?"
헛웃음과 함께 뱉어진 민규의 말에도 순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저 말없이 민규를 바라 볼 뿐이였다. 허- 곧이어 뱉어진 순영의 비소에 룸 안의 분위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워졌다. 내가 너네 장단, 다 맞춰야 하냐?
"뭐?"
"학교 가려는 몸 억지로 끌고 왔으면 양심 생각해서 닥치고 있어, 놀던 말던 그건 내 자유 아냐?"
"야. 니가 언제부터 그렇게 학교를 좋아했다고 그러냐?"
"…지금 뭐라했냐."
"너 시발 학교 그 찌질이 만나러 가는ㄱ,"
순영의 주먹이 민규의 얼굴을 스치고 허공에 떨어졌다. 우당탕- 바닥으로 곧두박질 치는 민규의 몸에 룸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비명을 지르는 제 친구들을 뒤로 현지는 아무말 없이 그저 순영의 뒷모습을 바라 볼 뿐이였다. 영수를 따라 몇 명의 남자아이들이 순영과 민규를 잡음으로써 간신히 싸움을 멈췄다. 안 때릴게. 놔.
민규의 주먹질로 인해 뻐근해진 턱을 매만지던 순영이 되는 일이 없다는듯 머리를 잔뜩 털며 민규를 바라보았다. 야.
"내가 지금 처음으로 후회 된다."
"……"
"니 새끼랑 친구한거."
말 끝으로 저를 말 없이 바라보다 룸을 박차고 나가는 순영의 뒷모습에 민규가 피가 터진 입술을 매만지며 미간을 찌푸렸다. …개새끼.
결국 권순영은 학교가 끝날때까지 털 끝 하나 비추지 않았다. 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데, 이상하게 마주치는 아이들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무슨 일 있냐고. 아무 일도 없다고 말하는데 계속해서 목 끝에서 생선가시 마냥 권순영이 턱턱, 하고 걸렸다.
"야, 오늘 끝나고 어디가냐?"
"도서ㄱ,"
"권순영 없잖아."
…어, 그러네. 그럼 오늘 우리 집 가서 공부할래? 평소같으면 가지 못해서 안달이였을 너희 집인데, 오늘따라 왜이렇게 발걸음이 안 떨어질까.
"…걍 도서관 갈랜다. 도서관이 더 잘 되더라."
"하긴, 야 그럼 나 영희랑 간다? 삐지지 마라?"
"…뭘 그런 걸 가지고, 내 뒷담이나 까지마라."
"웃기고 자빠졌네."
애써 입꼬리를 올렸다. 간다. 어깨를 한번 두들기고 교실을 빠져나가는 친구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나쁜놈."
오늘 하루 저 말만 수십번을 내뱉은것 같다. 인정하기 싫지만, 몇 주만에 다시 비워진 너의 자리가 너무나도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럴꺼면 애초에 말은 왜 걸은거냐. …이 양아치야. 당사자가 앞에 있는 마냥 작게 중얼거리다가 끝으로 자리를 노려보곤 교실을 마지막으로 빠져 나왔다.
허억, 헉.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닦고, 숨을 고를 틈도 없이 순영은 현관문을 열자 마자 보이는 떨어진 넥타이, 교복을 차례대로 주워 갈아 입었다. 얼굴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작게 인상을 찌푸린 순영이 그럴 여유도 없다는듯 신발이 신겨져 있는 발로 거실을 디딜었다. 시간이 없었다. 방에서 든 것도 없는 가방을 들고 나온 순영이 어젯밤 껴안고 자느라 탁자 위에 올려놓은, 현지가 손 댈 뻔한 여주의 연습장을 조심스레 가방에 넣었다.
도서관 앞을 쭈그려 앉아 있느라 저린 다리를 약하게 두들겼다. 5분만, 5분만 하다가 어느새 30분이 훌쩍 넘어버렸다. 학교도 안왔는데 여길 오겠냐. 스스로에게 내뱉은 타박이였다. 한심하다 김여주. 말 없이 뒤를 돌아 도서관을 바라 보았다. 여기 있어봤자, 공부는 무슨. 한참을 니 생각에 잠겨있다 시간낭비나 한체 돌아가겠지. 작은 한숨과 함께 발걸음을 돌린 여주가 그 날밤 순영과 함께 했던 밤거리를 걸었다. 나 좋은애야! 순영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샛노란 머리를 한체 너무나도 모순적이게 순수했던 웃는 얼굴. 그때 그 모습이 생각나 여주는 자기도 모르게 어느새 미소를 짓고 있었다. …보고싶다.
"야! 김여주! 여주야! 야 짝꿍!"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권순영이다. 놀란 여주가 입을 틀어 막았다. 큰 도로 건너편, 순영은 얼굴에 생채기를 매달은체 너무나도 해맑게 여주를 향해 크게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미친새끼, 얼굴 꼬라지는 왜 저래 또. 바보같은 순영의 모습에 미간을 찌푸리던 여주도 결국 웃음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야! 빨리 건너 와! 괜히 큰 목소리로 순영에게 소리쳤다.
"나 안 보고 싶었어?"
먹은것도 없는데 마신 공기만으로 사례가 들 뻔했다. 헛소리 하지말고 공부나 하라는 의미를 담아 빨간펜으로 녀석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탁, 하고 쳤다. 맞은 부분을 쓰다듬으면서도 녀석의 입에선 미소가 떠나가질 않았다. 괜히 부끄러운 마음에 마음에도 없는 말을 투덜댔다. 쌈박질이나 하고 다니는게 뭐가 보고싶겠냐.
"나 아픈데 오늘 공부는 안하면 안돼?"
"그래 하지말자. 내 소원 이루고 좋지 뭐."
"아냐, 하자. 오늘 여기 해야 돼."
순영이 여주의 교과서를 뺏어 허둥지둥 페이지를 넘겼다. 야 거기 아니거든? 순영덕에 엉뚱한 페이지를 펄치고 있는 교과서를 끌곤 온 여주가 작게 투덜대며 책을 넘기기 시작했다. "……" 머리를 괸체 아무 말 없이 투덜대는 여주를 바라보던 순영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야 됐어, 이제 봐봐. 저와 순영의 정 가운데로 책을 끌고 온 여주가 아무말 없이 제 교과서를 바라보며 웃고 있는 순영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 글씨 진짜 못쓴다 여주야."
"와 니가 할 말은 아닌데 진짜. 오늘 내 인생 최고의 수치스러운 날이다."
여주의 말끝으로 순영도, 여주도 도서관임을 망각하고 끝내 웃음이 터져버렸다. 사람이 거의 다 빠져나간 11시, 늦은 시각임을 서로에게 감사했다. 여주의 눈엔 웃고 있는 순영이, 순영의 눈 또한 저를 향해 웃고 있는 여주를 담고 있었다.
못 볼 줄 알았던 오늘 하루안에도 너가 있었다. 하루의 끝자락이지만 너의 얼굴을 봤으니, 그걸로 됐다.
어제보다는 너를 적게나마 눈에 담았던 오늘 하루다. 비록 하루의 끝자락이지만 너의 얼굴을 봤으니, 그걸로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