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생각을 해야 한다.
옅은 갈색의 나뭇결이 아름다운 욕조 안으로 조그마한 청동 물병에 든 향유가 부어진다.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따듯한 물의 표면 위로 미끄러지듯 향유가 닿으며 공기에 화려한 향기가 퍼져 나갔다. 기절한 뒤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른한 상태로 맡기에는 약간 어지러울 정도로 짙었다. 얌전하니 고운 얼굴을 한 언니 한 명은 꿀을 바른 보들보들한 천으로 내 팔을 문질러 닦고 있고, 또 다른 언니는 내 어깨를 손가락으로 지압하며 눌러 마사지 해주고 있다. 고요하고 편안한 시간이었다.
아니, 난 생각을 좀 해야 하는데. 눈을 느릿한 속도로 깜박였다. 목욕물의 온도는 너무 딱 좋고 향긋한데다가 어깨와 목 뒤를 나붓하게 누르며 풀어주는 손길이 환상적인 나머지 잠이 솔솔 몰려온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름대로 체통을 지키기 위하여 마사지 해 주는 언니의 손길에 반응하며 아앗, 언니, 거기요, 이런 소리를 꾹꾹 참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만으로도 좀 힘들었다. 이것은 내가 깊게 무언가를 이것저것 요리조리 생각 하려는 것을 방해하려는 모종의 음모가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생각인데, 진짜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직 현실감이 없는 게 이게 모두 꿈인 것 만 같았다. 아니 꿈이 맞긴 맞는데 깰 방법을 모르는 그런 거겠지. 이게 현실이라니 말도 안 되지. 애써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정신적으로 병이 와서 이 모든 상황을 견딜 수 없게 될 것만 같다.
“마마, 이리로.”
씻고 나서는 의복을 갖춰 입었다. 부드럽고 속의 살이 약하게 비춰질 만큼 얇은 흰색 속옷을 한 겹, 그 위에 이번에는 다른 재질의 하얀 속옷을 또 한 겹, 그 위로 하늘 빛깔의 저고리 위에 치마를 두르고 허리띠를 매어 향낭과 노리개를 찬 뒤에 또 겉옷을 걸치고 다시 걸치고. 나는 옷을 입는 것만으로 지쳤다. 세상에, 교복도 셔츠 베스트 마이 이렇게 입기가 버거워 셔츠 위로 바로 자켓을 입던 나인데.
“…혼자 있고 싶구나. 모두 물러가거라.”
“예, 마마. 언제든 불러주시어요.”
나의 목욕과 옷 입는 것을 돕던 언니들이 전부 사뿐사뿐 밖으로 나갔고 나는 꼿꼿하게 세우고 있던 허리를 무너트리면서 곧장 패닉을 드러내며 앉아 있는 의자 위에서 버둥거렸다.
아니 그러니까 시발 지금 세상에 이게 뭔지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대체 이게 뭐람 그러니까 나는 내가 왜 갑자기 조선 아니 이건 옷도 그렇고 건물도 조선시대가 아니고 니미럴 여긴 무슨 시대냐 무튼 여기에 떨어진 것인지 알 수가 없고 다만 바라는 것이 있다면 우리 집으로 날 돌려보내줘!
얇은 문 너머로 소리가 흘러 나갈까봐 소리를 지르지는 못하고 버둥거리며 손수건 같은 자수 천을 앞니로 자근자근 물어뜯으며 혼자 고요한 발광을 했다.
거울, 거울을 보자.
의자에서 일어나 여러 겹을 덧대어 입어 치렁거리고 하늘거리는 옷자락을 손으로 얼기설기 부여잡은 채 화장대처럼 보이는 곳으로 걸어갔다. 약간 탁하긴 하지만 내 모습을 비춰 볼 수 있는 커다란 거울 앞에 서자 아름다운 여인이 보인다. 불안한 표정을 한 채로 눈가가 불그스름했다. 눈물이 그렁거린 탓이다. 울고 싶진 않아서 손을 들어 올려 눈가에 가져다 대자, 거울 속의 낯설고도 어여쁜 여인도 함께 손을 들어 올리며 눈가를 닦아내는 것이 보였다. 그러니까 저게 ‘나’ 인 것이다.
갑작스럽게 나는 책 속의 세상으로 빨려 들어왔다. 그리고 예상컨대, 이 세계는 내가 재밌게 읽었던 ‘군주의 희’ 이라는 팬픽 속이 틀림없다. 나는 다시금 기절이 하고 싶어졌지만 그저 거울 속 여인을 바라보며 서글프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흣. 흐흐흣. 흐흐흐흐흐흑.
목욕을 하면서 미처 정리하지 못했던 생각을 정리해 보도록 하자.
뭔가 적어가면서 정리해 볼 수 있다면 딱 좋겠지만 여긴 청나라 명나라 뭐 이런 옛날의 시대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붓과 먹으로 화선지에 글을 적던 시대이므로 오히려 방해만 될 것 같다. 대신 윤기가 흐르는 나무 탁자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르리고 그 위에 글자를 쓸어보며 생각에 잠겼다.
우선 군주의 희, 라는 제목에서 군주란 우리의 민 군주, 내 인생 최애를 말하며 희란 ‘喜’ 기쁘다는 뜻이다. 이것은 이 세계 이 나라의 황제인 민윤기의 기쁨이라는 뜻이며 그와 함께 여주인 ‘희비(喜妃)‘를 뜻한다. 그러니까 직설적으로 말한다면 민윤기의 여주, 라고 해석 할 수도 있겠다.
이 픽션의 줄거리를 간단하게 요약해볼까. 황제 민윤기는 전쟁광이다. 고전물의 클리셰가 다 그렇듯 그는 후계자 다툼으로 암살이며 치정에 시달리며 어머니였던 황후까지 잃은 데다 형제들과는 가족애 대신 살기를 나눴으며 그렇게 마이너스 적인 감정을 잔뜩 소모한 채로 열일곱이 된 후엔 전쟁터에 뛰어들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불패하지 않는 전쟁터의 신이 된 채로 돌아와 황태자로 책봉되었으며 그대로 스물 셋에는,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후에도 정복전쟁은 계속되었다. 황제에게 총애를 받아 첩지와 봉호를 받고 희비(喜妃)가 되는 여주는 본래 제국의 검 아래 무릎 꿇은 소왕국의 공주였다. 그것도 왕의 사생아로 태어나 제대로 공주 취급도 받지 못한 채 작고 소박한 궁에서 치장과 화장 대신 책을 읽는 것을 낛으로 삶던 소녀였다. 소왕국은 항복에 대한 증거로 이 구박데기공주를 황제에게 팔아먹었고 그녀는 그렇게 제국으로 넘어와 황제의 수많은 후궁 중 하나가 된다. 그러나 그녀는 특유의 순수함과 깨끗한 아름다움, 영민함으로 우리 민군주님을 사로잡았고 둘은 서로 사랑이 빠져 어떤 시련과 방해마저 극복하여 영원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라는 엔딩을 찍는다.
진짜 좋아하던 글이었다. 소장본으로 나왔을 땐 샀고, 그 뒤로도 진짜 좋아하는 대사는 외울 정도로 읽었다. 친구들한테 제발 읽으라며 권하기도 했었다. 그런 세상 속으로 들어온 것이 그렇게 나쁘기만 한 일도 아닐 것이다. 내 최애와 다른 멤버들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데다가 그 사람들이 왕이며 호위무사며 진짜 멋있는 옷을 멋있게 입고 다닌다. 게다가 나는 손끝하나 움직이지 않아도 예쁜 언니들이 다가와 목욕 시켜줘, 옷 갈아 입혀줘, 밥 때 되면 상다리 부러져라 맛있는 반상이 올라왔다.
나는 즐길 자신이 있었다. 이 호화로운 삶에 아름다운 외모를 즐기지 않는 다면 대체 세상에 뭐 즐길 것이 있단 말인가? 심지어는 내가 좋아하던 연예인의 외형과 이름을 한 자들이 주위에 있지 않은가. 아아 정말이지, 뼈가 녹아날 정도로 이 세상에서 즐길 자신이 있었단 말이다. 난 민윤기 얼굴만 봐도 행복한 사람이다. 사진으로만 봐도 얼굴 근육이 풀리는데 실물로 보면 어떻겠나.
내가 이 세계 속 ‘화비(花妃)‘만 아니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화비는 (희비가 아니다 글씨를 잘 봐야 한다) 황제를 죽도록 사랑했으며 그랬기에 황제의 총애하는 여인인 희비를 못 살게 굴다가 결국 황제의 손에 죽고 마는, 악녀였다. 바로 그 악녀가 나였으며 내가 그 악녀가 되고 말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이는 듯하여 휘청거리며 의자 위에 망연자실 주저앉았다.
나는, 생각을 해야 한다.
이 세계 속에서 내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지만 생각 할수록 너무한 일이 아닌가. 계속해서 같은 생각만이 맴돌 뿐 앞으로 어떻게 이 상황을 헤쳐 나가야 하는 지도 모르겠다. 평범한 여고생이던 내가 갑자기 권세 높은 귀족 집 딸로 태어나 교육을 받고 황제의 후궁이 되어 살아가는 화비가 되어 자연스럽게 행동할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예법 같은 것도 하나 모르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어떻게 해야해? 하지만 그렇게 고민을 하려고 할수록 모은 생각은 한곳으로 모여들고 만다. 이 세계의 전개 상 내가 민윤기의 손에 죽게 될 거라는 것. 머리를 부여 잡았다.
하느님 아버지. 어찌하여 저는 훗날 나의 최애에게 끔살 당하는 캐릭터가 된 것입니까….
君主之花 (군주지화)
부제 : 이런 빙의는 싫어!
- 바라캇
줄여서 이빙싫 (발음 주의) 입니다.
처음으로 올려보는 글잡아고 너무 떨립니다ㅠㅠ
제목 그대로 우리의 여주가 글잡 글속 인물중 악녀에게 빙의해서 죽지 않기 위해 데굴데굴 구르는 내용입니다 (...)
고전이지만 퓨전이라고 할 수 있어 손 가는 대로 쓰는 가벼운 분위기를 지향합니다.
잘 쓸 수 있을 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아무튼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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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칠vs응사vs응팔은 ㄹㅇ 취향차이인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