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主之花 (군주지화)
부제 : 이런 빙의는 싫어!
- 바라캇
“크게 아픈 게 아니라면 되었다.”
황제의 손길이 거두어졌다. 나는 그를 한동안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나른한 눈꺼풀 아래 있는 것은 걱정이 맞는가. 내가 제대로 본 것인가. 황제의 눈을 이렇게 들여다보면 안 된다고, 예법에 어긋나는 거라고 했는데 나는 자꾸만 그의 눈을 빤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가 나를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맞는지 계속해서 확인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소녀가 폐하께 우를 끼친 것입니까. 송구하나이다.”
“되었대도.”
목소리가 나직하다. 미약한 웃음기마저 서려있었다. 어떡하지. 귀가 녹는다는 게 이런 거 아닐까. 손을 들어 올려 귓불을 괜히 한 차례 만지작거렸다. 아마도 빨개졌을 것 같다.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 놀랍고 당혹스러웠다.
황제는 아미를 미워하는 화비를 미워하기에, 영락없이 민윤기에게 경멸어린 시선과 날카로운 독설만 받아 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아까만 해도 인사를 하지 못 했던 나를 차갑게 바라보며 방만하다 꾸짖지 않았던가. (후궁이면서 지아비인 황제에게 인사를 안 한 건 확실히 꾸지람 받을 만한 일이긴 하지만.) 지금도 나를 혼내러 온 건줄 알고 마음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이게 뭐람. 내가 지나치게 걱정했던 건가? 분위기는 생각보다 말랑말랑했다.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그를 연신 살피고 눈치를 봤다.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듯 애정이 철철 넘치는 태도나 시선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싫다거나 경멸의 빛은 찾아볼 수 없었다. 까무룩 정신을 놓으며 기절 한 것엔 그 나름대로 걱정을 해주고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아.
아아. 그런가.
지금은 아직 책의 초반부. 여주가 희비의 품계도 받지 못하고 귀인일 뿐인 상태였다. 귀인의 뺨을 때리며 패악질을 부렸어도 낯선 상대인 새로운 후궁과 친우처럼 여긴 화비를 두고 봤을 때 이쪽을 걱정하는 것은 또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 아직 그들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아직은 민윤기가 나를 미워하지 않는다.
꼿꼿하게 긴장이 들어가 있던 허리가 순간 풀릴 뻔 했다. 그가 나를 싫어하지 않는 다는 것만으로도 이상할 정도로 깊게 안심이 되었다. 아직 괜찮다. 눈앞의 이 황제가 내가 알던 그 민윤기는 아닐지라도, 정인을 바라보는 마음이 아닐지라도, 그래도 나는 그를 좋아한다. 아직은 그에게 상처받을 각오를 하지 않아도 된다. 긴장이 풀리니 약간 어지러웠다. 이대로, 그가 나를 싫어하지만 않다면 더 없이 만족스럽고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지금처럼 간간히 대화를 나누며 나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그는 나를 상처주지 않고서.
긴장이 푹 풀리며 약간 비틀 거린 내게 민윤기가 권했다.
“그대는 그만 쉬는 것이 좋겠다.”
“편히 뫼시지 못하여 송구하옵니다.”
이정도면 그럭저럭 괜찮은 대꾸가 아니었을까, 하고 있었는데 민윤기의 미간은 아까보다 조금 좁아져 있었다. 왜지, 나 또 뭐 실수했나. 눈을 굴려 눈치를 살폈다. 예법에 실수가 있었더라도 나는 아프니까 봐주겠지. 아까부터 계속 그러고 있었으니까. 내 태도며 말투가 엉망진창일 텐데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는 것을 보니 그렇게까지 이상한 것도 아닌 듯 하고.
나를 빤히 바라보던 민윤기는 알쏭달쏭한 얼굴이었다.
“평소와 같이 함께 있어 달라며 붙잡을 거라 생각했다.”
아차. 화비는 그런 여자지. 황제를 너무 사랑해서 한 시라도 더 함께 있고 싶어 하는. 어떡하지. 나는 당혹스럽게 눈을 깜빡거렸다. 지금이라도 말을 바꿔야 하나. 그게 더 이상한데.
“오늘 참 이상해.”
“…….”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나는 움찔거리지 않는 것에 전력을 다 했다. 겨우 평정을 가장하며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의 눈초리가 내 시선을 꿰뚫었다. 등줄기가 다 오싹했다.
입술을 더듬거리며 말을 겨우 꺼냈다.
“…소녀, 바른대로 고하건대 몸이 몹시 좋지 않아 이대로는 폐하께 흉한 꼴을 보일 것만 같사옵니다. 소녀는 폐하께 언제나 꽃과 같은 모습이고 싶기에.”
어떻게든 둘러 댔으나 그다지 괜찮은 변명은 아니었다. 화비는 기회주의자이다. 그녀라면 아플 땐 아픈 것을 핑계로 폐하한테 같이 있어 달라며 아픈 것 보다 더 심한 엄살로 병상에 누워 잠이 들 때 까지 손을 잡아 달라고 조를 여자였다. 민윤기도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실제로 책의 내용 중에 그런 내용이 있다. 자꾸만 아미에게 향하는 민윤기를 붙잡고자 부러 감기에 걸린 뒤 황제의 걱정을 사며 아미에게 가야 할 발걸음을 막는. 책으로만 세상을 접하여 호기심이 많던 아미에게 우리 윤기 폐하는 친히 황궁 밖의 세상을 보여주겠다며 함께 나가주겠다 약조한 날이었다. 그 사실을 안 화비가 욕조에 얼음을 띄워 들어가 앉아 감기에 걸렸고 황제를 걱정시켜 제 곁에 있어 달라고 졸랐고, 황제는 그녀가 잠들 때까지 손을 잡아주었다. 화비의 곁에 남으며 아미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탓으로 아미는 ‘폐하는 화비를 총애하신다.’ 고 생각하여 두 사람 사이에 오해가 처음 싹 트는, 그런 장면이다. 해당 회차가 뜬 날 댓글창이 화비 욕으로 난리였지.
그렇게 화비처럼 행동했어야 했나. 아니면 지금부터라도 내 멋대로 굴어야 하는 걸까.
잠시 딴 생각에 잠긴 나를 보며 그는 그렇구나, 해주는 대신 손으로 내 턱을 잡고 들어 올렸다. 눈이 다시금 정통으로 마주쳤다.
“그대가 짐을 속이며 무슨 일을 꾸미는지는 모르나.”
“…….”
“내가 귀여이 봐줄 정도만 하는 게 좋을 것이다.”
나는 턱이 들어 올려 진 채 억지로 그를 향해 미소 지었다.
“소녀가 어찌 감히 폐하를 속인다는 말씀입니까.”
“그대는 거짓말이 서툴다. 일평생 해본 적도, 그럴 필요도 없었을 테지.”
“평생을 그리 살았듯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단조롭게 대꾸했다. 그러나 그것까지도 모조리 거짓말이었다. 그건 황제도 알고 있는 듯 했다. 그럼에도 그는 재밌다는 듯 한차례 웃었다. 그뿐이었다.
“오늘 함께하지 못 했으니, 내일의 조반은 함께 들지.”
“원하신다면 기꺼이.”
영광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왜 아픈 사람 오라가라야, 라는 뜻을 담아 '원한다면 나는 갈 수 밖에-' 하는 식이었다. 그는 나를 꾸짖는 대신 재밌어했다.
“올 때는, 머리를 틀어 올리지 않고 오는 것이 좋겠다. 지금처럼.”
“장식도 없이, 지금처럼 말입니까?”
“그래.”
“…….”
“지금이 평소보다 예쁘니.”
* * *
하아.
야장의(夜長衣)로 갈아입은 뒤에는 포근하게 데워진 침대 위에 누워 도톰한 이불을 덮자마자 발길질을 시작했다. 이 세계에 와서 하는 이불킥은 짜릿하군. 노래가 듣고 싶어졌다. 그러나 불가능한 세상 속이다. 몇 차례나 잠자리를 뒤척거리다가 결국은 일어났다. 억지로 누워있다 한들 편하지도 않고 잡생각만 더 심했다.
조그만 호롱불을 손에 든 채 방을 가로질러 창문을 열었다. 꽃의 향기를 머금고 있는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 들어왔다. 흩날리는 머리카락을 손으로 그러모아 눌러 내렸다. 뺨을 가닥가닥 스치는 바람이 서느랬다. 향기를 뿜고 있는 어둑한 정원은 물론 하늘마저 낯선 풍경이 시야에 닿는다. 달도 밝고 별도 많은 세상이었다. 내가 늘 봐오던 탁한 밤하늘과는 달랐다. 인공위성 몇 개가 초라하게 늘어져 있던 그 광경과는 달리 가히 압도적일 만큼 별이 많았다. 저 빛무리는 은하수라고 부르는 바로 그건가. 신기하다. 허나 그것은 서럽게도 이곳이 내 집이 아니라는 증거나 마찬가지여서 마냥 아름답게만 보이지도 않았다. 창틀 위에 양 팔을 포갰고 그 위에 턱을 기댔다. 이래저래,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명치 부근이 어쩐지 뻐근했다.
‘지금이 평소보다 예쁘니.’
민윤기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를 윙윙거리고 심장이 덜컹덜컹 거릴 기세로 떨리기도 했다. 아아, 이 심장에 해로운 남자야.
나는 화비를 싫어했다.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황제의 사랑은 오롯하게 희비인 아미를 향하는 것이 보였고 그들 사이에 끼어들 틈 같은 건 없는데도 어째서 황제를 포기하지 못하는지. 왜 그렇게까지 여주인공에게 꺼지라며 독하게 구는지를. 어째서 희비만 없다면 황제가 왜 자기를 사랑할 거라 강박적으로 생각하는지. 그저 소설의 전개에 필요하기에 넣은 악녀 이상도 이하도 아닌 캐릭터라 여겼다.
이제와 그녀의 몸속에 들어와 그 감정을 이해하게 된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민윤기가 나쁜 놈이라는 것이다.
나중에 다른 여자와 달콤하게 사랑에 빠질 거면서 왜 나한테도 예쁘다느니 뭐라느니 잘해주느냔 말이다. 괜히 사람을 설레게 하고 기대하게 만든다. 전형적으로 나쁜 놈이었다. 이제 보니 화비가 황제에게 목을 매는 이유가 다 있었다. 포기해야 한다고,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을 하면 찾아와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다. 나는 이 이야기의 흐름을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대로 황제를 사랑해 그를 차지하려고 애쓰면 애 쓸수록 결과는 참담할 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쩌면 혹시- 하는 생각이 불쑥 드는 게 우스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훗날 죽는다는 걸 아는 나조차도 ‘나를 걱정하는 건 가짜가 아니다. 나는 이 세계의 독한 악녀인 화비와는 다른 사람이니 어쩌면 그와 로맨스를 꿈 꿀 수도 있지 않을까.’ 이런 식으로 설레고 말았다. 나 참. 위험한 일이 아니고 뭔가. 그러다 진짜 그를 사랑하게 되어 나도 모르게 악녀 짓을 하고 돌아다닐 수도 있었다. 민윤기 이 위험한 남자야. 아무렇게나 무관심 속 유관심을 막 뿌리고 다니지 말라고, 진짜. 진짜로 위험하다고.
하늘에 별이 많다. 저렇게 많은데, 저 중 한 개의 별님 정도는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까.
악녀가 되고 싶지 않다. 적어도 민윤기의 손에는 죽고 싶지 않다. 그러니 다짐하고, 기도해 본다.
별님. 달님.
이렇게 기도합니다.
부디 이 소녀가 민윤기를 사랑하지 않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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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편에 댓글이 많이 달렸어요ㅠㅠ광광 웁니다ㅠㅠ감사합니다ㅠㅠ자주 쓰고 싶은데 시간이 많지 않아 슬프네요ㅠㅠ
암호닉도 받으니까 편하게 남겨주세요.
댓글 내용중에 추측성 댓글을 제가 싫어할까봐, 하는 걱정도 있었고 그랬는데 어떤 댓글이든 상관 없이 편하고 자유롭게 달아주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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